소설리스트

보이스(1) (8/17)

보이스(1)

화장실에서 서로의 좆을 만지고, 펠라까지 한 그들은 한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차기주는 그의 팔 안에 얌전히 잠든 김수현의 체온을 느낄 때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다람쥐는 발정기에 접어든 수컷과 수컷이 붙어먹었노라 메시아에게 보고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끝낸 다람쥐는 ‘그 아이’가 걱정되어 철창에 매달려 ‘악당’을 노려봤다. 악당은 그 아이에게 주둥이를 들이댔다. 그 아이의 눈꺼풀에 쪽, 뺨에 쪽, 입술에 쪽 하며 침을 바른다.

혹시 저 악당이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건가 싶어 다람쥐는 앞니를 드러내며 경고했다. 끼이잇!

* * *

“아아, 아니야. 아니야.”

메시아는 다람쥐가 보낸 텔레파시 이미지를 보고 절규했다. 화상을 입은 날개가 처음 다쳤을 때처럼 끔찍하게 아파왔다. 김수현을 구해내지 못하고 소중한 날개마저 다치고야 말았다. 자신은 결국 김수현을 구해내지 못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너무나 괴롭습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고 육신이 들짐승에게 내던져져 그 날카로운 이빨에 조각나는 듯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을 어찌해야 합니까.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채 그를 애틋이 여기건만, 어찌하여 이 애정은 보답받지 못한 채 진창을 굴러야만 하는 겁니까.’

메시아는 그가 괴로워하는 만큼 차기주도 괴로웠으면 싶었다. 차기주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었다. 김수현은 또다시 농락당하는 것뿐이었다. 김수현이 차기주를 사랑하는 게 세뇌의 결과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한 사랑일 리는 없었다. 본래 차기주는 타인을 잘 속이는 악마 같은 존재니까. 김수현은 속은 것뿐일 터였다.

차기주가 너무 미워서 죽이고 싶었다. 메시아는 연필을 꺼내고 빈 공책을 펼쳤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아버지께서 너를 벌하고자 나를 보내셨다. 나는 이 배은망덕한 인간들을 심판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뒤에 김수현과 천계로 돌아갈 것이다. 너희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다.

타락에 젖어 더럽고 추잡해진 차기주,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다 한들 너 또한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 신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였거늘, 너의 조상이 그랬듯 너 또한 금단의 열매를 먹고 부끄러운 욕망에 눈이 멀었구나. 지상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예야 그리하여 신께서는 너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거란다.

내 너를 용서치 않으리. 기필코 널 불행하게 만드리. 죽어라 차기주. 죽어. 죽어서 신께 속죄해라.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죽어’라는 저주의 말로 가득한 노트 위로 떨어졌다. 종이는 동그란 물방울 자국을 남긴 채 말라갔다. 메시아는 자신이 구원하지 못한 불쌍한 김수현을 위해, 아니 김수현이 차기주와 붙어먹는 게 끔찍이도 싫어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이메일 어플에 들어가 차기주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1004라는 이름으로 글을 작성했다.

[김수현은 너를 증오한다. 너를 혐오하고 원망한다. 원치 않는 감금 생활에 정신이 피폐해져 간다. 그는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하며 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너는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감정이 없는 악인이기 때문에 그런 불쌍한 김수현을 놓아주지 않는다. 계속 김수현을 강간하고 또 강간하며 자기 쾌락만을 좇아 김수현을 학대한다. 너는 머릿속에 오로지 김수현을 범할 생각밖에 없는 발정 난 짐승 새끼다.

이기적인 너는 산송장 같은 김수현의 다리를 벌리고 행위를 이어간다. 이 모든 게 네가 회귀를 하기 전에 저지른 죄업이다.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감정이 한 때 그 대상을 죽이려 들었음을.

너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다. 너는 이 인류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악인이다. 이전 생에서 너는 착하고 선량한 메시아를 때리고 협박해 김수현에게 세뇌를 걸게 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징벌방에 김수현을 가둘 필요가 없어졌다.

김수현은 널 사랑한다고 착각해 자발적으로 다리를 벌리는 남창이 되었고 네가 빼앗은 부로 인해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허름한 옥탑방에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게 되었다.

그 모든 게 너 때문이다. 네 이기심과 추악한 욕망 때문이다. 너로 인해 김수현은 가난에 시달렸고 김수현이 아끼는 누나는 몸을 팔다 자살해야 했다. 김수현이 아버지에게 맞은 것과 소중한 누나를 잃은 건 다 너 때문이다. 너의 죄악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너는 교복을 입고 옥탑방을 올랐다. 학교 선배인 척 김수현을 농락했다. 김수현은 그런 네 거짓말에 속아 널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너는 김수현을 풀어주고 그에게 자유를 주는 듯 굴었으나 그는 네가 만들어낸 작은 어항에 갇힌 것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으며 네 옆에서 죽어갔다.

넌 영리하고 사악하다. 남들 눈에 김수현이 자발적으로 네 옆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센터를 학교인 척 김수현을 속이고 그의 생활을 통제했다. 그렇게 아무도 김수현을 도울 수 없게 만들었다.

너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 네 자리는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김수현의 옆자리가 아니다. 네 자리는 썩은 내가 진동하고 어둠으로 뒤덮인 무덤이다. 넌 절대로 진실된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네 죄업으로 인해, 넌 영원히 거짓으로 점철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 *

김수현의 러트를 함께 보낸 차기주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센터 징벌방에 올라가듯 페인트칠이 벗겨진 허름한 건물의 철제 계단을 올랐다. 어째서인지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양복이 아닌 교복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양복이나 교복이나 비슷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그 둘은 미묘하게 달랐다. 입는 자의 신분과 나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익숙한 옷이 아니라서 그런지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불편해 괜히 교복을 매만져 보았다.

그가 좁고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책가방에 넣어둔 필통 안에서 몽땅 연필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쳤다. 김수현의 옥탑방에서 몰래 훔친 4B 연필 하나를 떠올리자 심장이 마치 녹은 설탕에 베이킹소다를 넣은 것처럼 달콤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진실을 알면 자신을 보는 김수현의 따스한 시선이 얼음송곳처럼 첨예해질 것을 알기에, 지금 느끼는 달콤한 감정에 마냥 행복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짓된 행복이었으므로. 차기주는 인류의 적인 메시아를 살려주기로 한 대가로 한 가지 소원을 이루었다. 바로 김수현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 메시아의 세뇌 한마디에 마법처럼 김수현은 차기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기주는 알고 있었다. 그건 마법이 아닌 저주라는 걸.

동화 속 야수는 진정한 사랑에 빠지면 저주가 풀려 왕자로 돌아가지만 차기주는 그 반대였다. 저주에 걸려서야 왕자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네가 혐오하는 사람이야.’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비밀을 품고 옥탑방 문 앞에 선다. 5m가 넘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성에 살던 김수현은 이제 발로 차면 찌그러질 것만 같은 허술한 철문이 달린 신림동 옥탑방에 산다.

이곳을 과연 집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그냥 닭장에 갇힌 것은 아닌지 의문이긴 하지만 차기주는 허리를 숙인 채 낮은 현관문을 넘었다. 흰 줄 실리콘에 곰팡이가 낀 더러운 싱크대와 오래되어서 웅웅 진동음을 내는 냉장고, 그리고 바닥에 깔린 얇은 요밖에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이 그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이 작고 네모난 공간이 점점 쪼그라들어 그를 살해할 것만 같았다. 차기주는 당장이라도 이 갑갑한 공간에서 김수현을 데리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김수현은 이 닭장같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김수현의 아버지는 차기주를 죽이려는 메시아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지급한 죄인이었다.

그런데 차기주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김수현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김 회장을 죽이지 않았다. 그 대신 회사만 빼앗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니 널 가난하게 만든 건 내가 아닌, 네 아버지야.’

차기주는 오늘도 어김없이 김 회장에게 죗값을 미뤘다. 김수현이 김 회장을 원망하길,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기를. 그렇게 바라던 그의 마음이 곧바로 뒤집힌다.

‘그래, 맞아. 아무리 부정해도 이 모든 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거겠지. 난 죄인이야. 수현아, 널 망가트린 건 네 아버지가 아닌 나야. 널 놓아줘야 할 텐데. 미안. 아직 난 그럴 수 없어. 오늘도 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네. 또 아버지에게 맞았구나. 수현아,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네가 아프다고,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럴 거야. 하지만 착한 넌 그러지 않겠지. 계속해서 상처 입고 아프면서도 내게 그 상처를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겠지. 난 무력하게 그걸 계속 지켜봐야 할 거고. 이것이 욕심 많은 나에게 내리는 너의 벌일까?’

차기주는 애써 모르는 척 김수현을 두고 교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익숙하게 싱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를 시작했다.

수도에서 물이 빗물처럼 쏴아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쯤 등줄기를 살금살금 기어가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아,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란 말인가. 네가 나에게 관심을 주다니. 아무리 내가 너를 내 품에 안아도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애정을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다니.’

“왜 또 학교 안 나왔어.”

김수현이 센터에 와서 동료들과 예전처럼 어울렸으면 싶었다. 정상적인 삶을 돌려주고픈데 이미 너무 늦은 걸까?

“학교 선배가 말하는데 대꾸도 안 하지? 김수현, 너 혼날래?”

장난을 치듯 가볍게 꾸짖었다. 어떻게든 이 옥탑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데 김수현은 여기서 돌아오지도 않는 누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수현아……, 돈 많이 벌어서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네 누나는 말이야. 지방에 있는 공장이 아닌 센터에서 에스퍼들에게 섹스 가이딩을 하며 돈을 벌었어. 다들 네 콧대 높았던 누나를 손가락질하며 욕했어.난 에스퍼들이 그녀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하지 못하게 했어. 네게 그녀의 소식이 들려선 안 되니까. 그랬더니 다들 그녀를 김아영이란 이름이 아닌 여러 대체어로 부르더라고. 차마 그들이 입에 담았던 상스러운 욕을 너에게 말할 순 없지만, 믿어줘. 내가 네 누나를 구하려고 했다는 걸.

그렇지만 네 누나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증오했어.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피를 토하듯 저주를 내뱉었지. 그녀가 그렇게나 증오하는 내 도움을 받을 리 없잖아. 그리고 내 도움을 받지 않은 그녀는 결국 네 곁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니까 넌 지금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거야.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내 곁이 아니어도 좋으니 네 아버지로부터만 도망쳐줘. 내가 그를 살해해 널 더 아프게 하기 전에 제발.’

설거지를 끝낸 차기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김수현에게 다가갔다. 멍으로 얼룩져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 작은 얼굴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야. 누가 너 이렇게 만들었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김수현이 숨기고 싶어 하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나 혼자 밤에 체조하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날이 더운데 선풍기도 틀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땀에 흠뻑 젖은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수현아,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난…….”

우느라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우는 그를 위로하겠다며 김수현이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파리한 얼굴과 삐쩍 마른 손목에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선배, 울지 마요. 나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참아본다. 차기주에게는 울 자격도 없었다. 김수현은 두 팔을 뻗어 차기주의 머리통을 끌어 내렸다. 눈물에 젖은 입술에 메마른 입술이 닿았다. 약하게 쇠 맛이 나는 입맞춤이었다.

역시 그는 이 거짓말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김수현이 아무리 아파도, 이 입맞춤이 달가워서. 이 애정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차기주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겁쟁이였다.

* * *

눈을 떠 눈가를 손으로 더듬자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느껴졌다. 이전 생, 불에 타서 죽은 김수현과 달리 그의 몸은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결국 타들어갔다 재생되기를 반복하던 그는 제 손으로 심장을 뜯어내 자살했다. 분명, 그렇게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은 되돌아왔고 그는 기억을 잃은 채 김수현과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재회했다.

이로써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역시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김수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품에 안긴 김수현의 체온이 믿기지 않아, 그는 한참 동안이나 잠든 김수현을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아침밥을 해서 먹여야 할 시간이라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 행거에 걸린 옷 중 니트를 골라 입었다. 김수현에게 넉넉했던 품인데 차기주가 입으니 딱 달라붙어 어깨가 더 우람해 보였다. 그는 바지통이 좁은 김수현의 하의를 빌려 입을 수 없어 아무렇게나 벗어둔 양복바지를 챙겨 입었다.

김 비서에게 새 양복을 가지고 오라 연락하기 위해 양복 재킷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1004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이메일이 와 있었다. 읽지 않으려고 했다가 제목이 ‘김수현을 학대한 개새끼에게’라고 적혀 있어서 열어봤다.

“하!”

그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가 내용을 읽고 표정을 굳혔다. 회귀 전, 차기주가 한 만행이 속속들이 적혀 있었다. 이 전부를 알 만한 인물이라면……. 이 메일은 메시아가 보낸 게 분명했다. 당장 만나자는 답장을 보냈으나 발신 전용 메일이라는 화면만이 뜰 뿐이었다. 차기주는 으득 이를 갈았다.

차기주에게 저주를 가득 담은 메일을 보냈음에도 메시아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온종일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그릇들이 원반처럼 날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에너지 드링크 음료 캔들은 볼링 핀처럼 넘어지고 웅웅 진동하던 탁상용 공기청정기가 박살 났다.

“용서 못해! 차기주. 이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메시아는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던지며 화풀이했다. 사기꾼은 원하는 장난감을 엄마가 사주지 않는다고 마트에서 드러누워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보듯 그를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제풀에 지친 메시아가 침대에 누웠다. 씨근거리는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사기꾼은 생각했다. 고작 이런 걸로 메시아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그는 자신의 동생을 죽게 만든 죗값을 치러야 했다.

“메시아, 제발 진정하세요. 요즘 세상에 순결이 뭐가 중요합니까. 거기다가 자기를 납치, 감금한 상대와도 자는데 상냥하고 친절한 메시아와는 안 자주겠습니까? 김수현이 개방적으로 지낼수록 메시아에게도 쉽게 기회가 오는 겁니다.”

궤변이었다. 사기꾼은 제 입으로 내뱉으면서도 참 헛소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단호한 눈을 했다.

“정말? 정말 그런 거야? 그럼 이제 나랑도 자겠네?”

침대에서 일어난 메시아가 사기꾼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오메가 페로몬이 가미된 분홍색 립글로스를 입술에 치덕치덕 바른 모습이 거부감을 일으켰다.

알파의 사랑을 받겠다며 베타가 오메가 흉내를 내봤자다. 사자가 토끼를 동경해서 풀을 먹어봤자 토끼가 되지 않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네. 그럼요.”

사기꾼은 속마음과 달리 신뢰를 주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개소리를 믿게 만들 시간이었다. 작업은 언제나 상대를 걱정하는 척 눈썹을 찡그리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작되었다.

“뭐야. 좋은 거라며.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김수현이랑 친한 정석훈을 죽였다면서요.”

“응, 내가 괴수를 불러서 죽였어. 그런데 왜?”

“그 일 때문에 김수현이 메시아를 원망할까 걱정이 됩니다.”

메시아는 이해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 안은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두웠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등장해 구해주겠다며 기껏 아침 일찍 일어나 스파 관리를 받고 비싼 메이크업을 받았는데, 아깝게도 공들여 치장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게이트 안에 조명이라도 달아놨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자신은 무척 아름다운 데다가 커다랗고 늠름한 날개를 가져서 김수현이 그 모습을 봤다면 첫눈에 반할 게 분명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날 전혀 못 봤어. 게이트 안이 어두웠거든.”

“하아. 메시아는 인류를 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천사이지 않습니까. 이미 괴수가 등장해 정석훈을 죽인 시점부터 메시아는 김수현에게 정체를 들킨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기꾼이 한숨을 내쉬며 안쓰럽다는 듯 메시아를 바라봤다. 그, 그런가? 메시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신을 못 봤으니 김수현이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만일 김수현이 눈치챈 줄 알았으면 절대 정석훈을 안 죽였을 거다.

“그럼 어떡해? 난 수현이한테 미움받는 거 싫어.”

어린아이처럼 인간관계에 서툴고 상식이 부족한 메시아는 사기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메시아는 제네시스 안에서 신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 누구도 메시아에게 감히 올바른 말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기를 칠 때는 공사 대상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주변 사람부터 연락을 끊게 해 고립시키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경우는 굳이 직접 그럴 필요 없이 이미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괴수를 부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였지만 그게 다였다. 자기가 천사라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일 뿐이었고,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사기꾼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기한테 관심 있어 하고 자기를 알고 있다고 믿는 메시아의 오만한 착각을 꿰뚫어 봤기에 자신 있게 함정을 팠다.

“김수현한테 정석훈을 죽인 건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는 걸 알려야죠. 메시아는 신께 숭고한 임무를 받고 그것을 수행하는 거였지 않습니까.”

“맞아. 난 아무 잘못 없다고. 어차피 김수현 빼고 나머지 인간들은 다 죽일 건데, 미리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그것도 일종의 임무였던 거지!”

사기꾼은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정의의 심판’이라고 믿고 있는 메시아의 붉은 눈을 들여다봤다. 몇 번을 봐도 사람 같지 않은 존재였다. 메시아가 부리는 괴수가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사기꾼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기 위해 손바닥으로 와이셔츠를 문지르며 소름을 잠재웠다.

자기 죄를 김수현에게 나불거려 무덤을 파는 메시아의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달콤한 복수가 공포를 마비시켰다. 그러자 굳었던 입술이 풀리고 혀에 기름칠한 듯 막힘없이 말이 나왔다.

“성소윤이 이제 센터에서 지내지 않습니까. 김수현에게 접근해 메시아의 위대한 임무를 알려주게 하고 정석훈을 죽인 게 불가피한, 신께 받은 임무의 일환이었다는 걸 말하도록 하세요. 그럼 분명 김수현도 메시아를 이해해줄 겁니다.”

메시아는 인간사에 어리숙한 자신을 위해 도움을 준 사기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기꾼, 널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감사합니다, 메시아.”

사기꾼은 아직도 자신을 이름이 아닌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메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얇은 눈꺼풀은 적의를 숨기기 위한 단단한 방패막이 되어줬다.

메시아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엉망진창으로 깨부순 방 안은 처참했다. 돌돌 뭉쳐놓은 양말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방 한편에 세워둔 맥주캔이 넘어져 남아 있던 술이 쏟아졌다. 학교에 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더플백과 배낭은 열린 채 속에 든 물건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또한 잡동사니를 넣어둔 서랍장을 꺼내서 집어 던진 탓에 볼펜과 이어폰, 동전 같은 작고 가벼운 것들이 방 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었다.

“아 참, 너 이름이 뭐였지?”

“최유다입니다.”

“좋은 이름이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거든. 그런 좋은 이름을 준 부모님께 고마워하도록 해.”

유다라는 죄인의 이름을 준 부모에게 자신이 고마워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은 이 이름 때문에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은화 30냥에 팔아먹은 성경 속 배신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진 채 놀림과 조롱을 당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라 어머니를 오래된 이불의 먼지를 털듯 패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옆집 아저씨를 유혹해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불륜녀였다. 그 탓에 동생과 그는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네 이름이 그래서 너도 배신자고, 네 부모도 그런 거라는 말들을 아직도 최유다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 특이한 이름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메시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은 일종의 다짐과도 같았다.

자신도 신의 사자라는 메시아를 언젠가 배신해 죽이고야 말겠다는 피의 맹세.

“난 성소윤에게 명령을 내리고 올 테니까 넌 여길 치우도록 해.”

메시아는 자기가 어지럽혀 놓은 방을 그대로 나가버렸다. 최유다는 허리를 굽혀 넘어진 쓰레기통에서 쏟아진 쓰레기를 주웠다. 혹시라도 약점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 온갖 물건들을 뒤져봤으나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메시아가 자신이 김수현의 ‘선배’라도 된 것처럼 써놓은 노트를 발견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덟 살 아이가 짝꿍을 짝사랑한다고 적어놓은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아하하하. 아, 이 등신 새끼. 네가 그런다고 김수현이랑 잘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넌 절대 못 그래. 넌 이제 나 때문에 찍힐 거거든.”

* * *

차기주는 근무 도중 황지윤 파트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핸드폰 액정에 뜬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뭡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차기주에 대한 경멸이 진득하게 눌어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기주 이사의 가이딩 중독 증세가 의심된다는 보고를 받아서 말입니다.

“누가 보고한 겁니까. 내 사람 중에는 그렇게 간 큰 새끼가 없는데.”

―그럼 차기주 이사의 새끼가 아니 내 새끼인가 보죠.

“하, 지금 나한테 사람 심어놓았다고 당당히 말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저번에는 징계 회의를 열어서 그의 발길을 붙잡고 허락도 없이 김수현 등급을 측정하더니, 이제는 그의 뇌까지 검사하려고 들었다.

차라리 그때 김수현이 가이드 검사를 해내지 못했어야 했다. 가이드가 아닌, 무효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라는 걸 들켰으면 계속 황지윤이 이렇게 귀찮게 지켜준다고 껄떡대진 않았을 테니.

이게 다 그녀가 김수현을 가이드라고 믿고 있어서였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까.

그 능력이 밝혀진다면 센터에서는 김수현에게 다른 센터 에스퍼들의 가이딩을 맡길 게 뻔했다. 그리고 차기주는 김수현이 그가 아닌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가이드인 척,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김수현이 가이드라는 소문을 퍼트린 건 차기주의 선택이었고, 그것 때문에 황지윤이 거머리처럼 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단 서류상으로 김수현은 센터 소속의 ‘가이드’이니까.

“그래서 지금 나더러 검사를 받으라는 겁니까. 그사이에 또 내 가이드는 어디에 빼돌리게요.”

―평범한 에스퍼도 아닌 차기주 이사가 가이딩 중독 증세를 보이면 문제가 크죠. 나는 물론이고 센터 차원에서 움직여도 차기주 이사한테서 김수현 가이드를 보호할 수 없을 테니까요. 왜요. 혹시 김수현 가이드 이외의 사람들한테는 가이딩 못 받는다는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황지윤이 차기주의 역린을 건드렸다. 분노에 찬 입가가 경직되어 부들부들 떨려왔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는 온 인내심을 끌어모아 감정을 누르고 답했다.

―그럼 가이딩 중독 검사받고, 다른 가이드한테도 가이딩받으세요. 두 사람, 아직 네임이 없지 않습니까.

“…….”

네임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차기주가 황지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몇 번이고 가이딩 중독 증세를 의심하며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을 것을 강요하겠지.

―차기주 이사가 순순히 가이딩 중독 검사를 받지 않으면 가이드 팀에서 안전을 위해 김수현 가이드를 차기주 이사로부터 분리, 보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욕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통화를 끄고 이를 악물었다. 관자놀이에서 혈관이 불끈 튀어나왔다. 당장 황지윤 사무실에 찾아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그 충동을 애써 참아냈다. 그가 분노에 찬 걸음으로 이사실을 빠져나오자 비서실에 앉아 있던 김 비서가 뛰어와 그를 쫓았다.

“어디 가십니까, 이사님.”

“가이딩 중독 증세 검사받으러 가. 메시아한테 받은 이메일은 어떻게 됐어? 위치 추적됐어?”

“네. 인터넷을 사용한 아이피 찾아냈습니다.”

“이따가 확인할게. 책상에 올려놔.”

차기주는 이 검사가 끝나면 몰래 김수현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서라도 황지윤이 그 얄미운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지 싶었다. 네임이 생겼다고 우기면 더 이상 그를 압박할 꼬투리가 없을 테니까.

아직 김수현한테 세 번밖에 가이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 결과에는 자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현재 얼마나 이성적인 상태인지와 더불어 김수현에 대한 집착이 가이딩 중독 증세가 아닌,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검사실로 내려갔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소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차기주는 말없이 검사 의자에 앉았고 그의 열 손가락에 클립처럼 생긴 검사 기계가 끼워졌다. 뇌파를 측정하는 머리띠 또한 머리에 부착되었다.

차기주의 뇌파를 확인한 연구소장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프가 완만하지 못하고 급격하게 요동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functional MRI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연구소장은 MRI실에 연락해 검사를 준비시켰다. 스스로 검사 장치를 떼어낸 차기주가 검사 의자에서 일어났다.

“functional MRI 검사받으러 다녀오세요.”

이 귀찮은 과정이 짜증 난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 차기주가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검사를 마치고 다시 마주한 연구소장은 얼굴이 좋지 못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차기주는 순식간에 긴장해 마른 입술을 다물었다. 연구소장이 모니터 화면으로 스캔한 뇌를 보여줬다. 한눈에 봐도 푸른색보다 붉은색이 많았다. 검사 결과, 그의 뇌 90%가 미쳐 있었다.

여태껏 이렇게까지 가이딩 중독이 심각한 에스퍼는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 정도 수준이 되기 전에 네임이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이딩 부작용으로부터 에스퍼를 구원할 네임이.

“이사님, 혹시 네임은 없습니까.”

“……아직.”

연구소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빠르게 증세가 악화됐는데 네임은 없다니.

이미 네임이 생겨도 골백번은 생기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네임 없이 중독 증세가 심해지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혹시 모르니 다른 가이드와 가이딩을 시도해보죠. 김수현 가이드에게는 당분간 가이딩을 받지 마시고요. 이사님은 지금 김수현 가이드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분을 보호하고 싶으시다면, 지금은 충동을 억누르고 참으셔야 합니다.”

“…….”

차기주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와 하얀 복도를 걸었다. 의사에게 시한부라는 진단받은 환자처럼 절망에 빠져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으로 벽을 짚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혹시라도 황지윤이 차기주의 사랑을 가이딩 중독 현상의 결과일 뿐이라고 매도한다면? 김수현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황지윤은 그동안 매칭 가이드가 없었던 그에게 김수현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만일 예상대로 황지윤이 김수현을 불러 그런 말을 한다면 그건 그가 죽길 바란다는 뜻이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회귀 전의 그가 김수현을 징벌방에 감금하고 강간했던 건 이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죄를 숨기면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그가 김수현을 사랑하는 게 가이딩을 받기 전부터였음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가 이전 삶에서 김수현을 강간하고 감금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김수현을 사랑해서였으므로.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멈출 수 없는 자동차를 모는 것 같았다. 눈앞에 갈림길이 있는데 한쪽에는 절벽이, 다른 한쪽에는 바다가 있어서 어느 쪽을 택해도 죽는 상황이었다.

차기주는 이사실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 김 비서에게 부탁해놓은 자료가 있었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 두통이 일었다. 찡그린 미간을 문지르고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책상 위에 올려진 사내 전화기를 들어 파트장실과 연결된 번호를 길게 눌렀다.

―뭡니까.

“원하는 거 말씀하시죠.”

―역시 가이딩 중독이라고 나왔군요.

이 영악한 가이드는 애초에 모든 것을 알고서 차기주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거다. 김수현과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차기주는 그들의 관계가 여기서 조금도 틀어지지 않길 바랐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김수현에게 사랑받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적처럼 얻은 귀한 사람이었다. 다시는 좁은 방 안에 갇혀 함께 불타는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 퇴사에 대한 규정안 제출했습니다. 여기가 회사이지, 강제 징용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회사가 퇴사를 못 합니까.

“가이드 수가 에스퍼의 50%도 안 됩니다. 황지윤 파트장, 그럼 에스퍼들은 다 폭주해서 죽으라는 겁니까. 괴수들이 이 나라 깨부숴서 다 죽거나 에스퍼들이 깡그리 폭주해서 죽어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에스퍼만 나라를 지킵니까? 우리나라 국군장병분들이 수고하시는 건 안 보이시나요.”

“총으로 괴수들한테 백날 갈겨보시든지요.”

차기주의 비아냥에 수화기 너머에서 살벌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럼 김수현 가이드도 알아야겠네요. 그 대단하신 차기주 이사께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착각하고 있을 텐데, 정신 차리게 해줘야죠.

“그 입 다물지 못해? 치졸하게 협박하지 마.”

―먼저 협박한 건 차기주 이사입니다.

차기주는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노려봤다. 황지윤이 눈앞에 있었으면 정말 그녀를 죽여버렸을지도 몰랐다. 가이드들이 폭동을 일으키든 말든 그에게는 김수현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요. 규정안에 서명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없는 겁니다. 무슨 일 터지면 난 내 가이드 데리고 다른 나라로 떠날 거니까.

―……이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구실 겁니까.”

“황지윤 파트장, 본인 허물은 못 보시나 봅니다. 제 비서한테 거울을 선물로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차기주는 전화를 끊고 김 비서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황지윤한테 거울 선물 보내. 기왕이면 전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걸로.”

이상한 명령을 전달받은 김 비서는 굳이 상사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물러났다. 차기주는 서류 더미에 섞여 있는 규정안을 찾기 위해 서류 뭉치를 뒤적거렸다. 이미 서명란에 황지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기주만 이름을 적어넣으면 이 사내 규정에 따라 가이드들은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지 센터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는 그 규정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에스퍼들도 언제든지 센터를 퇴사할 수 있다는 규정안을 작성해 프린트했다. 어디 될 대로 돼보라지.

차기주는 황지윤에게 팔자에도 없는 선물을 보내는 김에 서명을 넣은 서류들까지 함께 보내라는 말을 김 비서에게 하달했다.

* * *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꼼짝없이 버림받은 줄 알았다. 메시아에게 텔레파시를 받은 성소윤은 태백산 입구에 있는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갔다. 일반인 통제 구역이 된 산은 풀숲이 우거진 탓에 걸음을 뗄 때마다 나뭇가지가 옷깃을 잡아챘다.

그녀는 통나무 위를 미끄러지는 뱀을 보고 얼어붙었다. 산속 곳곳에서 동물들의 움직임에 따라 풀이 흔들렸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풀벌레의 울음소리만큼 우렁차게 들렸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갔으나, 나무뿌리와 돌이 운동화에 잘게 부딪혀 발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빼곡하게 숱이 들어찬 나무 때문에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제 머리 위에서 독수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분이 계실 것이 분명했다. 독수리는 그분이 이곳에 계시다는 증표와도 같았으므로. 그녀는 솟아오른 흙더미와 돌부리 때문에 고르지 못한 땅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죽자 살자 달린 덕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넓은 공터 안을 살폈다.

이곳은 에스퍼들이 태백산을 오르기 전에 자동차를 주차해두는 곳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도 잠시, ‘유일사 주차장’이라고 적힌 십자가 모양의 이정표 뒤에서 하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분홍빛으로 반짝거리는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오랜만이야. 그런데 임신한 거 아니었어? 아직도 배가 납작하네?”

성소윤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귀한 메시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 저주받은 씨앗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야 마땅했습니다.”

메시아의 하얀 손을 잡고 싶어서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들었다. 그가 성소윤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너 센터 가이드로 활동 중이지.”

“예, 센터의 약점을 알아내 반드시 메시아 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센터는 성소윤이 메시아의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직원으로 받아들였다. 웃긴 일이었다. 가이드는 절대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라며 방심하는 꼴이.

그녀가 중요한 정보를 빼내지 못할 거라는 오만 또한 재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야.”

메시아는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손목을 끌고 수풀로 들어갔다. 무성한 가지와 나뭇잎들이 옷 위를 긁듯이 스쳤다. 야생동물이 무서워 뛰어 내려오느라 등허리가 흠뻑 젖은 성소윤은 주변에 산짐승이 있지는 않나, 동물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 가이드를 차기주가 납치해서 감금 중이거든.”

“……김수현 가이드요?”

“응. 혹시 기회가 되면 그를 만나서 네가 잘 말해봐. 정석훈이 죽은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내 숭고한 임무를 설명하면서 수현이를 설득하면 날 이해해줄 거야.”

성소윤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김수현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메시아가 죽인 모양이었다. 그래놓고 김수현과 사이가 틀어져서 그녀를 통해 화해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김수현 씨도 신께서 내린 임무인데 메시아에게 계속 화를 낼 리가 있겠어요.”

안도하는 그를 보며 성소윤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마치 사랑에 빠진 인간처럼 굴고 있었다. 천사가 인간을 사랑하다니. 메시아는 그런 어리석은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됐다. 그는 신이 보낸 사자였고 위대한 천사였다. 그런 그가 고작 사랑 따위에 눈이 멀어 추락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사랑은 그에게 있어 독이 든 사과에 불과했다. 사랑에 빠진 그는 마치…… 어리석은 인간 같았다. 입에 바른 립글로스 때문에 더 그가 인간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성소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의 대화는 늘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답답했었다.

메시아는 인간사에 대해 전혀 몰랐고 그렇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성소윤은 되레 그런 점이 좋았다. 인간 따위는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위대한 존재. 그런 그는 숭배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이젠 그녀와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주차장에 세워둔 스포츠카를 끌고 가버렸다.

그녀는 고작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험준한 태백산에서 내려왔던 거였다. 빈정이 확 상했다.

과연 이 지상에 사랑하는 인간이 있고 지상의 물건에 애정을 가지게 된 천사가 이 인류를 제대로 징벌할 수 있을까.

메시아는 제네시스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고자 나를 보냈으니. 너희의 원죄를 사하고 하늘의 심판이 열리는 날, 함께 하늘로 올라가리라.”

메시아는 그들을 구원해줄 존재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하늘의 심판을 망치고 그녀를 신께 인도하지 못해서는 안 됐다.

광신도인 성소윤은 김수현에게 메시아를 좋게 말해줄 수 없었다. 혹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메시아가 인류를 멸망시키고 그녀를 구원해주지 않으려 들면 안 되니 말이다.

그녀는 산을 타느라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허리를 폈다.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할 때는 몰랐다. 수풀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느껴짐에도 왜 그 무엇도 성소윤을 공격하지 않는지.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따라온 사람이 있나 살폈다. 가이드인 그녀는 에스퍼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구애받고 있었다. 그녀를 몰래 따라와 지켜주는 존재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연약한 그녀가 혼자서 오르내리기에 야생동물들이 사는 태백산은 위험했다. 메시아를 만날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누구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녀의 부름에 바로 나무 기둥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있는 주위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핏자국이 있었다. 성소윤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뱀 사체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

가녀린 체구의 에스퍼는 큰 눈과 갸름한 턱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어딜 가도 그녀를 쫓아다녔던 달콤한 바닐라 향이 눈앞의 오메가에서 났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진심으로 곤란한 듯 구는 에스퍼는 명백히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성소윤은 그가 같은 오메가인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가이딩 한 번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가이딩을 받아본 적 없는 가이드에게조차 이렇게 맹목적으로 구는데, 진짜 가이딩을 받는 관계라면 에스퍼의 집착이 얼마나 심할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에스퍼의 집착이라……. 곰곰이 생각하던 성소윤은 문득 아무리 차기주가 최강의 에스퍼라고 해도 김수현만 흔들 수 있다면 무찌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류를 멸망시킬 단서가 바로 김수현이었던 거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상냥한 미소로 에스퍼에게 질문했다.

“혹시 제가 누굴 만났는지 보셨나요?”

“네……. 그렇지만 이해합니다. 소윤 씨는 원래 제네시스 멤버였고, 충분히 교주를 만나러 갈 수 있죠. 저 그런 거 이해 못하는 꽉 막힌 사람 아닙니다.”

지갑을 떨어트린 걸 한 번 주워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뒤로 계속 자신을 쫓아다니는 듯했다. 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을 바삐 굴렸다. 성소윤은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혹시 소윤 씨, 마음에 드는 에스퍼 없으면 저랑 매칭률 검사받아보실래요?”

“아, 네. 그래요.”

“합!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너무 기뻐요. 만약에 우리 매칭률이 높아서 페어를 맺으면 제가 진짜 잘해드릴게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에스퍼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다. 성소윤은 벌써 둘이 페어라도 된 것처럼 돌 조심해라, 나뭇가지 있다, 하며 손까지 잡아주려는 그의 태도에 웃음을 삼켰다.

* * *

성소윤이 김수현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센터 소속 가이드가 되어서 사원증이 있었고, 이 징벌방의 문은 사원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열 수 있었으니까.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김수현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열린 문을 돌아봤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한 김수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오랜만이에요.”

“몸은 괜찮으세요?”

괴수가 되었던 사람을 걱정하는 물음이라고 하기에는 시선이 배에 가 있었다. 정작 김수현과 함께 있을 때 다친 건 팔인데도. 그녀는 텅 빈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구두를 벗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김수현 씨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얼마나 안을 잘 꾸며놨는지 유명한 화가의 아트 스튜디오라고 해도 믿을 거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넓은 공간을 걸으며 그림 도구를 툭툭 건드렸다. 신경을 거스르는 짓이었는지 김수현의 표정이 굳었다.

“아, 미안해요. 그림 도구들이 한자리에 이렇게 많은 걸 보니까 신기해서요.”

“용건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무슨 일이죠, 성소윤 씨.”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 안 내주나요?”

그녀는 냉큼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김수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고 있던 작업용 앞치마를 벗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그가 돌아와 싱크대 상부 장을 열어서 녹차 티백을 꺼냈다.

그들은 마주 앉아 뜨거운 차를 식히기 위해 후후 입김을 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차를 얻어먹는 상황은 당황스러웠으나 대체 무슨 말을 하러 왔나 궁금해, 김수현은 얌전히 기다렸다.

“김수현 씨, 최근에 지인이 죽었어요?”

“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정성훈이라고 했었나?”

“정석훈이요. 그런데 그 일을 성소윤 씨가 어떻게 알죠?”

경계심 어린 눈을 한 김수현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자신을 바라보는 김수현을 보며 씩 웃어주었다.

“뭐 그건 알 거 없고, 원래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은 것뿐이니까 너무 메시아 님을 원망하지 마시라고요.”

“……지금 그게 대체 무슨……. 당신 미쳤어?”

대뜸 찾아와 그를 위해 죽은 정석훈이 원래 죽어야 했다는 미친 소리를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니, 단단히 미친 거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섣부르게 화를 내봤자 상대방의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놀아날 뿐이었다. 수현은 주먹을 말아 쥐며 머리를 차게 가라앉혔다.

그녀의 말속에는 정석훈을 죽인 범인이 메시아였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제네시스 신도였던 그녀는 그 사실을 알리며 마치 메시아가 옳은 일을 했다는 듯 굴었지만, 수현은 그녀로 하여금 메시아가 저지른 일을 알아차렸다. 메시아의 사람인 그녀가 어째서 메시아의 잘못을 밝히는 걸까.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우리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요. 그래서 이 지상에 머물며 병이 들고 배가 고프고 늙어가는 벌을 받죠.”

설마 자신에게 포교하러 온 건가 싶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는 이 타락한 인간들을 벌하시기 위해 천사를 내려보내 심판을 열기로 하셨습니다. 메시아 님은 이 심판을 하러 온 숭고한 사자(使者)이자 위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선지자(先知者)이세요.”

“잠깐만요. 난 그쪽 종교에 가입할 생각 없으니까 당장 나가주세요.”

김수현은 혹시 광분한 광신도가 뜨거운 차를 자신에게 끼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얼른 찻잔을 챙겨서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완강한 축객령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에도 성소윤은 끝까지 그녀의 믿음을 전파했다.

“메시아 님이 조만간 하늘의 심판을 여실 거예요. 우리 인류는 멸망하고 더러운 육체를 벗어던진 채 하늘로 올라가는 거죠. 믿음이 약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어차피 하늘의 심판이 열리면 이미 죽은 자든, 살아 있는 자든 모두 신의 품으로 돌아가야 해요. 구원을 받든, 받지 못하든.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요?”

“여기서 나가주세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메시아 님은 위대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에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죄예요, 김수현 씨.”

“네, 알겠어요. 저는 죄인이니까 잘 가세요.”

알파인 그가 힘으로 오메가를 밀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성소윤은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고 발을 질질 끌었다. 징벌방 CCTV를 보고 있던 감시자가 보낸 에스퍼가 문을 열었다.

에스퍼가 성소윤을 끌어냈다. 그녀는 구두조차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쫓겨나면서도 멈추지 않고 외쳤다.

“김수현 씨.”

문이 닫히려고 하는데 그 사이로 그녀의 미소가 엿보였다.

“계속 우리 메시아 님을 싫어하길 바랄게요. 너 따위, 심판을 망치는 독 사과에 불과하니까.”

급하게 문이 닫혔다. 에스퍼는 성소윤에게 함부로 여길 들어가면 안 된다며 화냈다. 그녀는 은근하게 에스퍼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눈웃음 지었다.

“왜요? 이야기 좀 할 수 있는 건데.”

“이사님이 아시면 소윤 씨가 위험해집니다. 그분은 가이드든, 오메가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에스퍼님이 비밀로 해주시면 되잖아요.”

성소윤은 손과 닿아 있는 에스퍼의 팔뚝을 통해 가이딩했다. 에스퍼는 강하게 항의하지 못하고 금세 사랑에 빠진 멍청이 같은 눈이 되었다. 아무리 에스퍼들이 초인이라고 해도 가이딩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다음에는 절대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알았어요. 눈감아줘서 고마워요.”

이번 에스퍼도 성소윤의 잘못을 눈감아주며 자기랑 매칭률 검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익숙하지 않은 다이빙을 하는 건 퍽 힘든 일이었지만 얻은 게 있으면 대가도 지불해야 하는 법이었다.

“좋아요. 이번 주에는 매칭률 검사가 많이 잡혀 있어서 그런데 언제가 편하세요?”

“저는 소윤 씨가 편하신 시간에 무조건 됩니다.”

자발적인 을은 갑에게 잘 보이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배려를 했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 어때요?”

“네, 좋습니다.”

에스퍼는 자기랑 페어를 맺으면 그녀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에스퍼에 비해 가이드 수가 현격히 적은 탓에 다들 구애에 필사적이었다.

자기 연봉과 재산이 얼마인지부터 시작해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옥상에서 내려온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성소윤은 자신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에스퍼에게 불쾌함을 표했다.

“에스퍼님은 계단으로 내려가세요. 전 좁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못 있어요.”

“아, 넵. 제가 배려가 없었습니다. 그럼 살펴 들어가세요.”

에스퍼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한 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래 봬도 그들은 오늘, 그것도 방금 처음 만난 사이였다. 에스퍼의 호의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가이드이기 때문에 발휘되는 거지,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낭만적인 이유 덕분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서운 차기주라고 해도 김수현한테는 이렇게 병신처럼 굴겠지.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 1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계기판에서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5, 4, 3, 2, 1.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류 멸망에 가장 큰 걸림돌인 차기주를 엿 먹일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몸은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영혼은 붕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트로이의 목마를 들인 어리석은 트로이 성은 결국 멸망했다. 자신이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들인 센터 또한 그리될 것이다.

최유다는 테이블에 앉아 하얀색 도미노를 차근차근 세웠다. 도미노는 달팽이처럼 테이블에 놓였다.

메시아가 성소윤과 접촉했다. 그녀로 인해 김수현은 메시아가 정석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도미노 한 개를 건드렸다. 연쇄 작용이 일어나며 수십 개나 되는 도미노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가 한 일이라곤 첫 번째 도미노를 밀어버린 거밖에 없었다.

* * *

차기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라도 황지윤이 김수현에게 그가 가이딩 중독이란 허튼소리를 할까, 혹 그가 회귀 전에 저지른 과오를 메시아가 고자질하진 않을까 매 순간 피가 말랐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건 그가 저지른 죄를 되돌려받는 것에 불과했다. 차기주는 회귀 전, 센터에 검사받으러 온 김수현을 떠올렸다.

김수현은 자기 입으로 에스퍼의 능력을 무효화시켜 가이딩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그 누구보다도 차기주에게 필요한 힘이었다.

당시 그는 유일하게 그를 가이딩할 수 있는 진설해를 만났음에도 가이딩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진설해의 가이딩은 그에게 있어, 사막에 조난된 사람에게 스포이트로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 먹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하루에 한 방울, 입가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의존해 버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었다.

결국 사막에 조난된 사람은 갈증으로 죽게 될 것이고, 차기주 또한 폭주로 죽게 될 운명이었다. 그래서 차기주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검사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쿠션이 없어 딱딱한 철제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아름다운 알파를 본 순간, 착각이 일었다. 자신이 갤러리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긴 다리를 어정쩡하게 접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김수현을 눈에 담았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그는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차기주 이사님이시죠? 김수현이라고 합니다.”

그는 입을 뗄 수 없었다. 주책맞게도 지금 입을 열면 한참 나이가 어린 알파를 보고 ‘너 참 내 취향이다’라고 말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김수현은 의자 등받이를 잡고 일어섰다. 꼭 몸 어딘가가 불편한 사람 같았다.

“악수 안 하실 거예요?”

차기주는 김수현이 내민 손을 뒤늦게 발견해 마주 잡았다. 그 순간 눈앞에서 갑자기 하얀 섬광이 터졌다. 가이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쾌감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신체를 이루는 세포를 전부 분해한 뒤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결점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를 신께서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주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안정 파동을 겨우 몇 퍼센트조차 내리지 못하는 가이딩을 받으며 쩔쩔맸던 게 우습게도 김수현에게 받은 가이딩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는 팔을 들어 손목에 찬 파동 측정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에 찍힌 숫자는 ‘0’.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제 능력 보셨죠? 제가 얼마나 이 센터에 필요한 존재인지, 아시겠어요?”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PL 그룹 자제라고 하더니만 과연 부잣집 도련님이란 생각이 들었다. 잘 익은 살구처럼 먹음직스러운 뺨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그래, 넌 나한테 참 필요한 존재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날 이사님 가이드로 삼아주세요.”

“그게 원하는 전부인가?”

“아 참, 혹시 저 좀 감금해주실래요?”

안 그래도 김수현을 감금할 생각이었던 차기주는 호랑이 굴에 뛰어 들어온 토끼가 신기해서 순간 말을 잃었다. 김수현이 픽 웃었다.

“제가 지금 집에 돌아가지 않을 핑곗거리가 몹시 필요해서요.”

그로서는 김수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에 오만한 데다가 이상하기까지 한 성격이구나 싶었다.

“알았어. 기숙사 방을 배정해주지.”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이대로 저 애송이의 페이스에 말릴 수는 없었다.

“기숙사는 안 돼요. 우리 누나가 센터 가이드라서요. 누나가 날 걱정하지 않으면 집에서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챌 거예요. 이사님 집에서 같이 살면 안 돼요?”

“……우리 방금 처음 만난 사이인데. 김수현 씨는 내가 편한가 보지?”

“아니요. 불편한데요.”

김수현이 당돌하게 차기주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자기 할 말 다 하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내 사택에 널 들일 수는 없고, 센터에 징벌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들어가면 내가 널 감금 중이라는 소문은 돌 거야. 어때 들어갈 거야?”

“네. 좋아요. 그런데 진짜 감옥 같은 데는 아니죠? 절 보고 예상은 하셨겠지만, 제가 몹시 곱게 자라서요.”

첫인상과 달리 참 성격이 안 맞는다 싶었다. 차기주는 징벌방을 신경 써서 꾸며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수현이 그럼 앞으로 지낼 곳을 안내해달라며 뒤돌아섰다.

차기주는 제멋대로 구는 김수현과 잘 지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앞서 걸었다. 그런데 김수현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쩔뚝거렸다.

“다리를 다쳤나 보지? 사람을 시켜서 휠체어를 가져오게 할 테니까 기다려.”

“다리가 아니라 엉덩이가 문제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

“아, 오해하지 마세요. 맞은 거 아니니까. 제가 좀 잘나가서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차기주는 환멸 가득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뒤돌았다. 천박하게 몸을 굴리고 다니는 알파라니. 언제 봤다고, 방금 그 한마디로 그에게 실망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차기주가 아무리 그런 김수현을 싫어하더라도 정작 거부할 수는 없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유일한 구원자였으니까.

차기주는 옥상에 김수현을 데려다주고 이사실로 돌아왔다. 차기주와 페어를 맺은 김수현은 문란한 에스퍼 같았다.

사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티끌만큼이나마 있었기에 그에 대한 경멸도 있는 것이었다. 특이체질인 차기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에스퍼와 가이드가 섹스를 많이 한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김수현이 문란하다는 게 이렇게 경멸받아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차기주는 김수현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은 채 사내 전화를 비서실에 연결했다.

“김 비서, 김수현에 대해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유능한 비서는 정확히 2시간 뒤에 김수현에 대한 정보를 A4로 10장이나 가져왔다. 차기주는 첫 장을 보고 의아해져 눈썹을 문질렀다. PL 그룹 셋째로 태어난 김수현은 한국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다.

최근 후계자였던 형, 김정석이 자살하면서 PL 그룹 전무로 취임했다. 그런데 모든 걸 버리고 갑작스럽게 센터에 와 검사를 받았다.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검사 때문이라면 PL 그룹에서 어련히 돈을 써서 빼줬을 텐데 왜 그랬을까. 하다못해 전공이던 그림은 왜 때려치운 거지?

그 밖에 그가 얼마나 사회에서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고, 사람들이 얼마나 이 아름다운 우성 알파를 사랑했는지에 대해 적힌 보고서를 쭉 읽었다. 지인 목록이 어지간히도 길었다.

하긴 차기주도 만일 김수현과 동갑에 같은 학교에 다녔으면 짝사랑이란 열병에 걸려 마음 앓이를 했을 거다. 김수현은 그만큼 아름답고 탐나는 존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수현은 기존의 삶을 버리고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왜 김수현이 센터에 들어왔는지 그 이유를 가늠하고 있는데 김 비서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김수현 씨가 앞으로 이사님을 가이딩해주려면 자신도 가이드가 필요하다며 진설해 가이드를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 목적이 이거였군.”

그는 대인관계가 좋고 공부를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완벽한 재벌 아들 김수현에 대한 서류를 책상에 내던졌다.

진설해는 차기주의 페어 가이드였다. 그게 김수현이 차기주를 선택한 이유였다.

“콕 집어서 진설해여야 한다고 했어?”

“네. 반드시 그분을 페어로 삼고 싶대요.”

차기주의 가이드인 진설해를 노리는 에스퍼들은 많았다. 에스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차기주를 가이딩할 정도이니, 가이드로는 진설해가 최고라고 쳐줬기 때문이었다.

김수현도 결국 다른 에스퍼들처럼 자기가 가지고 싶은 가이드를 노리고 차기주에게 능력을 공개한 것이었다. 왜 그가 집에 안 들어가겠다는 건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알았어. 진설해 가이드 불러서 충분히 설명하고 김수현이랑 페어 맺을 생각 있는지 물어봐.”

김 비서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다가 “넵, 알겠습니다” 하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차기주는 과연 이 알파를 자신의 페어로 삼은 게 잘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가이드에게나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주제에 상대방의 인성을 따지는 건 사치일 뿐이었으니까.

* * *

책상마다 파티션으로 공간을 나눠놓은 사무실에서 에스퍼들은 작업을 이어나갔다. 컴퓨터에 뜬 시계를 계속 힐끔거리며 점심시간만 기다리는 게 여느 회사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부드러운 패브릭 쿠션이 덧대진 파티션 안은 핀으로 고정해놓은 메모들로 가득했다. 에스퍼라면 다들 무식하게 괴수를 때려죽이기만 하는 줄 알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미결 서류와 파일 더미는 오늘 야근을 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하면서 왜 건물을 부쉈는지에 대한 사유서, 그 건물에 대한 피해 보상 및 인명 피해에 대한 경위서, 그리고 피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과문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주말에는 게이트 안에서 다친 환자를 찾아가 과일 바구니를 건네며 언론에 얼굴도장도 찍어야 했다.

영화 속 히어로와 에스퍼의 현실은 달랐다. 사람을 구해줘도 인터넷상에서 욕을 먹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이 빌어먹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들에겐 퇴사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지친 에스퍼들은 오늘도 책상 위에 올려둔 사랑스러운 가이드의 사진을 보며 애써 기운을 내려고 노력했다. 희미한 웃음을 뒤로한 채 오랫동안 컴퓨터 화면을 보느라 침침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피로를 풀어보기도 했다.

화이트보드에는 ‘이달의 사원’ 표기와 함께 얼마나 많은 게이트를 청소했는지 알리는 성적 그래프가 길게 늘어져 에스퍼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위이잉잉. 위이이잉. 긴급사태. 긴급사태. 외부 침입자. ‘코드 0’ 발령합니다. 에스퍼들은 침입자들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 또는 사살 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코드 발령 방송과 함께 사무실과 복도마다 설치된 사이렌이 붉은빛을 번쩍번쩍 뿌렸다. 방송을 들은 에스퍼들은 평범한 회사원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저마다 손에 불덩이나 얼음송곳같이 무시무시한 것들을 든 채 달려 나갔다.

센터에 침입자들이 쳐들어왔다. 센터 내부까지 침입자들이 들어왔으니 입구를 검문하는 군인들은 전부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곳곳에 보이는 침입자들을 향해 에스퍼들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고 침입자들은 그 힘에 맞서서 능력을 발휘했다. 에스퍼와 에스퍼의 충돌, 그 덕에 사방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건물 전체가 진동할 만큼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살벌하게 전투를 벌이던 양쪽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얀 머리칼을 가진 존재가 차기주에게 붙잡혔다. 차기주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벽에 머리통을 처박았다. 아마도 침입자들의 우두머리일 남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본 침입자들은 모든 의욕을 잃은 듯 보였다.

차기주가 손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당겨 어깨에서 탈골시켰다.

“으아아아!”

듣는 사람까지도 괴로워질 만큼 끔찍한 비명이었다. 그렇지만 차기주는 무감하게,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떼어내듯 메시아의 반대쪽 팔도 뽑았다.

“으흐윽! 으윽.”

차기주가 두 팔을 쓸 수 없게 된 남자를 바닥에 쾅쾅 내리찍었다. 마치 남자에게 무게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듯 차기주는 남자를 너무나 쉽게 휘둘렀다.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든 남자는 꿈틀거리며 도망치려고 기었다.

차기주는 구둣발로 메시아의 등을 밟았다.

“어딜 가. 남의 회사에 쳐들어왔으면 죽을 각오는 한 거잖아.”

“살, 살려……줘…….”

“내가 널 살려줘봤자 뭐에 쓰려고.”

차기주는 남자의 어깨에서 빼낸 팔들을 등 뒤로 잡아당겼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너희 정체가 뭐야.”

현존하는 에스퍼 중 가장 강하다는 차기주의 힘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 결과, 괴물 같은 사내에게 두 팔을 잃었다.

“커헉. 허억, 크으.”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남자의 두 팔을 차기주가 멀리 던져버렸다. 그가 피 묻은 손을 닦을 손수건은 바닥에 버렸다.

차기주는 손목에 찬 파동 측정기 시계로 시간을 쟀다.

“회복 능력이 상당히 빠른 걸 보니 S급인가 봐.”

상대의 협조라고는 필요 없는 무식한 방식이었다. 너저분하게 절단된 어깨에서 새로운 팔이 생겨나는 시간을 측정해 남자의 등급을 알아낸 것이다.

차기주는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며 그 배를 문질렀다.

“이봐, 이름이 뭐야.”

“퉷!”

남자는 차기주에게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차기주는 피식, 웃더니 손으로 남자의 뱃가죽을 찢어버렸다.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에 적, 아군 할 것 없이 모두가 얼어붙어버렸다. 아무리 침입자라고 한들, 차기주의 잔인한 처사에는 센터 에스퍼들조차도 회의적이었다.

차기주는 적의 배를 뚫고 구멍 안에 손을 넣은 뒤, 내장을 꺼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한번 시험해볼래? 네가 얼마나 잘 참는지. 네 인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남자는 피로 완전히 절여진 채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 아버지!”

“야, 정신 차려. 이 정도로 안 죽잖아. 너 이름이 뭐야. 왜 센터를 공격했어.”

처음으로 맛본 끔찍한 고통에 결국 남자는 항복했다. 남자는 피를 울컥울컥 토해가며 대답했다.

“메시아. 신께서 내려보낸 천사. 제네시스의 교주.”

“뭔 소리야. 제대로 설명해.”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신께서 날 지상에 내려보냈어. 난 하늘의 심판을 열 거야.”

황당한 소리였다. 차기주는 메시아라고 자기를 소개한 미치광이를 다그쳤다. 하늘의 심판이란 결국 사람들을 학살하는 테러 행위를 뜻했다.

“네가 가진 능력은 뭐지? 대답해.”

“난 인간의 원죄를 정화할 수 있어.”

“무슨 개소리야. 똑바로 설명 못해!”

차기주가 메시아 위에 올라타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메시아는 차기주의 눈을 노려봤다.

“넌 결국 벌을 받을 거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너 때문에 죽을 거야.”

세뇌 능력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또한 상대방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볼 때만 사용할 수 있고, 세뇌당하는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명령은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니 차기주가 제게 소중한 사람을 직접 상처 입히게 하고 그를 통해 자살하게 만들어버릴 셈이었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을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강간할 테니까.”

차기주는 천사의 저주를 웃어넘겼다. 자신에겐 그런 사람이 생길 일도,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할 리도 없다며 비웃은 차기주가 메시아의 목숨을 거두려고 한 순간, 메시아의 어깨뼈에서 하얗고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왔다. 제네시스 신도들은 메시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신도들은 하나님에게 임무를 받고 인류를 벌하기 위해 천사가 등장한다는 내용의 찬송가를 불렀다.

“하나님 진노하셔 천사를 내려보내셨네. 자비로운 메시아께서 원죄를 씻어주시니. 다 같이 하늘로 돌아가리라. 메시아와 함께하지 않는 이브와 아담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 반성하지 않는 죄인을 섬멸하자.”

기괴한 광경에 차기주의 손에서 힘이 빠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사가 달아났다. 정작 메시아는 놓쳐버렸지만 혼자만 도망친 메시아 덕에 센터는 제네시스 신도들을 전원 체포하여 센터에 구금할 수 있었다.

차기주는 신을 믿지 않았다.

1차 대변혁이 일어나 게이트에서 괴수들이 나오고 에스퍼와 가이드가 생겨나도, 이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약 6,600만 년 전 소행성 충돌로 공룡이 멸종한 사건과 다를 바 없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발생한, 누군가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천사를 내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인간인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눈으로 보지 못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직접 천사를 봤다. 있는 줄 몰랐던 아버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아들이 된 기분이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저렇게 약해빠진 천사라면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겠단 생각에 두렵지는 않았다.

심문을 위해 취조실의 문을 열자, 의자에 묶인 채 눈을 부릅뜬 광신도가 차기주를 보고 발광했다.

센터에서 침입자들에게 알아낸 바는 다음과 같았다.

천사 메시아를 따르는 광신도 집단은 ‘제네시스’이며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심판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인류 멸망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차기주를 없애려고 센터를 쳐들어온 거라고 했다.

“저주받아라! 인간의 탈을 쓴 사탄아! 신께서 널 용서치 않으리.”

천사의 팔을 뽑아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기 한참 전부터, 차기주는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비인류적인 실험으로 고문당할 때마다 신을 욕했다. 그에게 주어진 고통의 이유를 신에게서 찾았고, 그를 구원할 존재 또한 신인 것처럼 부르짖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답해주지 않았다.

만약 그때 차기주가 했던 온갖 욕설과 비굴한 애원을 신이 들었다면 이미 그는 신께 사랑받기 그른 존재였다.

“제네시스에는 얼마나 많은 광신도가 있지?”

“내가 말할 줄 알아?”

대범한 척하지만, 광신도는 차기주를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한 채 벌벌 떨어댔다. 차기주는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펜치를 꺼냈다.

“부디 네 이 32개가 다 빠지기 전에 대답해야 할 텐데.”

그는 광신도의 턱을 잡고 앞니를 펜치로 단단히 잡았다. 공포로 커진 동공 안에 차기주가 담겼다.

“으아아! 흐어어아.”

피가 묻은 앞니를 바닥에 내던지자 광신도가 흐느끼며 울었다.

“걱정하지 마. 요즘 임플란트 기술이 좋거든. 네가 순순히 협조만 해준다면 앞니 따위 다시 메워줄게.”

“흐흐흑. 점조직이라 얼마나 되는지는 정말 몰라요. 오늘 메시아께 연락받고 저희도 처음 모인 거예요.”

차기주는 우는 광신도의 턱을 놓아줬다.

“어떻게 메시아를 만나게 되었지? 그가 본인이 천사라며 너희에게 무슨 명령을 했고, 그를 따르는 이유는 뭐지? 단지 특별한,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인가?”

어느새 입 주변이 온통 피로 물든 광신도는 새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메시아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시더니 신께 성스러운 임무를 받아 지상에 내려온 사연을 말씀하셨어요. 저에게 자신의 신도가 되어 함께하지 않겠냐 하셨고요.”

“하! 어이가 없군. 대학살에 동참하겠냐고 묻는 말에 좋다고 한 건가? 단지 날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광신도는 고개를 저었다. 메시아가 본인을 천사라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날개를 본 건 오늘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메시아를 따랐냐고 물으니 전지전능한 메시아께서 임무를 잘 수행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단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말로만 그랬지만 절박했던 광신도는 그 말을 믿고 싶었기에 그냥 믿어버렸다. 그리고 광신도는 메시아의 명령에 따라 악인 20명을 살해하고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소원, 소원이라. 그래서 넌 무슨 소원을 이루었기에 인류 멸망에 동참하기로 한 거지?”

“죽은 아내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살아났어?”

“네, 아내가 돌아와 함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광신도가 말하는 천사는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는 존재였다. 그 믿음이 어찌나 절실한지 차기주 혹할 정도였다 만일 메시아가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그가 가진 저주와도 같은 약점을 고쳐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이런 마음을 이용해 메시아는 광신도를 꼬여낼 수 있었을 터였다. 정신을 차리고 다음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에서 삐삑 경고음이 울렸다. 불안정 파동 수치가 50%였다.

김수현의 무효화 능력으로 0까지 떨어졌던 게 전투 한 번 했다고 순식간에 올랐다. 그는 매직미러 너머에 있는 에스퍼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취조실을 나왔다. 심문을 이어가기 위해 오고 있던 에스퍼와 눈이 마주쳤다.

“메시아가 저 신도의 아내를 살려냈다던데 조사해봐.”

“예, 알겠습니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차기주는 급격하게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꼭 물컹거리는 젤리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벽을 손으로 짚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형광등 불빛에 터질 것 같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을 내리깐 채 답답한 시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5층에서 내린 그는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기 위해 계단 위를 엎드려서 기었다. 균형감각이 사라진 탓에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대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거란 두려움에 자존심도 버린 채 처절하게 계단 위를 기었다. 불안정해진 파동 앞에 그는 한없이 무력했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손으로 짚은 계단에 운동화가 있었다. 차기주는 실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봤다.

“뭐 해요?”

“지금 내가 재미있어서 이러는 것처럼 보이나.”

“까칠하긴.”

김수현이 손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기며 품었던 모든 두려움이 허탈하게 느껴질 만큼, 김수현의 손을 잡은 순간 모든 것이 멀쩡해졌다. 그는 추잡하게 계단을 기는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뒤늦게 귀 끝을 붉혔다.

“와, 대박. 아저씨 주제에 약간 귀엽네. 이래서 남주인 건가?”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아니에요. 나 지금 데이트 갈 건데 용건 끝난 거 같으니까 같이 갈래요?”

“남 데이트하는 데 낄 만큼 눈치기 없진 않거든.”

차기주는 먼지가 묻은 양복을 털며 차갑게 대꾸했다. 김수현은 기죽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내 데이트에 쫓아오래요? 같이 엘리베이터 타자는 거였지.”

오해였다는 걸 깨달은 차기주의 귀가 토마토색으로 진해졌다. 김수현은 로봇처럼 표정이 없는 알파가 모든 감정을 귀로만 표현하는 게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의 귀를 만졌다. 귓불이 생각보다 말랑말랑해서 그 대단한 차기주도 인간은 인간이구나 싶었다.

“따끈하다.”

차기주는 이제 불안정 파동 에너지도 리셋되었는데 왜 이렇게 눈이 시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수현의 입꼬리를 따라 잔뜩 올라간 광대가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눈매 끝이 약간 뾰족한 아몬드형 눈은 무표정일 때는 차가워 보이더니만 웃으니까 눈 밑 애교 살이 도드라져 그런지 짓궂어 보였다.

햇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김수현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그에게만 빛이 모여들었다. 차기주는 얼른 눈꺼풀을 내리깔았다가 다시금 그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 눈을 치켜떴다.

차기주의 귀를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던 김수현이 “흐음” 하며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그쪽인데 왜 나는 진설해를 사랑했다는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느라, 차기주는 함부로 귀를 만진 것에 대한 무례를 따져 묻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긴 채 철제 계단을 내려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아래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차기주는 김수현이 만졌던 귀가 마치 민들레 홀씨로 간질이는 듯 간질거려, 괜히 손으로 문질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김수현이 먼저 내려 차기주를 돌아봤다.

“혹시 로맨스 소설 좋아하세요?”

“아니, 그런 건 본 적 없는데.”

“이사님이 꼭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 귀 단속 잘하고 다녀요. 괜히 사람 마음 심란하게.”

김수현은 정말 이상한 알파였다. 차기주는 김수현과의 첫 만남부터 두 번째 만남까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왜인지 생각보다 김수현이 천박하고 문란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설해가 김수현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칭 감금 중인 김수현은 그 잘생긴 얼굴을 뽐내며 오메가는 물론, 알파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진설해의 옆에 서는 그를 보고 가이드들은 역시나 하며 부러워했다. 진설해가 김수현에게 팔짱을 끼더니 까치발을 들고 귓속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어도 차기주는 들을 수 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이 이럴 때만큼은 별로이다 싶었다.

“수현 씨, 우리 오늘 섹스 가이딩 할래요?”

김수현이 진설해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이 잘생기고 예쁜 알파와 능력 있는 오메가는, 차기주는 절대 알지 못할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에 등장할 게 분명했다.

약을 먹은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최상의 컨디션이었음에도 최악의 기분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진설해를 끌어안고 있는 김수현의 목이 차기주 쪽으로 꺾였다. 김수현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린 순간, 시선이 사라졌다. 김수현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아직 그 정도로 가이딩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차기주는 어째서인지 김수현이 그 말로 자신을 안심시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착각이 앞으로 그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지 알았다. 그렇기에 진설해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게 통쾌해도 마냥 기쁘진 않았다.

“그럼 갈까요, 설해 씨.”

“아, 네. 센터 안에 레스토랑이 있는데 꽤 괜찮아요.”

김수현은 정말 자기가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걸까. 저런 화려한 생김새를 가진 우성 알파가 돌아다니는데 센터에서 일하는 김아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이미 그가 징벌방 밖에 나온 순간부터 그는 감금당하는 중이라는 거짓말을 들킨 것과 같았다. 차기주는 그들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는 걸 사무실에 있는 김아영이 20분 안에 알게 될 거라는 데에 돈을 걸 수도 있었다.

이사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그의 발걸음은 착실히 김수현과 진설해가 나란히 걷는 방향을 따라 옮겨지고 있었다. 김수현의 뒤를 쫓으면서도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니까, 하고 듣는 이 없는 변명을 삼켰다.

일행은 아니었지만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호텔 같은 고급 레스토랑도, 그렇다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줄 서서 시켜 먹는 패스트푸드 가게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을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이었다.

이미 식사 중인 가이드와 에스퍼들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식당은 만석을 이루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만들어낸 시끄러운 소리가 재즈 음악과 섞여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앞치마 주머니에 팬과 메모판을 꽂은 종업원이 다가왔다.

“세 분이세요?”

“아니요. 둘이에요.”

진설해는 뒤늦게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차기주를 발견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미련 때문에 따라왔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의 표정에서는 약간의 자만심과 허영, 심지어는 경멸이 엿보였다.

김수현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고는 종업원에게 자리도 없는 것 같으니 한 테이블로 준비해달라고 했다. 그 말에 진설해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차라리 다른 데 가서 먹을까 봐요.”

“왜요. 난 여기 마음에 드는데. 엄청 맛집인가 봐요.”

진설해는 차기주와 같이 식사하기 싫어하는 눈치였으나 김수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받아주지를 않았다. 차기주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종업원을 따라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들은 벽에 70년대 할리우드 스타 사진이 걸려 있는 자리에 앉았다. 미리 테이블마다 종이 냅킨으로 포크와 수저, 나이프를 감싸둔 게 있어서 그들은 각자 몫을 챙겼다.

“메뉴판 보시고 메뉴 결정하시면 벨 눌러주세요.”

종업원은 사람 수에 맞춰서 메뉴판을 주고 갔다. 차기주는 부채처럼 메뉴판을 펼쳐서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빼꼼히 내밀어 김수현을 살폈다. 김수현은 뭘 먹을지 고심하다가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를 골랐다.

“난 토마호크 스테이크 먹을게요.”

진설해가 말했다. 김수현은 메뉴를 말하지 않는 차기주에게 “이사님은요?” 하고 메뉴를 확인했다.

“샐러드.”

“투움바 파스타 드세요.”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황당해하는 그를 본 김수현의 눈이 버들잎처럼 가늘어졌다. 그를 놀려먹은 게 재미있나 보다. 차기주는 헛웃음을 흘리며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벨을 누른 김수현이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종업원은 음식이 나오기 전, 식전 빵으로 구운 바게트를 가져왔다.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 버터와 딸기잼이 함께 곁들여져 취향 따라 빵에 발라 먹으면 됐다.

레스토랑 안은 바쁘게 오가는 종업원들의 부산함과 손님들의 이야기하는 소리가 모여 만들어진 웅얼거림, 시끄러운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 외딴섬처럼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싸늘한 공기만이 맴돌았다.

진설해가 차기주에게 ‘드세요’ 하며 상사 대접을 해줬다. 차기주는 이 가시방석에서 그 무엇도 집어 먹고 싶지 않은데 대체 왜 버티고 있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김수현이 손으로 빵을 집어 버터를 발라 입에 물자 입가에 하얀 부스러기가 묻어났다.

차기주는 손으로 털어주고 싶어서 그의 입가를 진득하게 쳐다봤다. 그 시선을 알아챈 김수현 덕에 두 알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진설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두 사람 뭐예요? 지금.”

차기주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김수현의 입가를 털어줬다. 아니, 그건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치고 미친 짓을 벌인 거였다.

“……입에 묻어서.”

“그럼 말로 알려주면 되잖아요. 도대체 뭐예요. 이사님, 혹시 저한테 미련 남으셨어요? 그래서 쫓아오신 거예요?”

진설해 입장에서는 페어였던 차기주가 새로운 에스퍼와 데이트하는 데 쫓아왔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충분히 이해됐다. 차기주는 아니라고 변명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오해를 풀려면, 왜 자기가 쫓아왔는지 이유를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네 옆에 앉아 있는 알파에게 몹시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녀는 소름 끼쳐 할 테다. 알파와 알파가? 에스퍼와 에스퍼가?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는 뭐냐고 하겠지.

종업원이 따뜻한 접시를 테이블에 놓아줬다. 절묘한 타이밍 덕에 차기주는 침묵으로 위기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느끼한 크림으로 범벅된 파스타는 취향이 아니어서 포크로 새우만 건져 먹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현이 바꿔 먹어보자며 접시를 가져갔다.

“두 메뉴 중 뭘 먹을까 고민했거든요. 알리오 올리오 먹어봤으니까 이제 투움바 먹어보게요.”

마늘과 페페론치노, 올리브유가 들어간 파스타가 앞에 놓였다.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서 마늘과 먹어봤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접시에 긁혀 끼기긱 소름 돋는 소리를 냈다.

진설해에게 시선을 준 김수현이 그녀에게서 나이프와 포크를 빼앗아 부드럽고 우아하게 고기를 썬 후 그녀에게 접시를 돌려줬다.

그의 매너 있는 행동에 진설해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김수현을 향해 돌아간 시선은 스테이크를 향할 줄 몰랐다. 차기주는 제 몫으로 주어진 파스타를 묵묵히 먹었다.

그때, 레스토랑 안에서 누군가 생일인지 테이블 위에 케이크가 등장했다. 종업원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줬다.

진설해가 요즘 보기 힘든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렇지만 생일이 아닌 그들은 찍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서 먹었다.

생일 파티를 한 일행이 코르크로 만들어진 게시판에 또렷해진 사진을 붙여놓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왔던 센터 직원들 사진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차기주는 면밀하게 사진을 살피다가 생일이 아닌 사람도 사진을 찍어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 상태에서 사진을 찍을 것도 아니었으므로.

식사를 다 한 차기주는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혹시 김수현도 그에게 마음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김수현도 차기주와 같은 감정이라면 다음에 만났을 때, 저번엔 얻어먹었으니 이번엔 자기가 사겠다고 말할 테니까.

“오늘은 내가 내지. 예상치 못하게 식사를 함께했으니까. 진설해 씨, 미안해. 본의 아니게 데이트를 방해해서.”

그녀는 알았으면 좀 비켜주지 그랬냐는 얼굴로 “아니에요. 이사님, 식사 즐거웠어요” 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차기주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김수현이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는데 도통 마음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냥 혼자만 의식했구나 싶어 김이 빠졌다. 그는 일행과 헤어져 서울에 있는 사택에 내려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G*겐을 타고 험한 산길을 내려갔다. 언제나 차를 숨겨두는 장소에 녹색 방수 커버를 뒤집어씌워서 위장해뒀다. 태백산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서 고급 세단으로 갈아탔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는 내내, 무슨 정신으로 먹었는지 모를 기름진 파스타가 위장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사실 팔다리가 잘리고도 금세 회복되는 괴물 같은 신체이니 비단 파스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속을 이렇게 불편하고 신경 쓰게 만드는 건 그 잘생긴 알파가 문제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시선을 사로잡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첫눈에 반한 이유가 어이없었다. 그 눈부신 외모에 넘어가버리다니. 마치 배 위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왕자에게 반해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인어공주처럼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인어공주는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왕자는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인어공주가 가족과 아름다운 목소리와 바다, 그리고 생명까지 포기하게 했다.

김수현 또한 자신을 그렇게 만드리라. 그것을 알면서도 차기주는 김수현을 향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차기주는 뇌가 없는 인어공주와 자신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여겼다. 어리석은 관심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