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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2) (6/17)

선배(2)

헬기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김수현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몇 번씩이나 확인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정석훈은 은근히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제 무릎만 노려봤다.

김수현은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손으로 문질렀다. 정석훈은 무릎에 올려둔 양복바지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차기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CCTV로 봤기 때문에 지금 김수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너 왜 그렇게 멍청하냐고, 어떻게 널 가둔 알파 새끼랑 키스할 수 있냐고 마구 몰아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주제가 못됐다. 정석훈은 차기주 밑에서 김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가 보고하는 감시자였지, 김수현의 친구도 보호자도 연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정석훈은 김수현에게 있어 정말 그 무엇도 아니었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표정이 없던 김수현의 얼굴에 꽃이 피어나듯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문자를 썼다가 지우길 반복하고서야 겨우 발송했다.

차기주와 김수현의 사이가 언제까지고 나쁘길 바라는 정석훈은, 이미 차기주의 심복이 될 자격을 잃은 채였다. 주인을 배신한 개는 잡을 수 없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듯 김수현의 잘생긴 옆얼굴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매끈한 뺨에는 아직 어린 나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솜털이 보송하게 나 있었다.

그런 주제에 인중에는 수염 자국 하나 없었다. 마치 오메가처럼 말이다. 그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청년이 오메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만일 김수현이 오메가였다면 어땠을까. 자신은 목숨 걸고 차기주를 배신해서라도 그를 가지려고 들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로 김수현이 알파인 건 그에게도 김수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김수현이 알파인 이상, 정석훈은 그를 포기해야만 할 이유를 하나라도 더 늘릴 수 있었으니까. 김수현은 차기주에게서 무슨 대답을 받았는지 몰라도 붉어진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정석훈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조심스럽게 훔쳐봤다.

헬리콥터에서 나는 시끄러운 모터 소리가 정석훈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겨줬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워 담으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언제 동요했냐는 듯 차가운 눈빛이 된 그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곤 먼저 내려서 김수현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김수현은 그 손을 무시하고 혼자서 헬기에서 내렸다. 정석훈은 무안해진 손을 주먹 쥐어 얼른 등 뒤로 감췄다.

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김수현과 차기주의 문자 대화는 계속되었다. 정석훈은 그럴 거면 그냥 통화를 하지, 하며 속으로 비꼬았다. 빈정거리는 마음이 입매를 흉하게 무너트렸다. 그는 얼른 고개를 창가로 돌려서 자신의 추한 질투를 감춰보았다.

정석훈이 처음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린 건 이윤석의 그림을 본 직후였다. 거친 터치로 그려진 한국 국적의 원양어선, 그리고 배를 점령한 해적. 푸른 새벽, 검게 물들었던 바다가 막 떠오르려는 태양 빛과 뒤엉킨 그 순간, 그리고 시작된 에스퍼들의 구출 작전.

이 모든 장면이 트리거가 되어 그의 기억을 되살렸다. 어째서 그들이 세 번이나 회귀를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첫 번째 생에서 김수현은 S급 에스퍼로서 에스퍼 팀 팀장으로 부임했었다.

그때의 정석훈은 제대 당시 귀갓길에 독수리 괴수로부터 공격받지 않았던 터라 차기주의 심복이 아니었다. 그는 A급 화염 에스퍼로서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료들은 다들 그가 차기 팀장이 될 거라며 설레발을 쳤었고, 그도 은근 승진에 대한 기대를 걸었었다.

그런데 한 번도 에스퍼로서 활동한 적 없는 재벌 집 아들이 팀장직을 맡았단다. 아무리 S급 에스퍼라고 해도 보조 계열 능력자에 전투 경험도 없는 20살짜리가 에스퍼 팀 팀장직에 앉았다는 소식에 팀원들은 불만을 늘어놓았다.

“능력 무효화? 그딴 게 뭐라고. 괴수한테도 통하나? 그냥 에스퍼들 능력 무효화시키는 잔재주 아니야?”

“맞아. 우리 능력 무효화시켜서 총 들고 괴수라도 잡게 하겠다는 거야, 뭐야.”

첫 번째 생에서는 메시아라는 존재가 없었다. 더불어 메시아를 추종하는 능력자들이 모여서 만든 사이비 단체 ‘제네시스’ 또한 없었기에 김수현의 능력은 아군을 엿 먹이는 용도가 아니면 뭔 쓸모 있겠냐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같은 에스퍼가 적일 리 없는 상황에서, 김수현의 능력은 그다지 큰 메리트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부에서 그가 훈련소에서 전 과목을 A+로 수료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과한 자리에 앉힌 거다, 김수현의 집안이 PL 그룹이라는 게 없지 않아 작용한 거다, 팀원들은 쉴 새 없이 새로 올 팀장에 대해 떠들어댔다.

김수현은 지금이나 그때나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으면 빛나는 미인이었다. 우성 알파가 가지는 우월한 피지컬과 아름다운 얼굴을 본 에스퍼들은 “헤에―” 하며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퍼 팀 팀장직을 맡게 된 김수현이라고 합니다. 제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팀장직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제가 어떻게 팀장이 되었는지 이해시켜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 그럼 한번 우리 팀장님 자질을 확인해볼까나.”

195cm가 넘는 큰 키에 B급 근육 강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건들건들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김수현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근육질 능력자를 보고도 겁을 내긴커녕 덤덤하게 양복 재킷 단추를 풀었다.

“대련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약조를 해주시죠.”

“으흐흐흐. 그건 내가 도련님께 해드려야 하는 말 같은데? 대련 중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책임을 묻지 말라고.”

“제가 이기면 저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절 팀장으로 대우해주세요.”

“뭐 좋아. 대신 너도 그 잘생긴 얼굴이 죽사발 되어도 아빠 찬스 쓰지 않기다.”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열을 받았는지 김수현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살해주려고 했더니만.”

그때 우리는 저 곱상하게 생긴 애송이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박장대소를 했다.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한다며 말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깨닫고야 말았다. 진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 그들이었다는 걸.

에스퍼들에게는 대련 중 지켜야 하는 규칙이 없었다. 괴수라는, 이성이 없는 존재를 상대하는데 무슨 예의와 규칙을 차리겠는가. 그들은 대련에서 상대방이 졌다고 승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싸웠다.

등급에 따라 신체 회복 속도가 다르긴 하지만 다들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상에 대한 두려움 또한 없었다. 좋은 말로는 실전주의 대련, 나쁘게 말하면 일명 개싸움을 했다.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두 선수는 마주 보고 서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팀장과의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동료들은 그들을 둥글게 둘러쌌다. 김수현이 대련을 시작하자마자 뻗을 거라며 팀원들이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난 1분 만에 진다는 데에 건다.”

“야, 아무리 그래도 S급이라잖아.”

“그럼 뭐 해. 재생 능력도 없고 일반인이랑 완전 스펙이 똑같다던데?”

“크흐흐흐. 혹시 그거 아니냐? 베개 영업. 존나 꼴리게 생겼잖아.”

“씹, 미친. 쟤가 뭐가 아쉬워서.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알파 새낀데. 그리고 재벌이 그러고 놀겠냐.”

“그럼 재벌이 왜 센터에 기어와서 팀장을 하겠대. 다들 기부금 내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던데.”

“헐. 듣고 보니 그러네. 쟤 왜 센터 왔대?”

“뭐긴 뭐야. 센터 이사장이라도 해서 나라를 꿀꺽 먹고 싶나 보지. 이야, 저거 야망 있는 새끼네.”

대통령이 존재하긴 했으나 차기주 이사 앞에서는 설설 기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센터의 수장이 된다는 건 이 나라를 갖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전 세계 정상들을 만나 그들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김수현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일한 S급으로 알려진 차기주 이사는 그렇게 세계의 독재자로 지내왔다. 그러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차기주와 같은 등급인 김수현이 고작 에스퍼 팀 팀장직을 맡는다는 건 매우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가 일반인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졌고, 공격이 아닌 ‘능력 무효화’라는 특수 능력을 가진 탓에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임을 알 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장되게 김수현을 무시하며 적대했다. 그를 통해 자신들이 차기주의 사람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난 저 얼굴이면 알파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김수현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가 추잡스러운 말을 지껄였다.

“준비. Go!”

가운데 서 있던 심판이 뒤로 물러났다. B급 에스퍼가 두 팔을 뻗어 김수현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수현이 옆으로 살짝 몸을 꺾어, 되레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오른팔을 잡고 몸을 회전시켜 B급 에스퍼의 등 뒤로 움직였다.

팔이 뒤로 꺾인 B급 에스퍼가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

“뭐야, 저 새끼. 왜 이렇게 쉽게 당해.”

팀원들은 예상과 달리 맥을 못 추는 동료를 욕했다. 김수현은 B급 에스퍼를 바닥에 넘어트리고 등 뒤에 올라탔다.

“으아아아.”

그러곤 그 팔을 완전히 뽑아버렸다. 오른팔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된 에스퍼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한 에스퍼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너무 쉽네. 고작 이딴 실력으로 나한테 도전한 거야?”

“으으, 씨팔. 너 죽었어.”

밑에 깔린 B급 에스퍼가 일어나려고 하자 김수현이 그의 머리통을 잡고 바닥에 쾅, 쾅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너희들 능력이 아무리 잘나봤자 나한테는 안 돼. 난 에스퍼들의 천적이거든.”

“큽, 이……게 능력 무효화의 힘인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되자 그는 김수현에게 꼼짝도 못했다. 김수현이 양복 재킷을 들춰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가 정확하게 뒤통수에 닿았다.

“이제 주제 파악이 좀 돼?”

“으, 졌습니다.”

김수현은 B급 에스퍼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등 뒤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졌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 길길이 날뛰어야 할 에스퍼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김수현을 올려다봤다. 정석훈은 그런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역시 S급은 S급이네’ 하고 말을 바꿨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에스퍼 팀 팀장님은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 뒤 당당히 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센터에 소속된 에스퍼 팀 팀원들은 왜 차기주 이사가 김수현을 팀장으로 앉혔는지 알 수 있었다. 에스퍼들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소집령을 받아 대회의실에 모였는데, 어두컴컴한 실내는 커다란 스크린에 맺힌 빔프로젝터 불빛만이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김수현은 발표자로서 모두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에스퍼 팀 팀장 김수현입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에스퍼 조폭 소탕’입니다. 센터는 갈수록 늘어나는 일반인들에 대한 에스퍼들의 범죄를 단속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른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김수현이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바꿨다. 센터 소속이 아닌 미등록 에스퍼들이 그 막강한 힘을 이용해 저지른 강력 범죄에 대한 그래프가 나왔다. 척 봐도 그 수가 갈수록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에스퍼들은 평범한 교도소에 가둘 수 없습니다. 그들의 능력 앞에선 그 어떠한 콘크리트와 철창도 무용지물이니까요. 그런데 유일하게 미국 오클라호마주 교도소만이 그들을 가둘 수 있습니다. 오클라호마주 땅에서 에스퍼의 능력을 무효화하는 특수 자기장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김수현은 또다시 화면을 바꿨다. 에스퍼들이 모여서 만든 범죄 조직도가 나왔다. 가장 규모가 큰 흑사회와 백사회의 보스 및 간부들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앞으로 우리는 흑사회와 백사회 조직원을 모조리 잡아 오클라호마주 교도소에 처넣을 겁니다. 그들의 능력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제 공이 무척 클 것 같으니, 너희들은 그냥 내가 차려준 밥상에 수저만 올리세요. 아시겠습니까.”

김수현은 자기를 무시했던 팀원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다들 김수현이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을 줄 몰랐기에 헛기침하며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차기주가 “잘 들었습니다, 김 팀장. 팀원들과의 불화는 적당히 해결하세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기주가 대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에스퍼들은 전과 달리 절도 있는 동작으로 김수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젠 그를 팀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거다.

정석훈은 김수현을 보며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의 팀장님이 되었다.

* * *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티셔츠가 흠뻑 젖어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130kg이 넘는 군장을 등에 짊어지고 김수현은 트랙을 뛰었다. 그는 손에 소총을 든 채 훅훅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에스퍼들의 능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그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인간 같지 않은 에스퍼들 사이에서 그들과 어울려 임무를 수행하려면 철인이 되어야 했다. 딱딱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군화 안에서 발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트랙에 군화 밑바닥이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달리는 속도가 현격히 줄어든다. 김수현은 손에 찬 시계로 심박수를 확인했다. 180. 억울하다.

D급 에스퍼도 고작 이런 훈련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지 않을 터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김수현은 결국 열 바퀴를 채우고 나서야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군장을 내려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정석훈은 수건과 시원한 생수병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이거 좀 드세요.”

“고마워, 석훈 씨.”

김수현은 일어날 기운도 없다는 듯 대답만 하고 손을 뻗지 못했다. 정석훈은 그의 위에 서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줬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물을 드려도 될까요? 입 벌려주세요.”

“그래. 나 지금 힘들어서 꼼짝도 못하겠으니까.”

김수현이 입을 벌렸다. 정석훈은 생수병 뚜껑을 따고 그의 입에 물을 부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마시느라 목젖이 빠르게 움직였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김수현의 턱과 몸이 온통 젖어들었다. 정석훈은 얼른 수건으로 그의 턱을 닦아줬다.

“하아, 이제 살겠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정석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쨌든 S급 에스퍼이고 집안 또한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 집이었다. 그가 이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에스퍼 팀 팀장 자리는 그의 것이었다.

“고작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지.”

정석훈은 그의 노력이 과하다고 했건만 김수현은 되레 자신의 노력이 모자라다고 답했다. 정석훈이 보기에, 김수현은 에스퍼 팀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존재였다. 그럼에도 단지 능력이 환영받지 못하는 특수계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김수현이 트랙에서 일어나 잠시 내려놓았던 군장을 도로 등에 짊어졌다. 그가 트랙을 떠나고 나서도 정석훈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트랙에 사람 모양으로 자국이 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 그 모습을 찍었다. 에스퍼들 중 그 누구도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정석훈은 그런 김수현이 신기했다.

타고난 신체 능력과 등급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센터에서 받는 훈련은 괴수를 처치하다가 죽지 않기 위한 기술을 익히는 것일 뿐, 결코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김수현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센터에서 사격장은 공격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가이드들이나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에스퍼 팀 팀장이 나타났다. 가이드들은 김수현을 신기해하며 쳐다봤다. 김수현은 따가운 시선들을 무시한 채 자리를 잡고 본인 소유의 K5 권총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핸드폰으로 타이머 어플을 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김수현은 빠르게 권총을 분해했다가 12발 복열 탄창을 채워 약실에 한 발 장전했다. 그가 실탄을 채운 권총을 다시 잡기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사격의 기본 자세인 위버스탠스 자세와 이등변삼각형 자세를 차례대로 빠르게 갖추었다. 그의 빠르고 정확한 동작에 가이드들은 연신 감탄을 뱉었다.

자세를 잡은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멈췄다. 탕, 탕, 탕, 탕, 탕, 탕. 연속으로 6발의 총알이 과녁을 맞혔다. 10점, 9점, 10점. 10점, 9점. 10점. 엄청난 사격 실력이었다.

훈련소에서 전 과목을 A+ 받았다면서? 가이드들은 김수현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소곤거렸다.

김수현은 주변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가이드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훈련을 이어나갔다. 에스퍼임에도 아무런 공격 능력이 없는 그에게는 총이 제2의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면 흑사회와 백사회의 에스퍼들뿐만 아니라 센터의 에스퍼들도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팀원들 또한 총을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처럼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총기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김수현, 자신부터가 완벽해야 했다. 그래야 설득력이 생길 테니까. 김수현은 그렇게 한참을 총기 훈련에 몰두했다.

* * *

맨손으로 5m에 육박하는 클라이밍 벽을 오른 에스퍼들은 정상을 찍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럼에도 다들 아무런 부상 없이 낄낄거리는 괴물 같은 면모를 보였다. 김수현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관심을 모았다.

“다들 주목. 혹시 이 중에서 사격 훈련을 받은 사람 있나?”

팀장의 물음에 팀원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면 적들은 물론 아군 또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적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우리 또한 총을 가지고 대적해야 한다.”

“아, 진짜. 그냥 능력 사용해서 맞다이 뜨면 되는 거 아닙니까. 웬 총질입니까.”

에스퍼들은 그들의 능력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총은 공격 능력이 없고 신체 또한 강인하지 못한 가이드나 사용하는 거라는 인식이 강했다.

“도시 안에서 능력을 사용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백사회와 흑사회에 소속된 에스퍼 수만 150명, 너희까지 하면 에스퍼들이 대체 몇 명이지? 그들과 너희가 함께 능력을 사용하면 서울이 남아날 것 같나?”

“…….”

“그럼 다들 이해한 걸로 알고. 사격장으로 이동한다. 실시!”

팀원들은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정석훈은 팀장의 명령을 군말 없이 따랐다. 사격장에 도착한 김수현이 팀원들에게 귀마개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에스퍼들은 이까짓 사격 따위 쏘기만 하면 10점이라면서 숫자가 써진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사격 따위 우습다고 여기던 에스퍼들 사이에서 이상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당연했다. 김수현이 무효화 능력을 사용해 모두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알았나? 너희들이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김수현이 비어 있는 자리에 섰다. 그러곤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검은 과녁에 총알이 쏟아졌다. 표적지 안에 있는 10점과 9점 원형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탄착점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는 완벽한 사격이었다.

“봤으면 빨리빨리 연습해야 할 거 아니야, 이것들아!”

새파랗게 어린 팀장님이었지만 김수현의 유능함에 팀원들은 차마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의 앞에 서면 모든 팀원들의 능력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어느새 팀원들에게서는 김수현에 대한 적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석훈은 갑자기 분위기가 변한 걸 느꼈다.

김수현을 힐끔거리는 에스퍼들은 가이드 앞에서처럼 가식적인 모습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정석훈 또한 이상하게 김수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동시에 몸이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가볍고 힘이 솟구쳤다.

왜 이러지? 이상함을 느낀 정석훈은 손목에 차고 있는 파동 측정 시계를 확인했다. 맙소사, 불안정 파동 수치가 0이라고? 설마 아직 다들 눈치채지 못한 건가? 아니, 애초에 이게 말이 되나? 그는 시계를 보고 있는 동료가 있는지 살폈으나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김수현은 단순히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에스퍼의 파동을 억제하면서 그를 통해 불안정 파동을 리셋하는, 일종의 가이딩 역할도 하는 듯했다. 눈치가 없는 팀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도 감지하지 못했으면서 사격 훈련을 끝내고 식당을 향하는 내내 김수현 이야기를 했다.

“우리 팀장님 너무 잘생기지 않냐?”

“맞아.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고 집에 돈도 많고. 아주 일등 신랑감이지. 누가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부럽다. 부러워.”

“같은 알파는 역시 안 되겠지?”

“야, 넘볼 분을 넘봐. 네가 되면 나도 되게?”

“이게 미쳤나. 팀장님이 왜 너를 만나.”

“씨발, 죽을래? 날 왜 안 만나.”

싫어할 때는 언제고 다들 뭔가에 홀린 듯 김수현을 찬양하다가 심지어는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댔다. 정석훈은 무효화 능력을 통한 가이딩은 평범한 가이딩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중독 증세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수현은 갑자기 싸움이 붙은 에스퍼들에게 다가갔다. 멱살을 잡고 싸우던 이들이 순식간에 순한 양처럼 돌변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곤 꼭 소개팅을 나온 사람처럼 수줍은 미소로 김수현을 바라봤다.

“오셨어요?”

“뭣들 하는 거야. 왜 싸우고 지랄이야.”

“팀장님, 그런 험한 말씀 마세요. 저 무서워요.”

목숨줄을 쥐고 있는 가이드에게 에스퍼들은 본능적으로 약한 척과 착한 척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같은 에스퍼인 김수현에게 그러고 있었다. 김수현은 눈썹을 찡그리고 징그럽다는 듯 몸서리쳤다.

“이게 미쳤나. 밥도 먹기 전에 역겹게 무슨 짓이야. 입 닥치고 아가리에 밥이나 처넣어.”

김수현이 쌩하니 식판을 챙겨서 가버렸다. 욕을 실컷 들은 당사자들은 애틋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 팀장님한테 욕 들어서 나 오래 살 것 같아.”

“좋겠다. 나도 팀장님한테 욕 듣고 싶다.”

정석훈은 집단 최면에 빠진 것 같은 동료들과 달리 자신은 제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아니었다. 그 또한 가이딩 부작용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에스퍼에 불과했다.

* * *

에스퍼 조폭 소탕 작전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대통령은 김수현 팀장의 공로를 크게 사서 무궁화대훈장을 내리기로 했다. 국가 원수급에게만 수여되는 훈장을 김수현이 받자 사람들은 차기주 이사가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괜한’ 걱정이었지만.

행사가 시작하기 전, 차기주 이사는 직접 김수현의 와이셔츠 깃을 정리해주고 양복 어깨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줬다. 김수현은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제 나이에 맞게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차기주 이사 또한 평소와 달리 몹시 부드러운 표정이었는데, 그의 눈빛에는 김수현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와, 웬일. 둘이 어떻게 저리 사이가 좋냐.”

“그러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정석훈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괴롭혔다. 김수현이 차기주와 잠시 귓속말을 했다. 대답을 들은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어딜 가는 걸까. 이제 곧 대통령께서 오실 시간인데.

차기주가 주위를 살피고는 조금 늦게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정석훈은 관람석에서 일어나 몰래 차기주의 뒤를 따랐다.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러 가는 듯했다. 괜히 따라 나왔네, 하며 뒤돌려는 순간 화장실 문이 안에서 딸깍 잠겼다.

* * *

정석훈은 숨을 죽이고 멈춰 섰다. 기척을 보니 김수현도 그 안에 있는 듯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차기주가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그는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지나가도 시끄럽다며 온갖 짜증을 내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김수현에게 얼마나 정신이 팔렸으면 미행을 몰라본 걸까.

“형, 어떡해. 나 너무 떨려요.”

“떨릴 게 뭐 있어. 네가 잘해서 받는 훈장인데. 이젠 김 회장도 너한테 쓸데없이 관여하진 못하겠지. 감히 누가 무궁화대훈장을 받은 영웅을 건드려.”

안에서 옷끼리 스치는 바스락거림이 들렸다. 정석훈은 머릿속으로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 포옹하고 있을까? 아니면 서로의 바지를 내리고 좆이라도 비벼대는 걸까.

정석훈은 실수로라도 알파 페로몬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입술을 깨문 채 화장실 문을 노려봤다.

“형, 나 잘했으니까 칭찬해주세요.”

“잘했어, 수현아. 상으로 뭐 줄까.”

김수현은 차기주의 어깨에 두 팔을 걸며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키스.”

혀와 혀가 섞이고, 상대방의 침을 삼켜대는 키스 소리가 그렇게 클 리 없건만 정석훈의 귀에는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어쩌면 그들이 농밀하게 입술을 쩝쩝대는 건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소리일 수도 있었다.

그를 지금 충격으로 몰아넣은 건 김수현과 차기주가 사귀는 사이라는 거였다. 정석훈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다.

“으음.”

키스의 여운으로 김수현이 야한 신음을 냈다.

“행사 끝나고 우리 아지트에 가서 섹스하자.”

차기주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김수현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그의 코끝을 검지로 톡 톡 두드렸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냥 지금 해버리고 싶다.”

“영웅님, 고정하세요. 세수하고 나와. 먼저 가 있을게.”

“알았어요.”

김수현은 찬물로 세수해서 열기를 식혔다. 차기주는 아무리 흥분해도 귀만 빨개져서 다들 몰라보는 반면, 김수현은 얼굴에 다 티가 났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키스만 천 번은 넘게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차기주의 귀 끝은 자신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빨개졌다. 그게 사랑의 증표라도 되는 양 김수현은 자신의 하얀 귀를 괜히 손으로 문질러봤다.

차기주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바닥에 주저앉은 정석훈 앞에 섰다. 역시 몰랐던 게 아니었다. 그는 정석훈을 경계하기 위해 모른 척 내버려둔 거였다.

“넘볼 걸 넘봐. 감히 네까짓 게 누굴 탐내.”

차기주가 정석훈의 허벅지를 지그시 밟고 지나갔다. 정석훈은 먼지가 하얗게 발자국 모양으로 찍힌 검은 양복바지를 손으로 털어냈다. 김수현이 알파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정석훈은 김수현이 알파와 섹스를 할 수 있는 알파라는 걸 알아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차기주를 제외하면 오로지 자신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김수현의 비밀을 아는 조금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 * *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안에서 한국 어선이 납치되었다.

고작 일주일 전에 한국 어선이 납치당해 한 명당 몸값으로 100억을 지불하고 인질을 돌려받은 참이었다. 무려 1,500억이나 되는 국비가 소모된 사건이었기에 여론은 위험 지역으로 어업을 떠난 선원들을 맹비난했다.

그렇다고 국가가 국민을 버릴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해적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 가 있던 대한민국 해군은 헬기를 탑재할 수 있는 구축함을 타고 해상 전투를 나섰다.

푸른빛 바다는 담요를 펼쳐놓은 듯 잠잠했으나 물살을 가르는 배에 마치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것처럼 물보라를 일으켰다. 갑판 위로 불어닥친 바닷바람이 해군들의 얼굴을 때리고 옷을 세게 잡아당겼다.

해수면에 반사된 햇빛으로 인해 피부가 까맣게 탄 해군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최대 속도 33.0knots 엔진이 긴급한 상황을 알기라도 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레이더에 한국 어선이 잡혔다.

구축함은 속도를 늦췄다. 제독은 망원경으로 배의 상황을 살폈다. 해적들이 2인 1조로 돌아다니면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보이지 않았다.

1차 대변혁 이전이었으면 좋았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해적 정원이 에스퍼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제독은 곧장 조타실로 돌아가 한국에 있는 센터에 연락을 넣었다.

* * *

에스퍼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김수현 팀장이 활약할 기회였다. 김수현과 그의 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한국 해군은 해적과 대치 상황을 유지하며 시간을 끌어주기로 했다.

해적들은 주포 장전 시간이 10초밖에 되지 않는 최신 구축함이 쏟아내는 위협 사격에 겁을 먹었는지 하얀 깃발을 흔들었다.

제독은 사격을 중지시켰다.

“에스퍼들이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제독.”

“우리가 다 해치웠는데 그 공을 센터 쪽에 넘길 순 없지. 빨리 한국 어선에 접근해서 인질을 구출하자고.”

“하지만 저들은 에스퍼들이지 않습니까.”

“내 명령을 못 들었나, 대위.”

대위는 제독의 명령에 경례를 올렸다. 구축함에서 방탄 막이 설치된 군용 보트가 내려갔다. 해군들은 검은 보트를 타고 한국 어선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이 접근하자 배 위에 있던 해적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바다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라 군용 보트를 뒤집었다. 해군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해적들이 낄낄 비웃으며 전기를 흘려보냈다. 10명이나 되는 해군들이 일제히 전기에 감전되어 세상을 떠났다.

해적들은 한국의 구축함까지 빼앗기 위해 귀찮은 해군들을 안심시키고 한꺼번에 처리한 것이었다. 제독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하얗게 질린 채 조타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다급하게 센터와 연결된 통신기에 대고 외쳤다.

“도대체 에스퍼들은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차기주는 다급한 제독의 목소리에 에스퍼 팀 팀장의 위치를 GPS로 확인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텔레포트 위치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3분 뒤에 도착합니다.

“그것보다 빨리 못 옵니까? 지금 여긴 한시가 급하다고요!”

왜요. 위협 사격만 하고 시간 끌라고 했는데 혹시 괜한 짓을 해서 해적들 심기라도 건드렸습니까.

제독은 뜨끔 찔려서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곤 대위에게 기관포를 한국 어선에 조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한국 선원들 구출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러다가 우리가 다 죽게 생겼어.”

겁에 질린 제독은 에스퍼 해적들이 탄 어선이 구축함을 향해 다가오는 환상을 봤다.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왜 하필 내가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끊겼던 통신구에서 소리가 났다. 대위는 공황 상태에 빠진 제독을 대신해 통신구를 받았다.

―에스퍼 팀 팀장 김수현입니다. 지금부터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은 제가 전임합니다. 구축함은 지금부터 전속력을 다해 도주합니다. 아시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위는 “전원 위치로”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키를 잡은 조타사가 빠르게 구축함을 움직였다.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는 해적들은 바다 위에서 무적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려 도망치는 해군의 걱정과 달리 해적들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능력을 사용한 두 명의 에스퍼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아아아.”

“으아아아.”

해적 대장은 목에 핏줄이 곤두선 채 피를 토하는 부하들을 보다가 총을 들어 그들을 쏴 죽여버렸다. 아무리 에스퍼라고 해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몇 발씩이나 총알을 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특히 폭주를 앞둔 상황에서의 에스퍼는 그 어느 때보다 나약해졌다. 가이드가 없는 그들이 폭주하면 배 위에 있는 모두가 다 죽었다. 인질이건 해적이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는 순순히 돈을 주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한 분노로 인질을 모아둔 곳으로 향했다.

“어떤 새끼가 외부에 연락했어. 선장 나와.”

열받은 해적 대장은 망설임 없이 선장의 머리통에 총알을 발사했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머리가 반쯤 뭉개진 시신이 바닥으로 던져지듯 넘어지고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가 점점 넓게 번져갔다.

인질들은 겁에 질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해적들과 눈이 마주칠세라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너희 몸값은 2,000만 달러야. 정부가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너희의 인체 조직을 전부 도려내 판매할 거다.”

해적 대장은 꼬리에 불붙은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해군들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저런 구축함을 가지고도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일반인은 에스퍼인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역시 자신들은 위대한 존재로 사람 위에 있는 절대 신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동료 중 파동 에너지가 안정화되어 있는 에스퍼가 몇이나 되는지 확인했다. 씨발, 단 한 명이라니.

등급 높은 가이드를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이번 약탈만 끝나면 육지로 황급히 돌아가 가이드를 사야 했다.

해적 대장은 동료 에스퍼들에게 무기를 챙기라고 했다. 구축함을 빼앗아 전쟁 국가에 팔아치우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전속 가이드를 한 명쯤 사서 데리고 살 수 있으리라.

그는 약탈하기 위해 가이드를 만나는지, 가이드를 만나기 위해 약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 순진한 어부였던 해적 대장은 자신을 보며 발발 떠는 한국인 선원들을 향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구축함을 따라간다.”

“대장, 방금 선장이 죽어서 배를 못 움직입니다.”

“젠장. 누구 배 몰 수 있는 녀석 없어?”

한국인 인질들은 그들에게 쏘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거대한 원양어선은 해적들이 타고 다니는 소형 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작법이 복잡했다. 제대로 배움을 받은 적 없는 해적들은 배를 움직이기 위해 이것저것 눌렀다.

일등 항해사는 그 틈을 타 몰래 배의 시동을 꺼버렸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해적 대장이 인질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하필 잡힌 것이 배의 시동을 끈, 그 일등 항해사여서 그는 자신이 한 짓이 발각된 건가 싶어 식은땀을 흘렸다. 덤덤한 척하지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들이 아무거나 눌러서 배를 고장 내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해적과 인질은 배 한가운데에 갇힌 채 다시 한국 정부가 협상하러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날이 저물어간다. 잔잔한 바다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 *

한편 에스퍼 팀은 새벽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두운 밤을 틈타 한국 어선에 접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 어두우면 적을 공격하고 인질을 구해낼 수 없었다. 승선 시간을 잘 맞추는 게 임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작은 보트에서 김수현은 어쩌면 제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밤에 차기주에게 연락했다.

처음 만난 순간, 그가 첫눈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찾아왔다. 저 알파를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섹스 파트너를 하자고 제안했다.

차기주는 잠자리에선 정열적이고 낮에는 다정한 이상적인 알파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에게는 목숨줄을 쥐고 있는 가이드가 있다는 거였다.

“선배, 나예요.”

선배는 바깥에서 전화 통화를 할 때 누구와 통화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정한 차기주 별칭이었다. 같은 에스퍼에다가 같은 알파라는 형질의 그들은 떳떳하게 만날 수 없었다.

그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김수현이 어리석게도 섹스 파트너가 연인과 동급의 관계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차기주 옆에 붙어 있는 진설해 때문에, 그들은 매일같이 싸우기 일쑤였다. 수현은 짝사랑하는 상대를 원수처럼 상처 주기 바빴다. 정말 그가 자신의 마음을 모를 수는 없다고, 그도 자신을 사랑하기에 계속 자신과 섹스하는 거라며 마치 알파와 각인한 오메가처럼 굴었다.

차기주는 왜인지 진설해의 가이딩만을 고집했다. 자신은 그들의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의심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그를 더럽다고 매도했다. 그때마다 차기주는 ‘정말 가이딩만 받아. 아무런 감정 없다고’라며 김수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가 어떤 말을 했어야 우리 사이는 괜찮았을까. 그가 뭐라고 말했든지 자신은 분명 똑같이 날뛰었을 거다. 가이딩이 없으면 에스퍼가 위험해진다는 걸 뻔히 알면서. 자신은 그가 폭주해 위험에 처하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사랑에 눈먼 김수현은 차기주의 그 무엇도 공유할 수 없는 치졸하고 속 좁은 남자였다. 그래서 매번 가이딩을 받은 차기주를 쫓아가 주먹을 날리고 욕을 하고 발길질하기 바빴다.

“용서할 수가 없어. 더러워. 더럽다고!”

“하, 수현아. 그럼 너는 가이딩 안 받아? 넌 친누나한테 받잖아.”

“난 누나랑 포옹만 한다고요. 하지만 형은 아니잖아요.”

“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포옹만 해.”

“씨발, 개새끼야. 그 입 닥쳐. 그 오메가랑 키스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잤지? 잤잖아. 너희 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차기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김수현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여유가 사라졌고, 심지어는 불면에 시달렸다. 차기주가 공식적인 자리에 설 때면 매칭 가이드로서 그 옆자리를 차지한 진설해가 죽도록 미웠다. 예전이면 코웃음 치고 넘겼을 일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기주에게 수도 없이 문자를 보내며 수현은 점점 무너져내렸다.

그렇다. 김수현은 더 이상 차기주에게 한낱 섹스 파트너로 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했다. 연인이 되어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형이 날 사랑하는 걸 알아요. 이제 그만 나 좀 받아줘요, 네?”

“아니,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섹스 파트너 하는 게 싫은 거면 우리 그만 만나자.”

“씨발, 나쁜 새끼.”

그만둘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로지 몸만 섞는 관계라도 김수현은 그를 원했다. 또한 수현이 고백한 후에도 그들의 관계는 뭐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차기주는 여전히 김수현에게 빌어먹게도 다정했다.

* * *

진설해는 김수현이 차기주를 짝사랑한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차기주 이사님이 얼마나 부드럽게 자길 안아주는지 모른다며, 혹시 팀장님에게도 그러냐고 도발하는 말에 김수현의 인내심과 정신 줄이 너덜너덜해졌다. 차기주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믿으려고 해도, 자신은 그에게 있어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신뢰를 불신으로 물들였다.

김수현의 머릿속에서 차기주는 자기 가이드를 두고도 색욕이 넘쳐 자신과 자는 파렴치한 바람둥이로 변질되어 있었다.

사고는 언제나 전조 증상을 보였다. 그들의 위태로운 관계를 눈치채기라도 하듯 운명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김수현의 아버지는 김수현에게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누나에게 계속 가이딩을 받는 게 세상눈에 불결하고 혐오스러워 보인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너희가 남매로 지내도 결국 남이다. 너 때문에 내 딸 혼삿길 망칠 일 있냐? 어서 결혼해서 그동안 키워준 은혜에 보답해라.”

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아버지는 김수현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비록 자기 호적에 넣고 아들이라고 칭했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선택한 결혼 상대는 GU 그룹의 오메가 회장이었다. 어머니뻘에 가까운 상대였으나 그녀는 김수현에 대한 탐욕을 숨기지 않고 아버지에게 직접 딜을 걸었다. 그렇게 김수현은 강제로 러트가 오는 주사를 맞고 방에 갇혔다.

늙은 오메가가 그 방에 들어왔고 둘은 사람이 아닌 발정 난 짐승 새끼라도 된 것처럼 붙어먹었다. 아무리 꺾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도 그의 아버지는 그가 견딜 수 있는 수위를 훨씬 넘긴 폭력을 휘둘렀다.

차기주는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아버지와 늙은 오메가를 죽이겠다고 했다. 자신은 차기주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고, 그건 자신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그렇게 증오하는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바보처럼 거짓을 입에 담았다.

“억지로 한 거 아니에요.”

“뭐라고? 너 지금 그 말 제정신으로 하는 거야? 김수현, 정신 차리고 말해.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나 나이 많은 사람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형도 나이 많아서 좋아한 거잖아요. 아버지한테 사랑 못 받고 자라서 늙은 사람만 보면 사랑받고 싶더라고요. 정말 몰랐다고요? 섹파면 섹파답게 굴어요.”

그가 진짜 아버지를 죽일까 봐 겁났다. 그래서 그랬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는데 또 한 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줘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에스퍼가 바닥에 무너져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김수현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곧 그들의 이별을 의미했음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 힘들고 아파도 홀로 참아온 습관 탓이었다. 자신은 항상 강해져야 했다.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아무도 없기에 언제나 숨어서 울곤 했다. 사실 아주 힘들고 아팠다고. 입 밖으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차기주는 그런 자신을 유일하게 보듬어주고, 또 안아주는 연고이자 반창고 같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자신은 언제나 상처를 주기만 했다. 우리의 관계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우린 더 이상 비밀스럽게 만나 섹스하지 않았고 가끔 센터 복도에서 마주치면 각자 단순히 상사와 부하로서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이 되었다. 그리고 남이 된 김수현에게도 차기주는 다정했다.

―수현아, 너무 겁먹지 마. 혹시 위험하면 내가 텔레포트로 갈게.

그가 정말 자신을 구하러 와줄까 궁금했다. 이미 제 손으로 관계를 다 망쳐놓은 주제에 섹스 파트너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진 않을까 기대됐다. 사랑을 하는 자신에겐 일말의 자존심도, 양심도 없었다.

―작전 시작할 때 나한테 꼭 말하고.

차기주는 자신이 미덥지 않아서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김수현이 자기와 같이 공격형 물리계 에스퍼였어도 똑같이 걱정해줬을 거다. 수현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희미하게 웃는 김수현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으나 동료들은 그의 눈에 맺힌 반짝임이 별과 달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조명을 달아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이 검은 바다를 따라 반짝였다. 하늘에 뜬 별은 저마다 자리가 있고 이름이 있다는데 김수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별에도 이름이 있겠지.

아마 차기주에게 물어보면 대수롭지 않게 ‘이건 백조자리야. 이건 천칭자리야’ 하며 알려줄지도 모르겠다. 차기주는 의외로 로맨티시스트니 말이다.

당신은 혹시 진설해에게도 똑같이 다정한 키스를 하며 별을 보여줬을까. 섹스하고 난 따뜻한 몸으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서로의 맨발을 비비며 장난치고?

우리의 추억을 다른 사람과의 기억으로 덮어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진설해가 몰랐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음식도 그녀와는 먹지 않았으면 싶다.

차기주와 온종일 휴일을 보내다가 소파에서 뒹굴며 영화를 봤던 날이 떠오른다.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로마의 휴일』을 틀어놓고 스파게티를 한 접시에 담아 먹다가 같은 면을 물어 키스했었지. 한참을 같이 웃고 떠들고……. 그날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공주가 하루의 일탈을 마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도 언젠가 끝을 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끝을 자신은 아픔만으로 매듭지어 버렸다.

“이만 끊을게요. 다른 팀원들도 통신구 사용해야 해서.”

―그래, 다치지 말고.

우리는 전혀 싸운 적 없다는 듯, 또 사랑한 적 없다는 듯 아주 친한 형 동생 사이처럼 대화를 끝냈다.

수화기 너머에서 더 이상 차기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수현은 팀원들이 가족과 연인,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통신구를 넘겼다. 팀원들은 ‘선배’가 누구냐며, 혹시 사귀는 사이냐고 물었지만, 자신은 언제나처럼 대답해주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통신구를 받은 팀원이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그다음 사람은 임신 중인 자기 가이드에게 했고, 아빠가 뭐 하는지 아직 모르는 3살짜리 딸과 통화하는 녀석도 있었다.

다들 일반인의 몸으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적지 않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작전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일반인의 몸으로 참여하는 작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되는 거였다.

김수현은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글을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작은 종이를 찾아내 무언가를 끼적이며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달빛은 적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얄미울 정도로 밝았다.

그들은 계속 달빛이 어두워지길 바라며 대기했다. 급격하게 내려간 수온으로 인해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두 팔을 교차해 어깨를 감쌌다. 이 정도 추위엔 끄떡없는 다른 팀원들과 달리 약해빠진 김수현만 덜덜 떨었다.

“팀장님, 괜찮으시면 제가 체온을 나눠드려도 되겠습니까.”

김수현은 이를 탁탁 부딪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작전을 돌입하기도 전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

정석훈이 딱딱한 방탄복을 벗고 김수현을 품에 안았다. 그와 맞닿은 부위가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온기를 찾아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다.

“팀장님, 지금 움직이셔야 합니다.”

껌껌한 세상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던 달이 기울었다.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차례이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운 시기. 이때 어선에 진입해야 한다. 정석훈이 김수현을 깨웠다. 잠에서 깬 김수현은 눈을 부릅떠 정신을 차렸다.

“전속력으로 달려.”

“Yes, sir.”

수면에 뜬 보트가 빠르게 달리며 물수제비를 뜨듯 통통 뛰어올랐다. 배에 접근하고서야 보트가 멈춰 섰다. 육체 강화 능력을 가진 문정인이 제일 먼저 맨몸으로 배에 올라 정상에서 밧줄을 던졌다. 다른 팀원들은 기관총을 어깨에 멘 채 거미처럼 잡을 것도 없이 배를 올랐다.

김수현은 위에서 내려준 밧줄을 잡았다. 1분 30초. 10명이 넘는 에스퍼가 어선에 전원 탑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김수현은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기 전, 팀원들의 수를 확인했다.

“지금부터 무효화 능력 사용한다. 전원 대기.”

수현은 천천히 자신의 파동을 퍼트렸다. 범위는 어선 전체였다. 이상을 느낀 해적들이 잠에서 깨어나 호루라기를 불었다. 달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떠오르는 태양이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빠르게 보호경을 착용했다.

“연막탄 던져.”

팀장의 명령에 에스퍼 팀 전원이 해적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한 연막탄을 던졌다. 그걸 시작으로 에스퍼 팀 팀원들은 기관총을 난사했다. 한바탕 총알 세례가 쏟아진 뒤, 어선을 뒤졌다. 아직 남아 있는 해적들을 모조리 찾아내야 했다.

김수현은 권총을 들고 이동했다. 정석훈은 뒤에서 그를 엄호하며 따랐다. 어선의 도면을 미리 받아본 그들은 배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김수현은 제일 먼저 조타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적들은 알아듣지 못할 한국말로 외쳤다.

“엎드려!”

한국 인질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김수현은 순식간에 권총으로 무장한 해적 세 명을 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다.”

“손 머리 위에 올려.”

이제 남은 해적은 두 명. 그들은 순순히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김수현은 해적들이 혹시 총을 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그들의 몸을 더듬었다. 해적들이 김수현 얼굴을 보고는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앳된 얼굴을 보고 김수현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수현은 총구로 해적의 이마를 밀쳤다.

“등신 새끼. 상황 파악이란 걸 해보지 그래.”

“네가 우리의 힘을 다 회복시켜줬어.”

김수현은 해적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하며 무릎을 꿇렸다.

“고마워, 자기야.”

해적이 실실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윙크를 날렸다. 김수현은 그 해적을 발로 차서 넘어트렸다. 해적은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김수현을 올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팀장님, 전원 체포했습니다.”

곧이어 팀원들이 조타실로 해적들을 포박해 데리고 왔다. 한국 인질들은 “살았다!” 큰 소리로 외치며 눈물을 터트렸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러분. 혹시 선장님 계십니까.”

선원들은 흐흑 울면서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가리켰다. 배를 움직여야 하는데 곤란했다. 구축함을 도로 부르면 그들이 다시 올 때까지 김수현은 무효화 능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해적들이 무효화 능력이 풀리자마자 능력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마냥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파동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의 가이드인 누나는 한국에 있고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무한하게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김수현은 선택해야만 했다. 무효화를 풀어서 부하에게 염력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거나 그들을 이동시켜줄 구축함이 돌아오길 기다리면 계속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거나.

물론 제3의 해결책도 있었다. 김수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포박된 채 무릎 꿇은 해적들의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그들은 범죄자였고 동시에 에스퍼였다. 일반 감옥에 가둘 수도 없고 미어터지려는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받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처치 곤란이었다.

어차피 한국 정부는 백사회와 흑사회 조폭들을 오클라호마 교도소에 다 처넣은 탓에 할당량이 없었다.

한국인 선원들은 눈앞에서 살해된 해적들을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김수현은 이게 가장 합리적인 결단이었노라 생각했다.

“해적들은 더 이상 없었나.”

“예, 팀장님.”

“무효화 능력을 풀면 정한이가 염력으로 배를 움직여. 예멘으로 간다.”

“예, 팀장님.”

“철민이는 예멘 공항에 연락해서 한국행 비행기 준비시키고.”

“넵.”

“진철이는 시체 한곳에 모아둬. 선장님 시신은 한국에서 장례 치러주게 잘 챙겨.”

“알겠습니다.”

김수현은 진두지휘해 현장을 정리했다.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부작용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의자를 찾아 앉자 명령받은 팀원들이 빠르게 뒤처리를 시작했다. 정박해 있던 배가 물살을 갈랐다. 그는 두통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말 걸지 마. 토하겠어.”

빨리 누나를 만나서 가이딩 받고 싶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참기 위해 크게 숨을 헐떡였다. 정석훈이 손수건에 물을 묻혀 오겠다며 사라졌다. 부질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그를 위해 떠나는 부하가 듬직했다.

김수현은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기분 좋은 상상을 반복했다. 그에게 있어 행복한 기억은 차기주와 함께한 순간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가 보고 싶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는 핑계를 댔다.

방탄조끼 주머니에 있는 통신구를 꺼냈다가 넣길 반복했다. 새벽 3시에 술 처먹고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하는 전 남친 같은 짓이란 생각에 손을 내렸다. 정석훈이 손수건을 적셔서 오는 게 보였다.

“저 녀석 왜 방탄조끼가 없어.”

그는 혼자만 방탄조끼를 입지 않은 정석훈 때문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혀를 쯧 찼다. 보트에 있을 때 추위에 떠는 그를 안아 체온을 나눠주느라 정석훈이 방탄조끼를 벗어둔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김수현은 무사히 에스퍼 해적들을 소탕해서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정석훈이 이마에 손수건을 올려줬다.

“두통약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그와 대화하고 있는데 정석훈 너머로 갑작스럽게 움직임이 잡혔다. 해적들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던 한국 선원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정석훈에게 총을 겨눴다. 김수현은 망설임 없이 정석훈을 잡아당기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A급 에스퍼에게 총은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인 착각이었다. 회복 능력도 없는 그가 총알받이로 나서버리다니.

그런데 평범한 총알이 아니었다. 총알이 방탄조끼를 뚫고 배를 파고들었다.

“쿨럭.”

김수현이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팀장님!”

자기를 구하려다가 총에 맞은 김수현 때문에 정석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팀원들은 마지막 남은 해적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김수현은 눈앞이 뿌예지고 별 무리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곧 죽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김수현은 마지막 남을 힘을 짜내 방탄조끼 주머니를 더듬어 통신구를 꺼냈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차기주가 보고 싶었다. 피로 얼룩진 손으로 통신구를 눌러 그에게 연락했다.

“선배…….”

―수현아, 벌써 작전 끝났어?

“으, 미안해요.”

숨이 안 쉬어졌다. 어떻게든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꺼풀이 추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니. 뭐가.

“선배를 흣, 욕심내서요. 사랑해서 미안해요.”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석훈은 구멍 난 상처를 손으로 눌러 압박하며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팀장님 말하지 마세요. 피가, 피가 멈추지를 않아요. 말하지 마시라고요.

차기주는 쿵,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천장을 확인했다. 건물은 멀쩡했다. 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어 제대로 된 말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그러다가 제 뺨을 손으로 강하게 때려 정신을 차렸다.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 좌표 계산을 해둔 게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김수현이 있는 바다 위로 공간을 가르고 도착했다. 정석훈이 피투성이가 된 김수현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차기주는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선내로 떠오르는 태양 빛이 붉게 들이쳤다. 태양 빛에 물든 김수현의 창백한 뺨은 마치 설렘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이 와중에 차기주를 본 김수현은 웃고 있었다.

김수현의 눈에 여명이 깃들었다. 빛나는 눈은 커다란 호수 같았다. 차기주는 피 웅덩이가 생긴 바닥에 무릎 꿇고 아직 통신구를 놓지 못한 김수현의 손을 펴냈다. 차기주는 피로 물든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래, 인정할게. 난 널 사랑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러니까 반드시 널 살릴 거야.”

그 말을 들은 김수현은 그걸 드디어 인정하냐는 듯 오만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안아 들고 한국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다시 한번 텔레포트했다. 방탄조끼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에스퍼의 능력이 담긴 것이 분명했다. 예상대로 총알은 완전히 수현의 몸통을 관통했다. 출혈이 심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서도 김수현은 무려 열흘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차기주는 병실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고 정석훈은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병실 앞 복도를 지켰다.

* * *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김수현이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윤석은 난생처음 ‘스파’라는 곳에 왔다. 여기서 관리를 받으면 피부가 매끄럽게 되어 훨씬 잘생겨 보인다고 사기꾼이 알려줬다.

그는 소파에 몸을 묻고 따뜻한 족욕을 즐겼다. 몸이 이완되면서 다리가 벌어지려고 해 가운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맸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맴도는 백단향 향기가 들뜬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줬다.

직원이 쿠키와 루이보스차를 가져다줬다. 폭포가 없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플루트 연주가 들렸다. 이윤석은 족욕을 끝내고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온열 기구로 데워진 베드에 엎드려 누웠다. 관리사가 그의 등에 아로마 오일을 부드러운 손길로 펴 발랐다.

“고객님, 날개 뼈에 상처가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날개를 집어넣은 흔적을 보고 관리사가 걱정했다. 이윤석은 그곳은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다. 두 명의 관리사가 그의 전신을 마사지했다. 보디 관리가 끝나고 눕자 관리사들이 줄기세포 화장품이라는 것을 얼굴에 발라주었다.

이걸 바르면 피부 재생이 되는 데다가 주름도 펴지고 안색이 환해진단다. 인간들은 참 희한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가꾸는구나 싶었다. 김수현도 이런 곳에 와서 서비스 받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고 잘생겼나?

그가 얼굴에 석고 팩을 붙이고 누워 있으니 관리사들이 팔과 손에 달라붙어서 손톱을 다듬어줬다. 발꿈치를 문지르는 스크럽에 굳은살이 정리되어 갔다.

1시간 20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 과정이 꽤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나 김수현에게 잘생겨 보이고 싶은 마음에 꾹 참고 견뎠다. 만일 여기가 천계였다면 그는 이런 복잡한 관리 따위는 하지 않고 열심히 날개를 빗질했을 거다.

어디 깃털이 빠진 데는 없나, 숱은 풍성한가 확인하고 위풍당당하게 날개를 펼쳐 구애했겠지. 마치 화려한 깃털로 짝을 유혹하는 공작새처럼 말이다.

스파에서 관리를 받은 이윤석은 연예인들이 메이크업을 받는다는 청담동 샵에 들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의 얼굴을 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칭찬을 서슴지 않았다.

“어머, 어쩜 이렇게 피부가 좋으세요?”

“나 오늘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갈 건데 어떻게 해야 멋져 보여?”

이윤석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질문을 무시한 채 그냥 자기가 말하고 싶은 걸 말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개의치 않고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최고로 멋져 보이게 화장해드릴게요. 혹시 상대 형질이 어떻게 되세요?”

“알파야. 우성 알파.”

김수현이 우성 알파인 게 그의 자랑이라도 되는 듯 어깨를 쭉 펼쳤다.

“그럼 눈매는 동그랗게 그리고, 입술은 분홍색 계열인 게 좋아요. 오메가들보다 훨씬 예쁘게 화장해드릴게요.”

이윤석은 얼굴에 한겹 한겹 쌓이는 화장품 때문에 피부가 갑갑했다. 눈에 검은 펜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눈이 매워서 눈물이 다 났다. 눈 화장을 힘들어하는 그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마스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속눈썹이 길어 보여야 눈이 커 보인단다. 이윤석은 그 모든 것들을 꾹 참았다. 김수현에게 잘 보일 수만 있다면 인간처럼 치장할 수 있었다. 기껏 얼굴을 하얗게 칠해놓더니 쉐딩을 해야 한다며 얼굴 윤곽을 어둡게 칠했다. 처음부터 하얗게 칠하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을. 인간들은 참 번거로운 짓을 했다.

입술에는 끈적거리는 분홍색 물감 같은 걸 발랐는데 은은하게 펄이 들어가 있었다. 입술이 반짝거리며 예뻐 보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알파들이 이 립스틱만 바르면 키스하고 싶어서 환장한다고 했다.

“오메가의 발정 페로몬이 0.001% 함유된 제품이에요.”

이윤석은 샵에서 나올 때 그 립스틱을 열 개나 구매했다. 매일 매일 립스틱을 바르고 김수현과 키스하고 싶었다.

* * *

끼이이익. 한국 대학교로 향하던 차량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김수현은 안전벨트 덕분에 상체가 흔들리긴 했지만 무사할 수 있었다. 정석훈이 운전석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죄송합니다, 에스퍼님. 그런데 지금 앞에…….”

운전기사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안전벨트를 풀고는 사자를 피해 도망치는 사슴처럼 운전석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정석훈은 황당한 얼굴로 차량 전면 유리창을 쳐다봤다. 아스팔트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망할. 서울은 센터 에스퍼들이 그 어느 구역보다 게이트 청소를 자주 하는 안전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들 앞에 게이트가 열린단 말인가.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김수현에게 당장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김수현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차를 버리고 게이트의 반대 방향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가 커지는 속도가 그들이 달리는 속도를 훨씬 웃돌았다.

아무리 빨리 뛰어도 소용없었다. 게이트가 열리는 면적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팽창 속도가 빠른 걸 보면 A급 게이트가 분명했다. 정석훈 혼자서 보스를 잡을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아스팔트에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 위에 발을 디딘 듯 물컹한 출렁임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김수현이 그를 돌아봤다. 정석훈은 고개를 저었다.

“수현 씨, 어서 도망쳐요.”

“아니요. 차기주 이사가 우릴 구하러 올 겁니다.”

김수현은 기억이 없어도 절대 동료를 버리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다. 김수현이 검은 그림자 안으로 정석훈을 따라 들어왔다. 팽창을 끝낸 게이트가 하얗게 빛을 내며 공간을 쪼갰다. 하얀빛이 블랙홀처럼 두 사람을 빨아들였다.

* * *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두 사람은 어두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했다. 동굴 천장에 뾰족한 정유석이 고드름처럼 맺혀 있었다. 박쥐처럼 생긴 괴수가 입에서 거미줄을 뿜자 정석훈이 오른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퍼져나간 화염에 박쥐 괴수가 새까맣게 타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위틈을 비집고 나오던 노란 야광 눈을 가진 벌레들이 불꽃을 보고는 파스스,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울퉁불퉁한 동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에서 엄청난 악취가 났다.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얌전히 이사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정석훈의 예상과 달리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한 괴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더욱 엄청난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짐작하며 자신의 뒤에 김수현을 숨겼다.

“게이트에서 석훈 씨 혼자 싸우게 둘 순 없어요. 혹시 총 있으면 주세요.”

그는 아공간을 열어 K5 권총을 찾아 김수현에게 건넸다. 회귀 전 김수현이 자주 사용했던 무기였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정석훈은 권총을 잡은 김수현의 손 자세를 바로 해주었다.

“잠금장치를 풀고, 방아쇠에 이렇게 손가락을 넣어서 당기면 됩니다.”

등 뒤에서 첨벙첨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현은 재빠르게 뒤를 돌아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권총을 겨눈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끌렸다. 후우우우. 뜨거운 입김처럼 돌풍이 불어왔다.

어딘가에서 찌르찌르 울던 벌레 소리가 멈췄다. 동굴 속에 잠들어 있던 동물의 숨소리처럼 잔잔한 날갯짓이 퀴퀴한 공기를 타고 전해져온다. 공기에서 유황 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더 뒤로 물렸다.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더 큰 공포가 몰려왔다.

유명한 샵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은 메시아는 동굴 안이 너무 어두워 자신의 멋진 모습을 김수현이 볼 수 없지 않을까 싶어 울상을 지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날개를 꺼냈다. 신께 소원을 빌어 이 세상의 시간을 되돌렸을 때, 지상으로 추락한 뒤로 단 한 번도 그것을 꺼내 확인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더러운 인간계의 공기에 다친 날개가 덧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도 꽤 지나 잘 아물었을 터였다. 하얗고 풍성한 천사의 날개를 보여주며 멋지게 짜잔 나타나 김수현을 구해줄 생각이었다. 날개는 메시아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김수현과 정석훈은 잔뜩 겁에 질렸다. 왜 저러지? A급 에스퍼와 함께 있지만 혹시나 김수현이 위험해질까 봐 게이트에 박쥐와 야광 벌레만 집어넣었다. 김수현이 두려워하려면 고작 그딴 것에 겁을 먹어야지 그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는 매력 발산을 위해 더 크게 커다란 날개를 펄럭였다. 검은 피막으로 덮인 날개는 동굴 안에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악마는 제 모습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고 경계 어린 시선에 서운함을 느꼈다.

“수현 씨,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도망치세요.”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꼭 두 사람은 자신이 그들을 죽일 것처럼 굴었다. 그는 왜 자신을 보고 김수현과 정석훈이 겁을 먹나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생각해봤다. 너무 어두워서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을 보지 못한 거지 싶었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석훈이 화염 능력을 사용해 불기둥을 날렸다.

“으아아아아!”

동굴이 웅웅 울릴 정도로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메시아는 날개로 몸을 감싸 보호했으나 날개가 타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정석훈을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자신이 그를 죽이면 김수현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을 원망할지도 몰랐다.

메시아는 다친 날개를 얼른 집어넣고,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괴수 중에서 가장 영리한 드래곤을 소환했다. 절대 김수현은 다치게 하지 말라 명령한 후 물러나다가 박쥐들이 만들어놓은 구아노를 밟았다.

딱딱하게 굳은 동물의 배설물이 부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어둠 속에서 메시아의 행방을 알렸다. 수현은 망설임 없이 그 방향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메시아는 화약이 터지면서 뻔쩍이는 섬광을 피해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드래곤은 인간 둘을 발견하고 쿵, 쿵, 쿵 거대한 발걸음을 뗐다. 공포에 질린 김수현은 딱딱하게 굳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귀에서 날짐승의 비명과도 같은 이명이 울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고정하기 위해 팔꿈치를 접고 가슴에 붙인 채 권총을 조준했다. 탕! 드래곤은 침을 쏘는 벌을 내쫓듯, 날아온 총알을 앞발로 휙 쳐냈다.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긴장감과 두려움에 공기가 무겁고 축축해졌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수현 씨, 도망쳐요.”

“나만 갈 순 없어요.”

“방금 뭔가가 게이트 밖으로 나갔어요. 그 방향으로 움직여요.”

김수현은 드래곤을 주시하는 정석훈이 자신을 볼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도리질 쳤다. 그러곤 그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그럼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요.”

정석훈의 대답을 듣자 안심이 됐다. 김수현은 그의 손을 잡은 채 게이트 출구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김수현은 맞잡은 손에서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그리스 최고의 리라 연주자였던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가 뱀에게 물려 죽자 지옥에 그녀를 구하러 간다. 그리고 지옥의 왕,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듣고 감동해 아내 에우리디케를 살려주기로 한다. 다만 오르페우스에게 절대 지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되고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돌아본다. 에우리디케는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 그는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됐다. 빛을 보기 전까지 절대로 돌아봐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김수현의 눈에 드래곤과 대치 중인 정석훈이 보였다. 천천히 떨리는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이 잡은 게 잘린 팔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 돼. 안 돼! 석훈 씨, 안 돼요!”

“팀장님, 미안해요. 이번에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드래곤을 향해 화염이 감싸인 그가 뛰어들었다. 김수현은 정석훈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권총을 드래곤을 향해 미친 듯이 발사했으나 총알이 떨어진 권총에서는 달칵거리는 소리만 났다.

“으, 으욱. 아니야. 이건 아니야.”

땀과 눈물로 더럽혀진 얼굴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뜨거운 열기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뿜어져 나와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불타는 정석훈을 떼어내기 위해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렀다. 그는 꼬리에 맞으면서도 결코 괴수를 놓지 않고 버텼다.

“끼아야아아. 끼야아아.”

드래곤은 꼬리로 바닥을 탕 탕 쳐대며 분노를 표출했다. 정석훈은 마지막으로 김수현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의 기숙사 방 침대 맞은편에는 작약꽃이 있었다. 그는 매일 밤, 혹여라도 그 꽃이 시들까 걱정되는 마음에 잠 못 이뤘다.

제발 이번에는 우리 팀장님이 괜찮아야 할 텐데, 하며 그는 회귀 전에 했던 살인을 후회했다. 그때의 정석훈은 김수현을 지키기 위해 살해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로 김수현을 구하는 거였다.

그땐 가이딩 부작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을 때가 되자 인생의 파노라마가 거꾸로 돌아가며 지난날을 보여줬다.

두 번째 생에서 정석훈은 옥탑방에 불을 질렀다. 어리석게도 김수현을 구하겠다며 그를 가둔 채 불태워 죽였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첫 번째 생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번 생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모든 순간이 눈앞에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자신이 겪은 일같이 느껴진다. 석훈은 김수현과의 몸싸움 끝에 움직임을 잃은 그를 내버려 둔 채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곤 볼펜을 들어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내가 목숨을 끊는 것은 전부 차기주 이사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연인이면서 자신의 가이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가이딩이 포옹 정도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내겐 슬픔과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사랑이 날 살해하는 겁니다. 차기주 이사는 내가 자기 가이드의 신경을 거스를까 봐 내 존재를 숨기기 급급해했고 그로 인해 나는 내가 그의 연인임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그 증거는 내 핸드폰에 저장된 ‘선배’가 차기주 이사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연인을 연인이라 부르지 못한 채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몰래 숨어서 지냈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제 더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그를 사랑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생을 정리합니다.

정석훈은 김수현의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기숙사 방에 돌아와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그것이 첫 번째 삶의 끝이었다. 회상을 끝마친 정석훈은 고개를 돌려 오열하는 김수현을 바라봤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자신이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당신을 위해 죽어간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세요.’

드래곤이 앞발로 정석훈을 붙잡았다. 남은 한 손이 자유로워진 그는 그 손으로 드래곤의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두꺼운 비늘에 덮여 있는 겉과 달리 입 안은 연약한 점막으로 이뤄져 있었다.

불꽃이 드래곤의 기도를 타고 들어가 배 속을 불태웠고, 그렇게 드래곤은 속이 완전히 익은 채 죽었다. 김수현은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지켜봤다.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에 옥탑방에 불을 지르러 왔던 창문 너머의 사내가 보였다. 불을 지르며 무언가를 제게 속삭이던 사내가.

“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게요.”

김수현과 선배를 죽였던 남자는 역시 정석훈이었다.

“으, 으으.”

대체 왜 그랬냐고 원망해야 할까. 아님 지금 당장 자신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가 저지른 죄가 분명하거늘 김수현은 그의 죽음이 슬펐다. 그러므로 그냥 눈물을 흘렸다.

“팀장님,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요.”

그가 자신을 ‘팀장님’이라는 낯선 호칭으로 불렀음에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수현은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의 한 조각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자신의 서재에 말도 없이 찾아온 정석훈이 자기 머리에 총을 가져다 댔다. 아치형 창문에서 들이치는 노을빛이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를 붉게 물들였다. 정석훈을 진정시키기 위해 김수현은 두 손을 든 채 나직하게 말했다.

“석훈 씨, 일단 진정하고 그 총 내려놔.”

“차기주 이사 만나지 마시라고요. 둘이 헤어지세요. 차기주 이사는 절대 팀장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요.”

“석훈 씨, 나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그 사람이 가이딩 문제로 진설해 가이드 만나는 거, 그것 때문에 나 걱정해주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이제 괜찮아. 내 능력, 그냥 에스퍼 능력만 없애는 게 아니었어. 가이딩처럼 파동도 진정시킬 수 있는 거였어. 가이딩만 해결되면 이사님이랑 나 이제 아무 문제 없어.”

차기주와 김수현은 둘 다 에스퍼였다. 그들에게는 가이드가 필요했다. 김수현은 가이딩 부작용이 없는, 특별한 누나 덕에 깨끗한 사생활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차기주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차기주를 괴롭히며 상처 줬는지 모른다.

진설해. 그 오메가가 뭐라고, 사랑하는 이를 의심해 걸레 취급하며 저주했다.

정석훈은 김수현의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야 당신의 능력을 깨달았냐는 듯 수현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설마 알고 있었어?”

정석훈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팀장님, 알파도 괜찮잖아요. 그럼 나랑 사귀고 내 가이드 하시면 되잖아요.”

듬직한 부하인 줄 알았던 놈이 자기 목숨을 인질 삼아 김수현을 협박하고 있었다. 차기주랑 헤어지고 자기랑 사귀어 달라고. 미친 새끼. 정신병자 새끼.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면서도 당장 눈앞에서 부하를 죽게 할 순 없었다. 이 정신 나간 새끼를 흠씬 두들겨 패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김수현은 정석훈이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이딴 방법으로 비겁하게 굴래?”

정석훈은 권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고, 김수현은 권총을 빼앗기 위해 손을 잡아당기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둘은 바짝 붙어서 권총을 가지고 힘 싸움을 했다. 탕!

“아아.”

김수현은 평범한 에스퍼들과 달랐다. 일반인처럼 칼에 베이면 피가 났고 저절로 낫지 않았다. 관통당한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심장이 왼쪽에 치우쳐 있어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팀, 팀장님. 어떡해. 팀장님.”

정석훈이 출혈을 막겠다며 손으로 김수현의 가슴을 틀어막은 채 눈물 흘렸다.

“야, 이 새끼야, 그러기에 왜 총 가지고 장난을 쳐.”

너무 열받아서 정석훈의 머리를 때리기 위해 손을 뻗었건만 힘이 없어서 그냥 쓰다듬고 말았다. 입에서 울컥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기억을 떠올린 김수현은 “씨발” 욕을 하며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사고라지만 총으로 쏴서 죽이고, 두 번째 생에서는 불을 질러서 죽였다. 그런 새끼다. 전혀 동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그를 이용해먹기만 했을 뿐이라, 그를 원망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이 모순은 거듭된 회귀가 만들어낸 오류였다. 도대체 자신은, 아니 이 세계는 몇 번이나 시간이 되돌려진 것일까. 도대체 누가,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들었던 거고?

머릿속에서 기억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일단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 해도 이 세계는 두 번의 회귀를 거듭했다. 그렇다면 이번 생은 세 번째. 자신이 봤던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알파와 오메가가 없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죄악이었던 세계는?

드래곤이 죽자 게이트가 사라졌다. 김수현은 영화 속 멸망을 맞이한 도시처럼 버려진 자동차들 사이에 주저앉아 차기주를 기다렸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던 자신의 에스퍼를.

<3권에서 계속>

미주

1) 출처 생텍쥐베리 『어린왕자』 일부.

에스퍼×에스퍼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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