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1)
창살이 달린 조그마한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이쳤다. 뺨을 살살 쓰다듬는 온기에 기분이 좋아져, 김수현은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이른 시간인 것 같아 계속 잠을 청하기로 했다.
잠시 후,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 김수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한 후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했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려는데 거울 속 오른쪽 뺨이 약간 번들거렸다.
뭔가 하고 손으로 만져보자 끈적거리는 게 묻어났다. 무슨 연고라도 발라둔 것같이…….
“아…….”
수현은 멍하니 거울 속 부기가 옅어진 뺨을 바라봤다. 햇살이 비쳐서 따듯하다고 생각했던 건 차기주의 온기였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어준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미쳤어. 미쳤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세면대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터질 것처럼 빨개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왜인지 창피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넘어가면 안 되는데, 다 거짓말인데…… 나 어떡해.”
수현은 손으로 다치지 않은 뺨을 철썩, 아프지 않게 때렸다.
“정신 차려, 김수현. 넌 사이코패스 새끼한테 농락당하는 거라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가이딩을 해주겠구나 싶어, 얼씨구나 속으로 좋아할걸.”
자신이 그에게 준 것이라곤 마음의 상처뿐인데 뭐가 예쁘다고 연고까지 발라주고 간 걸까. 김수현은 자꾸만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능력자들』과 『농락』을 읽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차기주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을 거다.
그를 향하는 끌림은 다른 극을 향해 가는 자석과도 같이 강력했다. 하루라도 빨리 선배를 찾아야 했다. 그러면 차기주에 대한 마음도 금세 식어버릴 터였다.
수현은 수도꼭지를 틀고 일부러 찬물로 세수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거울 속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한 자신의 얼굴은 누가 봐도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김수현은 몇 번이고 되뇌며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행거 앞에서 잠옷을 벗었다. CCTV의 빨간불이 깜빡이는 게 보였지만 정석훈이 옷을 갈아입을 때는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팬티만 빼고 다 벗었다.
오늘은 뭘 입을까, 새삼 행거를 보고 고민했다. 평소와 달리 색다르게 입고 싶었다.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데, 문득 형에게 맞은 오른쪽 뺨이 욱신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 뺨을 더듬어보니 의식하지 못한 새, 자신이 웃고 있었다.
“뭘 고민하는 거야.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고.”
괜히 멋쩍어진 수현은 신경 쓰지 않은 척, 흰색 티셔츠에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을 겹쳐 입었다. 하의는 청바지 밑단을 살짝 접어서 복숭아뼈가 보이게 하고 핸드폰을 챙겨서 청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수현 딴에는 꾸미지 않은 느낌을 최대한 살린 패션이었다.
시간에 맞춰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어째서인지 수현은 그게 차기주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후다닥 현관 앞에 달려가 도어스코프로 밖을 내다봤다. 차기주는 평소 철제 계단을 오른 후에 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문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수현은 오늘 그가 대체 뭘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검은 구두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 도어스코프를 통해 차기주를 보고 있는 김수현의 심장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차기주는 문 앞에 서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 최대한 멋있어 보이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가 진짜로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무언가 오해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윤석이 작가인데 오죽할까. 그다지 눈치가 빠른 녀석은 아니니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사실은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의 마음을 가지려고 그렇게 행동한 거라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 오해가 쌓이고 쌓여 그런 결말을 맞이한 거라면?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서 침이 고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놀란 차기주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도어스코프를 통해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S급 에스퍼인 그가 이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곧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언제나와 같이 정갈하게 구두를 벗은 그가 자신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왜 현관에서 자기를 보고 있었는지 궁금한가 보다. 답을 구하는 시선에 당황한 수현은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발을 헛디뎠다.
“어?”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뒤로 넘어지려는데 차기주가 재빠르게 허리를 팔로 감아서 잡아줬다. 수현은 마치 탱고라도 추는 것처럼 허리를 꺾은 채 멈춰 섰다.
“괜찮아?”
“네.”
수현은 퐁퐁 차오르는 수치심에 얼른 차기주를 밀어내고 후다닥 떨어졌다. 홧홧한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식혔다. 정작 차기주는 별일 없었다는 듯 양복 재킷을 벗어서 아일랜드 식탁에 있는 의자에 걸어뒀다. 그가 와이셔츠 소맷단을 팔뚝까지 걷어붙였다.
수현은 드러난 근육질의 팔을 보며, 그 팔이 자신의 허리를 감았던 감각을 되새김질했다. 앞치마를 맨 그가 냉장고를 열어서 식자재를 살폈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떡볶이 떡과 어묵, 양파, 대파, 고추장, 고춧가루를 꺼냈다.
간장과 설탕까지 싱크대 하부 장에서 챙긴 그는 인덕션에 냄비를 올리고 씻은 떡볶이 떡과 어묵을 담았다.
“아침부터 떡볶이 먹어요?”
“응. 특별식이야.”
“왜요. 나한테 화 안 났어요?”
“서운하긴 했지. 그런데 화는 안 났어. 내가 널 가둔 건 사실이고 우리 관계가 강압으로 이뤄진 건 맞으니까.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
수현은 체크무늬 난방 밑단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가 너무 순순하게 나오자 되레 미안해졌다.
“어제 그런 말 해서 미안해요. 서운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
“그런데 그래도 나 안 풀어줄 거죠?”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뒤돌아 있던 차기주가 어느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럼 이사님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세요. 나 가둔 건 사실이니까.”
“미안하다, 수현아.”
“이제 우리 화해하는 거죠?”
차기주는 마치 별거 아닌 일로 싸웠다 화해하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김수현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이 그가 사랑스러워져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설령 그가 자신을 괴물이라고 욕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머뭇거리며 허공을 배회하던 김수현의 손이 차기주의 등에 안착했다. 자신의 가슴에 의지하듯 파묻힌 김수현의 뺨이 눈물 나도록 기뻤다.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차기주의 귓가에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을 때, 그에게 있어 그 모든 순간은 찰나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김수현을 놓아줬다. 정석훈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뭐지?”
―이사님, 저. 그게.
정석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을 이어나갔다. 차기주는 눈을 돌려 CCTV가 있는 방면을 노려봤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잘못일까. 스쳐 지나갈 바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흔들린 나무가 잘못일까.”
―이사님, 저는…….
“난 흔들린 나무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
“죄송하다는 말도 안 하냐.”
―죄송합니다.
김수현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정석훈을 이용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김수현의 무효화 능력을 맛봤으니 눈깔이 돌아가고도 남지. 그런데도 심복이라며 김수현에게 붙여놓은 자신이 안일했다.
“이제부터 수현이 감시는 다른 에스퍼가 한다. 넌 빠져.”
―이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수현 씨 보호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차기주는 ‘감시’라는 임무를 언급했건만 정석훈은 ‘보호’라고 개인적인 견해를 붙였다. 김수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차기주는 빠르게 통화를 끝내고 수현을 잡아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앉혔다.
“금방 아침 차려줄게.”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면 그가 입에 올린 ‘감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차기주는 모르는 척 다 만든 떡볶이를 그릇에 담아서 앞에 놔줬다. 눈앞에 음식이 놓였음에도 김수현은 수저를 들 생각을 안 했다.
“뭐 해. 학교 늦겠다. 얼른 먹어.”
“나 석훈 씨한테 감시당할래요.”
“왜, 둘이 정분났어?”
정석훈이 가이딩 중독 증세를 보이며 수현에게 집착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굳이 그런 상대와 함께 다니겠다는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화를 참아내느라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던 주먹에 김수현이 부드럽게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영악하긴.”
정석훈으로 인해 차기주는 김수현의 능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가 걱정되었다. 어제 S급 가이드로 판명 났으면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할 생각을 안 할 텐데, 수현은 A급에서 측정을 멈췄다고 했다.
괜히 자신의 가이드라는 이유로 다른 에스퍼들의 호기심을 끌어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A급 가이드가 흔하지는 않아도 S급 가이드처럼 하늘 위의 존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알았어. 정석훈이랑 다녀.”
“고마워요, 이사님.”
김수현이 제 주인의 사람임을 인식 중인 정석훈이라면 메시아가 괴수를 보냈을 때, 충성스러운 개처럼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켜낼 터였다. 안 좋은 마음을 품고 접근하려는 에스퍼들 또한 확실히 처리해내겠지.
그런 식으로 써먹고 치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차기주는 ‘배려’라는 어른스러운 가면으로 시커먼 속내를 숨겼다.
그걸 모르는 김수현은 차기주가 자기 부탁을 들어줬다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정말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까. 김정석, 김아영을 보면 김 회장 유전자가 썩 좋은 것 같진 않은데. 둘 다 성격 나쁘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김수현에게는 제법 착한 누나처럼 굴지만, 김아영은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재벌 집 자제라는 배경과 A급 가이드라는 높은 등급 때문인지, 그녀는 엄청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버릇은 무려 ‘인간 따위가 감히’였다. 꼭 자기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오만무례하게 굴어 가이드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물론 에스퍼들은 A급 가이드인 김아영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설설 기었지만, 망나니 형과 싸가지 없는 누나를 둔 김수현의 성격이 이렇게 순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엄청 맛있다. 이사님도 어서 드세요. 맨날 나만 먹는 것 같아.”
떡볶이 하나 해줬다고 기뻐하는 게 정말 아이 같다. 차기주는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빨개진 귀와 달리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은 무심한 얼굴이 김수현을 응시했다. 음미하듯 넓고 깊게 호흡하는 수현의 가슴은 노래를 부르는 새처럼 부풀었다가 꺼졌다.
입가에 묻은 빨간 소스를 혀로 핥는 김수현의 모습에, 차기주의 입은 마치 야한 영화를 처음 본 사람처럼 벌어졌다. 입가를 핥는 그 혀가 세상에서 제일 관능적으로 느껴져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 키스하지 않으면 숨이 끊어져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절박하게 김수현의 이름을 불렀다.
“수현아.”
“네?”
김수현은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나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키스하면 화낼 거니?”
“뭐래. 미쳤나 봐. 우리 계약 잊었어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수현이 젓가락을 손에 쥔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입에 있는 떡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이왕 화났으니까 키스하자.”
차기주가 일어서서 상체를 숙였다. 키가 큰 그는 아일랜드 식탁을 완전히 가로질러 김수현에게 도달했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잡아 고정하자 수현은 입을 열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버텼다.
그가 애원하듯 혀로 수현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뜨거운 숨이 인중을 간지럽혔다. 수현은 코로 숨을 내쉬면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기주에게 들킬까 봐 모자란 숨을 꾹 참았다. 물에 있을 때는 3분을 호흡하지 않아도 꿈쩍 않더니만 차기주와 입술을 맞댄 지금,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내쉬기 위해 살짝 벌어진 입술의 틈을 놓치지 않고 차기주의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으음.”
김수현은 자신의 앓는 소리에, 뒤통수를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목덜미로 내려간 손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고개가 맞물려 있어 김수현의 시선에는 차기주의 귀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염료를 부어놓은 것처럼 새빨간 귀를 바라보던 김수현은 힘을 풀고 입을 완전히 벌렸다. 차기주의 혀가 뱀처럼 입 안을 난잡하게 휘저었다. 바다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다. 미안해, 선배.
김수현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배에게 사과하며 눈을 감았다. 바닥으로 젓가락 두 짝이 쨍그랑, 떨어졌다.
* * *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광대를 선배가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끈적거리는 연고가 두툼하게 발렸다.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어리광을 부리니 가슴을 꽉 움켜잡고 있던 서러움이 풀려나갔다.
“아야.”
햇살에 몸을 노릇노릇하게 데우는 고양이처럼 미소를 짓다가 찢어진 입술에 눈살을 찌푸렸다. 툭, 갑자기 뺨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라도 새는 건가. 더 심해지기 전에 지붕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뺨에 떨어진 물이 지나치게 따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선배가 울고 있었다.
“왜 울어요?”
“미안해, 수현아.”
“선배가 왜 미안해. 내가 다 맞을 만하니까 맞은 건데.”
그가 흘린 눈물에 자신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선배가 손으로 부드럽게 눈물을 쓸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잘못한 게 없어. 넌 절대 맞을 만해서 맞은 게 아니야. 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갈기갈기 찢어서 개밥으로 던져주고 싶어.”
선배는 참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농담인 걸 아는데도 그의 무릎을 꾹 붙잡았다.
“울 아버지 먹어야 하는 개가 불쌍하다. 그거 동물 학대라고요, 선배.”
멍든 뺨이 안타까워 떠나지 못했던 선배의 손길과 선배가 발라주었던 연고, 그리고 선배가 자신을 위해 흘렸던 눈물이 김수현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차기주와 맞닿아 있는 입술을 떨어트리기 위해 주먹을 쥐고 그의 배를 가격했다.
차기주는 S급 에스퍼답게 주먹에 맞고도 자신의 입술을 빨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제야 고개를 뒤로 물리는가 싶더니만 금세 김수현의 입술로 다시 달려들었다.
“으, 놔. 놓으라고요.”
“수현아, 착하지. 응? 조금만 더 하자.”
그는 달래는 척하면서 김수현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그를 멈추기 위해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행동에 차기주는 쯧, 싸늘하게 혀를 찼다.
“우리 페어 계약 파기예요.”
차기주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의자에 앉아 어서 떡볶이를 먹으라며 다시 친절하게 새 젓가락을 쥐여줬다. 그는 방금까지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진짜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다.
“지금 떡볶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 나랑 한 페어 계약 잊었냐고요. 내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왜 키스해요, 왜!”
수현은 손등으로 불결해진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서 닦았다. 차기주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화내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신이 화내는지 모르는 건가? 그 순진무구한 시선에 되레 자신이 화를 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의자 깊숙이 등을 파묻은 채 눈가를 휘었다.
“설마 내가 그걸 지킬 거라고 믿었어? 순진하긴. 그 계약은 내가 너에게 관용을 베풀고 싶을 때만 지키라고 있는 거야. 네가 나와 동등하다고 믿고 싶을 때, 널 달래줄 용도로 쓰려고 있는 거라고. 그게 정말 날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물론 믿지는 않았다. 어리석게도 그의 온화한 태도와 다정한 말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을 뿐.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아. 아무것도 안 먹고 학교 가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기주는 키스를 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았다. 그의 붉은 귀를 본 순간 착각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바보같이, 그게 그와 키스해도 되는 이유가 되어주는 건 아니었는데. 잠깐의 착각으로 선배를 배신해버렸다. 차기주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은 차기주를 좋아해서는 안 됐다.
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문고리를 돌렸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나 좀 꺼내줘요.”
차기주는 그런 김수현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느린 발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철문을 두드리는 수현의 주먹질도 빨라졌다.
“열어줘, 열어달란 말이야!”
“아가, 손 다칠라.”
자신을 아기라고 칭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털이 쭈뼛 서서 그를 돌아보자, 그는 공포로 하얗게 질린 수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으로 잠금장치를 풀어줬다. 수현은 잠금이 풀리는 순간 문고리를 돌리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형광등 불빛과는 다른 태양 빛이 이젠 자유라는 듯 자신을 반겼다. 그는 도망치는 자신을 보며 물었다.
“수현아, 네가 그렇게 사라지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꼭 이렇게 모든 걸 망쳐야겠니? 네 가족과 친구들 모두 너로 인해 불행해지면 그때 가서 그 원망을 다 어떻게 받아내려고 그래?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자신을 타이르는 엄하고도 다정한 목소리에 수현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기주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무자비한 냉혈한이었다. 굳이 자신에게 선택권을 쥐여주고 그의 곁에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다.
“으, 으으. 윽.”
수현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음을 삼켜냈다. 그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도로 징벌방 안에 데려다놓았다. 차기주는 침대에 엎드린 채 우는 김수현을 뒤로하고 화장실에서 젖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곤 맨발로 밖에 나가는 바람에 더러워진 수현의 발바닥을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에게 자신은 뭘까. 이 고민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절대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필요한 것은 오로지 가이딩뿐이었다.
그 답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도……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맛본 타인의 다정함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앞의 아늑한 품을 향해 달려들게 만들었다. 외로움에 무너져, 어디 있는지 모를 선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차기주에게 기대고 싶었던 거다.
결국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것도 모자라 얌전히 그 속에 누우려고 들었다. 바보같이. 수현은 눈물을 그치고 숨을 골랐다. 어떻게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전까지는 그에게 순종하는 척 굴며 기회를 엿볼 셈이었다.
그는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차기주를 순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눈물에 젖어 엉긴 긴 속눈썹을 그가 검지로 조심스럽게 덧그렸다.
“눈 붓겠다.”
가장 열받는 건 차기주가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표정이라는 거였다. 그가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 위생 백에 담았다. 울었던 여파로 코가 막혀서 색색 숨을 몰아쉬자, 그가 진정하라는 듯 자신의 등을 쓸어줬다.
“눈가는 빨갛게 붓고 입가는 퉁퉁 부르트고. 지금 네 모습이 어떤 줄 알아?”
침대 매트리스에 앉은 그의 손에서 얼음이 빠르게 녹아 위생 백 안에 물이 고였다. 차기주는 눈물에 젖은 수현의 눈을 얼음찜질해주며 그 귓가에 속삭였다.
“엄청 위험해 보여.”
등골이 오싹해졌다. 티셔츠와 남방을 겹쳐 입었음에도 그의 손가락이 걷는 듯 제 등을 쓸어 올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손가락이 닿는 부위마다 전기가 찌릿하게 올라왔다. 등에서 시작한 등반은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와서 멈추어 섰다. 목을 가볍게 감싼 그가 김수현의 눈에서 얼음을 떼어냈다.
“이래서 학교 갈 수 있겠어?”
이건 물음이 아니라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김수현은 그의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두 팔을 벌려 차기주에게 안겼다. 그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어리광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순순하게 구는 자신의 행동이 그를 향한 순종으로 여겨졌을 터였다.
“이사님, 제가 잘못했어요. 학교 보내주세요.”
그가 굳이 비슷한 덩치인 김수현을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그러곤 민망함에 빨개진 김수현을 기쁨에 찬 얼굴로 들여다봤다.
“영리해.”
“…….”
“넌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내가 꼼짝 못할 걸 알고 있어. 그렇지?”
김수현은 아무 대답 없이 차기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 수현아. 넌 절대 나한테서 못 벗어나. 너한테 소중한 게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네가 잃을 게 없다고 해도 난 널 가질 수 있는 사람이야.”
수현은 차기주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양복 재킷이 구겨지도록 움켜잡았다. 이렇게 소심한 복수밖에 하지 못하는 게 분했다. 언젠가 저 높은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할 텐데.
그렇게 소리 없이 이를 갈고 있을 때, 정석훈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온 것을 보니 CCTV로 차기주와 자신 사이에 일어난 소동을 본 모양이었다. 차기주의 무릎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자신을 보고 정석훈이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그는 곧장 시선을 피하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됐어. 애 학교나 보내.”
“감사합니다.”
김수현은 그간 차기주가 자신을 학교에 보내준 것이 그의 배려, 혹은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그저 김수현을 시험했던 거였다. 직접 징벌방의 잠금장치를 풀어주었을 때처럼.
얼마나 오만한 자란 말인가.
수현은 헬기 패드에서 대기 중인 헬기에 익숙하게 올라탔다. 늘 그랬듯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안전벨트를 맸다. 창밖으로 펼쳐진 숱이 빽빽한 태백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숨으면 아무리 차기주라고 해도 자신을 찾아내기 힘들어질 터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 기회. 학교에 사람이 많을 때…… 자신이 몸을 숨길 인파가 학교에 들어오는 밤. 기회는 ‘예술인의 밤’이었다. 자신이 참가할 명분이 충분하며 학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일한 날. 그때를 놓치면 언제 그렇게 시기적절한 환경이 구성될지 알 수 없다. 수현은 주먹을 말아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아서 붉어진 뺨, 키스로 부르튼 입술, 눈물에 짓무른 눈가까지. 자신의 몰골이 지금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을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에 가는 것만이 차기주로부터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차기주가 전화로 정석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쳐 지나갈 바람이라는 걸 알면서 흔들린 나무의 잘못이라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제 와 곱씹어 보면 굉장한 말이었다. 그건 정석훈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어째서? 수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관찰하기만 하던 감시자가 자신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차기주는 그 사실을 묵인하고 계속 그에게 감시자 역을 맡겼다. 정석훈에 대한 신뢰가 깊어서 용서를 해준 것일까?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가 차기주에게 버림받았을 가능성을 놓쳐선 안 됐다. 정석훈 이외의 다른 감시자가 새로 붙게 될 걸 고려해야 했다. 제3의 인물이 ‘예술인의 밤’을 망치게 둘 순 없었다.
호텔 옥상에 헬기가 착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나오니 평소처럼 리무진에서 운전기사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차에 올라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 바람을 쐬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바람에 조금이나마 쓸려나가는 것 같았다.
학교 주차장에 차가 정차하자마자 운전기사가 후다닥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극진하게 도련님 대접을 받으며 내렸다. 이런 자신이 실은 감금당해 24시간 감시당하는 처지라는 걸, 사람들은 알까? 수현은 정석훈 이외에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까 주위를 둘러봤으나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체 능력으로는 알 수 없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정석훈이 수현과 두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섰다.
“석훈 씨, 혹시 석훈 씨 말고 나 감시하는 사람 있으면 알려줘요.”
“예. 알겠습니다.”
“석훈 씨는 이사님 사람이어도 내 편이죠?”
“……예.”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순진한 알파를 이용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서 그가 차기주에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그의 충성심을 이용해 진설해와 몰래 만나려고 했던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매우 달랐다.
비록 자신의 계획과 달리 정석훈은 차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자신의 일탈을 눈감아줬으나, 결국 그것 때문에 그는 차기주에게 버림받을 처지에 놓인 거였다. 그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새삼 다짐하는데 불현듯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먼지가 뿌옇게 낀 옥탑방 창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옥탑방은 자신밖에 살지 않아 아버지와 선배 이외에는 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없는 살림이라도 훔쳐 가려고 온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섬증을 느꼈다.
분명 닫아뒀던 창문인데 살짝 열려 바람이 숭숭 불어닥쳤다. 창문을 닫기 위해 솜이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둑이 무서워 벌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열린 틈으로 사내의 손이 튀어나와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아악. 살려주세요.”
“■■ 씨, 저예요.”
“잘못했어요. 저 거지예요. 우리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수현 씨, 뭐 하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김수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정석훈을 쳐다봤다. 기억 속 창문 틈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도둑과 그의 음성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아니에요. 어서 가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멈췄던 김수현은 몸을 움직여 미술 학관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풍경과 냄새가 묘한 안전감으로 다가왔다. 복도에 세워둔 자신의 그림이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캔버스에는 옥탑방 안에 선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자신과 창문 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의 섬뜩한 눈을 손으로 만져봤다. 어쩌면 이자가 옥탑방에 불을 지른 범인인지도 몰랐다.
* * *
한국대 대강당에 들어가기 위한 원형 도로에 고급 외제 차들이 줄을 섰다. 대강당 입구에서부터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영화제에 참석하려는 배우들처럼 차려입은 방문객들이 그 위를 걸었다.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검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김아영은 어깨에 살짝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팔에 걸었다. 그녀의 뽀얀 어깨와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녀를 에워쌌다.
사랑하는 막내가 출품하는 그림을 구매하기 위해 김아영은 두둑하게 수표를 챙겨왔다. 본래 이 행사의 취지는 대중들에게 예술을 쉽게 접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으나, 한국대는 부잣집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부모들이 자식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면서 행사는 자식 자랑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김수현은 아버지를 대신해 김아영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다. 검은 스틸레토힐을 신은 김아영은 가느다란 발목을 내보인 채 사뿐하게 걸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높게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찰랑거렸다. PL 그룹 김아영을 알아본 학부모들은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김아영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김수현의 그림이 뭘까 빠르게 눈을 움직여 살폈다.
다른 학생들은 부모님에게 자기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말해 비싼 가격에 사게 하곤 했다. 그런데 김수현은 강직한 성격 탓에 아무리 누나한테만 말해보라고 달래도 비밀로 해야 하는 거라며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의 그림이 남들의 그림보다 저렴한 가격에 팔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어떤 게 김수현의 그림인지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이었다.
작품을 구경하는 이들로 인해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 찼던 전시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한 인물이 등장하자 전시장에 흐르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은 한순간 그의 존재감에 묻혀버렸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차기주 이사가 등장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며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PL 그룹 셋째가 가이드로 발현해 차기주 이사와 페어를 맺었다는 소문이었다.
알파 가이드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는 보통 오메가 에스퍼와 짝을 이뤘다. 가이딩할 때 어쩔 수 없이 성교를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알파 가이드와 알파 에스퍼가 페어를 맺은 것이다.
우성 알파가 극 우성 알파를 뒤로 받아내는 거냐며 온갖 추접한 말들이 사람들 사이에 귓속말로 오고 갔다. 김수현은 알파치고는 꽤 단아한 몸 선을 가진 미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쪽으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차기주는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어디 더 떠들어보세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혀를 모조리 뽑아버릴 테니까.”
차기주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흠칫, 몸을 굳혔다. 아무리 에스퍼라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사람인지라, 대부분 귓속말까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S급 에스퍼라고 하더니만……. 그의 능력이 경이로우면서도 섬뜩했다.
차기주가 손을 가볍게 휘저어 대강당의 문을 닫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쾅, 하는 굉음이 들리며 문이 닫혔다. 아무도 도망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오메가들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주저앉았다. 알파들 또한 겁에 질린 채 숨을 죽였다. 차기주의 사나운 페로몬이 목덜미에 칼을 겨누듯 살벌했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행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수현은 발에 익숙지 않은 새 구두를 신은 탓에 반쯤 절뚝거렸지만, 차기주는 수현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기쁘다는 듯 얼굴을 폈다.
가볍게 포마드로 앞머리를 넘긴 김수현은 유명 패션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수려했다. 그 앞에서 차기주는 차마 기분 안 좋은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김수현의 입술에 시선을 둔 채 다가갔다.
“수현아, 축하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님.”
차기주는 잘록한 허리를 팔로 감싼 채 김수현이 자신의 것임을 과시했다. 김수현은 같은 알파끼리 몸을 맞대고 있으면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세라 거리를 벌리려고 들었다. 소문이라면 진즉 돌고도 남았는데 말이다.
차기주는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유러피안 스타일의 정장을 입어 늘씬한 체형이 도드라진 김수현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별 무리가 쏟아질 것만 같은 검은 눈은 김수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속과 달리 겉보기에 다정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이윤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김수현은 맘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경매를 통해 구매하면 된다고 차기주에게 행사에 대해 안내했다.
“네 그림은 뭔데.”
“익명 행사거든요. 알아서 잘 찾아보세요.”
이윤석은 등 뒤로 주먹을 숨긴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이윤석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차기주는 김수현을 데리고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해둔 전시회장 1층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놀랍게도 김수현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봤다.
“이거 네가 그린 거지?”
“글쎄요.”
김수현은 어떻게 알았지,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괜히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기주가 살짝 고개를 꺾어 김수현의 귓가에 다가갔다. 위로 올라간 붉은 입꼬리가 몹시 즐거워 보였다.
“이건 분명 네 그림이야. 네 페로몬이 덕지덕지 발려 있잖아.”
“하! 아니거든요. 그림에 무슨 페로몬이 있다고 그래요.”
“왜 발끈하고 그래. 귀엽게.”
차기주는 씩씩거리는 김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줬다. 재벌 집 도련님이 어떻게 저런 가난한 옥탑방을 상상해낼 수 있나,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김수현은 교수님들께 인사를 가야 한다며 가버렸다. 차기주는 그런 김수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입꼬리를 도로 내렸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해진 그는 김수현의 작품이 아니라면 감상할 생각이 없었기에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김수현의 그림 옆에 걸려 있는 바다 그림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파란색 물감을 거칠게 찍어내 바다를 표현한 그림에는 한국 어선에 탑승한 해적들이 그려져 있었다.
소말리아 해안은 3,330km에 이르는 아프리카 최장 해안이었다. 소말리아 사람들은 남부 키스마요에서 모가디슈, 에일, 라스코레 등 대도시를 기점으로 어업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991년 소말리아 정부가 붕괴하고, 1995년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어부들은 생존을 위해 낚시 장비를 모두 팔아 라이플총과 포탄, 로켓을 샀다.
그들은 소말리아의 해적이 되어 외국 어선들을 납치해 몸값을 받아냈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워낙 유명하니 그걸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본 시기가 문제였다.
아직 뉴스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소말리아 해적에게 한국인 선원 30명이 납치되었다. 센터는 에스퍼들을 파견해 해적들을 사살하고 한국인 선원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차기주는 수도 없이 일어나는 해적 납치이니까, 하며 애써 이상한 기분을 무시한 채 멈췄던 발걸음을 뗐다.
그가 보지 못한 2층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의자, 석고 조각상, 설치 예술품, 거대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비디오 아트 영상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디오 아트 영상은 프레임이 없는 QLED 8K 텔레비전에서 실제 사람 크기만 한 영상이 나오는 것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진짜인 줄 알고 깜짝 놀라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매는 대강당에 있는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관람 의자들이 수백 석이나 줄 맞춰 놓여 있고 단상에는 작품을 띄울 커다란 스크린 화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작품을 살 사람들은 원하는 작품의 번호와 가격을 미리 적어서 제출했고 경매 참가자들은 번호가 적힌 패들을 받았다.
차기주는 35번, 김아영은 42번이었다. 경매는 학교 이사장이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예술인의 밤’을 위해 초청받은 전문 미술 경매사가 경매대에 올라섰다.
“반갑습니다. 저는 경매사 이지수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제22회 한국대 ‘예술인의 밤’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매 출발합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1번 작품이 떴다. 이 경매에 참여한 작품 중에는 원래대로라면 수백억이 넘을지 모르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그걸 운 좋게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 자식의 작품을 비싼 가격에 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온 학부모들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1번 작품입니다. 시작가 30만 원부터 5만 원씩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30만. 35만! 현장, 감사합니다.”
경매사는 손으로 패널을 드는 사람을 가리켰다.
“50만.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55만! 60만! 60만, 낙찰입니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번갈아 가며 1번 작품의 가격을 올린 후 낙찰받았다. 다른 작품들을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부모님의 돈 자랑에 뿌듯함을 느끼며 다른 친구들에게 ‘네 작품은 얼마에 팔렸어? 정말? 좋겠다. 난 얼마야’ 하며 가식을 떨어댔다.
작품을 낙찰받으면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경매사는 경쾌한 목소리로 경매를 이어나갔다.
“자, 이번에는 전시 내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는데요. 15번 작품입니다. 30만 원부터 올라갑니다. 30만!”
차기주는 패널을 들었다.
“서면 30만 원 나왔고요.”
서면은 미리 입찰받아 동일 가격 제시 시 현장에서 경매를 참가한 자보다 우선권을 가진 것을 뜻했다. 김아영이 이에 질세라 패널을 들었다. 차기주 덕에 뒤늦게 동생의 그림을 알아봤다.
“현장 35만 원. 40만. 45만. 50만.”
차기주와 김아영은 번갈아 가면서 패널을 들었다. 경매사가 이제부터는 10만 원씩 올라간다고 알렸다.
“60만. 70만. 80만. 90만. 100만. 100만입니다.”
경매에 참여한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가였다. 김수현은 이런 식으로 그림을 비싼 가격에 팔 생각이 없었기에 아픈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차기주와 김아영이 둘 다 포기하지 않고 패널을 들었다. 경매사는 경매가가 200만 원이 넘어서자 금액을 20만 원씩 높였다. 금세 그림 가격은 400만 원을 돌파했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나왔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인가 싶었는지 여기저기서 패널을 들기 시작했다. 경매는 낙찰받으려는 참여자가 많아지면서 과열되었다. 경매가가 600만 원이 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때쯤 되니 김수현의 작품은 더 이상 평범한 대학생의 그림이 아니게 되었다.
차기주는 계속 팔을 들기도 번거롭다고 느꼈다.
“2,000만.”
김아영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3,000만.”
그녀가 다리를 꼬자 드레스 밑단이 올라가 뽀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차기주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 장식하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김아영은 당연히 자신의 다리에 덮어줄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으나 손수건은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날아 김아영의 다리가 아닌, 김수현의 눈을 가렸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김수현은 눈을 가린 손수건을 떼어내기 위해 허우적허우적 팔을 내저었다.
“지금 뭐 하세요.”
“아무래도 알파와 오메가 사이지 않습니까. 가족끼리도 조심해야죠.”
“미친 새끼.”
“남매가 똑같긴.”
차기주는 김수현을 가이딩하는 김아영에게 치졸한 질투를 느끼며 패널을 들었다.
“이제 이 지루한 경매를 끝냅시다. 10억.”
경매사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10억을 외쳤다.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패널을 들며 어떻게든 그림을 사려고 들었던 이들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압도적인 그림 가격에 더 이상 호가를 부르는 이들은 없었다.
“10억. 더 없습니까? 10억. 10억. 10억! 낙찰입니다.”
김수현은 다리가 후들거려 손으로 벽을 짚고 섰다. 최유정과 이윤석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김수현을 찾았다. 그는 차기주가 경매를 끝내기 전에 도망쳐야 했기에 친구들을 모른 척하며 학생들 틈바구니에 숨었다.
자신의 그림을 사기 위해 차기주가 전투적으로 가격을 올려대는 탓에 혼이 쏙 빠져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수현은 창백한 얼굴로 자리를 급히 벗어났다.
정석훈이 그런 김수현을 부축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됐어요. 누가 나 감시하는지나 알려줘요.”
“6시 방향에 있는 기둥 뒤, 에스퍼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석훈 씨, 그 에스퍼 잠시만 맡아주세요.”
“도……망가시는 겁니까.”
그는 김수현의 팔을 낚아채 멈추어 세웠다. 김수현은 정석훈의 팔뚝을 지지대 삼아 버텨 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 정석훈을 흔들어놓았다.
“부탁드릴게요. 보셨잖아요. 별것도 아닌 내 그림을 10억에 사는 미치광이예요. 이사님한테 벗어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계속 감금당하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함께 떠나요.”
“그게 무슨?”
“제가 지켜드릴게요, 수현 씨. 그러니까 저랑 함께 떠나요.”
김수현은 정석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건 알았지만 모든 걸 버릴 정도라니? 차기주처럼 정석훈도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그의 팔을 놓으려고 했으나 정석훈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저도 가요. 저도 가겠습니다.”
담담한 검은 눈에 담긴 건 차기주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것같이 그를 빼닮은 집착이었다. 일단 그를 떨쳐내야 한다는 생각에 김수현은 거짓을 입에 올렸다.
“……그래요, 그럼. 일단 에스퍼 처리부터 부탁할게요.”
정석훈은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에스퍼에게 다가갔다. 같은 감시자인 그가 제 역할을 벗어던지고 에스퍼를 포박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멱살을 잡아당기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때, 소란을 느낀 차기주는 낙찰 확인서를 작성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김수현의 위치를 살폈다.
김수현의 모습을 쫓아 콘서트홀을 나왔다. 학생들 사이에 숨어 있던 자신의 알파가 어느새 2층에 올라가 있었다. 유독 수현의 주위에만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차기주는 한달음에 그곳으로 올라갔다. 양복을 입은 잘생긴 알파를 구경하던 사람들을 밀쳐버리고 그 앞에 섰다.
안도감에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나 그는 “수현아” 하고 부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지독한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자신이 쫓은 것은 작약꽃이 놓여 있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상이었다. 김수현 이외에 관심이 없었던 차기주는 비디오 아트 작품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생생한 영상에 작약꽃 향기까지. 시각과 후각이 주는 정보를 지나치게 믿어버렸다.
아마도 김수현이 의도했을 작은 함정에 어이없을 만큼 쉽게 속았다. 하, 헛웃음을 터트린 그는 감정의 동요와 함께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나지막이 욕설을 뱉은 차기주의 눈이 음습하게 탁해졌다.
“우리 수현이가 나 심심할까 봐 취미생활도 만들어주네.”
얼굴에서 손을 내린 그는 언제 감정을 내보였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대강당 밖에 준비해놓은 에스퍼 팀 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냥을 시작한다.”
* * *
대강당 옥상에 올라가 있던 에스퍼 팀 팀장은 야시경으로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경매가 진행 중이어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주차장 쪽을 감시하고 있던 팀원이 차 한 대가 나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원래라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당한 한국인 선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엘리트들이었으나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를 보호 및 감시하기 위해 남았다. 그 어떠한 임무도 김수현보다 우선시 될 순 없다는 게 센터에 내려진 암묵적인 방침이었다.
“A조는 차량을 추격한다. 햄스터가 아직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B조는 내부를 샅샅이 검문하도록.”
“Yes, sir.”
에스퍼들은 옥상에서 줄을 내린 채 오로지 로프에 의지해 5층 높이의 건물에서 내려왔다. 훈련받은 정예 요원들답게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듯 순식간에 지상에 발을 딛은 그들은 지하 주차장을 나오는 자동차에 달려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가 놀라서 차를 멈춰 세웠다. 에스퍼가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그가 사원증을 보여준 뒤, 차 안에서 사람을 다 내리게 하고 차 바닥과 트렁크까지 열어서 확인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안에 김수현은 없었다. 그렇지만 A조는 주차장 입구에 버티고 서서 혹시 빠져나갈지 모르는 차량을 일일이 검사했다. B조는 대강당의 유일한 입구를 통해 진입하자마자 대못과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문에 나무판을 덧대고 못질해서 봉쇄해버렸다.
에스퍼 팀 팀장은 대강당 안을 훑어보고 메가폰을 잡았다.
“긴급 대피 훈련 중입니다. 긴급 대피 훈련 중입니다. 시민 여러분은 에스퍼들의 안내에 따라 훈련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전원 대강당 로비에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한참 경매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웬 긴급 대피 훈련이냐고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콘서트홀에서 쏟아져 나왔다. 에스퍼들은 그들을 일렬로 세우고 바닥에 앉게 했다.
그 속에서도 김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차기주는 1층으로 내려와 에스퍼 팀 팀장에게 턱짓을 했다.
“아직도 못 찾았어?”
“탈출한 흔적이 없으니 내부에 있을 겁니다.”
“찾아. 못 찾으면 너희 다 죽을 줄 알아.”
* * *
긴급 대피 훈련이란 방송을 듣고 2층에 있던 관람객들도 1층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텔레비전 뒤에 숨어 있던 김수현은 “젠장” 하고 작게 욕설을 뱉었다. 내부에 있는 에스퍼를 정석훈에게 맡기고 바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차기주가 다른 에스퍼를 한 명만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 외부에서 에스퍼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뒀다. 자신이 도망친 줄 알고 차기주가 대강당을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자신이 영상으로 나오는 텔레비전에 오늘 선물 받은 작약 꽃다발을 놓아둬 차기주가 자신의 페로몬을 맡더라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차기주는 이 트릭에 속아 자신을 코앞에 두고도 1층으로 내려갔다.
김수현은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 그 소리를 듣고 차기주가 알아차릴까 봐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의 모공이 다 열린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축축하게 젖어 드는 와이셔츠가 맨살에 감겼다.
1층에 있던 차기주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도 내려오지 않자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 2층 수색해.”
에스퍼들은 우르르 계단을 향해 뛰었다. 김수현은 천천히 걸으려고 했으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힘차게 달리는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 당겨왔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숨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단 급한 대로 청소 도구를 모아두는 창고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땀에서 배어 나오는 작약꽃 향기가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와 함께 달짝지근하게 맴돌았다. 어떻게든 페로몬을 단속하려고 했으나 패닉에 빠져 쉽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칼날 같은 빛줄기에 발끝이 닿지 않기 위해 무릎을 세운 채 웅크렸다. 그러다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둔 대걸레와 빗자루, 마대 탈수기를 살짝 건드리고 말았다. 작은 달그락거림이 마른하늘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모든 걸 시커멓게 물들인 어둠이 자신의 존재도 지워주길 바랐다. 김수현은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지나쳐라.
군화를 신은 에스퍼들은 2층에 있는 문들을 하나씩 열어봤다. 그들이 가까워지는 소리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조여왔다. 에스퍼 팀 팀장은 누가 봐도 안에 김수현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청소 창고 앞에 바짝 붙어 섰다.
“햄스터 찾았습니다.”
“쉿!”
차기주는 검지로 입술을 가려 그를 조용히 시켰다. 겁먹은 김수현이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얼마나 무서울까. 겨우 이 건물 밖으로도 도망치지 못할 주제에 자꾸 자신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차기주는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청소 도구용 창고로 다가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문틈을 바라봤다. 짐승의 눈처럼 눈조리개가 움직이며 어둠 속에서 사물을 식별하였다. 그는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긴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내려가.”
“예?”
에스퍼 팀 팀장은 김수현을 눈앞에 두고서 굳이 모르는 척하는 차기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차기주는 몸을 일으키고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웃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차기주가 손짓으로 에스퍼들을 내려보냈다. 그는 청소 도구용 창고가 있는 복도를 걸어 다니며 숨바꼭질 노래를 불러댔다. 김수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포식자의 여유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다 숨었니? 찾는다.”
덜컹덜컹. 문고리가 거센 힘에 흔들리더니, 깔끔히 뽑혀 나갔다. 문이 열리며 훅 바람이 들이쳤다. 김수현은 비명을 손으로 꾹 내리눌렀다. 어둠 속에 파묻힌 김수현을 보며 조명 아래 서 있던 차기주는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수현아, 이럴 땐 눈치 빠르게 나한테 안겨야 용서받지.”
“으.”
흘러들어 온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김수현은 잔뜩 구겼던 길쭉한 팔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안 통했던 피가 돌면서 팔다리가 저릿해졌다. 수현은 이제 갓 걸음마를 뗀 기린처럼 불안정한 걸음으로 차기주에게 다가갔다. 두 팔로 두꺼운 흉통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여 김수현의 정수리에 입 맞췄다.
“재밌었다. 그렇지?”
김수현의 필사적인 도주가 차기주에게는 장난인 것이다. 그는 공포로 하얗게 질린 수현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맞췄다.
“왜 무서워해. 너한테 최대한 맞춰주고 있잖아.”
차기주의 엄지가 땀에 젖은 촉촉한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김수현은 자신을 부드럽게 책망하는 차기주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담긴 서운함이 꼭 상처받은 사람 같았다.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수현은 사람 감정을 가지고 노는 이 영리한 사이코패스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일 텐데, 수현은 마치 『농락』의 ‘김수현’처럼 흔들렸다. 어쩌면 그는 착한 사람일지도 몰라. 그가 날 진짜로 좋아할지도 몰라. 어느 순간 수현은 『농락』의 김수현이 수없이 했던 생각들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흔들 다리에서 이성을 만나면 공포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호감이라고 착각한다고 한다. 김수현의 발아래 놓인 흔들다리는 그들이 쫓는 자와 쫓기는 자라는 상황 자체였다. 자신이 정말로 차기주에게 끌리는 건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고, 아니어야만 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차기주의 등 뒤로 둘렀던 팔을 풀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도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와 있었다. 수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래야 내가 아는 김수현이지. 누나한테 인사하러 가자. 네 우리로 돌아가야지.”
우리는 짐승을 가두고 기르는 곳을 뜻했다. 김수현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라렸다. 차기주 또한 내색을 하진 않아도 상당히 열받은 상태였기에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냈다.
김수현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렇게 1층 대강당 로비로 내려가 사람들 틈에 앉아 있는 누나를 찾았다.
“수현아.”
김아영은 벌떡 일어나 동생에게 달려갔다. 에스퍼들은 긴급 재난 훈련이라며 무장 강도가 인질들을 잡아두듯 사람들을 모아뒀다. 그게 김수현을 찾기 위함이었음을 눈치챈 그녀는 보호하듯 동생을 끌어안았다. 차기주가 거침없는 손길로 김아영의 포니테일을 잡아당겼다.
“악!”
그녀가 김수현에게서 떨어지자 차기주가 바로 포니테일을 놓았다. 김아영은 얼얼한 두피를 손으로 문질렀다.
“김아영 씨,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남매끼리 끌어안고 싶습니까. 왜요? 동생이 너무 잘생겨서 이참에 사귀게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제발 우리 좀 불순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내가 불순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평범한 남매와 다르게 애틋한 겁니다.”
질투에 미친 차기주는 정말이지 눈에 뵈는 게 없는 새끼였다. 어떻게 남매인 그들을 오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에스퍼라는 이유로 그를 때릴 수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는데 김수현이 차기주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입 닥치세요. 두 번 다시 누나와 나를 그딴 더러운 추문으로 엮으면 그땐 이사님 가이딩 안 합니다.”
차기주는 찢어진 볼 안쪽 살을 혀로 훑었다. 상처가 바로 회복되어서 잔잔하게 피 맛이 돌았다. 그는 이미 멀쩡해진 뺨을 부러 보여주기식으로 매만졌다. 입가에 살짝 흘러내린 피에 김수현의 시선이 맺혔다.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김수현은 그것 가지고는 모자란다는 듯 차기주의 머리채를 손으로 낚아챘다. 그가 무례하게 누나의 포니테일을 잡아당겼던 일의 복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에스퍼들과 관람객들은 헉, 숨을 들이켰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누나한테 해야겠죠. 머리 잡아당긴 거 사과하세요.”
손을 펴니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강한 S급 에스퍼라도 머리카락까지 최강은 아닌 듯했다. 김수현은 손끼리 부딪쳐서 그것들을 털어냈다. 차기주는 김아영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김아영 씨.”
“아, 아. 네.”
당황한 김아영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동생이 걱정되어서 힐끔 쳐다보니 수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에스퍼들은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대강당의 출입문을 봉쇄했던 나무판자를 뜯어냈다. 이 사건으로 김수현은 자신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차기주 가이드라는 걸 전교생이 알게 될 터였다. 정석훈도 단순한 경호원이 아닌 에스퍼라는 걸 눈치채겠지. 친하게 지내는 최유정은 자신을 피하게 될 거고, 이윤석은 작가니까 차기주의 잔혹함을 더 잘 알아 겁먹을 게 분명했다.
김수현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는 최유정과 이윤석을 찾았다. 최유정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고 이윤석은 눈썹이 치켜 올라갈 만큼 눈을 크게 뜬 채였다. 주먹으로 입을 가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섣부른 도주였던 걸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기회가 또 언제 온다고, 성공할지 안 할지 재는 배부른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나. 나 갈게.”
“응. 수현아, 오늘 고생 많았어.”
차기주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함부로 다룬 자신을 책망하기는커녕,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감싸 안았다. 따끔거리는 시선이 소나기처럼 자신을 흠뻑 적셨다. 김수현은 그에게 안긴 채 지하 주차장까지 걸었다. 대기 중이던 운전기사가 마이*흐의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김수현이 차에 오르자, 차기주가 바로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차기주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김수현의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꼭 감싸 쥐었다.
* * *
최유정은 입에서 주먹을 떼어낸 이윤석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잇자국으로 살갗이 파였다. 얼마나 세게 깨문 건지,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걱정스럽게 손을 가져가 살피려고 하자 이윤석이 거칠게 손을 빼냈다.
이윤석의 행동에 마음 상한 최유정이 뭐라고 내뱉으려는 순간, 상처가 씻은 듯 회복되었다. 최유정은 할 말을 잃었다.
“너…… 에스퍼였어?”
“예, E급 에스퍼예요.”
누가 그랬다. 일반인이 에스퍼와 가이드를 만날 확률은 지구에서 백조자리 방향으로 약 3천 340광년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케플러-47 행성계를 맨눈으로 볼 확률과도 같다고. 농담조로 과장한 말이긴 했지만 어쨌든 능력자들을 실제로 보는 것이 요원한 일인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센터 에스퍼들을 본 것으로도 모자라 뉴스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그 ‘차기주’ 이사를 봤다. 남몰래 흠모한 대학 후배는 무려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였고, 그의 친구로서 자신과 함께 다니던 이윤석마저 에스퍼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늘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하고 속으로 농담을 삼킨 최유정은 놀란 가슴을 잠재우려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정도는 그냥 나아요.”
에스퍼에 대해 무지한 그녀는 이윤석에 말에 ‘역시 에스퍼는 상처가 쉽게 낫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가 어렵게 느꼈다.
“으응. 그래, 윤석아. 오늘 고생 많았어.”
“네, 누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끄덕이고 빠르게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행사에 참여했던 관람객들은 무려 그 차기주 이사를 때렸던 김수현에 대해 이야기하며 연신 “대박”을 외쳐댔다. 그 잘난 차기주도 자기 가이드한테는 굽히고 들어가는구나 싶어 놀라는 한편, 가이드에 대한 환상이 담긴 감탄이었다.
이윤석은 자신의 예상과 달리 사이좋아 보였던 두 알파를 떠올리며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가 준 소설 『농락』을 읽었으면 김수현은 차기주를 벌레 취급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까 본 김수현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자기를 감금 중인 극악무도한 에스퍼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지?’
김아영의 머리를 차기주가 잡아당기자 김수현은 당당히 누나의 복수를 했다. 그건 차기주가 자기를 절대 공격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김수현이 이를 인지했든 하지 못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또다시 사랑에 빠져 짐승처럼 붙어먹을 테니까!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이윤석은 초조함에 엄지를 입에 물고 손톱을 뜯었다. 짧아진 손톱 밑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상처가 생겼다가 곧바로 재생되길 반복했다.
분명 자신이 소설을 통해 차기주가 김수현을 강간했음을 알려주었건만 왜 김수현은 그를 또 믿는 걸까. 세뇌의 부작용인가? 아닌데. 차기주가 선배라는 건 모르는 것 같았는데…….
요동치는 감정에 따라 파동도 불안정해졌다. 이윤석은 바로 제네시스 신도 중 가이드 한 명을 택해 연락을 넣었다. 빌어먹을 가이딩을 받아야 했다.
자신도 김수현을 가지고 싶었다. 차기주만 그를 독차지하는 건 매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이었다. 그 녀석은 이미 한 번 김수현을 가졌으니 이제는 자신의 차례여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자신만큼 김수현을 아껴주는 존재는 없을 게 분명했다. 차기주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드는 무식한 새끼였다. 폭력적이고 잔인해서 선량한 괴수들을 찢어 죽였다. 반면 자신은 어떠한가.
자신은 아름다운 대지, 가이아를 병들게 하는 해충들을 박멸하는 정의의 사도였다. 자기 죄를 반성할 줄도 모르고 신에 반하는 인간 중에서 차기주가 최고봉으로 사악하고 악랄했다. 김수현은 속고 있는 거였다.
어리석고 순진한 김수현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사용한다고 해도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괜찮았다.
신께서도 자신이 김수현을 구해내면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인간일 리 없다고, 어서 천계로 오라며 두 팔을 벌려 반기시겠지. 이윤석은 김수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을 하며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김수현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했다. 착한 자신은 차기주와 달리 김수현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을 거다. 차기주와 자신은 달랐다.
드라마를 보니까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주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보호받는 중인 김수현에게 생명의 위협 같은 위기가 올 리 없으니, 직접 괴수를 보내 위험한 상황을 연출한 뒤 구해주면 될 것 같았다.
그럼 김수현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제 발로 따라오겠지. 사회화가 안 된 인외의 존재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정보를 조합해놓고는 그럴듯한 계획이라는 생각에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천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이윤석은 발그레한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드라마에 나온 가이드의 얼굴 위로 김수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드라마에서는 에스퍼가 괴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자, 가이드가 진한 키스를 해줬다.
이윤석은 천사가 인간과 키스를 하는 것이 대죄라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지금 반은 인간이니까 괜찮아’라며 자기합리화했다. 순백의 영혼이 조금씩 갉아 먹히는 줄도 모른 채 그는 신이 나 힘차게 달렸다.
드라마에서처럼 멋지게 등장해서 김수현을 구해내야지. 제일 비싼 양복과 구두를 차려입고 청담동에 들러 헤어 스타일링도 받을 거다. 김수현과 자신은 분명 그 순간 아주 멋진,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되어 있을 테다.
이윤석은 학교 주차장에 세워둔 빨간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핸들에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 말이 그려진 로고가 박혀 있었다. 메시아를 따르는 제네시스 신도가 바친 공물이었다. 이윤석은 새삼 돈이 있으면 누구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멋져질 수 있다는 생각에 샐쭉 웃음을 내비쳤다.
그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누르자 부아아아앙, 스포츠카에서 굉음이 났다.
“아차, 뉴스 확인해야 하는데.”
첫 번째 메시아라는 자가 사기꾼을 통해 연락을 취해왔다. 이윤석은 그자가 첫 번째 메시아임을 증명할 증거를 요구했다. 자칭 첫 번째 메시아는 조만간 소말리아 해안에 해적이 출몰해 한국 배를 납치할 거라고 했다.
‘예술인의 밤’에 출품한 그림, ‘여명의 눈동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린 거였다.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르는 찰나,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던 바다가 순식간에 피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에스퍼들이 한국인 선원을 구하기 위해 선박으로 진입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첫 번째 메시아가 그 그림을 사서 자기 존재를 알리기로 했는데, 개 같은 차기주의 에스퍼들이 훼방을 놓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살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회귀하고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탓에 그로서는 알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설령 회귀자 중 기억을 되찾은 자가 사기를 치려고 하는 거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가짜와 만나 어울리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테니까.
“흐음. 좀 더 기다려보지 뭐.”
그는 조수석에 스마트폰을 던져놓고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 * *
“손 좀 놔주세요.”
수현이 입을 열고서야 차기주가 슬그머니 그의 주먹을 놓아주었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손에서 수현의 무게가 빠져나가자 어딘가 어색했다.
“우리 계약, 한 번 어겼다고 계속 어길 생각이세요?”
“수현아, 난 내가 너한테 무척 잘해줬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가두기는 했지만, 학교도 보내주고 핸드폰도 사용하게 해줬잖아. 그런데 넌 왜 날 이렇게 미워하기만 할까.”
김수현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고 드는 차기주를 피해 고개를 사선으로 내렸다.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무서울 뿐.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게 뻔한데, 그런 존재에게 마음을 빼앗겨 선배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다. 김수현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
차기주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싫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중력처럼,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자신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태백산 입구에 도달해 차량에서 내렸다. 오프로드를 달리는 데 특화된 G*겐이 있는 곳까지는 두 발로 걸어서 산을 올라야 했다.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등산로에 진입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단풍잎을 뭉텅이로 날려 주황색과 붉은색으로 두 사람의 앞길을 물들였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걷다 보니 땀이 나 피부에 달라붙은 먼지와 뒤엉켰다.
마른 낙엽 사이로 황급히 도망치는 쥐가 보였다. 움찔, 수현의 어깨가 솟아올랐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착 가라앉았다. 차기주가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를 옆에 두고 겨우 쥐에 겁먹은 자신을 위한 그의 배려가 씹지도 않고 삼킨 사과 조각처럼 마음에 쿡, 하고 걸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되레 차기주를 의식하게 되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야 했다. 생각에 잠긴 채 걷던 수현은 낙엽 밑에 숨겨진 돌부리를 채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 발목이 크게 비틀려 넘어질 뻔했다. 휘청이는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팔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정신을 차린 김수현은 차기주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놔요.”
“발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수현이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도 차기주가 자신의 발을 살피려고 들었다.
“왜 그래요. 보지 말라고요.”
“너 구두 새거라 불편하잖아.”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김수현의 발을 들어 올렸다.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딱딱한 새 구두를 벗겨내자 뒤꿈치가 까졌는지 피 묻은 양말이 드러났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김수현을 근처에 있던 바위에 앉힌 채 반대쪽 구두도 벗겨냈다.
“나 보고 맨발로 산을 타라고요?”
“누가 너 보고 산 타래.”
구두를 빼앗은 차기주가 등을 보이며 업히라고 했다.
“싫거든요. 구두 돌려줘요.”
구두를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가 들고 있던 구두를 휙 덤불 사이로 던져버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뭐 하긴. 잘하는 짓이지. 어서 업혀. 여기서 밤새울 거면 상관없고.”
수현은 입술을 깨문 채 차기주의 등에 올라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왕이면 목을 아주 조를 생각이었다. 답답하지도 않은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팔로 김수현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채 일어섰다. 뻣뻣한 가죽 구두에 갇힌 채 온종일 비명을 지르던 발에 솔솔 바람이 불어왔다.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며 저린 발을 풀어봤다.
“하여간 어리석어. 오늘 계속 서 있을 거였으면서 왜 새 구두를 신어.”
“잔소리하지 마요.”
“잔소리가 아니라 속상해서 그렇지. 넌 네 멋대로 하는데 난 내 멋대로 말도 못해?”
수현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어버렸다. 그러자 차기주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발이 편해지자 긴장해서 땀을 흠뻑 흘렸던 몸이 파업해버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깐만 자고 차 탈 때 일어나야지.
차기주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통해 김수현이 잠들었음을 눈치챘다. 제 속을 실컷 썩여놓고 나 몰라라 곤히 잠든 게 어이없는 동시에 귀엽게 느껴졌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맘고생을 했는데, 정말 미쳤다. 갈 데까지 갔구나, 차기주.
차기주는 혹시 몰라 차량 위에 위장용으로 덮어놓았던 방수천을 염력을 사용해 걷어냈다. 조수석 문을 열고 김수현을 태웠다. 안전벨트를 꼼꼼히 채워준 그는 프런트 범퍼를 돌아 운전석에 탔다. 그는 시동을 켜는 대신 염력을 이용해 G*겐을 들어 올렸다.
자연 그대로 방치된 태백산을 운전하다 보면 나무뿌리에 걸리거나 돌조각이 바퀴에 튀어서 차가 덜커덩거렸다. 차기주는 잠든 김수현이 깨지 않도록 굳이 염력을 사용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차를 움직여 센터로 향했다.
이렇게 능력을 과용할 수 있는 건 다 김수현 덕분이었다. 그는 손목에 차고 있는 파동 측정기 시계에서 수치가 쭉쭉 올라가도 힐끔 쳐다만 봤다. 김수현은 존재만으로도 그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안겨줬다. 그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있는 수현을 눈에 담았다.
자신이 이러는 건 다 가이딩 때문일 터였다. 그는 김수현에게만 특별히 발휘되는, 이 비정상적인 집착에 대한 이유를 그리 규정하기로 했다. 이 감정을 짝사랑이라고 부르려니 심장이 찢기듯 아팠다. 영원히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랑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는 어리석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게 김수현에게 미움을 받는 그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었다.
센터에 도착한 그는 김수현을 안고 징벌방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김수현을 눕히고 양말을 벗겨냈다. 그도 한 명의 에스퍼이건만, 겨우 까진 발꿈치가 낫지를 않았다. 이렇게나 약해빠져서는 자꾸만 보호본능을 자극하니, 차기주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잘못을 묻지 못하는 거다.
그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퉁퉁 부은 발을 감싸고 주물렀다. 소독약을 바르면 따가워할까 싶어 상처 주위에 요오드를 발라주고 상처에 연고를 바른 뒤, 자는 동안 침구에 묻지 않도록 커다란 반창고로 뒤꿈치를 덮어줬다.
그는 치료를 마치고 한참 동안 힘줄 하나 돋아나지 않은 수현의 고운 발등을 구경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이 작은 방에만 갇혀 있으려니 많이 힘들긴 할 거다.
그렇지만 김수현이 자기가 돌보지 못하는 사이 메시아에게 죽임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안전하게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들여다보는 게 나았다. 그렇게 김수현을 완전히 제 품에 가둬놓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방 안에 수현의 고른 숨소리만이 울리기를 잠시, 차기주는 다람쥐가 미친 듯이 쳇바퀴를 돌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해. 네 주인 깬다.”
그는 케이지로 다가가 앞에 놓인 도토리를 몇 개 꺼내서 넣어줬다. 다람쥐가 쳇바퀴에서 내려와 양 볼이 미어지도록 도토리를 삼켰다. 그러곤 자기가 정한 아지트인지 구석에 가서 입에 넣은 도토리를 뱉어 숨겼다.
먹지도 않고 모아놓기만 한 도토리의 양이 이미 상당해 보였다. 겨울이 오면 먹이를 찾기 힘들어서 비축하는 습관 때문일 터였다. 이제 이 케이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 배고픔 따위 모르고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다람쥐는 그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김수현 또한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들까? 자신이 내어주는 안락한 품에 기대지 못하고 결국 또 제 곁을 벗어나려 들까?
그는 다람쥐에게 당장 먹이를 먹지 않으면 영영 먹지 못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케이지 안으로 손을 넣어 그동안 다람쥐가 모아둔 도토리를 전부 꺼냈다. 이제는 자기 삶이 바뀌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람쥐가 찍찍 울며 그의 손을 물어뜯었다. 그래도 그는 기어코 다람쥐에게서 도토리를 빼앗았다. 그리고 빼앗은 도토리 중 한 개를 다시 건넸다. 다람쥐는 그걸 숨기기 위해 구석으로 기어갔다. 그럼 그는 그 도토리를 또 빼앗았다. 그는 도토리를 건넸고 다람쥐는 숨겼다.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손이 넝마로 변했을 터였다. 차기주는 다람쥐에게 또다시 도토리를 건넸다. 그 녀석은 그제야 도토리를 물어 숨기는 대신, 그 자리에서 도토리를 손으로 잡고 앞니로 돌돌 깨 먹었다.
차기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김수현은 몸을 좌우로 뒤척이다가 쭉 기지개를 켰다. 잠에 대한 아쉬움으로 부드러운 거위 털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발로 바닥을 딛는데 뒤꿈치에 붙여놓은 커다란 반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
수현은 손으로 차기주가 정성을 담아 치료해주었을 그것을 오랫동안 매만졌다.
“아, 젠장. 좆 됐다.”
차기주 새끼는 왜 가만히 있고 싶은 사람을 흔들어놓는 걸까. 이딴 호의 필요 없다고 반창고를 떼어버려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어 손바닥으로 받았다. 연거푸 세수를 한 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울 속 자신을 노려봤다. 빨갛게 뺨이 익은 게 누가 봐도 설레하는 꼴이다. 이미 늦었다. 헤픈 새끼. 더러운 새끼. 수현은 온갖 욕설로 스스로를 매도했다.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차기주에게 설레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선배가 이런 날 알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겠어.”
애써 부정해봤다. 이미 늦었다는 자각이 섰음에도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꼴은 자신이 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수현은 빠르게 양치를 마친 채 화장실을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와 꽃비를 본 사람처럼 콩닥콩닥 설레는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일부러 행거에 걸린 옷 중 가장 어두운색의 니트를 골라 입었다.
남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검은 양말을 챙겨 신었다. 그러곤 알 수 없는 기대로 현관문을 돌아봤다. 정작 현관문은 조용했고 그가 깨어난 걸 안 다람쥐만이 찍찍 울며 관심을 끌었다.
물통을 갈아주고 솔로 케이지 바닥을 쓸어냈다. 김수현은 쳇바퀴를 빠르게 도는 다람쥐를 보다가 또다시 현관 쪽을 쳐다봤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람쥐는 도토리뿐만 아니라 사과와 오렌지, 애호박 같은 것도 잘 먹는다고 했다. 수현은 오늘따라 다람쥐에게 그것들을 꼭 주고 싶었다. 그것들을 다람쥐에게 주려면 전부 칼로 잘라야 했고, 그래서 차기주가 기다려지는 것뿐이었다. 그가 기다려지는 건 정말 단순히 그것 때문이었다. 수현은 구질구질한 변명을 속으로 늘어놓으며 그가 언제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다.
적막한 징벌방에 철제 계단을 구두로 밟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김수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 “널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우선 넌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는 거야. 난 곁눈질로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씨앗이거든. 그러면서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면 돼.” 여우가 대답했다.
그다음 날 어린 왕자는 다시 왔다. 여우가 말했다.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3시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난 더 행복해질 거야. 4시가 되면 이미 나는 불안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난 알 수 없을 거야. 의례가 필요해.1)
등교 전, 아침에 밥을 먹이러 오는 반복되는 일상이 차기주가 자신에게 행하는 길들임이었다. 김수현은 현관 쪽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는 평소와 달리 손에 종이 박스를 들고 있었다. 차기주는 종이 박스를 열어서 안에 든 신발을 꺼내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스웨이드 소재로 된 로퍼였는데, 앞은 막혀 있고 뒤가 뚫려 있어서 슬리퍼처럼 편하게 신을 수 있는 블로퍼 종류였다.
“으.”
함부로 다정한 차기주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수현은 주먹으로 아픈 심장을 꾹 내리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으나 여전히 자신의 마음은 그대로였다. 수현은 구두를 벗고 막 안으로 들어선 차기주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김수현의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실수인 척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입술의 감촉이 김수현을 전율케 했다.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감정은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애달팠다.
“만약 이 모든 게 거짓이면 당신,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어리석게도 자신은 차기주를 믿고 싶었다. 『능력자들』과 『농락』을 읽었음에도 그를 믿고 싶었다.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선배를 잊지 못하는 한편, 차기주 또한 좋았다. 모순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마음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양복 재킷의 뒷자락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손아귀에서 검은 천이 회오리처럼 주름 잡혔다. 차기주가 김수현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수현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 순순히 자신이 그에게 굴복했음을 받아들였다.
“난 절대로 널 속이지 않아. 난 널 해치지도 않을 거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거야.”
김수현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딴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보호할 건지 아닌지 묻는 게 아니었다. 당신이 정말 날 좋아하는 거냐고, 그 모든 다정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수현은 가슴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서 차기주를 올려다봤다.
목에 맨 넥타이를 잡아당겨 그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자신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얼굴로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언제나 차가운 인상을 유지하던 남자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흔들리는 동공과 거친 숨, 입을 맞대고 있는 동안 빨간 물감으로 칠해놓은 것같이 붉게 물든 귀까지. 그 모든 게 차기주의 동요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줬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동안 했던 고민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수현이 먼저 붙였던 입술을 떼어냈다. 차기주의 두꺼운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이사님 나 좋아하죠?”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켰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저 영악한 녀석이 그 사실을 약점 삼아 자신을 얼마나 흔들어놓을까,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지옥의 밑바닥을 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까짓 감정 따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충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꽉 눌러 담아 외면하고, 자신조차 바라지 않는다는 듯 버려두려 했다. 여기서 부정하기만 하면 김수현이 그의 짝사랑을 알아차릴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한마디. ‘널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의 입술은 단 1mm도 떼어지지 않았다. 그는 무서운 괴물을 마주한 아이처럼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정작 김수현에게 괴물 같은 존재는 자신이건만, 그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사실 나도 그래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차기주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김수현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사님은 참 못된 사람이에요. 일부러 날 가두고 길들인 거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날 길들인 건 너야.”
김수현이 뒤에서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등줄기에 얼굴을 파묻고 어리광을 부리듯 비볐다.
“내 뺨에 연고를 발라줬잖아요.”
“네가 다쳤으니까.”
“뒤꿈치가 까졌다고 업어주고.”
“네가 아픈 게 싫으니까.”
“뒤꿈치에 반창고도 붙여두고 로퍼까지 준비해 오고.”
차기주는 그의 배 위에 있는 김수현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숨기려고 했던 건, 그리고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의 망상에 불과했었나 보다. 이렇게까지 티가 났는지 몰랐다.
“정말 바람둥이라니까.”
김수현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그는 그만 실소하고야 말았다. 바람둥이라니. 그와 제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는 여태 사랑이란 사치스러운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정체를 꼭꼭 숨긴 채 숨죽이며 스스로의 목을 조이기 급급했다.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특이체질 때문에 아무리 가이드를 만나도 섹스 가이딩은 번번이 불발되었고, 고자라는 치욕스러운 소문과 함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겁에 질린 채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던 내게 네가 어떤 의미인지, 너는 모르겠지.
“사과 좀 깎아줘요. 다람쥐 아침 먹이게.”
밤사이 원수 사이가 된 다람쥐가 차기주를 보고 끼이이 끼끼, 난동을 부렸다. 그는 말 못하는 짐승에게 네가 그래봤자 네 주인은 모른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허리에 김수현을 매단 채 뒤뚱뒤뚱 걸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야채 칸에 넣어둔 사과를 꺼내 싱크대에서 씻을 때까지 김수현은 그의 허리를 놓지 않았다. 차기주는 그동안 김수현이 속 썩이며 쌓인 앙금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자신을 방심하게 하고 또 도망치려는 계획인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는 지금의 행복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설령 수현의 애정이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의심하기보다 이 행복을 맘껏 누리기로 했다.
이런 적 있나 싶을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가 뻐근했다. 분명 찰싹 달라붙은 김수현이 귀찮아야 하는데 차기주는 코알라 새끼처럼 구는 수현을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 싱크대 하부 장에 지문을 인식하고 과도를 꺼냈다. 의자에 앉으면 김수현이 팔을 풀까 싶어 그는 꿋꿋이 서서 사과를 깎았다. 얇게 벗겨진 붉은 껍질은 뱀의 똬리처럼 쌓여갔다.
그는 다람쥐가 집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사과를 작게 큐브 형태로 조각냈다. 김수현이 냉큼 그것을 가져가 케이지 안에 넣었다. 다람쥐는 지난밤 교훈을 잊지 않았는지 바로 배를 채웠다.
“너 어쩐 일이야. 맨날 안 먹고 숨기더니만. 우리 다람쥐 잘 먹으니까 보기 좋다.”
코를 찡긋거리며 다람쥐가 김수현의 검지에 뺨을 비볐다. 사과를 배불리 먹은 다람쥐는 금세 두 다리를 뻗고 드러누웠다.
김수현은 케이지에 바짝 붙어서 다람쥐의 볼록 튀어나온 배 좀 보라며 차기주에게 손짓했다.
“정말 귀엽죠?”
“응.”
넌 참 귀여워.
차기주의 고개가 김수현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쫓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겠다며 더러운 창고 안에 숨었으면서 고작 반창고 하나에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차기주는 그런 김수현이 신기하고 안타까웠다. 그간 얼마나 외롭게 지냈으면 자신 같은 놈한테 넘어왔을까. 그가 해준 거라고는 다쳤을 때 치료해준 것뿐이었는데.
그러다 차기주는 문득, 자신이 왜 김수현에게 반했는지 생각해봤다. 김수현은 차기주에게 연고를 발라주지도, 반창고를 붙여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마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고 하면 김수현은 믿지 않을 것 같다. 차기주 본인 또한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이것은 오래된 미래가 아니었을까 하는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지금이 되어버린 그 미래에 자신이 김수현을 사랑하고 있기에. 과거의 자신 또한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호텔리어를 보고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오래전에 정해진 미래. 차기주는 그 미래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필수 불가결하고 불가역적이었다. 단순히 그럴 운명이었기에, 상대방에게 그 무엇 하나 받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몽땅 넘겨버린 거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건, 현재에 이르러서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과도 같았다.
김수현보고 멍청하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훨씬 어이없었으니까. 운명을 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냉장고를 뒤졌다. 아침으로 뭘 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달걀을 꺼냈다. 실온에 보관 중인 식빵에 달걀물을 묻혀서 프라이팬에서 익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렌치토스트에 살살 설탕을 뿌려 내놨다.
“와, 나 이거 좋아하는데. 이사님은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걸 잘 알아요?”
“그러게.”
김수현이 사과를 먹는 다람쥐를 뿌듯하게 바라봤듯 그는 자신이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김수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데, 김수현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시간만 유독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다 먹었어?”
“네.”
설탕 가루가 묻어 반짝거리는 입술이 대답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차기주의 상체가 아일랜드 식당을 가로질렀다. 그는 두 손으로 가볍게 김수현의 얼굴을 감싸고 그 입술에 묻은 설탕을 핥았다. 김수현의 혀가 차기주의 입 안으로 넘어왔다.
참 달다. 너.
혹시 저번처럼 김수현이 거부할까 하는 두려움은 침에 녹아든 설탕처럼 점점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