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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선배(3) (7/17)

선배(3)

이사실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김 비서에, 차기주는 빽빽한 글자를 읽느라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저 이사님…….”

김 비서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되묻는 대신 컴퓨터 화면에 뜬 사내 메신저를 읽었다.

[서울 R16 구역. 게이트 발생. 에스퍼 파견 바람.]

차기주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만큼 가장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게이트가 열린 게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런 사태에 대비해 30명의 에스퍼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게이트가 발생한다고 해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차기주는 늘 그래 왔듯이 메신저를 통해 에스퍼 3명을 현장으로 파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한순간 멈칫, 굳었다. 김수현 또한 학교 때문에 서울에 있을 시간이었다.

“설마.”

그는 고개를 들어 김 비서에게 눈으로 물었다. 김 비서가 침을 꼴깍 삼키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무래도 김수현 씨가 게이트에 갇힌 것 같습니다.”

“거기 어디야. 좌표 불러.”

“하지만 이사님…….”

김 비서는 혹시 김수현이 죽어, 차기주가 가이딩을 받지 못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당장 능력을 사용한다면 파동이 급격히 요동칠 테니까. 차기주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지금 장난해? 김수현 죽으면 어차피 나도 죽어.”

김 비서가 신속하게 김수현이 탑승한 차량의 GPS를 확인했다. 차기주의 눈에 그 좌표가 새겨진 직후, 잔잔한 실내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차기주의 몸을 감싼 바람은 거세게 그의 양복 자락을 뒤흔들었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살짝 감았다 뜬 찰나, 차기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간 이동이라는, 그 어떤 에스퍼도 가지지 못한 전대미문의 능력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SS급 에스퍼. 물론 차기주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었지만, 굳이 그런 것들을 밝히지 않아도 차기주는 이미 명실상부 이 인류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였다. 그런 그에게 가이드가 없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마치 핵폭탄 발사 버튼 위에 딱따구리를 내려놓고 언제 새가 그 버튼을 누를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김 비서는 제발 김수현이 무사하길 기도했다.

* * *

아무것도 없는 도로 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공간이 일그러졌다. 바람이 불며 주변에 있는 먼지들이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나타난 차기주는 김수현의 등교 차량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자동차 천장에 무사히 착지한 그는 보닛을 밟고 차도로 내려왔다. 손목에 찬 파동 측정 시계에서 삐이― 시끄럽게 경고음이 울려댔다. 그러나 그는 시계를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가며 게이트를 찾기 급급했다.

김수현이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파동이 불안정하게 널뛰며 속을 쑤셔댔다. 아주 작은 자극도 감각이 예민해진 에스퍼를 고통스럽게 했다.

각막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그는 급하게 눈꺼풀을 닫았다. 김수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일상이었던, 그럼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숨이 막혔다. 눈조차 뜰 수 없을 만큼 시야에 들어오는 태양 빛이 뜨겁게 느껴졌다.

차기주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가린 채, 다른 감각에 의지해 김수현을 찾아 헤맸다. 자신의 페어를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지켜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현아. 김수현.”

손바닥으로 가린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화상을 입은 듯 붉게 익더니 기포가 맺히며 진물이 흘러내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를 전지전능한 신처럼 만들어주는 파동 에너지가 이제는 그를 한없이 나약하고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김수현을 업고 산을 올랐던 날, 자동차를 염력으로 움직인 뒤 가이딩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능력을 사용한 탓이었다. 차기주는 어느새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는 김수현이 없으면 이렇게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으, 수현아.”

어떻게든 게이트를 찾아내야 했다. 정석훈이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들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구하러 가지 못하면 김수현에게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으, 흐으.”

그는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팔꿈치로 아스팔트를 밀었다. 볼품없는 지렁이처럼 기면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파동 에너지를 몸 안에 가두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그가 포기하면 그의 힘은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류를 멸망시켜버릴지도 몰랐다.

지하 벙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겨우 아스팔트로 만든 벽 따위가 자신의 폭주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만 들었다. 차기주는 고개를 떨군 채 흐느껴 울었다. 김수현을 찾아야, 아니 찾아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차기주는 헤매고 있었다. 이 어둠이 점점 짙어져 모든 걸 집어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 누군가 나를 이 어둠에서 빼내주었으면…….

그는 자신을 유일하게 구원해줄 수 있는 김수현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김수현의 손을 잡고 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사님.”

환청일까. 너무도 바란 나머지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수현은 피로 얼룩진 차기주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무효화 능력을 사용했다.

“하, 하하. 하하하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그림자에, 차기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나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거였다. 그는 파동 에너지가 잠잠해지자마자 온몸에 도는 에너지와 재생되는 신체를 느꼈다. 그는 그의 목숨줄을 쥔 김수현을 올려다봤다. 눈이 부시게 잘생긴 알파가 걱정스럽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정석훈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버려진 차들을 되찾으러 오는 차주들과 뒤엉켜버린 교통을 정리하기 위해 온 경찰의 모습만이 게이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할 뿐.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난 괜찮아요. 하지만 석훈 씨가…….”

김수현은 자기를 구하고 죽은 정석훈을 떠올리는지 눈물을 흘렸다. 차기주는 장기 말을 계획대로 써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표 내지 않았다. 그 대신 바닥을 기어서 더러워진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슬픈 척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래. 그랬구나.”

차기주는 심복이 죽었음에도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오히려 앓던 이를 뽑아낸 듯 시원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봐도 비정할 정도로, 차기주는 김수현을 마음에 품은 정석훈의 죽음을 기껍게 여겼다. 그는 생각보다 치졸한 사내였던 거다.

어쨌든 차기주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겠다.”

“흑.”

김수현이 차기주의 허리를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차기주는 한 손으로 김수현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어 센터에 연락했다.

“여기 R16 구역인데 혹시 새끼 게이트들도 열렸는지 확인해.”

일반적으로 게이트는 보스를 죽이면 자연적으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게, 게이트 등급에 따라 근처에서 하위 등급의 게이트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차기주는 연락을 마치자마자 김수현의 허리에 팔을 감고 안전한 옥탑방으로 텔레포트했다. 한시라도 빨리 김수현을 안전한 장소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이게 무슨.”

김수현은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에,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능력 이외의 힘이었다.

“수현아, 나 가이딩.”

차기주가 뺨에 김수현의 손을 가져다 대고는 교태를 부렸다. 속눈썹을 팔랑이며 쳐다보는 시선은 마치 상대를 유혹하려는 듯 농염했다. 그는 조금 불안정해졌던 파동이 다시 순식간에 가라앉는 경험을 하고 “하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나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을 매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기주는 경이로운 김수현의 힘에 경의를 표하며 그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차기주의 다정한 키스에 김수현의 볼이 달아올랐다.

“저, 이사님, 석훈 씨 팔을 현장에 두고 왔어요. 잘린 오른팔이라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그래. 수습하라고 할게.”

차기주가 전화로 정석훈의 팔을 챙겨 장례를 치러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수현은 힐끔 차기주의 표정을 살폈다.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정석훈이 죽었는지 묻지 않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가 왜 혼자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죄책감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비록 정석훈이 회귀 전에 김수현을 두 번이나 죽인 개새끼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김수현은 이번 일을 통해 되찾은 제 첫 생의 기억을 곱씹으며 지금의 차기주와 기억 속 차기주를 비교했다. 첫 번째 생에서 그와 자신은 섹스 파트너였다. 차기주는 그 또한 한 명의 에스퍼로서 가이드가 필요했기에, 자신의 마음을 알고도 받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받아줬다. 자신을 더 이상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이기적이고 철없었던 스무 살짜리가 하는 질투에 휘말려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며, 자기 목숨보다 사랑을 택한 것이다.

수현의 무효화 능력에 가이딩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제 곁에서 죽어가는 차기주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였다.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말 그대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이제 우리에겐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렇게 좋아했건만……. 어이없게도 믿었던 부하에게 총을 맞아 죽어버렸다.

자신이 죽은 뒤에 차기주는 어떻게 됐을지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자살했다고 오해해서 상처받지는 않았을지, 정석훈의 범죄가 밝혀져 그가 벌은 받았는지. 자신이 죽은 이후의 일들이 몹시 궁금했다.

그렇지만 차기주는 자신과 달리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김수현은 굳이 이 기억을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연인의 죽음이라는 큰 상처를 차기주가 다시 떠올리지 못했으면 했으니까. 그와 자신은 너무나 오래 돌아와야 했다.

두 번째 생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선배가 누구였든 이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자신이 사랑하는 건 오직 차기주뿐이니까.

“수현이 너, 열이 왜 이렇게 많이 나.”

갑자기 차기주가 손으로 김수현의 뺨을 감쌌다.

“오늘 일이 오죽 충격적이었어야죠.”

김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그 손에 뺨을 기대었다.

“어서 누워.”

차기주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를 만들었다. 김수현은 게이트에 들어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남색 니트를 벗고 행거에 걸어둔 잠옷을 챙겨 입었다. 드로어즈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길이였다. 차기주의 시선이 잠시 그의 다리에 가는 듯했으나 곧 떨어져 나갔다. 아픈 연인을 상대로 발정할 순 없었다.

청바지도 벗고 편한 잠옷 바지를 챙겨 입은 수현은 감기에 걸린 아이처럼 침대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찾아낸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물컵과 해열제 두 알을 건넸다. 화장실에서 수건을 적셔 온 그는 수현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고마워요.”

김수현은 차기주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건넸다.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자신은 소설 내용에 얽매여 그가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줘도 믿지 않고 의심하기만 했다. 이제 와서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작가가 대체 뭐라고.

자신이 보아온 차기주는 작가가 그려낸 것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뭐 약간 개자식 같은 면모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배’라는 단어에 한 맺힌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그리 불러온 게 웃겼다. 어쩌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두 번째 생에서 만난 연인도 첫 번째 생에서 그런 것처럼 진짜 학교 선배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현은 그 ‘선배’도 차기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차기주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온계를 가져와 들이댔다.

“너 지금 체온이 37.8도야. ……안 되겠다. 너 이불 덮지 마. 체온 떨어트려야 해.”

“그냥 미열일 뿐이에요.”

차기주는 김수현이 죽을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핸드폰을 집어 든 그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구소장에게 연락해 의사를 보내라고 했다. 그러곤 빨리 열을 내려야 한다며 창문과 현관문을 열어뒀다.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별일 아닌 일에 부산스럽게 구는 그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나 자신이 좋을까. 그는 예전에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래서 함께 행복했던 기억도 없을 텐데 말이다.

“아니야, 수현아. 헬렌 켈러는 열 때문에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됐어. 열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에게는 떨어지는 낙엽조차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그가 자신을 그토록 연약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사실 자신은 130kg짜리 군장을 메고 트랙을 10바퀴씩 도는 철인인데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에스퍼 훈련소에 들어가 교육받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그때처럼 몸을 만들라고 하면 그럴 자신 있었다.

냉동고 문을 열어 얼음을 꺼내 든 그가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자신의 이마에 놓아줬다.

“곱게 자란 도련님인데. 오늘 많이 무서웠지?”

자신을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이 좋아 수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봐요.”

“이제 괜찮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거야.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수현아.”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져 베개를 적셨다. 차기주가 손으로 물기를 닦아주고는 이마에서 얼음을 치웠다.

“너무 차면 두통 생겨. 잠깐 쉬었다가 다시 대고 있자.”

그는 자신이 PL 그룹 자제라 곱게 자랐다고 생각하지만, 김수현은 이렇게나 애지중지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더욱 이 순간이 소중했다. 차기주가 계속 자신을 그런 존재라고 오해했으면 했다. 실컷 어리광을 부리며 사랑받게.

수현이 그렇게 그의 품에 기대어 있을 때, 연락받고 온 의사가 열린 현관문을 두드려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얼른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인 의사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수현을 살피더니, 곧 진료 가방에서 페로몬 측정기를 꺼냈다. 페로몬 측정은 당 측정과 같이 수지침으로 손가락에 피를 내어 측정기에 묻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측정기를 보던 의사는 곧 가볍게 말했다.

“곧 러트가 오려고 해서 열이 나는 겁니다.”

“하지만 제 러트 주기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요?”

“오늘 게이트에 갇히셨다고 들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 정도 오차 범위는 생길 수 있습니다.”

의사가 가방에서 억제제를 찾아 수현에게 건넸다.

“하루 2알씩 드세요.”

차기주는 방금 해열제를 먹었는데 억제제도 먹어도 되냐고 꼼꼼히 따져 물었다.

“예, 그 부분은 괜찮으니까 지금 바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약 효과가 돌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러트가 온 다음에 먹으면 본인이 더 힘들 겁니다.”

김수현은 주저 없이 억제제를 삼켰다. 빈속에 연속으로 약만 먹었더니 속이 쓰라렸다. 아무 말 않고 인상만 찌푸렸는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 차기주가 먼저 의사에게 위장약을 요구했다.

수현은 액체로 된 위장약을 받아 포장지를 뜯었다.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정말 맛이 없었다. 약을 먹고 나니 속은 쓰리지 않았지만, 입 안에 미끈거리는 기분 나쁜 쓴맛이 맴돌았다.

자신이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한 의사가 돌아가고 차기주는 걷어냈던 이불을 도로 자신에게 덮어줬다.

“난 이만 가볼게.”

러트인 상대와 함께 있어봤자 사고만 일어날 뿐이었다. 이럴 땐 욕심부려도 되건만, 수현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 가려는 차기주의 양복 재킷 소맷단을 급히 잡아챘다. 그러자 차가운 인상이 무너지며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수현아.”

“나랑 있어줘요.”

“하지만 너 러트야. 내가 있으면 분명 무슨 사달이 날 거라고.”

“……알아요. 그래서 같이 있어달라고 한 거예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거북이걸음처럼 느릿한 침묵이 흘러갔다. 김수현은 슬쩍 잡아당기자, 반항 없이 그대로 끌려오는 손에 저절로 광대가 솟아올랐다. 침대에 앉은 그의 얼굴은 옥탑방에 도착하자마자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자신과 달리 피로 얼룩져 있어 몹시 섬뜩해 보였다.

가뜩이나 차가운 인상인데 이런 몰골이니 이곳에 왔다 간 의사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전혀 티 내지 않은 걸 보면 역시 센터 소속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현은 옆에 치워둔 젖은 수건을 집어 들어 차기주의 얼굴에 눌어붙은 핏자국을 문질렀다. 오래 놔뒀더니 잘 지워지지 않아 힘을 줘 닦았다. 피부가 뻘게질 강도인데도 살살하라는 소리조차 안 한다.

혹여라도 자신의 손길을 잃을까 봐 그러는 게 분명했다. 자신 또한 그의 보살핌이 기꺼워 그에게 몸을 맡기고 그 손길을 온전히 받아냈으므로. 그는 의외로 겁이 많은 듯했다. 그래서 첫 번째 삶, 그러니까 1회차의 생에서 자신이 더욱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관계를 이끌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침대에 올라와요.”

차기주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양복 재킷을 벗고 침대에 올라왔다. 그가 이불에 파고들어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네가 낯설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싫어요?”

“아니,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차기주가 김수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억제제 때문에 페로몬 냄새 안 나죠?”

“응. 그래도 네 살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좋네.”

무심한 듯 내뱉는 말에 가슴께가 간질거린다. 그동안 곁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몹시도 그리웠던 연인의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그 손길에 차기주의 몸이 멈칫, 굳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그 손길이 거두어질까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걱정하고 있구나.

괜찮다고 말하듯 그의 긴장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무르자,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을 품게 한 건 다름 아닌 현재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가이딩을 명분으로 자신을 옥탑방에 가둔 건 누가 뭐래도 차기주의 잘못이었으니까. 도망치려고 한 것도 사과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차기주를 안심시켜주는 건 다정한 행동만으로 충분했다. 그 행동에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을 셈이었으니까.

김수현은 1회차 때 차기주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억제제를 먹었음에도 막아내지 못한 러트에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어째서인지 그때도 지금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러트에 못 이겨 화장실 칸막이 안에 갇혀 숨을 헐떡거렸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으로 좆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눈앞에 오메가만 나타나면 그가 누구든 섹스를 하겠다며 이를 갈았다. 알파 전용 화장실에 오메가가 나타날 리 없는데도.

오메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구멍을 열어 좆을 처박은 채 씨 물을 잔뜩 쏟아부어 임신시켜야지. 우성 알파의 본능은 김수현의 이성을 지배했다.

“하아, 하아. 씁. 하.”

아무리 혼자 좆을 문질러대도 발정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괴로워서 화장실 칸막이벽에 이마를 쾅 쾅 부딪쳐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제발 누가 도와줘.”

구멍만 있으면 무조건 좆을 박아 넣고 흔들 셈이었다.

“이봐. 괜찮아? 억제제 줄 테니까 잠깐 문 좀 열어봐.”

좆을 문지르던 손으로 다급히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숙인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윤이 나는 검은 구두였다. 칼같이 주름 잡힌 바짓단을 보며 내심 그가 멋진 알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어찌나 키가 큰지,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알파의 얼굴이 보이지를 않았다.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고개를 젖힌 후에야 마주한 그의 얼굴은 천재 조각가가 깎아낸 완벽한 조각상 같았다. 등 뒤로 일렁이는 형광등의 불빛이 마치 그의 후광처럼 느껴졌다.

억제제를 올린 손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알파의 손을 붙잡고 혀로 푸른색 알약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손바닥을 혀끝으로 핥는 모습에는 간절함마저 담겨 있었다.

“으.”

알파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김수현은 혀로 억제제를 가져가며 알파를 올려다봤다. 바지를 풀어 헤친 채 좆을 세운 자신은 수치심도 모르고 알파를 응시하며 그의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길고 딱딱한 손가락이었다.

그것이 목젖을 찌를 때까지 깊게 빨아들였다.

“정신 차려. 이제 금방 억제제 효능이 돌 거야.”

손가락 세 개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넣었다가 빼며 알파에게 눈웃음을 쳤다. 태어나서 본 생명체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의 덩치가 자신보다 크고 우람하다는 건 결코 그 아름다움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그를 유혹하기 위해 기를 썼다.

차기주의 첫인상은 마치 바다에서 조개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아프로디테를 두 눈으로 목도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자신은 저렇게 생긴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미모에 홀려 자신의 축축하고 음습한 목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내려는 알파의 손목을 붙잡았다.

“후회할 짓 하지 마. 정신 차려.”

김수현에게 손가락이 빨리며 어느새 그의 바지 앞섶은 두툼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자유로운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가렸다. 아아, 어떡해. 너무 귀여워. 분명 동정일 거야.

김수현은 자신도 동정인 주제에 순진한 알파의 행동을 보고 귀여워했다. 우악스럽게 집어삼켰던 손가락을 뱉어내고 알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파고들지 않을 만큼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나랑 섹스할래요?”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당신이랑은 꼭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왠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거든요.”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붉게 달아오른 알파의 귀를 보니까 그를 잡아먹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자신은 실성한 사람처럼 알파의 부푼 바지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머리통을 밀어내려는 손길에도 엉덩이 두 쪽을 꽉 움켜잡고 버텼다.

“그만해.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정말 당신과 자고 싶어서 그래요. 나랑 자요.”

“그럼 정신 멀쩡할 때 만나도 나랑 자고 싶으면 그때 자. 지금은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참으라고. 당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고 싶은데. 배 속에 통째로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린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는 끝내 발정 열에 들뜬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 억제제를 먹었으니 곧 괜찮아질 거라며 화장실 칸막이 문을 닫아버렸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소리를 들으며 좆을 문질렀다.

“씨발, 내가 왜 참아야 해!”

잔뜩 성난 자신의 욕설을 듣고도 그는 화내지 않고 자리를 비켜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제일 먼저 그 알파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깨달았고, 그다음으로는 자신이 무려 차기주 이사를 상대로 변태 짓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수치심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방금까지 그 손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해내고는 얼른 도로 떼어냈다. 젠장, 좆 됐다.

이제 차기주 이사에게 영원히 변태 새끼로 낙인찍힐 거란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발정 열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변기 위에서 일어났다. 계속 한 자세로 좆만 문질러대서 그런지 다리도 저리고 팔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김에 머리도 감아야지 싶었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2시간 동안 갇혀 있던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왔다. 시들시들해져 화장실 타일만 보던 고개를 들자 세면대 위에 놓인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것과 달리 무광의 검은색 종이에 금박으로 ‘차기주’, 이름 세 글자만 적힌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는 사람마다 자기가 누군지 단박에 알 거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지 않았다면 이런 명함을 만들 수는 없을 터였다.

손을 깨끗이 씻고 허공에서 탈탈 털어 물기를 날려 보낸 뒤 명함이 젖지 않게 손톱으로 집어 들었다. 공룡이 세 들어 살기라도 하는 듯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쿵쾅 뛰어댔다.

당시 에스퍼 훈련생이었던 자신은 까마득하게 높은 위치에 있는 차기주 이사와 만날 접점이 없었다. 이대로 잊혀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름만 적힌 명함 따위 뭘 하라고 줬나 짜증이 다 났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다.

센터 본관 로비에서 차기주를 마주친 것은 그날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가 자신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비서와 대화 중인 차기주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리라 여겼다.

그런데 우뚝 멈춰 선 차기주가 김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스쳤다. 설마 자신을 알아보는 걸까? 하긴 갑자기 러트가 와서 화장실에서 자위하던 녀석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의 시선을 받은 김수현이 용기를 내서 다가갔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차기주가 턱짓만으로 자기 비서를 물렸다. 김수현은 그런 그의 오만한 태도조차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묻는 차기주의 물음에 그 또한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가가 올라가며 봉긋해진 뺨에 생기가 돌았다.

“명함에 핸드폰 번호가 없더라고요.”

“그건……. 그냥 명함을 들고 이사실로 올라오면 돼.”

“아아, 그렇게 사용하는 거였구나. 난 또.”

아직 회사 생활을 해본 적 없어서 차기주 이사의 명함이 프리패스권처럼 사용된다는 걸 몰랐다. 스무 살의 김수현에게 회사원은 곧 어른이었고, 그런 어른과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들의 계급과 나이 차이 때문일까. 괜히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사님, 저 기다렸어요?”

김수현은 조금 더 도발적으로 그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 입술이 스칠 듯한 거리, 서로에게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다시 만났을 때도 자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죠?”

김수현이 느리게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런 김수현을 말없이 쳐다보던 차기주가 갑자기 김수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수현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붙들려 걸음을 옮겼다. 비상구로 뛰어 들어간 그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녹색 표시등만이 아무도 없는 계단을 밝히고 있었다.

차기주가 김수현을 벽에 몰아붙이고 물어뜯듯 거칠게 키스를 해왔다. 김수현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같은 알파끼리는 키스하지 않는다는 세상의 상식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지를 입은 채 서로의 하반신을 문질렀다. 김수현은 자신의 혀를 빨아들이는 차기주에게 우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개를 꺾어서 각도를 바꿨다. 차기주의 혀를 휘감으며 자신의 입속으로 끌어들였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두툼한 허벅지에 부푼 좆을 비벼댔다. 차기주의 단단한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강하게 비틀었다. 자신보다 잘난 알파에게 자신의 것을 박을 생각에 미친 듯이 흥분됐다.

게걸스럽게 키스를 하던 두 알파는 간신히 몸을 떨어트렸다. 쥐뿔만큼 남은 이성이 여기서 이 이상 해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 해요?”

차기주는 센터가 아닌 서울에 자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센터 내에 마땅한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해봐야 업무를 보는 이사실이 다였다. 거기에 소파가 있긴 했지만, 김수현과 첫 관계를 맺는데 그곳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화장실에서 만난 알파가 누구인지 이미 조사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름은 김수현, 우성 알파이자 S급 에스퍼. PL 그룹 자제. 서양미술 전공자. 에스퍼 훈련소 1등 훈련생.

수려한 외모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다. 이렇게 강인하고 아름다운 알파를 소파에 구겨놓고 안을 수는 없었다. 차기주는 잠시 마땅한 장소를 고민하다가 지금은 비어 있을 징벌방을 떠올렸다.

“옥상에 가면 징벌용 옥탑방이 있어. 거기로 갈까?”

“그래요, 그럼.”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손바닥에 땀이 고였지만 혹시나 이 손을 놓았다가 상대방이 도망가버릴까 봐 그들은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타인에게 끌릴 수가 있구나. 서로 미친 듯이 끌리는 사이 아니랄까 봐, 그들은 똑 닮은 감탄을 삼켜냈다.

차기주는 사원증을 센서에 대고 징벌방의 문을 열었다. 아직 훈련생이라 사원증이 없는 김수현은 그런 사소한 모습조차 대단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징벌방이에요?”

침대만 하나 달랑 있는 넓은 방은 그냥 섹스를 위해 만들어둔 곳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조로웠다. 김수현은 먼저 흰 시트가 깔린 매트리스에 가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양복 재킷을 벗은 차기주는 마땅히 걸어둘 곳조차 없어 바닥에 겉옷을 내려놓았다. 빳빳한 양복 재킷에 멋대로 주름이 졌다.

“너무 삭막한가.”

“아니요, 딱 좋아요. 우리가 하려는 일에 걸맞은 장소네요.”

김수현은 눈꼬리를 접은 채 싱긋 웃었다. 차기주는 유혹하듯 눈웃음을 치는 김수현에 갑자기 후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매트리스에 한쪽 무릎을 대고 올라간 그는 순식간에 김수현의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덮치는 포식자 같은 몸짓이었다.

말랑한 입술을 쪼옥 쪼옥 빨아들이며 잘생긴 애송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미쳤구나, 차기주. 이게 무슨 짓이야.

금욕적으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 겨우 두 번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는 건 천지가 개벽할 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같은 알파였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대가 다가와도 미쳤다며 밀어내야 맞았다. 그럼에도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김수현의 모든 것이 한없이 달게만 느껴졌다. 뱀이 선악과의 존재를 알렸을 때, 아담과 이브는 그게 얼마나 탐났을까.

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유혹을 집어삼켰다. 차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기주에게 있어 김수현은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진 선악과와도 같았고, 차기주는 지금 당장 김수현을 통째로 삼켜야만 했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스를 하면서 바지 버클을 풀었다. 김수현도 손을 내려 자기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들은 서로 발기한 좆을 꺼내 들며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잠시 떼어냈다.

하아. 더운 숨이 그들의 인중을 간지럽혔다.

차기주는 자신의 아래에 깔린 채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사랑스러운 알파를 내려다봤다. 그에게는 이제 단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아 있었다. 김수현과 자지 않으려면 지금 멈춰야 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그가 망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곧은 쇄골과 직각으로 꺾인 어깨를 마주한 차기주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일단 자봐요, 우리. 속궁합이 안 맞으면 그때 그만인 거죠, 뭐.”

김수현은 부러 경험이 많은 척 허세를 부렸다. 차기주는 ‘발랑 까진 애새끼’ 하고 목을 그르릉 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수현은 화난 짐승을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기주는 그 별것 아닌 손길에 굴복했다. 그가 김수현이라는 유혹을 피해낼 재간은 없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두 개 풀고 티셔츠를 벗듯 팔을 교차해 한꺼번에 벗어 던졌다.

김수현 또한 거추장스럽게 팔에 걸려 있던 와이셔츠를 완전히 벗어냈다. 바지까지 순식간에 벗어낸 그들은 서로의 성기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차기주는 얼굴만큼 단아한 김수현의 것을 보고 감탄했고, 김수현은 예쁜 얼굴과 달리 흉악한 차기주의 것을 보고 식겁했다. 역시 자신이 박아야겠다 결심하며 차기주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설마 네가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하!”

어이가 없었다. 감히 그 누가 차기주의 뒤를 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김수현의 발칙함을 봐주지 않고 덥석, 김수현의 좆을 손으로 쥐었다.

“읏.”

온갖 여유롭고 당돌한 척은 다 하더니 고작 좆이 잡힌 것만으로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좆 기둥을 잡고 부드럽게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악력에 자극받은 성기가 딱딱해지고 축 늘어져 있던 불알이 땡땡하게 차올라 동그래졌다. 그는 김수현의 혼을 쏙 빼내기 위해 혀로 젖꼭지를 핥았다.

“거, 거긴 왜 핥아요.”

“너 기분 좋으라고.”

당황한 김수현은 말을 더듬었다. 차기주는 가슴에 파묻었던 고개를 살짝 들고 눈가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어쩐지 짓궂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도로 김수현의 오른쪽 가슴에 고개를 내린 그가 쭙, 강하게 젖꼭지를 빨아들였다.

“흐아.”

김수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꿈치로 매트리스를 팡팡 쳐댔다. 차기주의 머리를 떼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허공에서 손이 어쩔 줄 모르고 왔다 갔다 했다.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리고 허리가 비틀렸다. 차기주는 예민하기 그지없는 김수현을 위해 손으로는 열심히 좆을 흔들어줬다.

“하아, 아. 그만. 으, 그만해요.”

김수현은 이대로 가면 차기주의 손에 사정해버릴 것 같았다. 어깨를 밀어내며 거리를 벌리려고 해도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몇 번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바닥에 사정해버리고야 말았다. 여유로운 척, 경험 많은 척은 다 해놓고. 차기주가 속으로 얼마나 자신을 비웃고 있을까 싶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얗고 농도 짙은 정액을 담은 손이 김수현의 가랑이 밑을 파고들었다.

“미쳤어요? 이사님이 박혀요.”

“정말? 정말 내가 박힐까? 그럼 한 번 해보고 네가 사정하지 않으면 그러자. 해보고 네가 못 느끼면 그때 내가 네 밑에 깔려줄게.”

“씨……. 약속해요.”

김수현은 분하다는 듯 차기주를 흘겨봤다. 그 불손한 눈이 얼마나 귀여운지 차기주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화가 난 김수현이 안 하겠다고 하는 걸 간신히 어르고 달래 다리를 벌려냈다.

경직된 엉덩이 근육 때문에 구멍의 주름이 꽉 조여져 있었다.

“나보고 넣으라는 건 맞지?”

“나도 노력 중이거든요.”

능숙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갓 성인이 된 스무 살짜리가 부리는 객기에 불과했다. 우습게도 그 사실이 그를 몹시 기분 좋게 했다.

차기주는 손에 담긴 정액을 내려다보다, 먼저 그곳을 풀어주기 위해 혀를 가져다 댔다. 정액만을 윤활유 삼아 풀기에는 아래가 너무 뻑뻑해 보였다. 말캉거리는 혀가 주름을 파헤치고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김수현은 침대 시트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안으로 파고든 혀가 뜨겁고 좁은 안을 넓히기 위해 내벽을 문지른다.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흐.”

차기주는 바들바들 떨리는 하얀 허벅지 사이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높은 콧대로 김수현의 불알을 건드리며 입으로는 츄웁, 츄읍 야릇한 소리를 냈다.

“아아, 미쳤어. 개, 새끼. 흐아, 진짜 돌았어.”

곱상하게 생겨선 입이 꽤 험했다. 뭐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하면서도 역시 이런 면은 고쳐줘야지 싶었다. 혀를 깔짝깔짝 움직여 내벽 주름을 자극하자 김수현의 발이 바둥거리며 매트리스를 탕 탕 쳐댔다.

혀가 잘릴 것처럼 구멍이 강하게 수축했다. 그는 혀를 뺐다가 넣었다가 하며 구멍을 침으로 흠뻑 적셨다. 실컷 구멍이 빨린 김수현은 탈진한 사람처럼 팔다리를 널브러트린 채 숨을 헐떡였다.

차기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빨아둔 구멍을 구경했다. 구멍이 저 혼자 뻐금거리며 열릴 때마다 투명한 액을 흘렸다. 차기주는 손에 모아둔 정액을 그 위에 덧발랐다. 손가락으로 주변을 긁으며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자 김수현의 허리가 아치형으로 휘었다.

“으흣, 으.”

차기주는 검지로 구멍을 천천히 쑤시기 시작했다. 이전엔 그 무엇도 받아낸 적 없는 구멍이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김수현이 자지러지며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흐읏, 윽. 아파요. 흐, 아파.”

그는 검지에 이어 중지도 구멍 안에 넣었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김수현은 아프다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이런 식이면 절대 좆을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알파와 섹스를 하려고 한 것 자체가 무리였던 거다. 물러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잔뜩 발기해 배에 달라붙은 김수현의 좆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다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착실히 자극받은 좆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 야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차기주는 얼굴을 시트에 비비며 숨을 고르는 김수현을 내려다보다, 손가락을 더 깊이 집어넣었다.

침과 정액으로 젖은 내부가 질퍽거렸고, 잔뜩 예민해진 점막이 손가락을 휘감았다. 꿀꺽,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차기주의 것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그는 김수현의 다리 한쪽을 잡아 가위처럼 벌렸다. 구멍이 오물대며 손가락을 씹어댔다.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김수현의 구멍에 문질렀다.

“씹, 죽을래요? 왜 발꿈치를 들이밀어요.”

“발꿈치 아니고 좆이거든.”

“……내가 미쳤지.”

이렇게나 좆이 큰 줄은 몰랐다. 김수현의 것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편이었지만 차기주는 성기가 아닌 세 번째 다리 수준이었다. 물론 눈으로 봤을 때도 크긴 했지만 뒤에 닿는 감각은 또 새로웠다. 이걸, 넣는다고. 수현은 눈두덩이에 팔뚝을 올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하겠어?”

그가 김수현의 다리를 놓고 물러나려는 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김수현은 비장하게 오금에 손을 걸어 삽입하기 쉬운 자세를 취했다.

“일단 넣어봐요. 해보고 판단해볼 테니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차기주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멍에 숨을 멈췄다. 꼭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눈 깜빡임이 느려졌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다이버라고 불릴 만큼 잠수를 많이 하는 직업이었다. 잠수하는 동안 몇 분이고 숨을 참는 것은 익숙했다. 그런데 김수현을 보고 있으면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숨통이 틀어막혔다. 마치 김수현이 차기주의 바다라도 되는 것처럼.

차기주는 미끄러운 구멍에 좆 기둥을 잡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으.”

눈을 가리고 있는 팔 때문에 잔뜩 찡그린 이마와 입술을 괴롭히는 하얀 이만 보일 뿐 수현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차기주는 자신과 이어지는 순간, 김수현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 팔을 치워냈다.

잔뜩 붉어진 눈가와 눈물이 가득 맺혀 반짝거리는 눈에는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커다란 귀두를 삼키기 위해 오밀조밀한 주름이 팽팽하게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점막이 흡반 기관처럼 달라붙어 차기주의 좆을 안으로 빨아들였다.

차기주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 강렬한 황홀함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김수현이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굳히자, 멈춰 있던 차기주가 돌연 붉은 천을 발견한 투우 소처럼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으윽!”

김수현은 차기주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몸이 두 동강 나버릴 것만 같았다. 짧게 자른 손톱에 긁힌 피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자잘한 상처가 수없이 생겼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며 차기주의 등을 피로 물들여갔다.

배꼽까지 파고든 좆이 내벽에 있는 불룩한 전립선을 건드린 순간 김수현의 머릿속에서 하얀 번개가 터졌다. 동시에 김수현의 좆에서 뿜어져 나온 묽은 정액이 배를 더럽혔다.

차기주가 뒤로 물러날 때마다 내벽과 꽉 맞물려 있는 점막까지 구멍 밖으로 딸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구멍이 완전히 망가져 영영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김수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나, 그 걱정은 곧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강렬한 쾌감에 의해 완전히 휘발되었다.

김수현은 한때 발이라고 착각했을 만큼 튼실한 좆을 배 속에 넣고 꼭꼭 씹어먹었다. 아아, 미칠 것 같아. 이게 뭐야.

차기주가 삽입한 채 쿠퍼액을 흘려댄 탓에 배 안이 온통 질퍽거렸다. 사정하지 않았음에도 배 속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들어 움직임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그가 피스톤질할 때마다 김수현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침을 흘렸다.

차기주의 좆에 의해 쉴 새 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구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배 속에 불길을 집어넣는 듯한 행위에 김수현은 신음했다.

“아아. 흑, 으흣. 아!”

김수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다리로 차기주의 허리를 감싼 채 끌어당겼다. 어떻게든 차기주의 좆을 더 깊게 넣으려는 듯, 다급하게 움직이는 하얀 다리는 천박해 보일 정도였다. 차기주가 콧대로 김수현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김수현은 내심 긴장했다.

자신이 오메가였으면 그에게 페로몬 샘을 깨물려 각인을 당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각인……. 각인이라.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김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걱정을 했다는 걸 차기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자신이 각인을 당하고 싶다는 것 같지 않은가.

언제 침입을 거부했냐는 듯 흐물흐물하게 풀린 구멍으로 차기주의 좆이 거침없이 나갔다가 들어서기를 반복했다. 힘 좋은 알파의 움직임에 침대가 삐거덕거리고, 김수현의 몸도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잠수를 한 듯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의 시간이 멈춘다. 김수현의 몽롱한 시야에 차기주의 얼굴이 들어왔다.

차기주는 자신을 부숴버릴 것처럼 흔들어대면서도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별로인 걸까? 흥분으로 고양되었던 기분이 차가운 눈보라에 휩쓸린 것처럼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만일 자신이 날카로운 선으로만 그림을 그린다면 그 그림에 차기주란 제목을 붙일 거다. 뾰족하고 차가운, 얼음송곳 같은 인상에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김수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기주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역시, 차기주는 자신과의 섹스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만, 좋았던 거구나. 괜스레 서운한 마음을 삼키던 그때, 차기주가 힘이 빠진 김수현의 다리를 어깨에 짊어졌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어깨에 걸쳐져 달랑달랑 흔들리는 자신의 발끝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차기주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어? 왜 저렇게 빨갛지?

뺨과 목덜미는 물론,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인 자신과 달리 서늘한 얼굴을 유지하던 차기주는 어디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 이 남자. 지금 엄청 흥분했구나. 그도 자신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서운함이 눈 녹듯 사그라졌다.

두 팔을 벌리자 그는 기꺼이 목을 내준 채 김수현에게 안겼다. 김수현은 그가 품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빨간 귀를 만져봤다. 뜨겁고 말랑거렸다.

“이사님 저랑 자는 게 많이 좋은가 봐요?”

“……응.”

“그럼 우리 종종 만나서 섹스할래요? 사정했으니까 제가 계속 깔려드릴게요.”

차기주가 김수현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의 다정함이 김수현을 착각하게 한다.

“글쎄. 너도, 나도 가이드가 있잖아. 이대로라면 서로 상처뿐인 관계가 되지 않을까.”

차기주는 마치 머나먼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남자와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김수현과 이별하려고 들었다. 어쩌면 그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이건 우발적인 사고였고 그들은 본래 생활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러나 김수현은 어째서인지 화가 났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먹고 버려진 것과 같이 비참해졌다.

“이사님, 지금 저랑 자면서 가이드 걱정하시는 거예요?”

자신이 마치 유부남을 꼬여낸 상간남이 된 기분이었다. 김수현은 기분이 확 나빠져서 그를 밀쳐냈다. 차기주가 몸을 뒤로 물렸다가 퍽, 앞으로 치고 들어왔다.

“읏.”

“난 내 가이드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런데 넌 아닐 거 아니야.”

“나도 아니거든요. 내 가이드 친누나예요.”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가 곧장 현실로 돌아왔다. 알파와 알파, 에스퍼와 에스퍼의 만남이었다.

그는 김수현과 법적으로 결혼을 허락받을 수도, 아이를 만들 수도 없었다. 친누나와 페어를 맺은 김수현과 달리, 차기주는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김수현을 불안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난 널 불행하게 만들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없더라도.”

김수현은 그의 목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차기주를 째려봤다.

“그럼 가끔 만나서 이렇게 떡이나 치며 지내요. 감정 같은 건 나누지 말고, 그냥 섹스 파트너로요. 나 이사님 좆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하여간, 어린 녀석이 왜 이렇게 말본새가 나빠.”

차기주가 검지로 김수현의 콧대를 톡톡 두드렸다. 혼내는 것치고는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이었다.

“꼰대.”

김수현이 삐진 척 고개를 돌려버리자, 작게 웃은 차기주가 김수현의 등을 감싸서 그 몸을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더욱 깊게 맞아들어갔다. 어쩐지 기분이 풀어진 김수현은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 김수현은 품의 온기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수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차기주가 아닌 누나였다. 잠들기 전만 해도 분명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왜 누나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누나?”

“수현아, 이제 괜찮아?”

“이사님은?”

김수현은 자신을 안고 있던 누나를 밀어내고 옥탑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차기주는 다행히 어디 가지 않고 구석에서 그들이 포옹하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너 불안정 파동 수치가 높아서 내가 가이딩했어. 이제 괜찮아진 것 같네.”

“응, 고마워. 그런데 나 러트니까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누나.”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억제제 먹고 왔는데도 힘드네.”

땀에 젖은 누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호흡하는 걸 보니 자신의 러트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가 발그레한 뺨에서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발정기 때는 가족끼리도 조심해야 했다.

김수현은 고개를 돌려 차기주의 표정을 뜯어봤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처져 있었다.

자신이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질투하는 주제에 러트 중인 자신의 품을 누나에게 양보했다. 연속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러트까지 와서 힘들었는데 가이딩을 받은 덕에 몸이 가뿐해졌다. 다 차기주 덕분이었다. 그가 그의 감정은 뒤로한 채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해준 덕이었다.

차기주, 이 바보 멍청이. 앞으로도 저 냉정한 인상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오해를 많이 받고, 또 손해 보며 살겠지. 오직 자신만이 그의 귀와 미세한 얼굴 근육을 보고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김수현의 시선을 따라간 김아영이 눈을 흘기며 차기주를 살벌하게 째려봤다.

“우리 수현이 손끝 하나 건드리기만 해요.”

“누가 보면 내가 범죄자인 줄 알겠군. 김아영 씨, 나 당신 상사야. 말 가려 하지.”

“범죄자 아니었어요? 납치, 감금 다 하셨잖아요. 차기주 이사님도 이만 나오시죠. 수현이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누나가 차기주 이사를 싫어할 만하다는 건 알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누나가 싫어한다는 게 괜히 서운했다.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 두 팔을 벌려서 부르자 차기주가 냉큼 침대에 올라와 자신의 품에 안겼다. 누나는 충격을 받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수현아.”

“누나, 나 사실 이사님 사랑해. 우리 사귀는 사이야.”

품에 안긴 차기주의 심장이 쿵 쿵, 크게 울려왔다. 그 진동을 느끼며 그가 자신의 말에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자가 널 납치하고 감금했다고. 조금 풀어준다고 네 편인 줄 아나 본데, 저 새끼는 사악하고 영리한 악마야. 널 속이고 망가트리고 죽게 할 사이코패스라고!”

누나가 험한 말들을 뱉어댔다. 분명 자신을 많이 아껴서 그러는 것이리라. 묵묵히 그 말을 듣던 차기주가 자기보다 작은 김수현의 품에 더욱 꼭 안기기 위해 꿈틀거리며 파고들었다. 마치 김아영에게 이것 좀 보라는 듯이. 김수현은 그런 차기주를 느끼며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너 이거 스톡홀름증후군이야.”

그에게 감금당하기 전부터 그를 사랑했다. 그보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나 회귀로 인해 자신이 그를 사랑했던 과거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누나에게 자신이 미래에 겪을 일들을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되돌아갔다니?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나.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삶을 사는 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쩌면 이 세상의 시간을 되돌린 존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제 기억의 공백이 생긴 것에도 전부 이유가 있겠지. 자신은 그 부분을 빈칸으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은 김수현이었다.

손으로 차기주의 귀를 만지작거리자 금세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2회차 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선배’도 자신을 보며 귀를 붉히곤 했었다.

혹시 두 번째 삶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도 실은 차기주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어른처럼 비합리적인 사고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들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2회차 생은 어딘가 많이 비틀리고 어긋나 있었다. 온전치 못하고 단편적인 기억들이었다. 그러니 그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 '선배'를 찾아 헤매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선배와 차기주의 공통점이 붉은 귀뿐일지라도, 자신은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며 맘 편히 사랑하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그였으므로.

“절대 안 돼, 수현아. 차기주 이사가 어떤 인간인데! 어떻게 네 입으로 저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해!”

누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한 누나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았기에, 놀란 김수현은 눈이 커졌다.

“김아영 씨, 아무리 가족이어도 남동생 연애까지 컨트롤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누나가 손톱을 세우고 차기주에게 달려들었다. 김수현은 누나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에 화를 내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할 줄 몰랐다. 강압적으로 끌려와 징벌방에서 지내긴 했다. 그렇지만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학교도 다녔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폭력도 폭언도 없었으며 단지 그와 함께 식사를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의사를 묵살하고 징벌방에서 지내게 한 건 명백한 잘못이지만, 그는 아픈 자신을 치료해줬고 누나를 불러 가이딩을 받게 해주기도 했다. 자신도 며칠 전까지 그를 원망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차기주가 덤벼드는 누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 놓으라고! 너, 내가 절대 가만 안 둬.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놈. 퉤!”

“누나!”

누나가 차기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차기주의 뺨을 타고 더러운 침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뛰쳐나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차기주가 누나의 손목을 놔줬다.

“그만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사님이 날 징벌방에 가두긴 했지만 나 여기 지내면서 전혀 답답하지 않았어. 학교도 다녔고 누나랑도 연락했잖아.”

누나는 분이 안 풀린다는 듯 씩씩거리며 긴 손톱을 세웠다. 고양이처럼 차기주를 공격하려는 기세에 김수현은 “제발” 하고 애원했다.

“수현아, 누나가 이번에는 반드시 널 지킬 거야.”

“누나, 나 괜찮아. 잘 지낸다고.”

“그래. 넌 그렇게 믿고 기다려. 누나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김아영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김수현의 손등을 쓸어주며 미소 지었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둔 핸드백을 챙기고 뾰족한 하이힐에 발을 꿰었다. 아슬아슬해 보일 정도로 높은 구두 위에 올라선 뒤꿈치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는 벽을 잡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며 문을 나섰다. 그녀가 가고 나서야 김수현은 걱정 어린 눈으로 차기주를 돌아봤다. 웃을 때면 한없이 맑기만 한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미안해요.”

“아니야. 김아영 씨가 대단히 널 사랑하나 봐. 널 그렇게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다니. 기분 좋아.”

“비꼬지 말아요.”

“비꼬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차기주는 전시회에서 김수현을 데려왔던 날, 수현에게 들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롤*로이스 고스트에 올라간 김수현은 엉덩이가 아픈지 제대로 앉지를 못했다. 그 모습에 차기주는 김수현이 전날 난잡한 섹스라도 즐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잔뜩 분위기를 잡은 채 불편한 심기로 미간을 찡그렸다. 김수현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김수현과 잤을 사람에게 미친 듯이 질투가 났다. 그래서 차창에 뿌연 김이 낄 만큼 씨근덕거렸었지.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가 김수현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증거는 너무나 명백했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어디 불편하세요?”

“그건 김수현 씨가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요?”

“김수현 씨의 개인사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지.”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엉덩이를 맞아서 앉을 때 불편해한 거예요. 얼마 전에 새벽 3시까지 친구랑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갔거든요. 설마 이상한 생각 하신 거 아니죠?”

미안했다. 방탕한 사람으로 오해해서. 그런데 그것보다도 자신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미안했다. 도대체 우리 사이가 뭐길래, 알지도 못했을 때조차 자신이 그를 지켰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였다.

전시회에서 그가 사생아라 떠들었던 갤러리들의 뒷담화가 벌처럼 귓가를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 말들을 들으며 김 회장이 제 아들을 이토록 팔아치우고 싶어 하는 이유를 깨달게 되었다. 그리고 차에 태웠을 때, 김수현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김수현이 학대받으며 살아왔다고.

차기주의 상상 속에서 김수현은 어느새 동화 속에 등장하는 불쌍한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김수현은 어둡고 더러운 다락방에 갇혀 청소하는 신데렐라가 되었고 깨진 둑에 물을 채워야 해서 우는 콩쥐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힘들고 아팠을 시간 동안 김아영이 그 곁에 함께하며 김수현을 지켜줬다는 것에 차기주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넌 모르지만 난 네 생각보다 널 훨씬 아끼거든.”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나 이제 풀어주는 거예요?”

“……메시아만 죽이고. 그땐 집에 보내줄게.”

“정말요?”

“그래. 난 널 감금 중인 게 아니라 보호 중인 거니까.”

“거짓말. 처음에는 감금이었잖아요.”

김수현은 차기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좌우로 무게 중심축을 바꾸며 춤을 추듯 움직였다. 차기주가 그를 따라 뒤뚱거리며 답했다.

“50 대 50으로 하자. 나도 너 많이 봐줬잖아. 무슨 감금당한 사람이 나가고 싶을 때마다 산책하러 나가.”

김수현은 자신이 힘들게 한 도주를 고작 ‘산책’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잡힐 때마다 아무런 책을 잡지 않았던 그를 기억하며 차기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자신이 아는 그가 맞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없어도 차기주는 차기주다.

1회차 때의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예전과 달리 좀 더 전문적으로 도주를 할 수 있겠지만, 이젠 굳이 차기주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김수현은 그의 등줄기를 손으로 쓰다듬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근육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는 엉덩이를 다섯 손가락으로 꽉 움켜잡았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갑작스레 왜 이러나 당황하면서도 은근한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엉덩이를 쭈물거리다가 포옹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김수현은 자는 동안 땀에 젖은 잠옷 상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차기주는 갑작스레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스트립쇼에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바삐 움직이는 시선은 김수현의 일자로 뻗은 쇄골과 직각으로 꺾인 어깨, 탄탄하게 올라붙은 가슴근육 사이를 방황했다. 그림만 그리는 미대생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수현의 배에는 11자 복근까지 자리 잡혀 있었다.

“이사님, 나 씻을 건데 같이 씻으실래요?”

“…….”

차기주는 김수현의 도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권투를 하다가 머리를 맞은 선수처럼 비틀거렸다.

“김수현,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하는 말이야?”

차기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수현은 그간의 기억을 통해 지금 그가 몹시도 흥분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봐 불안에 떨었던 때와 달리 여유로운 얼굴로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모르겠어요.”

김수현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앞에 있는 알파를 유혹하듯 바지를 천천히 내렸다. 브리프 또한 밑으로 잡아당겨 매끈한 성기를 자랑했다.

김수현의 손짓이 이어질수록 차기주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가 거칠게 넥타이를 당겨 벗고는 제 셔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손이 답답해 보일 정도로 김수현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가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다 뜯어버리고 어서 빨리 그를 가지고 싶었다.

억제제를 먹긴 해도 역시 러트는 러트인가 보다. 김수현은 단추를 풀고 있는 손을 도와 차기주에게서 와이셔츠를 벗겨냈다. 같은 알파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육식동물, 한마디로 짐승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강철로 이뤄진 것 같은 단단한 대흉근에 입을 맞췄다.

움찔거리는 몸의 잔떨림이 느껴졌다. 김수현은 눈을 휘며 웃었다. 이 세상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잘난 차기주 이사가 사실은 동정이란 사실을. 김수현은 이미 수없이 그의 좆을 받아낸 기억으로 능숙하게 차기주의 바지 벨트를 풀고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이로 그의 바지 지퍼를 깨문 채 천천히 내리자 차기주가 작게 신음했다.

“너…… 이딴 거 누구한테 배웠어.”

그가 질투를 느끼는 듯 제법 살벌하게 눈매를 치켜떴다. 그래봤자 자신의 털끝 한 올 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사님은 야동도 안 보세요?”

사실 이 모든 건 이미 당신과 해본 일들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혹여 그가 회귀 전을 기억하게 되어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아파할지 알기에.

“……요즘 애들은 너무 빨라.”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천장으로 젖히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김수현은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허벅지를 붙잡고 그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았다. 브리프 위로 그 흉흉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물건을 혀로 문지르자 차기주가 몸을 떨었다.

“으.”

“무슨 기대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김수현은 차기주의 신경 줄을 살살 긁어댄 주제에 이로 브리프를 내리고는 말끔하게 물러났다. 차기주는 빳빳하게 발기한 좆을 내보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냥 같이 씻자는 건데요.”

실실 웃는 미소가 얄밉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흘겨본 다음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해바라기형 샤워기 헤드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이 차기주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이곳은 샤워기조차 길게 늘어져 있지 않았다. 그 호스로 목을 졸라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수현을 이곳에 들이기로 마음먹은 그는 징벌방의 모든 걸 세심하게 꾸몄다. 칼은 절대 만질 수조차 없게 싱크대 장마다 지문 인식 장치를 달아두고, 샤워기를 바꾸고,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는 찬물 세례 아래에서 고개 숙인 채 요동치는 불안을 잠재웠다.

김수현이 제 누나 앞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줄은 몰랐다. 왜 자신은 김수현이 자신을 증오할 거라고 여겼을까. 자꾸 도망치려고 들어서? 하지만 김수현은 이미 제게 마음을 열고 먼저 키스를 해주지 않았던가.

어쩐지 그는 그 해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가 김수현에 대한 감정을 ‘오래된 미래’라는 모순적인 말로 표현했던 까닭을.

화장실에 따라 들어온 김수현이 그에게 다가왔다가 찬물을 맞고 도망쳤다.

“물을 왜 이렇게 차게 해뒀어요.”

“그냥 씻기만 할 거라기에. 이 녀석 좀 가라앉히려고.”

차기주는 덤덤하게 손으로 그의 세 번째 다리를 가리켰다. 공용 목욕탕에서 그의 것을 본 에스퍼들이 수군거렸던 것처럼 김수현도 과한 크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크다 못해 흉측한 성기를 마주하고도 김수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샤워기 수전의 방향을 바꾼 김수현이 따듯한 물 아래에서 차기주를 마주한 채 두 사람의 좆을 손에 겹쳐 쥐었다.

“설마 러트인 알파가 하는 말을 믿었어요? 순진하긴.”

김수현과 좆을 맞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피부를 혀로 핥는 것처럼 간지럽게 느껴졌다. 차기주의 귀가 붉게 타올랐다. 김수현은 바짝 몸을 붙이고 차기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고만 있지 말고 손 좀 움직여 봐요. 내 손만으로는 다 안 잡히니까.”

차기주는 김수현과 손을 겹쳐 잡았다. 위아래로 가볍게 쓸어내리는 기둥 두 개가 힘을 얻어 단단해졌다. 혈관이 울퉁불퉁 흉악하게 선 그의 것과 달리 김수현의 것은 김수현의 얼굴만큼이나 단아하게 생겼다.

알파의 좆이 이렇게나 예쁠 수 있다니. 이건 반칙이었다. 그는 김수현이 숨을 헐떡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두 개의 젖꼭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물에 젖은 채, 지그시 눈을 감은 단정한 얼굴에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김수현을 이루는 요소 중 그 무엇 하나, 차기주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 곳이 없었다.

먼저 사정한 김수현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깨와 등줄기는 물론, 허벅지까지 이어진 작은 물줄기들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김수현은 아직 빳빳하게 서 있는 차기주의 성기를 덥석 입에 물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수현은 떨어지는 물방울에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또렷하게 뜨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목구멍 깊숙이 좆을 삼키며 기도를 조이자 그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 보였다. 김수현은 입술로 얇은 성기의 표피를 긁어내리며 고개를 물렸다가 다시 단숨에 차기주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흣.”

차기주가 김수현의 머리카락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어느새 머리통을 쥐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목젖이 찔려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으나 순식간에 샤워기 물에 쓸려나가 수현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입에 거칠게 좆을 처박지 않기 위해 이를 으득 갈았다. 김수현은 그의 인내를 알기라도 한다는 듯 허벅지 뒤쪽을 두드려주며 달랬다. 그가 천천히 하반신을 움직이며 좆으로 입 안을 쑤셨다.

좁고 습한 그곳에 낙원이 있기라도 하듯 엔도르핀이 마구 솟구쳤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목구멍 너머로 좆을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이 빨리 사정하지 않아 혹 김수현이 힘들진 않을까 걱정했다.

난생처음 겪는 강렬한 감각은 다시 이 경험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힘들어서 다시 펠라를 해주지 않는 건 아닐까, 꼭 아이 같은 걱정을 했다. 그는 벽을 두 손으로 집고 고개를 숙였다. 수현에게 내리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아릿하기까지 한 사정을 했다.

길이도 길이지만 그 입에 비해 둘레도 엄청나게 두꺼운 좆을 뱉어낸 김수현은 손으로 턱관절을 매만졌다. 김수현이 손바닥에 뱉어낸 정액은 창피할 만큼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차기주는 그의 순결함이 촌스럽고 못나게 느껴져 얼른 김수현에게 입을 맞췄다. 때때로 짓궂어지는 수현이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도 그는 만족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순결이 모두 김수현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수현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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