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2)
한국대 미술대학은 1년에 한 번 ‘예술인의 밤’이란 행사를 열어 학년과 상관없이 재학생들의 작품을 익명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 예술 발전을 위한 행사로써 유명한 기성 작가들은 물론, 수백억을 호가하는 대작가의 작품도 출품되어 컬렉터들과 일반인들의 참여에 이바지했다.
운이 좋다면 저렴한 가격에 유명 화가의 작품을 얻을 기회였다. 평소 미술에 관심 없던 이들도 혹시 모를 횡재를 꿈꾸며 학교에 방문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 갔다.
‘예술인의 밤’에 참가하기 위해 김수현도 강의가 비는 시간을 틈타 학교에서 작업 중이었다. 여러 학생이 사용하는 장소인 만큼 그가 이윤석의 출입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수현은 매끈한 피부를 사포로 긁어대는 것같이 강렬하게 자신을 훑는 시선을 무시한 채,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수현을 비롯한 학생들이 한창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실습실 뒤편의 여닫이문을 열고 최유정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도넛 박스를 본 학생들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다들 배고프지? 도넛 먹고 해.”
“와. 선배님, 감사합니다.”
다섯 명의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최유정에게 달려들어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제각각 손에 묻은 흑연이나 물감을 클렌징 티슈로 닦아내며,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는 이윤석과 김수현을 흘깃 쳐다봤다.
“야, 네가 말 걸어봐. 같이 먹자고.”
“설마 재벌 아들이 이런 걸 먹겠어?”
다른 동기들은 수업이 끝난 후에 함께 대학가 근처에 술을 마시러 가거나 학과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수현은 그런 방식으로 동기들과 친분을 만들어두지 않았고 그 탓에 그들은 수현이 일부러 그들과 상종하지 않는, 고고한 재벌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오해였지만 일일이 찾아가 해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내버려뒀다. 어차피 수현은 강의가 끝나면 정석훈에게 정중하게 끌려가 징벌방에 갇히는 신세였다. 지금이야 그들이 정석훈을 PL 그룹에서 일하는 경호원으로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약 자신이 차기주의 가이딩을 위해 감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학교에 소문이 돌 게 분명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선배가 자신이 다른 남자와 잔다고 상상할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평범한 학생이었으면 학교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다가 사그라질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재벌 아들이라, 그 소문이 인터넷에까지 퍼져 전 국민들이 자신과 차기주의 관계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걱정인 것은 알지만, 학교와 징벌방에만 갇혀 지내서 그런지 요즘 부쩍 부정적인 생각이 늘었다. 심지어는 그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일도 잦아졌다. 수현은 피곤한 얼굴로 애써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와. 이것들이 우리 수현이를 따돌리고 있었어? 야, 수현이 그런 애 아니거든. 나랑 학식도 먹고 돈 가지고 사람 차별하지도 않아. 근데 너희는 왜 돈 있다고 차별하냐.”
최유정이 김수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도넛 박스에서 초콜릿으로 코팅된 바바리안 크림 도넛을 집어서 수현의 입에 물렸다. 김수현은 도넛을 오물오물 먹으며 자신을 향한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묵묵히 받아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이윤석을 동기 중 하나가 불렀다.
“윤석아, 너도 와서 먹어.”
캔버스에 파란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던 이윤석이 드르륵 의자 소리를 내며 일어나, 김수현과 함께 드러그 스토어에서 산 클렌징 티슈를 꺼내 더러운 손을 닦아냈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장난을 치던 이윤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몇 번 농담을 주고받았던 이들이 물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어. 나 수현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내 속내를 다 털어놨는데 연락 차단당했어. 내가 많이 부담스러웠나 봐.”
“야! 이 미친 새끼야! 네가 이상한 소리 해서 그런 건데 왜 애들 오해하게 말해.”
화난 최유정이 이윤석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쳤다. 이윤석은 밀려나지 않고 최유정을 내려다봤다. 그 시선에 위압감을 느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이윤석의 시선을 피했다.
“수현아.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어. 혹시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으면 이메일 확인해줘. 네가 꼭 읽어줬으면 하는 게 있어.”
그 말을 뒤로한 채 이윤석이 실습실을 나가버렸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동기들은 차마 도넛을 더 집어 먹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김수현은 입에 든 달콤한 도넛을 급하게 씹어 삼켰다.
“미안해. 편하게 먹어, 얘들아.”
수현이 급히 가방을 챙겨서 나오자, 옆에 바짝 따라붙은 정석훈이 혹 이윤석이 스토커냐고 물어왔다.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며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수현은 첨부 파일 제목을 보고 흠칫,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윤석이는 제 친구예요.”
“뭔가 이상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이윤석을 수현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같이 움찔거렸다. 수현은 힘이 들어간 그의 주먹을 살짝 감싸 쥐었다.
“친구끼리 작은 오해가 생겨서 싸운 건데 일일이 이사님한테 보고할 건 아니죠?”
“……예.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석훈 씨.”
김수현이 두 눈을 휘며 웃자 그의 애교 살이 도드라졌다. 단순히 고마움을 담은 미소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옅은 붉은 기가 도는 눈가는 정석훈의 정신을 엉망진창으로 뒤흔들어놓았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앞서가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김수현과 맞닿았던 주먹을 만져봤다.
아직도 닿는 순간 느껴졌던 따뜻한 온기와 함께 고급스러운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꽃을 잘 알지 못하는 그조차도 김수현의 페로몬 향이 가진 형태가 매우 아름다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매혹적인 향을 풍길 리가 없었다.
그의 근무는 김수현을 학교에서 센터 징벌방까지 무사히 데려다놓는 걸로 끝났다.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알파를 죄인처럼 가두고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운 추를 매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워 잘 떨어지지조차 않았다.
센터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센터에는 온갖 편의 시설을 비롯한 가게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괴수를 잡는 게 일인 회사원들만 모아놓은 센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게는 꽃집이었다. 예전에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 생각했으나, 평소처럼 그 옆을 지나던 그는 코에 스미는 기분 좋은 향기에 홀린 듯 그곳에 들어갔다.
이 첩첩산중에서도 꽃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바로 에스퍼들이었다. 에스퍼는 가이드에 대한 독점욕과 집착이 강했다. 자신과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어떻게든 현혹해 페어를 맺고, 연인이 되어 결혼까지 하려고 들었다.
그렇게 해야 온전히 가이드를 소유해 안정적으로 가이딩을 독점할 수 있으니까.
페어를 맺고 싶은 가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이딩 중독 증세를 막기 위해 여러 가이드에게 돌아가며 가이딩을 받는 정석훈은 꽃집과 아무런 접전이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는 더 이상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미 김수현의 페로몬은 공기 중으로 흩어진 지 오래일 텐데, 마치 그것을 가두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있던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익숙한 향기를 찾았다. 정석훈은 김수현을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꽃을 빤히 쳐다봤다. 하얀색의 순결한 꽃잎이 풍성하게 피어나 있었다.
예쁘고 아름답다.
김수현이 웃을 때 솟아올랐던 하얀 두 뺨이 떠올랐다.
“작약꽃 정말 예쁘죠? 꽃말도 행복한 결혼이라 찾으시는 에스퍼분들이 많으세요. 고백용으로 최고 인기랍니다.”
꽃가게 주인이 적절한 영업 멘트를 날렸다. 정석훈은 필요도 없고 먹을 수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는 금방 시들어버릴 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포장해달라고 했다.
제 손으로 꽃을 사보긴 처음이었다. 그는 작약 꽃다발을 들고 기숙사 방에 들어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쩌자고 사버린 걸까. 이대로 두면 금세 시들어버릴 터라 한숨을 뒤로한 채 화병을 찾았으나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방을 나와 화병까지 구매하고 말았다.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었으나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는 정석훈의 입가에는 이상하게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기숙사 방문을 열 때는 작약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콧노래를 부르며 꽃다발 포장을 풀었다. 화병을 깨끗이 씻어 물을 채운 후, 보기 좋게 꽃을 담은 그는 침대 맞은편에 작약꽃을 장식했다. 에스퍼의 예민한 감각이 때로는 아주 도움이 되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화병을 꽤 멀리 두었음에도 꼭 작약꽃에 파묻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숨이 벅차도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 손으로 거세게 맥박이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미 김수현을…….
그런 정석훈에게 김수현이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업을 듣기 위해 겨우 징벌방을 벗어난 김수현이 정석훈의 거친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석훈 씨, 제발 학교에서만큼은 저 자유롭게 풀어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로 도망 안 칠게요, 네?”
“안 됩니다.”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온종일 감시당하는 기분이 어떤 줄 알아요?”
김수현이 고개를 푹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정석훈은 그를 달래줘야 하나 싶어 허공에서 손을 멈춘 채 고민했다. 이대로 김수현을 끌어안는다면 어떨까. ……이사님이 알면 그의 손목을 잘라버릴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는 김수현의 부탁을 들어줘서도 안 되고, 그를 끌어안아서도 안 됐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어느새 애달프게 떨리는 김수현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수현은 오메가도, 심지어는 그렇게 품에 쏙 파고드는 체격도 아니었지만, 자신보다 우월한 알파를 끌어안은 그는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쿵쿵, 설렘과 불안으로 크게 진동하는 심장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아주 아주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자신만 입을 다문다면 이사님께서 절대 알 수 없는 부정임에도 정석훈은 자신의 앞날을 예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차기주의 손에 죽을 것이다. 절대 가질 수 없는 존재를 탐했으므로…….
운이 좋다면 김수현을 구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주인에게 죽임당하거나 이 어린 알파를 위해 죽거나, 어쨌든 죽겠지.
정석훈은 이만 제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자신이 만약 그 죽음의 방식을 택할 수 있다면 반드시 김수현을 구하다가 죽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기에 그는 김수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제 한 목숨 바쳐 지켜내겠다 맘먹은 존재를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학교 내에서 감시하지 않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는 절대 차기주 이사한테서 김수현을 구해낼 수 없었고, 그를 멀쩡히 집에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허튼짓하시면 이사님께 보고해 학교도 못 나오게 되실 줄 아세요.”
“고마워요, 석훈 씨.”
눈물에 젖은 김수현의 얼굴이 정석훈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와이셔츠가 젖어들었다. 그의 호흡이 가빠지고 열린 모공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김수현이 정석훈의 등을 한 번 꽉 끌어안았다가 물러났다.
그는 문득 김수현에게 계속 가이딩을 받으면 무슨 느낌일까 상상했다. 정확히 말해서는 능력 무효화였지만. 그 냉정한 차기주 이사가 어린 알파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해 쩔쩔맬 정도이니, 지속적으로 그 능력에 노출되면 얼마나 황홀할까. 정석훈도 에스퍼라 가이딩을 받을 때 온몸을 채우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가이딩을 받는 에스퍼의 뇌를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PET) 으로 검사한 적이 있었다.
에스퍼들은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일반인의 것보다 14% 컸고, 기분 조절과 관련된 변연계의 일부는 일반인의 것보다 17%나 컸다. 가이딩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의 기분 차이로 인해 뇌에 과부하가 일어난 결과였다. 에스퍼들이 가이딩을 받고 있지 않을 때는 베타파의 크기가 일반인의 40% 수준에 불과했으며, 알파파 기능 또한 떨어져 있어 우울감과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가이딩 여부에 따른 신체 변화는 중독 현상을 겪고 있는 환자와 전형적으로 같았다. 이는 얼마나 에스퍼들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가이드에게 구속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였다. 가이딩이 에스퍼들에게 중독 증세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에스퍼들은 불안정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가이드가 꼭 필요했다. 불안정 파동 수치를 낮추지 않으면 폭주 상태가 되어 본인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기 때문이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딩이란 생존이었고, 동시에 쾌락의 배설이었다. 그러나 정석훈은 생존도 쾌락도 아닌 이유로 김수현에게 가이딩을 받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 압도적인 고요함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자신은 정말로 미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몇 개 떨어지고 그칠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날갯짓은 바다를 건너자 폭풍이 되었고, 그 폭풍은 다시금 돌아와 나무를 거세게 흔들었다. 정석훈은 깊게 뿌리 내린 차기주 이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어떻게든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주차장으로 향한 그는 차에 올라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바람에 쓰러져버린 나무의 마지막 발악이 아닌가 싶었다.
가증스러운 눈물 연기로 정석훈을 떼어낸 김수현은 빈 강의실에서 이윤석과 단둘이 만났다.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에 걸터앉은 그가 김수현에게 제 정체를 밝혔다.
“수현아, 내가 아무래도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 같아.”
당황한 김수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그 사이로 하얀 이가 보였다. 이윤석은 웃음기 어린 얼굴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김수현이 점점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양새가 마치 그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모시는 제네시스의 신도들 같았다. 그들은 메시아를 보고 하나같이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그건 그들이 메시아를 신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김수현에게 ‘작가’도 그런 존재인지 몰랐다.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지만 그 위치만으로도 특별한 존재.
사기꾼이 이래서 작가인 척하라고 했구나 싶었다. 그와 손이 닿는 것조차 끔찍이도 싫어했던 김수현이 먼저 손목을 잡아왔다. 이윤석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천계에서 살았던 이윤석은 왜 자신의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지금 꼭 인간처럼 굴고 있었다. 첫 번째 메시아는 인간의 태를 빌어서 태어났으나, 임무에 실패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는 천사인 채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탈을 뒤집어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지냈다. 그러니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수현 앞에만 서면 자꾸 인간처럼 굴게 되었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가 기꺼웠고 절로 붉어지는 두 뺨이 뜨거웠다.
손을 잡힌다는 건 참으로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김수현의 어깨는,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기 좋아 보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건 뭐든지 행동으로 옮기곤 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참지 않았다. 이윤석은 창틀에서 일어나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놀란 김수현이 이윤석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이윤석은 놓아주지 않았다.
“네 불행을 다 막아줄게. 난 다 알아. 네가 차기주에게 감금당했다는 것도, 네 아버지가 널 괴롭히는 것도.”
“또 무슨 수작질이야.”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는 마치 고양이가 털을 세운 채 앙칼지게 우는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대사와 달리 음성이 잘게 떨려왔다.
“말 그대로 난 내가 쓴 소설에 빙의했어. 그리고 네가 원작 캐릭터와 다르게 행동하는 걸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 어쩌면 너도 나처럼 책 속 인물에게 빙의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맞지? 수현아.”
“증거는? 네가 작가라는 증거.”
여전히 믿지 못하는 척하지만, 몸짓부터가 달랐다. 이윤석의 몸을 밀어내던 김수현이 몸에 힘을 풀었다.
“네 이메일에 보낸 내 소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작가가 아니라면 어떻게 네가 기억하고 있을 또 다른 생까지 알고 있겠어.”
이윤석이 작가라는 걸 알게 된 김수현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윤석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어리광쟁이처럼 김수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문질렀다. 콧대와 입술이 마구잡이로 단단한 어깨를 탐닉했다.
“이윤석. 네가 진짜 작가라면 알고 있겠지. 어떻게 해야 차기주가 진설해를 사랑하는 거지? 응? 빨리 대답해줘.”
김수현은 이윤석이 작가라는 충격으로 그가 몸을 함부로 만져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오로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답만을 찾고자 했다.
소설 내용이 엉망진창으로 꼬인 탓에 김수현은 이러다가 영영 차기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빨리 차기주가 자신을 버리고 진설해를 사랑하게 해야 했다. 조급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이게 다 차기주가 제게 다정하게 구는 탓이었다. 자꾸만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그가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에도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어느새 마음마저 넘어가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를, 자신은 분명 선배를 사랑하는데 조금만 넋을 놓으면 차기주의 얼굴이 선배의 그림자 위로 겹쳐 보였다. 차기주의 모습이 선배를 제게서 지우려고 하고 있었다. 차기주의 짙은 눈썹과 깊어 보이는 눈매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하찮게 여길 것만 같은 차가운 인상을 한 주제에 자신을 발견하면 마치 오므려 있던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환한 얼굴을 하는 것마저 자신의 가슴께를 멍멍하게 했다.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면 자신은 김수현이라는 이름의 꽃이 된 것만 같았다. 그가 봐주기에 존재하고, 그가 말을 걸어주기에 존재의 의의가 생기는, 김춘수가 그려낸 꽃처럼 말이다.
김수현은 이러한 변화를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알파가 단순히 가이딩을 목적으로 부리는 개수작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선배와 재회하게 되면 이 흔들린 마음을 웃으며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김수현은 끈질기게 자신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이윤석의 팔을 풀어냈다.
“대답해줘. 원래 차기주는 진설해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지금은 내게 너무 집착해. 네가 소설을 그딴 내용으로 써서 그런 거잖아! 어떻게 할 거야? 이 일을 어떻게 할 거냐고!”
얌전히 있던 김수현이 이윤석을 밀치며 주먹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앙다물어진 입술로 인해 수현의 턱에 작은 호두가 생겼다. 그곳에 시선이 박힌 이윤석은 자신도 입술을 꾹 다물어 호두를 만들어봤다.
이윤석도 김수현을 향한 차기주의 집착을 멈추는 방법은 몰랐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썼을 거였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김수현이 무사히 차기주의 영역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인 자신이 신을 대신해 인간을 벌할 수 있을까. 날개를 잃고 땅으로 추락한 자신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이윤석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발견한 김수현이 주먹질을 멈췄다.
“미안. 많이 아파?”
이윤석은 자신을 향하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히끅, 히끅.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삼켜내느라 목이 턱턱 막혀왔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간 수현이 저를 보이지 않는 척 외면하고 말을 걸어주지 않아 외로움에 잠겨 죽어가고 있었다.
작은 관심이 이렇게나 달고 값지다. 여기서 더 큰 감정을 받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그는 감히,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인간의 마음을 상상해보았다.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디 봐봐. 멍든 거 같아? 내 주먹이 조금 맵긴 하지?”
김수현은 이윤석이 자신에게 맞아서 우는 줄 알고 어깨가 축 처진 채였다. 이윤석은 약간의 허세가 담긴 김수현의 물음에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진지하게 자기가 강한 줄 아는 건가? 만일 이윤석이 메시아의 모습이었다면 김수현을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었을 거다. 그가 무엇도 아닌 무효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라고 알고 있는지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허세였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일반인과 전혀 다른 신체 회복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에스퍼인 주제에 너무 약했다. 거짓말에 약한 메시아는 차마 그렇다고 하진 못하고, 네 솜 주먹 따위에 끄떡없다는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수현의 눈빛이 너무도 좋았기에.
“어. 나 너무 아팠어.”
“미안해.”
“이제 나 무시 안 할 거지? 이제 다시 밥도 같이 먹고, 대화도 하는 거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김수현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윤석은 어딘가 모르게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상대를 가지고 수상하다고 경계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응. 우린 친구잖아.”
“맞아. 우린 친구잖아.”
이윤석이 속눈썹에 눈물을 대롱대롱 맺은 채 활짝 웃었다.
“난 네 친구여서 너무 좋아.”
좀 이상한 녀석이지만 착한 건 사실이었다. 김수현이 여태 경험한 이윤석은 그런 사람이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뒤집어 시간을 확인한 김수현은 순간 멈칫했다. 오늘은 메시아가 김정석이 죽는다고 예고한 날이었다.
그 미친놈이 죽는다고 자신이 후회할 것 같진 않았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수현은 작가가 바로 앞에 있으니 김정석이 왜 죽으면 안 되는지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윤석아, 뭐 하나만 묻자. 내가 혹시 형이 죽는 걸 못 막으면 후회할 것 같아?”
“응.”
“왜? 난 그 새끼 빨리 뒈졌으면 좋겠는데.”
“와. 수현아. 너 진짜 생긴 거는 이온 음료 광고 찍을 것 같은데 입은 장난 아니다.”
“그래서 뭐 보태준 거 있냐.”
이윤석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네가 후회한다면, 그건 네가 PL 그룹 전무이사가 되어야 해서가 아닐까. 넌 좋아하는 꿈도 포기한 채, 오로지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할 테니까.”
“원작 『능력자들』 이야기네.”
“아아, 『능력자들』.”
김수현이 빙의했다고 믿는 소설이 그런 내용이었군. 이윤석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며 애써 들썩이는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아, 씨. 정석훈을 협박하기에는 아직 떡밥이 모자라는데.”
김수현은 하얀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정석훈이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너무 별일이 없어서 문제였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듯 굴어야 할 차기주는 정작 밥 배달해주는 기사님 노릇만 한 게 다였다.
그렇지만 오늘을 놓치면 김정석이 죽어서 원작 『능력자들』의 결말이 도래할 게 분명했다. 물론 자신이 차기주에게 붙잡혀 있으므로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할 일은 없겠지만,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걸 고려하면 어떻게든 똑같은 결말을 향해 갈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차기주가 갑작스럽게 진설해에 대한 사랑에 눈떠버리면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아버지에게 머리채 잡혀 끌려갈 게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야, 나 할 거 생각났거든.”
“뭔데.”
“나랑 옷 좀 바꿔 입자.”
잠깐이라도 정석훈의 눈을 피해 집에 다녀와야 했다. 그 김에 진설해를 만나 차기주에 대해 논의해봐야겠다.
진설해에게 당장 만나자며 집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그녀에게서 곧장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역시 센터에서 마주쳤을 때 손이 부딪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빨리 옷을 바꿔 입고 변장해야 했다. 김수현은 빈 강의실에서 티셔츠를 벗었다. 적당하게 근육이 잡힌 우성 알파의 몸을 본 이윤석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뭐야. 너도 벗어.”
이윤석은 뒤돌아서 명품 로고가 박힌 후드티를 벗어 수현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수현이 입고 있던 부드러운 흰색 니트를 받아 바꿔 입었다. 피부에 오소소 닭살이 돋을 만큼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이윤석은 피부에 닿는 니트의 감촉을 느끼며 두 팔을 X자로 교차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러니까 꼭 김수현이 자신을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바지도 벗어야지.”
이윤석은 바지 지퍼를 내리며 힐끔 뒤돌아서 김수현의 몸을 구경했다. 똑같이 땅을 지탱하는 다리이건만 뼈 위에 덮인 상앗빛 피부와 동그란 무릎뼈가 말도 안 되게 예뻤다. 다리가 결코 얇은 것은 아니었으나 선이 고왔다.
김수현과 바지까지 바꿔 입은 이윤석은 괜히 니트의 소맷단을 끌어 올려 코를 문질렀다. 천사인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형질은 없었지만, 페로몬을 맡을 수는 있었다. 수현의 옷자락에 코를 묻자 마치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의 한가운데에 선 것 같았다.
“나 잠깐 집에 갔다 올게.”
그 한마디를 뒤로한 채 빈 강의실을 나온 수현은 복도에 나오자마자 후드티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미술 학관을 벗어났다. 도망자처럼 땅만 본 채 어깨를 움츠리고 발은 경보를 하듯 빠르게 교차해 셔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혹시 몰라 핸드폰을 꺼두고 학생들이 꽉 들어찬 셔틀버스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힐끔거리는 것을 보니 자신이 어지간히 수상하게 굴었구나 싶었다.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척 버스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교문 앞에 셔틀버스가 멈추어 섰다. 수현은 차례대로 하차하는 학생들의 대열에 섞여서 자연스럽게 버스에서 내렸다. 이렇게나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쉬운 걸, 굳이 최유정과 사귀는 척 정석훈을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별거 아니네’ 하며 코끝을 검지로 쓱 문지르는데 누군가 후드티의 모자를 잡아당겼다. 모자가 벗겨지며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뭐야.”
수현은 무례하게 길 가는 사람의 후드티 모자를 벗겨낸 게 누구인가 싶어 날카로운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흡, 그리고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마주한 탓에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접니다, 김수현 씨. 믿음의 대가가 배신이었다니 실망이군요.”
“어떻게?”
수현은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수현 씨가 몹시 눈에 띄시거든요.”
정석훈은 창백하게 질린 뺨을 내려다봤다.
“비밀로 해주세요. 정말 집에 잠깐, 아주 잠깐 다녀오려고 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배려해준 것 같습니다.”
김수현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지하게 눈썹을 모으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이 정도 배려는 배려도 아니라는 듯 구는 도련님의 어리광에 정석훈은 이를 악물었다.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사님이 저 좋아하는 거 알죠? 그런데 저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이사님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시면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할 거예요.”
설익은 함정이었지만 지금 수현에겐 그것 외에 내세울 패가 없었다. 정석훈이 코로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키가 비슷한 둘이건만,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격형 에스퍼의 우람한 팔뚝과 넓은 어깨 때문에 김수현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졌다.
김수현은 정석훈의 위엄에 기죽지 않기 위해 턱을 치켜들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생각한 대로만 하자. 생각한 대로만. 불안한 마음에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이미 강의실에서 이윤석과 최유정의 문자를 통해, 김수현과 최유정이 별 사이 아님을 확인한 정석훈은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자신을 협박할까 싶었는데, 저 깨끗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로 이런 영악한 계획을 세울 줄이야.
만만한 성격이 아닐 것 같긴 했지만, 자신을 이런 식으로 속이려 들 줄은 몰랐다. 정석훈은 왠지 모를 서운함에 아랫입술을 앞니로 깨물었다. 이사님은 그에게 김수현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적당히 넘어가주라고 했었다. 거짓말에 약한 그는 최대한 김수현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저랑 같이 가셔야 합니다.”
“정……말요? 정말 허락해주는 거예요?”
“절 협박하시면서까지 허락받으려고 하셨던 거 아닙니까.”
차기주 이사 밑에서 도구처럼 부려지는 것엔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정석훈은 자기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침대 맞은편에 꽂아놓은 꽃다발이 뭐라고 지금 떠오르는 건지. 그는 풋내 나는 소년처럼 구는 스스로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김수현은 정석훈에게 미안했지만 자신에겐 이 선택밖에 없었다며 애써 그 생각을 떨쳐냈다. 대신 앞으로 그에게 잘 대해주자 다짐하며 택시를 잡았다. 주차장에 자신을 등하교를 시켜주는 전용 자동차가 있었지만 그걸 이용하려면 운전기사까지 매수해야 했다.
정석훈은 다행히 묵묵히 수현을 따랐다. 수현은 택시를 타고 오랜만에 PL 그룹 일가가 사는 대저택,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인터폰에 달린 호출 벨을 눌렀다.
“저예요.”
고용인은 걱정 한마디 없이 대문 잠금장치만 풀어줬다. 이 집안이 원래 이렇지, 새삼스레 씁쓸해진 수현은 작게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린 마당은 아버지가 퍼팅 연습을 하는 곳인 만큼 넉넉한 공간을 자랑했다.
자랄 때부터 철사로 조여, 기괴하게 꼬인 채 자라난 소나무는 통제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나타내는 단편적인 예였다. 그는 소나무마저 절대 제멋대로 자라게 두지 않았다.
마당 한 편을 차지한 소나무로부터 고개를 돌린 김수현은 스프링클러가 작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 있는 잔디를 밟지 않기 위해 디딤돌만 골라가며 걸었다.
오랜만에 저택 현관문을 여니 익숙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수현은 자연스레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나선형으로 휘어진 계단은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라 많이 미끄러운 편이었다. 한밤중에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내려오다가 미끄러질 뻔한 경험이 더러 있어 올라가는 내내 계단 손잡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고용인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지금 여자분이 방문하셨어요. 전무님 기분이 안 좋으니까 잠시 자리를 피해주세요.”
정석훈이 여자라는 소리에 자신을 돌아봤다. 김수현은 대꾸하지 않은 채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실크 시트가 진줏빛으로 반짝였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오기 전까지는 저 침구가 아니었으니, 왜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새로 간 것일 터였다.
진설해가 뒤에 있는 정석훈을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김수현은 그를 방 밖에 세워둔 채 재빠르게 문을 잠갔다.
그녀는 문이 있어봤자 정석훈의 청력으로는 뭐 하나 빠짐없이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김수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책상에서 노트와 펜 두 자루를 꺼냈다.
여기 앉아요. 필담하게.
단정한 글씨를 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대 앞에 놓여 있던 의자를 가져와 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 맞아요? 이사님한테 감금당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아무리 봐도 내가 이사님의 가이드가 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이 계획을 더 진행하는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수현은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차기주가 가진 대외적 이미지는 한국이 소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차기주를 그 존재 자체만으로 두려워했다. 그러니 진설해가 이 계획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만 되면 진설해 씨의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진설해의 아버지는 최초의 게이트 발견자였다. 말 그대로, 그는 게이트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그가 마치 이세계에 있는 괴수를 지구로 넘어오게 만든 주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몰아세웠다. 그 죄로 그는 현재 300년 형을 선고받아 미국 남부 오클라호마주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진설해의 아버지를 빼내려면 차기주 정도 되는 권력이 필요했다. 아니면 수백, 수천억이 될지도 모를 비용을 지불하고 A급 용병 에스퍼들을 여럿 고용해 교도소를 함락시키고 구해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아무리 A급 가이드가 돈을 잘 번다고 해도 진설해가 구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이 아니었다. 『능력자들』에서는 차기주가 진설해와 약혼하고 깜짝 선물로 아버지를 감옥에서 풀어줬었지.
김수현이 진설해를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건 다 원작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덕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이사님이 저한테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아요.
다급함이 느껴지는 글씨가 휘날리듯 노트에 적혔다.
수현씨가 가이딩 중독이 걱정된다면서 다른 가이드를 권해봐요.
모든 에스퍼들은 가이딩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사람에게만 지속해서 가이딩을 받으면 가이딩 중독이라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자신은 운 좋게도 혈연이라 그런지, 누나의 가이딩에 중독 증세를 일으키지 않아 꾸준히 누나에게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에스퍼들은 센터에서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았다. 그리고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받을수록 에스퍼는 그 가이드에게 지독한 애정과 집착을 느끼게 되었다.
이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어떤 에스퍼는 자기 가이드를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극단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에스퍼는 영원히 정착할 상대를 정하기 전까지 특별한 가이드를 정하지 않고 여러 가이드에게 돌아가면서 가이딩을 받았다. 물론 에스퍼가 멋대로 정착할 가이드를 정한다고 해서 가이딩 중독 증세가 사라지는 것인가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에스퍼가 중독 증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달콤하고도 잔혹한 조건이.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 신체 어느 부위에 상대방의 이름이 생겨난다고 했다. 마치 신이 너희는 완벽한 한 쌍이라고 정해준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때부터 에스퍼는 가이딩 중독 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에스퍼들의 삶의 목표는 괴수를 무찌르는 게 아니라 서로 네임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반려를 찾아내는 거라고도 했다.
에스퍼들은 그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가이드들한테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이드가 제대로 대우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에스퍼들이 처음 생겨났을 당시에는 진한 스킨십과 섹스를 통해 그들의 불안정 파동을 잠재우는 가이드를 창기 취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가이드들이 죄다 숨어버리는 바람에 에스퍼들은 단체로 괴수가 아닌 폭주로 인해 몰살당할 뻔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 센터와 정부는 꾸준히 언론을 통해 가이드에 대한 이미지 세탁했고,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널리 퍼뜨렸다. 그 덕에 지금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이드가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일종의 직업쯤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가이드가 되면 에스퍼와의 낭만적인 사랑 끝에 그의 유일한 안정제가 되어 자신의 에스퍼와 백년해로할 수 있다는,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알파이자 에스퍼인 자신은 아니었다. 차기주와 붙어먹어도 임신할 수 없고 네임 또한 발현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애초에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잘못되었고 수현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지만 시도해볼게요.
여태 가이딩 몇 번이나 했어요?
두 번밖에 안 했어요.
그럼 기회를 봐서 한 번만 더 가이딩해봐요. 두 번은 너무 적으니까.
네. 그리고 황지윤 파트장 쪽은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수현 씨 이야기 듣고 돕기로 했어요. 아마 조만간 징계위원회 소집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솔직히 여기까지 가능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SP에는 두 명의 이사가 있었다. 에스퍼 파트의 차기주, 가이드 파트의 황지윤. 그러나 대부분 센터 이사라고 하면 차기주를 떠올렸다. 황지윤은 언론에 노출되는 일을 몹시 꺼리는 인사로, 이사라고 불리기보다는 편하게 파트장이라고 불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들 센터 이사님이라고 하면 차기주, 파트장이라고 하면 황지윤을 떠올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뭔데요?
파트장님이 에스퍼를 몹시…… 혐오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수현 씨가 무효화 능력이 있는 에스퍼라고는 말 못하고 S급 정도 되는 가이드 같다고 거짓말을 해뒀어요. 그래서 파트장님이 이 일에 나서면 가이드가 맞는지 검사를 받게 될지 몰라요. 근데 제가 먼저 이런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센터에 이미 수현씨가 가이드라고 소문나 있었어요.
황지윤은 초창기에 가이드에 대한 취급이 좋지 않을 때부터 센터에서 일한 개국공신이었다. 그녀가 에스퍼들을 혐오하는 건 당연했다. 지금도 가이딩이랍시고 에스퍼들에게 함부로 다뤄졌던 가이드들은 그녀의 보호 아래 페어를 맺지 않은 채 지냈으니까.
진설해가 걱정하는 건 조력자로 끌어들인 황지윤이 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김수현이 에스퍼라는 게 밝혀지면 황지윤은 이 일에서 손을 뗄 게 분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차기주의 속을 끓게 하기 위해 네 에스퍼가 널 벗어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며 낱낱이 고발하겠지.
가이딩 검사는 물에 잠수해서 그 파동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등급을 측정해요. 어쩌면 수현 씨 무효화 능력으로 테스트 자체를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수현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단 한 번도 다른 쪽으로 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에스퍼들의 능력을 무효화하는 것 이외로는 말이다. 소설을 읽어 고정관념에 빠진 김수현과 달리,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진설해 쪽의 생각이 트여 있었다.
알았어요. 진설해 씨, 이렇게까지 열심히 도와줘서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 날 위해서 한 일인걸요. :)
그녀와 한참 필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밖에서 쿵, 하고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넌 또 뭐야. 못 보던 가드인데.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나 김정석이야. PL 그룹 후계자라고!”
김수현은 얼른 노트를 찢어서 진설해에게 건넸다. 그녀는 종이를 자연스레 청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수현은 화장대에서 가져온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후,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김정석이 그를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언가 확인하듯 코를 킁킁거리는 형의 모습을 본 김수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익었다.
“내 방에서 무슨 짓이에요.”
“아아, 난 또 네가 대낮부터 오메가를 끌어들여서 떡이라도 치나 했지.”
“입 닥쳐요.”
수현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형이 너무나 싫었다. 두 눈에 혐오를 가득 담아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김정석이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나 닥쳐! 대낮부터 여자를 방에 끌어들이고. 불결해. 더러워. 이 걸레 새끼야, 죽어!”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도 난폭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형이 주먹을 휘둘렀다. 눈앞에 별이 번쩍 튀었다. 얼굴을 세게 맞은 수현의 몸이 침대 위로 처박혔다. 그다음 순간 바지를 벗기기라도 할 듯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형, 미쳤어요?”
“잤지! 차기주랑 잤지!”
“안 잤다고. 그리고 내가 누구랑 자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김수현 또한 우성 알파라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수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뒤에서 자신을 덮치려고 드는 미친 형을 때렸다. 투덕거리며 침대에서 싸우는 형제를 보던 정석훈은 김정석의 목덜미를 잡아서 침대에서 끌어냈다.
“악, 놔! 놓으라고!”
“김정석 전무님, 당신 때문에 김수현 씨를 지키지 못하면 저는 오늘 이사님한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같이 관에 들어가실 겁니까.”
바둥거리던 몸짓이 멈췄다. 김정석은 뒤늦게 차기주를 떠올렸는지 하얗게 질렸다.
“내, 내가 내 도, 동생 버르장머리도 못 고쳐?”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 있음에도 겁먹은 개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김수현은 김정석에게 맞은 흔적으로 인해 차기주에게 이 비밀스러운 외출을 들키게 되었다는 생각에 열이 올랐다. 조용히 끝낼 수도 있었는데.
“형,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나도 형 싫어요. 진짜 진절머리 나도록 싫다고!”
김수현은 다른 사람 앞에서 제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석이 그렇게 만들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김정석에게 맞아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런 수현을 어딘가 얼빠진 듯 보던 김정석이 바닥에 이마를 쿵 쿵 박기 시작했다. 정석훈이 그런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자해를 막았다.
“괴로워. 너무 괴로워 미치겠어.”
김정석의 이마가 찢어져 높은 콧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놀라서 김정석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가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며 울었다.
“수현아. 수현아. 형 너무 아파.”
우리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인데 그 애달픈 목소리에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 순간,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다락방에서 어린 김정석이 자신을 무릎에 앉힌 채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옛날 옛적에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다. 부자 아버지는 두 형제를 몹시 아껴서 항상 밤에 잠들기 전에 사랑한다면서 이마에 뽀뽀를 해줬다.”
“형아, 왜 헨젤이랑 그레텔이 숲에 들어가?”
어린 자신은 그림책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물었다. 형은 길에 빵 부스러기를 버리는 아이들을 보고 비둘기 먹이를 주며 노는 거라고 했다. 어린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두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헨젤과 그레텔은 숲에서 놀다가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했다. 맛있어 보여서 과자를 뜯어 먹고 있는데 집주인 아줌마가 나타났다. 형제는 집을 망가뜨려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림에는 철창에 갇힌 아이들이 보였다. 형이 말하는 행복한 동화와 달리 무시무시한 그림을 본 자신은 겁에 질린 채 얼굴을 손으로 가려 숨겼다.
“수현아, 겁먹지 마. 집주인 아줌마랑 술래잡기하느라 아이들이 개집에 숨은 것뿐이야.”
형은 어린 김수현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무섭다고 칭얼거렸다. 그가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내밀면서 어서 보라고 했다.
뭔지 몰라도 행복해 보였다. 그제야 ‘하나도 안 무서웠어’라며 의기양양해 하는 자신을 보고 그가 웃었다.
이건 김수현의 기억이었다. 지금의 둘을 보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아 보였다.
김정석은 술을 마실 때면 다락방에 들어가곤 했다. 자신은 그가 왜 변했는지, 그래 놓고 왜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형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걸어 나갔다. 시체처럼 파리한 그의 입술을 보던 수현은 다급하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파른 계단에 선 그가 자신을 보고 웃었다.
“내가 나한테서 널 지키기 위해 한 모든 행동에 용서를 빌게. 수현아, 형은…….”
“형!”
김수현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손으로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몸을 날렸다. 수현이 자신을 구하려고 할 줄 몰랐는지, 부릅뜬 형의 눈이 웃겨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추락하는 느낌을 받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떴다.
형은 당장 머리가 깨질지 모를 상황에서도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끝내 무엇 때문에 자신을 괴롭혔는지 알 것만 같았다. 김수현의 등을 감싸 안은 채 형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꽉 끌어안은 손길에 꼭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수현은 다급하게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추락하고 있던 둘의 무게를 한 손으로 지탱하느라 팔이 빠질 듯 아파왔다. 여기서 손을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정석훈이 하나로 뭉쳐 있는 둘을 한꺼번에 잡아당겨 그 품에 받아냈다. 아아. 막아냈다. 형의 죽음을, 막아냈다.
김수현은 공포에 질린 정석훈의 눈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살았음을 깨달았다. 예상과 달리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지 못한 김정석은 왜 자길 살렸냐며 흐느꼈다. 어린 김수현의 기억을 엿본 탓에 차마 독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 우린 형제잖아. 아무리 형이 미워도 죽으면 슬퍼할 거야. 우린 가족이잖아, 응?”
김수현이 김정석을 어르듯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김정석은 계단에 걸터앉아서 마구잡이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수현아, 넌 내 동생이 아니야.”
“김정석!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수현이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소식을 듣고 집에 왔는지 누나가 현관문을 열고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예쁘게 관리한 손톱으로 금방이라도 형의 얼굴을 할퀼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을 어머니가 외도해서 낳은 사생아라고 욕해도 괜찮았다. 분명 괜찮았는데……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게 꼭 진짜처럼 들렸다.
자신은 그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라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김수현이라는 소설 속 인물의 설정이기 때문에 자신이 상처받을 일이 전혀 아니었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총에 맞은 것같이 아파오는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사랑해.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넌 내 동생 아니니까 그래도 되는 거잖아……!”
“이 미친 새끼야, 닥쳐! 왜 수현이가 우리 동생이 아니야!”
누나가 형의 뺨을 때렸다. 손톱에 긁힌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혼란도 잠시, 이런 몰골을 진설해와 정석훈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수치심이 밀려왔다. 말 그대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서 수현은 도망쳤다. 계단을 벗어나 다락방으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그곳에 숨었다.
“흐으, 윽. 흑.”
턱 턱 막히는 목구멍으로 괴로운 울음소리가 반토막 난 채 흘러나왔다. 형이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싶더니,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청소된 건 물론이고 침대까지 놓여 있었다. 이곳이 또 다른 그의 방인 것처럼.
자신의 방, 침대 시트가 바뀌어 있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게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페로몬 냄새와 형의 페로몬 냄새가 마치 둘이서 잠자리라도 한 것처럼 난잡하게 섞여 있었다.
“미, 친 새끼…… 미친 새끼!”
수현은 침대에서 이불과 시트를 벗겨내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시트를 엉망으로 벗겨내고 베개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엉엉 울었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숨기려고 날 괴롭힌 거면 계속 그랬어야지. 끝까지 숨겼어야지. 왜 그 입을 열어. 정말 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걸까? 아니야, 어차피 이건 다 소설이잖아. 그러니까 난 괜찮아. 괜찮아. 제발…… 제발, 괜찮아라. 제발.
수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태아처럼 웅크린 채 울었다. 그러다 문득 형이 수집해놓은 자신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자라서 버린 줄 알았던 옷들, 유년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졸업 앨범, 그림 대회에서 받은 상장…….
수현은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찢고 찢을 수 없는 건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전부 엉망이었다.
아버지가 그래서 날 때린 거야.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겠지.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남의 자식이라니. 나 같아도 죽여버리고 싶었을 거야.
혼잣말은 난폭한 짐승이 휘두른 발톱처럼 수현에게로 돌아와 깊은 상처를 남겼다. 김수현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상처받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소설 속 인물의 가정사일 뿐인데 왜…… 왜 이게 자신의 삶같이 느껴질까.
그가 자신과 똑같이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린 불쌍한 존재여서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수현아, 누나야. 제발 문 좀 열어봐.”
누나가 문밖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았다.
“설마 김정석 말 믿는 거 아니지? 누나가 다 잘못했어. 누나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진정하고 문 좀 열어줘. 누나는 이러다 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너무 겁나. 응? 수현아, 제발.”
그녀를 방 안으로 들이는 것이 맞았다. 그녀만이 자신의 편이었으므로. 그러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미안해. 잘못했어.”
“……누나는 잘못한 거 없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며 겨우 내뱉은 대답이 과연 누나의 귓가에 닿았을까 싶었다. 한참 딱딱한 바닥에 웅크려 앉아 있는데 달칵, 문고리에 달린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저절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봤다.
불을 켜지 않은 탓에 캄캄했던 다락방 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있는 건 자신이건만, 빛을 등져 더 어둡고 짙어 보이는 그림자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상처 입은 새끼 고양이를 구조하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수현아, 학교 보내놓으니까 속상하게 이게 뭐야.”
차기주였다. 자신을 가두고 밥 먹이며 사육하는 에스퍼. 그를 마주하자 형이 어릴 때 읽어준 엉터리 「헨젤과 그레텔」이 떠올랐다. 어린 동생을 위해 거짓말로 꾸며냈던 이야기와 달리, 그 동화는 잔혹했다.
동화 속 마녀는 과자 집을 먹은 아이들을 철창에 가두고 맛있는 걸 먹여 살을 찌운다. 그리고 아이들은 눈이 안 좋은 마녀에게 다 먹은 고기의 뼈를 자기들의 손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연장해간다. 그러다가 마녀가 커다란 솥에 남매를 넣고 끓이려고 하자 오히려 마녀를 빠트려 죽이고 보석을 훔쳐 달아난다.
차기주에게 자신은 붙잡힌 헨젤이자 그레텔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올려둔 채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주지만, 이 모든 건 아이들을 살찌워서 잡아먹기 위해서 행했던 마녀의 친절과 다르지 않았다.
『능력자들』과 『농락』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차기주는 김수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능력자들』의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진설해만을 사랑하는 로맨티시스트였다.
『농락』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거기서는 김수현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의 파동을 가라앉혀주길 바라서, 김수현을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거라고 나왔었다. 이윤석이 작가이니 직접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윤석아, 혹시 차기주가 날 조금이라도 사랑하지는 않을까?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혹시 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건 아니냐고?’
만약 이윤석이 그렇게 묻는다면 자신은 고백해버릴지도 몰랐다. 너무 외롭고 힘든 자신에게, 오로지 그만이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바보처럼 담장을 최대한 높게 세우고 그가 자신의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게 방어했다고 여겼건만, 정작 그는 문을 열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왔다.
그가 자신의 성에 들여온 트로이 목마는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자신의 허락을 받은 후 징벌방의 문을 열었던 배려일까. 아니면 학교에 보내주는 거? 아침마다 직접 요리해서 밥을 차려주는 거? 맛있는 음식들을 포장해와 같이 식사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자신에게만 부드러워지는 입매와 자신을 바라볼 때만 밤하늘의 별을 박아놓은 듯 빛나는 검은 눈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애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아름답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감정 따위는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런 존재를 사랑할 수는 없다. 애정이 자라나려는 거면 그 싹을 잘근잘근 밟아 죽여야 한다.
‘선배, 빨리 내 앞에 나타나줘. 이러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해버릴 것 같아. 난 내가 너무 불안하고 미덥지 않단 말이야. 빨리 날 차기주한테서 구해줘.’
차기주는 웅크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처럼 끌어안았다.
“쉬. 괜찮아.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어둠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가려줘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너무 설렌 나머지 심장이 터져버렸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는 어차피 자신을 보다 쉽게 손에 넣기 위해 이러는 것일 게 뻔했다. 그러니 자신도 차라리 맘 편히 그를 이용하기로 했다. 수현은 위안을 얻기 위해 얼굴을 파묻은 채 차기주의 향기를 맡았다. 비록 그가 제게 내어준 이 따스한 품마저 전부 거짓된 연기라 할지라도.
차기주에게는 마트에서 절대 살 수 없을 것 같은 향기가 났다. 그리고 자신은 어쩐지 이 향기를 그리워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폐부 깊숙이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가 김수현의 등과 오금에 팔을 넣어서 단단히 받쳐 들었다.
자신 또한 182가 넘는 장신이건만 무겁지도 않은 걸까. 하긴 차기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이니 자신 같은 건 깃털처럼 가벼울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을 안아 드는 건 그에게 깃털 하나 나르는 것과 같은, 별거 아닌 행위이겠지.
차기주의 품에 안겨 밝은 복도로 나오면서, 수현은 흔들리는 감정을 다잡을 수 있었다. 파도야, 아무리 네가 날 덮쳐온다고 해도 난 꺾일지언정 쓸려가지는 않을 거란다.
묵직하게 부어오른 눈꺼풀을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진설해는 보이지 않았고 정석훈과 누나, 형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은 진설해와의 만남을 차기주에게 들켰을까 봐 저도 모르게 그의 양복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왜? 네 오메가가 안 보여서 걱정돼?”
“설마 진설해 씨 어떻게 했어요?”
“네 눈에는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나 보지. 형편없는 쓰레기. 그렇지?”
“그게 아니라…….”
“맞으니까 지금은 입 다물어. 너 혼내고 싶은 거 참느라 나도 꽤 힘들거든.”
차기주는 자신을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자신이 걱정되는지 누나가 졸졸 쫓아오려고 들었다. 정석훈이 손이 없는 차기주를 대신해 현관문을 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서 정원에는 조명이 켜져 있었다. 대문을 넘자마자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마이*흐 뒷좌석에 밀어 넣어졌다. 차기주가 바짝 달라붙어 앉았다.
“출발해.”
“저……. 이사님, 정말 도망치려던 게 아니라 잠깐만 집에 다녀오려고 그런 거였어요.”
“아아, 그래.”
수긍하는 척 대답했지만, 그는 수현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턱을 괸 채 무심하게 차창만 바라봤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유리에 인공적인 도시의 불빛이 뭉개지듯 맺혔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그의 눈을 피해 오메가를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형이라는 새끼한테 맞지를 않나, 발정 난 개와 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상심해서 다락방에 숨어 질질 짜고 있지를 않나.
이 어리고 모자란 애송이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든다면 정석훈을 시켜 다시 가두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 헬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수현이 얼마나 다쳤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고 울었다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이제 인정할 때가 됐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예쁜 얼굴과 달리 성격은 못돼먹은 이 어린 알파에게 첫눈에 반하다 못해 열렬히 짝사랑 중이었다. 그의 사랑은 완전한 일방통행이었다. 그가 아무리 잘 대해주고 착하게 굴려고 해도 김수현은 그에게 마음 한편을 내주기는커녕 도망칠 궁리나 했다.
어둠에 검어진 차창 위로 김수현의 실루엣이 비쳤다. 그의 눈은 이 차에 탄 순간부터 풍경이 아닌 창에 비친 김수현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무의식적인 행동마저 지배할 줄이야. 분명 자신이 화났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제 눈은 김수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진설해는 호텔에서 자신을 가이딩하겠다며 온 가이드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한 호기심으로 벨보이로 취업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김수현은 처음부터 자신을 속인 거였다. 시키지도 않은 룸서비스가 온 건 무효화 능력을 사용해 자신을 가이딩하고, 그걸 진설해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려고 했던 거였다.
명백한 기만행위였음에도 분노로 들끓었던 속이 잠잠해졌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김수현과 진설해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그 어떤 알파도 자기 오메가를 다른 알파의 가이드가 되게 하려고 이런 연극을 벌이지는 않는다.
대체 왜 김수현은 자신을 진설해와 연결해주려고 했던 걸까. 혹시 오늘 만남도 그 방법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가진 걸까.
그렇다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취조실에서 그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 *
취조실에는 아무것도 없이 테이블과 의자만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진설해는 눈앞에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가 늘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덜덜 떨며 손을 테이블 아래에 내려 숨겼다. 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 안에 갇혀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은 세 시간, 그동안 차기주에게 어떤 식으로 고문받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취조실 문이 열리고 차기주가 들어왔다. 거대한 흑표범이 다 잡힌 토끼를 보고 여유롭게 다가오듯 사뿐한 발걸음이었다. 그가 단단하고 흉악한 상체를 예쁘게 포장해주었던 양복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차기주는 마치 그녀와 회식이라도 함께 하러 온 사람처럼 편하게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소맷단에 달린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팔을 걷어붙이니 혈관이 불거진 근육질의 팔이 드러났다.
“진설해 씨, 우리가 구면이죠.”
“네, 네. 네.”
이끼리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입술은 ‘네’ 하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만큼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대답은 한 번만.”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리는 진설해를 보고도 차기주는 동정심을 느끼기는 커녕 덤덤히 재킷 주머니에서 펜치를 꺼냈다.
“이제 진설해 씨에게 선택권을 줄 겁니다. 제 물음에 협조적으로 대답할 시에는 이 펜치가 사용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진설해 씨가 대답하지 않으면 저는 이렇게 물을 겁니다. 본인 손톱을 직접 뽑을지, 아니면 내가 시원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줄지.”
이미 굳어버린 유화처럼 차기주의 얼굴엔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무섭도록 감정을 죽인 채 오로지 자기가 해야 할 말만 내뱉었다. 붉은 입술은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도록 굳게 일자로 다물려 있었으며 진설해를 보는 눈에는 자기 페어와 감히 단둘이서 만난 이에 대한 적개심은커녕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흐, 으으. 사, 살려주세요. 이사님, 살려주세요.”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마 차기주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다가 곧 코가 뭉개질 정도로 얼굴이 거세게 바닥에 짓눌리고 말았다. 차기주가 구둣발로 그녀의 머리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머리가 나쁩니까. 제가 언제 빌라고 말했습니까. 그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그게 싫으면 손가락을 잘릴 건지 손톱을 직접 뽑을 건지 선택하라고 했잖습니까.”
“허으윽, 크으……!”
진설해는 이러다가 차기주의 발에 머리통이 깨져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신음만을 내뱉던 입술이 비틀린 채 겨우 숨을 들이켰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내 페어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녀의 머리에서 드디어 발이 치워졌다. 그녀는 그제야 옆으로 넘어져 거칠게 호흡했다.
“대답하기 싫습니까? 그럼 선택하세요. 물론 손가락보다는 손톱이 나을 테니,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겠지만.”
테이블에 놓여 있던 펜치를 차기주가 손수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수전증에 걸린 노인처럼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차기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검은 구두 끝을 까딱까딱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진설해는 왼손 새끼손톱을 펜치로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아아!”
그녀는 손톱이 뽑힌 새끼손가락을 반대 손으로 감싼 채 데굴데굴 굴렀다. 비명에 찬 신음만이 취조실을 채웠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고,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눈 밑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신음만 내뱉었다.
“이런, 진설해 씨. 별로 안 아픈가 봅니다. 아직도 대답하지 않는 걸 보면.”
그녀가 누워 있는 자리까지 차기주의 긴 그림자가 닿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그림자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구석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곤 겁에 잔뜩 질린 채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도 차기주로부터 두 번째 질문이 날아왔다.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였다.
“오늘 김수현 만나서 무슨 이야기 나눴습니까.”
“으, 으아. 아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모르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두 손을 싹싹 비비는 진설해에게 차기주가 재킷에서 꺼낸 가위를 보여줬다. 가위다리를 움직여 찰캉찰캉 소리를 내는 그는 그제야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제가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 진설해 씨가 직접 손톱을 뽑는 게 여러모로 낫겠죠.”
“쓰읍, 후우. 쓰읍, 후우.”
진설해는 늦장을 부리면 차기주가 진짜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를 거라는 걸 알기에, 스스로 손톱을 뽑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른손잡이인 그녀는 잘 사용하지 않는 왼손 약지를 골랐다. 펜치로 손톱을 잡고 밀려올 고통을 상상하며 눈을 꾹 찌푸렸다.
“아아아아!”
괜찮다. 손톱은 어차피 다시 자란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다. 파트장님이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됐다. 파트장님이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만 버티면……. 그런데 정말 자신을 구하러 오기는 할까? 세 시간이나 이곳에 갇혀 있었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걸 보면 황지윤 파트장도 차기주 이사를 막을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차기주는 영악한 사내였다. 긴 시간 동안 이곳에 홀로 가둬둠으로써 그 누구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런 자를 어떻게 자신의 에스퍼로 삼을 수 있을까. 김수현과 자신은 불가능을 꿈꾸는 어리석은 몽상가였던 걸까.
바닥에 피와 함께 나뒹구는 손톱은 은색 네일아트를 해, 꼭 반짝이는 은화 같았다. 그녀는 엄청난 공포와 감정 소모로 인해 마치 모진 고문을 받은 사람처럼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차기주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왜 김수현이 진설해 씨를 내 가이드로 밀어주려고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탈진한 채 바닥에 늘어져 있던 진설해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겨우 펜치를 들어 왼손 중지 손톱을 뽑아냈다. 세 개의 반짝이는 은색 손톱이 버려진 동전처럼 바닥을 굴렀다.
시간을 재듯 까딱이던 검은 구두가 멈췄다. 차기주는 가위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그녀가 이번에는 대답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진설해 씨 아버지를 구해주면 내 사람이 되겠습니까.”
펜치를 들고 있던 손이 드디어 그것을 놓았다.
* * *
김수현은 몰래 집에 간 탓에 다시는 징벌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가 소설에서처럼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무작정 자신을 강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동안은 자신이 조용히 지내서 그런 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너무도 쉽게 생각했다. 정석훈은 생각보다 김수현의 말을 잘 들어줬고 형은…….
“하아. 미치겠다.”
수현은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싼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마 가이딩 중독 증세를 운운하며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을 것을 권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많이 참았으니까. 자신을 때리는 차기주는 상상되지 않았지만, 폭력에 익숙한 몸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차기주에게 맞는다면 얼마나 아플까. 애초에 그에게 맞고도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수현은 점점 고통의 기억에 잠식되어갔다.
밥을 먹이러 올 시간인데 그가 오지 않았다. 혹시 조금 늦는 건가 싶어 현관 앞에 가서 서 있었다. 6시 정각이 되자 역시나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평소와는 묘하게 달랐다. 그 낯선 발걸음이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지체 없이 잠금장치가 풀렸다.
정석훈이 종이 가방을 들고 구두를 벗었다. 그가 아일랜드 식탁에 가져온 음식을 내려놓고 곧장 도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이사님은요?”
“모르겠습니다.”
“석훈 씨, 정말 미안해요. 안 들키고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수현은 시선을 내리깐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울상인 얼굴을 보며 정석훈은 엄지를 접은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김수현 씨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에 손가락이 잘렸습니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정석훈은 그 틈을 타 김수현의 치아를 관찰했다. 김수현은 아주 반듯하고 충치 치료 한 번 받지 않은 건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즐거워 정석훈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성격상 이런 유의 장난을 치지 않는 사람이건만, 막상 자신의 말에 놀란 김수현을 보니 즐거웠다.
“농담입니다.”
정석훈의 희미한 미소를 본 김수현이 분노를 담아 발을 쾅, 하고 굴렀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요. 진짜인 줄 알았잖아요.”
“절 걱정하셨습니까.”
“그럼 안 했겠어요?”
진지하게 ‘나 화났어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인 김수현을 보며 정석훈은 심장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잔잔한 바람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어봤자 기껏해야 잎 몇 개 떨어뜨릴 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그 바람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는 송두리째 흔들릴 준비를 했다.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차기주에게 입은 은혜를 떠올렸다.
육교를 지나던 자동차에는 부모님과 여동생, 그가 타고 있었다. 정석훈은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평범한 거리의 풍경, 도시의 불빛들. 익숙한 광경이건만, 군대에서 전역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 그런지 모든 게 특별해 보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날은 정말로 특별한 게 맞았다.
한순간 차에 그림자가 지는 듯하더니 거대한 독수리처럼 생긴 괴수가 그들이 탄 차를 향해 날아왔다. 독수리 괴수의 발톱에 자동차는 종이처럼 쉽사리 우그러졌다. 순식간에 유리창이 터져 나간 자동차는 뼈대만 남은 채 날카로운 발톱에 들려 하늘을 날았다. 이대로 다 죽는구나. 난 집에 가보지조차 못하고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걸 내려놓았던 것도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때, 차기주 이사가 나타났다.
그는 맨손으로 자동차의 문짝을 뜯어냈다.
“뛰어내리세요. 에스퍼들이 여러분들을 구해줄 겁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네 사람에게 차기주 이사는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처럼 신사답게 굴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자신을 잡아 차 밖으로 내던졌고 에스퍼들이 바람과 염력을 사용해 네 가족을 받아줬다.
차기주는 그 일로 대중에게 무지막지한 욕을 먹었지만, 정석훈은 알았다. 차기주의 판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네 사람의 시체 또한 괴수의 발톱에 산산조각 난 자동차 파편에 섞여 있었을 거라는 걸. 그들이 자동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괴수가 자동차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무사히 괴수의 발등에 올라탄 차기주는 오로지 손의 힘만으로 날개를 뜯어내고 그 핵을 꺼냈다. 사람들은 차기주가 잔인한 성정을 가졌기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물리적인 힘만으로 괴수를 찢어 죽인 거라고 했지만, 그의 오랜 심복으로 지낸 정석훈은 이제 진실을 알았다.
차기주는 대외적으로 S급 에스퍼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SS급 에스퍼였다. 사실 ‘SS급’이라는 등급도 현존하는 측정 방법으로는 그의 등급을 알아낼 수 없어서 붙인 상징적인 수치였다. 그는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힘을 가져 다른 에스퍼들처럼 평범하게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은 그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차기주의 치명적인 비밀이었으나 오랫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정석훈은 알 수 있었다. 차기주는 시시때때로 가이딩을 받는 척했지만 언제나 시계로 측정된 불안정 파동 수치가 높은 상태였다. 가이딩을 받은 전후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아니, 되레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절대 좋아지지 않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가 사실 가이딩을 못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전 세계가 패닉에 휩싸일 게 뻔했다. 어쩌면 종말이 다가온다고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차기주는 최대한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신체적인 힘으로만 괴수를 상대하는 거였다. 괴수를 고문하는 것을 즐기기 위함이 아닌, 오로지 파동의 조절을 위해서.
그래서일까, 정석훈은 차기주의 파동을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무효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라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 그런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달까.
그러니 김수현과 정석훈이 짝을 이룰 기회는 없을 것이다. 차기주는 자신의 유일한 숨통인 김수현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그는 징벌방을 나와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리 차기주가 높은 탑에 라푼젤을 가둔 마녀처럼 굴어도, 자신은 그를 말리고 김수현을 구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쿵. 쿵. 쿵. 둔탁한 발걸음 소리에 맞춰 정석훈의 심장도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란 얼마나 비겁하고 은혜를 모르는 짐승이란 말인가. 차기주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지고 가족들마저 지킬 수 있었건만, 자꾸만 그는 그 은혜를 잊고 김수현을 떠올리게 되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 맞은편에 놔둔 작약꽃을 바라봤다. 향이 없는 모란꽃과 비슷하게 생긴 주제에, 향이 진한 이 하얀 꽃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조금씩 말라가는 하얀 꽃잎 수를 하나둘 눈으로 셌다.
징벌방에 갇힌 김수현도 언젠가는 저 꽃잎처럼 말라, 서서히 죽어갈 테지.
꽃잎 하나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테이블에 떨어졌다. 정석훈은 멍하니 그 꽃잎을 응시하며 그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노라 다짐했다.
* * *
차기주 이사가 가이드 진설해를 취조실에 가두고 고문했다는 소문이 센터에 소속된 능력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추측만 내놓다가 회사 인트라넷에 뜬 공문을 보고 앞뒤를 꿰맞췄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던 사실을 아무래도 진설해가 황지윤 파트장에게 일러바친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감히 대통령도 건드리지 못하는, 그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 감금 사건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징계위원회 신청인 서명에 황지윤 파트장의 이름이 당당하게 올라 다들 걱정이 많았다. 그 탓에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날은 아침부터 센터 분위기가 흉흉했다.
황지윤 파트장을 보호하겠다며 피켓 시위를 하는 가이드들도 있었다.
“황지윤 파트장 건드리면 더 이상 가이딩은 없다!”
“가이드의 인권을 보장하라! 가이드 감금이 웬 말이냐!”
“차기주 이사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차기주는 아침부터 독재 정권을 지탄하는 시민처럼 구는 가이드들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은 절대로 김수현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보폭을 넓게 해 건물 입구를 빠르게 지나쳤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평소와 달리 이사실이 있는 4층이 아닌, 대회의실이 있는 6층 버튼을 눌렀다. 그는 김수현이 김정석에게 뺨을 맞은 일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답지 않게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얼굴에 언뜻 피로감이 내비쳤다. 육체적으로 피로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신이 너덜거렸다.
맘 같아서는 당장 김정석의 멱을 따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쓰레기도 형이라고 엉엉 울던 김수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온 힘을 다해 충동을 참아내야만 했다. 멀대같이 큰 알파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눈에 김수현은, 김수현이 퉁퉁 부은 눈으로 밤새 바라보고 또 쓰다듬어주던 다람쥐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발을 내디뎠다. 대회의실에는 징계위원회 시간이 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센터 임원들이 빠짐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동안 자신을 처벌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을 냈을까 싶었다.
차기주는 인사 한마디 없이 가장 상석을 가장한 죄인의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 감금 사건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징계위원회 의제는 차기주 이사의 처벌 관련 건이며, 이 사건을 센터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할 시에는 형법 제276조에 의거하여 차기주 이사를 형사 처벌할 수 있음을 알립니다.”
차기주는 오늘 이 징계위원회를 소집한 황지윤을 쳐다봤다.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물러나지 않겠다는 거다.
“차기주 이사는 대답하세요. 징벌방에 가이드를 가둔 것이 사실입니까?”
그는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제 가이드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제 가이드는 아직 대학생이기 때문에 헬기를 이용해 서울로 통학하고 있습니다. 헬기 사용 목록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정석훈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임원들에게 돌렸다. 임원들은 각각 차기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콜록콜록, 하는 기침 속에는 ‘황 파트장은 무슨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벌여’ 하는 책망이 섞여 있었다.
“제보가 있습니다. 차기주 이사가 가이드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는다더군요.”
“어제 제 가이드는 자신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제 가이드의 자택 주변 CCTV를 증거 자료로 제출합니다. 앞에 놓인 태블릿을 통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임원들은 태블릿에 있는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김수현과 정석훈이 대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김수현을 느슨하게 풀어둔 덕에 빠져나갈 구실이 많았다. 차기주는 양심의 가책을 단 한 톨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김수현을 보호하려 했을 뿐이고 김수현은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차기주가 감금죄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오늘 그의 처벌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주장을 죄다 완벽하게 반박해낸 차기주는 조금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을 엿 먹이려고 한 황지윤을 바라봤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그저 피식 웃으며 손목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에스퍼에게 있어 시계란 불안정 파동을 점검하는 중요한 생존 도구였다. 그러나 가이드에게는 단순히 시간을 알아보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황지윤은 시계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씨발.”
벌떡 일어난 탓에 의자가 시끄럽게 넘어졌다. 센터 임원들은 차기주가 별거 아닌 일로 자신을 불렀다고 분노한 줄 알았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수치도 모르고 숨었건만, 차기주는 그런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대회의실을 나섰다.
황지윤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지금쯤 가이드 검사가 다 끝났겠어.”
그녀는 그 누구도 차기주를 처벌하지 못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차기주가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지 않았어도 이곳에 저 괴물을 혼낼 존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징계위원회를 연 건 차기주를 붙잡아놓을 명목을 만들어 김수현의 가이드 검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황지윤은 김수현을 센터 소속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보호 아래, 김수현이 차기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테니까. 차기주 정도 되는 에스퍼를 가이딩할 수 있을 정도면 등급은 A급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저 차기주가 쩔쩔매는 걸 보니, 어쩌면 S급 가이드인지도 몰랐다.
그럼 한국에서 세계 최초의 S급 에스퍼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S급 가이드까지, 총 두 명의 S급 능력자들이 나오게 되는 거였다. 국력의 상승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힘이 실리게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차기주가 재수 없는 새끼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차기주에게서 가이드를 뺏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이드가 없었던 에스퍼에게서 가이드를 뺏으려고 해봤자 피만 볼 뿐이다. 적어도 에스퍼의 집착 속에서 숨통이 트일 정도로만 김수현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손목시계에서 눈을 뗀 황지윤은 이제 차기주한테 숙청당할 거라며 겁에 질려 중얼거리는 임원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차기주 이사가 무슨 연쇄살인마입니까? 다들 헛소리 말고 해산하세요.”
* * *
김수현은 징벌방 문이 열렸을 때 당연히 문을 연 사람이 정석훈일 줄 알았다. 그러나 처음 보는, 웬 하얀 제복을 입은 여자가 징벌방으로 들어왔다.
“김수현 씨 맞으신가요?”
“예. 누구세요?”
“이연우 대리라고 합니다. 오늘 가이드 검사를 받으실 수 있도록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진설해가 말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수현은 긴장하지 않은 척 캔버스화를 꿰신었다. 만일 무효화 능력이 통하지 않으면 자신이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라는 사실을 들키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황지윤 파트장을 놓칠 게 분명했다.
먼저 철제 계단을 내려가는 말총머리를 보며 머릿속으로 가이드 검사 때 무효화 능력을 통해 파동을 잠재우는 상상을 끊임없이 했다. 그렇게 한참 마음을 가다듬고 있자니 정말 무효화 능력이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하얀색의 네모반듯한 건물에 들어갔다. 건물 안에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연우는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김수현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김수현 씨, 차기주 이사에게 감금당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오늘 가이드 검사를 통해 센터 소속이 되면 저희 가이드 파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김수현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예.”
“일반인이 처음 물에 들어가 버티려면 조금 힘들겠지만 훌륭한 조교가 있으니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이연우의 손짓을 따라 탈의실이라고 적힌 곳에 들어갔다. 그녀는 로커를 열어 잠수복을 꺼냈다.
“알몸에 입는 겁니다. 뒤에 지퍼가 있으니 수영모와 잠수복을 착용하고 절 부르세요.”
김수현은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두 팔을 교차해 얇은 베이지색 니트를 벗었다. 청바지도 벗어 속옷과 함께 빈 로커에 넣었다. 잠수복은 생각보다 입기 불편한 재질이어서 낑낑거리며 겨우 팔다리를 밀어 넣었다.
하얀 등을 드러낸 채 탈의실 밖으로 나오자 벌써 잠수복을 다 입고 기다리고 있던 이연우가 김수현의 등에 달린 지퍼를 올려줬다. 그는 맨발에 닿는 까칠한 콘크리트의 감촉에 걸을 때마다 발가락을 움찔거렸다.
가이드 검사실에는 아쿠아리움처럼 거대한 수족관이 있었다. 수족관에 담긴 물이 조명을 받아 바닥에 물그림자가 일렁였다. 수현은 손으로 수족관의 특수 유리를 짚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이연우는 물에 들어가기 전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면서 시범을 보였다.
“목을 천천히 돌리세요. 하나, 둘, 셋.”
목 풀기 운동 뒤에는 팔꿈치를 접은 채 돌려서 어깨를 이완시켰다. 무릎을 잡고 살짝 앉은 채 돌리기도 하고 허벅지 안쪽 근육이 늘어나도록 한쪽 다리만 접은 채 앉기도 했다. 체육 시간에 학교에서 했던 준비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이제 호흡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다이빙에 있어서 기본은 ‘깊고 천천히’입니다. 이러한 호흡법은 심박수를 낮추고 긴장을 완화시켜 물속에서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연우가 가이드 검사실 한편에 있던 화이트보드를 끌고 와 마커 펜으로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다이빙 호흡은 4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준비 호흡, 최종 호흡, 숨 참기, 회복 호흡입니다. 원래라면 검사 전 센터에서 호흡법 훈련을 충분히 받아야 하지만, 특수한 상황이므로 김수현 씨가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는지 지상에서 체크해보겠습니다.”
타이머를 가져온 그녀가 코를 막은 채 숨을 들이마시라고 했다. 김수현은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켰다.
“숨 멈추세요.”
초시계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분명 제 기억상 잠수 훈련을 해본 적이 없건만, 마치 오랫동안 해온 사람처럼 익숙하게 폐 안에 공기를 가둬두고 숨을 참아낼 수 있었다.
“2분 30초. 훌륭합니다. 김수현 씨, 타고난 다이버네요.”
그녀의 칭찬을 듣고 나서야 코를 잡고 있던 집게 손을 풀었다. 한꺼번에 공기를 들이켜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켜길 반복했다.
“어지럽거나 현기증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네, 괜찮아요.”
이연우는 김수현이 혹시 다이빙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과도하게 숨을 참을 시에 컨트랙션(*수축) 단계가 오는데, 이는 배와 가슴 부위의 근육이 반복적으로 강하게 수축하는 현상으로 숨을 오래 참아 신체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였다.
이 컨트랙션 현상만 잘 극복하면 숨을 참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졌으나, 다이빙 호흡법을 배우지 않은 일반인은 결코 이 단계까지 오지 못했다. 그런데 김수현은 익숙하다는 듯 이걸 해낸 것이다.
이연우는 그가 재벌이니 취미로라도 다이빙을 해봤겠거니 짐작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검사 방식이 알려져, 다이빙을 취미로 가지는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김수현이 다이빙 경험이 많은 학생이라 단정 짓고 빠르게 수업 진도를 뺐다. 차기주가 징계위원회에 붙잡혀 있을 때 신속하게 가이드 검사를 끝마쳐야 했다. 이연우는 김수현에게 오리발과 수경, 스노클을 주고 그녀 또한 장비를 착용했다.
“물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검사 못해도 되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수족관은 중심부로 갈수록 수심이 점점 깊어지는 구조였다. 사다리를 타고 물 안으로 입수한 그녀는 혹시 모를 부상을 막기 위해 주의 깊게 그를 관찰했다. 수영에 능한 걸 보면 역시 그녀의 추측이 맞은 듯싶었다.
그는 숙련된 다이버였다.
“준비 호흡 하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의 시간 비율을 1:2로 하여 복식호흡 하세요. 부드럽게 복부를 움직여 호흡하며 이완에 집중합니다.”
김수현은 누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배영으로 몸을 잔잔하게 물에 담갔다. 이연우는 익숙하게 호흡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틱 준비하세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김수현은 당연하다는 듯 수족관의 턱을 잡았다. 그는 횡격막을 내리고 들숨을 하여 최대한 폐를 팽창시켰다. 들숨은 목, 가슴, 배 순으로 공기를 가득 담아야 했다. 김수현은 배가 빵빵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 해보는 다이빙 훈련이었음에도 마치 수천 번을 해온 사람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다. 김수현은 오리 주둥이처럼 입을 살짝 앞으로 뺀 채 오므렸다. 공기가 유입되는 통로를 물리적으로 좁혀 공기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거였다.
“잠수.”
20초 뒤 그녀는 “출수”를 알렸다. 김수현이 고개를 들어 호흡했다가 도로 잠수했다. 이번에는 40초 후 “출수”를 시켰다.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스태틱 기록을 늘리다가 수현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까지 숨을 참아내게 했다.
스노클을 착용한 그는 수면 아래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후두개를 닫고 공기를 홀딩했다. 늑골과 횡격막을 유연하게 움직여 폐에 공기를 가득 담아놓은 그는 여유롭게 무호흡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현은 아무것도 없는 물속에서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태아처럼 편안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다이버로 지낸 것처럼 처음 마주한 물이 익숙했다. 원래 다들 이렇게 물속이 편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전생에 인어라도 되었던 걸까.
푸르게 일렁이는 물빛이 그립고도 슬펐다. 깊숙한 수심 아래, 자신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았다. 희미해지는 기억은 차기주를 만난 시점부터 이상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불이 타오르는 옥탑방에 대한 기억의 조각 위로 새로운 기억이 겹쳤다.
‘도망치기만 해봐. 그땐 네 아킬레스건을 다 끊어버릴 테니까.’
‘네 집안은 풍비박산 났어. 다 네 잘못이야. 네가 날 거부해서 네 집이 망한 거라고.’
‘네 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의 소식을 알고 싶으면 여기까지 기어와. 네가 잘 빨면 한번 알아봐 주지.’
잠잠하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현은 급하게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려 입에 물고 있던 스노클을 빼냈다. 이연우는 타이머 정지 버튼을 엄지로 눌렀다.
“3분 30초. 이 정도라면 가이드 검사를 시작해도 될 것 같네요.”
잠시 물에서 나온 김수현은 수경을 벗고 호흡을 골랐다.
“잠시 올라오세요.”
이연우는 공기통에 달린 오링이 제 위치에 있는지, 낡지는 않았는지 검수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손이 준비된 서약서와 볼펜을 내밀었다.
“가이드 검사는 물에서 인위적인 파동을 일으켜 단계별로 검사 대상이 가이딩을 통해 없앨 수 있는 파동의 크기를 측정해 등급을 알아냅니다. 수압에 의한 부상을 얻거나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이드 검사에 대해 충분히 안내받았으면 서약서에 서명하세요.”
김수현은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그녀는 서약서를 회수해 가며 수족관에 있는 리프트 기계를 작동시켰다. 천장에서 사각형 모양의 철창이 느린 속도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안전벨트가 달린 의자가 있었다.
다만 등 뒤에 공기통을 달아야 하므로 등받이 대신 앞쪽에 지지대가 있어 끌어안고 앉아야 했다.
“비상시에 의자에 달린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물 밖으로 올라올 겁니다. 이제 공기통 착용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연우는 공기통과 조끼를 연결하고 밸브를 열어 압력을 점검한 뒤 김수현에게 건넸다. 김수현은 수월하게 수중에 가라앉아 있을 수 있도록 몸무게의 10%에 해당하는 쇳덩이가 달린 벨트를 착용하고 조끼를 입었다. 그는 다시 수경을 착용하고 입에 공기 호스를 물었다.
“위험 상황 발생 시에는 반드시 비상 버튼을 누르세요.”
김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연습해보도록 하죠.”
수현이 의자에 앉아 몇 번이나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하고 나서야 이연우는 리모컨을 이용해 리프트 기계를 수족관 한가운데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김수현은 철창에 갇힌 채 물속에 잠겼다. 이연우는 뒤늦게서야 물에 들어갈 때, 수경과 밸브를 오른손으로 눌러야 한다고 말해야 했음을 깨달았다.
김수현이 너무나 능숙해 일어난 실수였다. 이연우는 다급한 마음으로 물속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김수현은 고개가 젖혀지지 않도록 턱을 당긴 채 수경과 공기 호스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역시!
그녀는 순수하게 그의 다이빙 실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실상 김수현은 패닉에 빠져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서서히 발밑에서 물이 차오를 때, 하마터면 비상 버튼을 누를 뻔했다.
그러나 황지윤이라는 조력자를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상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가이드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야 했다. 확실치도 않은 소문이 아니라, 검증된 절차를 통해서. 철창이 완전히 수족관 바닥에 가라앉았다. 방송을 통해 그녀가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럼 지금부터 가이드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하세요. E급 측정입니다.”
잔잔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물살이 느껴졌다. 김수현은 능력 무효화를 사용해봤다. 신기하게도 물의 움직임이 언제 흔들렸냐는 듯 멈췄다.
“E급 통과. 준비하세요. D급 측정입니다.”
이번에는 제법 물살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싶었다. 산에 가면 흐르는 시냇물에 손을 담그면 느낄 만한 유속이었다.
“D급 통과. 준비하세요. C급 측정입니다.”
D급에서 C급으로 넘어가니 물살이 확실히 급해졌다. 이제는 물살이 용 모양으로 움직이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김수현은 이번에도 손쉽게 그 물살을 와해시켰다.
이렇게나 빠르게 가이드 검사가 진행된 것은 센터 건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동 에너지에 반응해, 그 파동을 가라앉히는 속도가 채 1분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준비시키면 즉각적으로 파동 에너지를 잠재운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차기주의 가이드다웠다.
“준비하세요. B급 측정입니다.”
수족관은 애초에 파동 에너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로 잠잠했다.
파동 에너지는 등급별로 해당하는 고유 숫자를 그만큼 또 제곱한 크기와 동일하게 여겨진다. E급의 고유 숫자는 2, D급은 3, C급은 4, 이런 식이다. 2², 3³, 4⁴……. E급의 힘이 4일 경우 D급은 27, C급은 256. 그렇게 계산하면…… A급은 6의 여섯 제곱인 46,656인 것이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등급 간 힘의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졌다.
“준비하세요. A급 측정입니다.”
A급 가이드라면 바다에서 서퍼들이 서프보드를 탈 수 있는 정도로 높게 이는 파도 정도는 잠재울 수 있어야 했다.
그동안 보여준 김수현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연우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거대한 물살에 당황해서 자신이 가진 가이딩 능력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A급 등급 측정이 순식간에 끝났다. 어쩌면 파트장의 추측대로 김수현은 S급 가이드인지 몰랐다. 아직 시도해본 적 없는 등급 측정이었다. 엄청난 유압을 견디지 못하고 수족관이 깨져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명령받은 대로 S급 등급 측정을 준비했다. 수족관이 깨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물이 넘치지 않도록 배수관을 열어 물을 어느 정도 빼냈다. 설령 수족관이 깨진다고 해도 피해가 덜할 방법이기도 했다. 차기주의 경우 등급 측정을 했을 때 그가 내보낸 파동 에너지가 북극에서도 측정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가 지진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는지라 이는 센터에서도 몇 명 알지 못하는 극비 사항이었다. 본래 서울에 있던 센터를 태백산으로 옮기게 된 것도 그때였다. 센터 건물이 차기주의 파동에 의해 폭삭 주저앉았으니까. 혹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최대한 수도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윗선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가이드 등급 측정은 김수현 혼자만이 위험해지는 검사였다. 여기서 만들 수 있는 파동으로는 기껏해야 수족관 하나만 터질 뿐, 그걸 막아내지 못하면 위험해지는 건 김수현 하나였으니까. 충분히 할 가치가 있는 실험이었다.
“김수현 씨, S급 가이드 등급 측정을 진행할까 합니다. 혹시 원치 않으시면 빨간 버튼을 눌러주세요.”
그녀는 그도 가이드인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S급 등급 측정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빨간 버튼을 눌렀다. 수족관에 잠겨 있던 철창이 위로 올라갔다. 이연우는 김수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검사가 두려운 걸까? 그렇다기엔 물 위로 올라온 그의 표정은 한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A급 가이드 검사도 손쉽게 통과한 그라면 최초의 S급 가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안전벨트를 푼 그가 철창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어째서 S급 등급 측정을 거부하냐고 물었다. 그는 마이크를 통해서 느껴지는 그녀의 당혹감에 입에 물고 있던 공기 호스를 뱉어냈다.
“난 차기주 이사의 가이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마침 김수현을 구하러 달려왔던 차기주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김수현의 눈동자가 기둥 뒤에 숨어 다가오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이를 마주했다.
차기주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이 평소보다 붉은빛을 띠었다. 꽤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얼음으로 깎아놓은 줄 알았던 남자가 이렇게나 날것의 감정을 드러낼 줄 몰랐다.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른 그가 김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다급한 발걸음으로 검사실을 벗어났다. 상처받은 듯 도망치는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게 왜 자신을 가뒀냐며 코웃음이라도 쳐야 했건만 목이 메었다. 김수현은 마치 무거운 물건에 짓눌린 것처럼 땅을 파고드는 듯한 철렁함을 느꼈다.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문질러봤다. 뒤통수에 감정을 실을 수 있을 리 없건만, 왜일까. 자꾸만 도망치는 것 같았던 차기주의 뒷모습이 머릿속에 영상처럼 흘러갔다. 상처받은 게 자신인 것처럼 시선이 흔들린다.
뒷담화했는데 상대방이 들은 것 같은 상황이어서 그런 걸까.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변명해본다.
정석훈이 검사실에 김수현을 데리러 왔다. 김수현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정석훈과 함께 징벌방으로 향했다. 그가 몹시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자신이 에스퍼라는 걸 아는 이였으니 어떻게 가이드 검사를 통과한 건지가 궁금한 것이겠지. 무효화 능력에 생각 이상으로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터라, 굳이 오늘 있었던 검사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만에 하나 자신의 능력이 사람의 죽음마저 무효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면? 힘에는 책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는 전지전능한 존재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철제 계단을 오르는 내내 정석훈의 시선에 등줄기가 따끔거렸다.
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라 ‘여기서 어떻게 도망간다고 그래요. 나 좀 내버려 둬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도 꾹 참고 그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도한 관찰을 책잡지 않았다.
정석훈이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센서에 대고 문을 열어줬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혹시 그 사원증 좀 자신한테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세요. 이사님 기분이 언짢으십니다.”
“그래요. 다 나 때문이죠.”
수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캔버스화를 벗었다. 물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땅을 딛는 발에 힘이 빠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형에게 맞아 발긋하게 물든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평범한 에스퍼였으면 이미 사라졌을 붓기였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이 가진 에스퍼로서의 신체 회복 능력까지 무효화하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엎드려 있으니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진 방 안에 털털,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너도 참 관종이다.”
사람만 나타나면 자기 좀 봐달라는 듯 열심히 움직이는 다람쥐를 보며 김수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없는 힘을 쥐어짜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당근을 꺼내 싱크대에서 씻었다. 차기주가 요리를 해준 것처럼 자신도 다람쥐에게 당근을 썰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싱크대 하부 장 문이 열리지 않았다. 힘으로 당겨봤으나 손끝만 아파서 포기했다. 문을 잘 들여다보던 수현은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싱크대 하부 장에까지 지문 인식 장치를 달 줄이야. 차기주는 자신이 식칼로 자살이라도 할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감금했다고 다 삶을 포기하려고 드는 건 아니다. 자신의 정신 상태가 그렇게나 미약해 보였던 걸까. 다람쥐에게 당근 하나 잘라주지 못하는 현실이 화나고 분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수현은 당근을 들고 CCTV를 향해 흔들었다. 김수현을 감시 중이던 정석훈은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 눈썹을 매만졌다. 그러다 결국 여동생에게 당근을 흔드는 게 뭘 뜻하냐고 문자를 보냈다.
[왜? 누가 당근을 흔들어? 그거 자기 도와달라는 건데?]
정석훈은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김수현이 순식간에 가련하고 연약해지더니 그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망상이었다. 그 또한 이것이 망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머리에는 김수현을 구해줄 존재가 자신밖에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는 침대맡에 놓인 화병을 끌어안았다. 시들어가는 꽃잎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마치 자신이 김수현을 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 얼른 꽃병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아, 어쩌지. 어떡해.”
작약꽃이라면 얼마든지 꽃집에서 새로 사면 되건만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는 떨어진 꽃잎을 주워 책 사이사이에 끼웠다. 이렇게 말린 후 책갈피로라도 만들어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소중한 작약꽃을. 소중한 향기를.
정석훈은 자신이 지나치게 김수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작약꽃의 흔적들을 모조리 소유함으로써 김수현을 가지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공허함을 채웠다.
익숙하면서 낯선 기억이 섬광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책을 만지느라 부산스럽던 손길이 뚝 끊겼다. 어딘가 멍한 초점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벌써 세 번째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야지.”
* * *
바닥을 뒤덮다시피 널브러진 옷가지들 사이에서 하얀 무언가가 꾸물거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새 둥지처럼 붕 뜬 메시아였다. 그는 방 안 어딘가에 던져놓았던 제네시스 신도들의 인적 사항을 찾는 중이었다.
방 안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려 있었고, 물건 또한 전부 끄집어내져 있었다. 한참을 뒤적이던 메시아는 운동화를 배송받고 생긴 주황색 박스를 침대 밑에서 찾아냈다.
그 안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선물 받은 유리구슬과 이상한 풍선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와 씹다가 잊어버려 딱딱하게 굳어버린 풍선껌, 예뻐서 모아둔 초록색 소주병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예쁜 것들이었다.
예전에는 이것들이 너무 신기하고 좋았는데, 인간계에서 지내다 보니 그것들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메시아는 초록색 소주병을 들어서 예전처럼 형광등 불빛에 비춰봤다. 처음 인간계에 내려왔을 땐 이거 하나만 있어도 온종일 구경하느라 재미있게 놀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전부 지루해졌다. 그는 소주병들과 풍선껌, 유리구슬을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았다.
그러곤 여기저기 널려 있던 것 중 이제는 어디에 쓰는지 아는 콘돔만 소중히 챙겨 지갑에 넣어뒀다. 그렇게 한참 방을 청소하고 나니 제네시스 신도들의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가 나왔다. 그곳에는 김수현의 아버지, PL 그룹 김 회장에 대한 서류도 있었다.
회귀하기 전, 그는 PL 그룹 김 회장의 초대를 받아서 처음 김수현을 만났었다.
잊고 있었는데, 김 회장만 잘 이용하면 김수현을 보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연기 따위 할 필요 없이 간단하게.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메시아는 자신이 이제 인간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김 회장한테 아들을 달라고 하는 거야! 수현이랑 내가 결혼하면 차기주 성격에 열 받아서 자살하고도 남지, 암. 차기주가 죽으면 얼른 하늘의 심판을 열어서 인류를 멸망시키고 수현이랑 천계로 돌아가야지.”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크크 웃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서류에서 김 회장의 핸드폰 번호를 찾아낸 메시아는 얼른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아들을 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류를 다시 살핀 그의 눈매가 축 구슬프게 내려갔다.
“씨,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 으아아아! 짜증 나. 내가 그래서 김 회장을 이용해먹지 않은 거였구나.”
메시아는 러그 위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빨리 김수현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는 소지품을 넣고 다니는 가방을 뒤져서 담뱃갑을 찾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자 잿빛 연기가 길게 뿜어졌다. 순결하고 순진한 천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행이었으나 메시아는 본인의 타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타락은 자신의 날개가 타들어갔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인간들은 죄다 술과 담배와 섹스를 하며 살았다.
자신도 반은 인간으로 지내니까 해도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아는 책상 위 다 마신 에너지 음료 캔 안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리고 의자를 빼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선배인 척하는 연기는 작가 행세를 하느라 그만뒀지만 일기를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윤석이라는 인간의 모습 이외에도 메시아라는 모습 또한 있었으므로, 그는 메시아의 능력을 사용해 정보를 모았다. 사기꾼의 충고를 잘 받아들여 이번에는 김수현을 반드시 속일 수 있도록 증거 자료를 착실히 수집할 생각이었다. 절대 조바심을 내선 안 된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는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똑똑하게 굴어야 했다. 바스스. 입에 문 담배에서 다 탄 재가 떨어져 내렸다. 메시아는 다 피운 담배를 캔 안에 집어넣어서 껐다.
그 아이는 항상 내 등을 본다. 내 등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그림 속에서 나는 얼굴은 없고 등만 있다. 왜 얼굴을 그려주지 않으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 얼굴보다 잘생기게 그릴 자신이 없어요.
김수현도 한때 상대에게 잘생겼다는 말을 이렇게 낯간지럽게 말할 만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다 메시아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거짓에 불과했지만.
그는 회귀를 거듭하면서 흐릿해진 기억을 찾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차기주가 그의 염장을 지를 때 했던 말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중 몇몇 개는 기억났다.
그 아이는 구름이 그려진 파란색 수면 양말을 좋아한다. 매일 집에서 그것만 신고 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단다. 아니면 작은 햄스터라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떡볶이는 쌀떡보다 밀가루떡을 더 좋아하고, 놀이터에 가면 그네를 탄다. 멍이 생기면 잘 빠지지 않고 아버지를 무서워한다. 나중에 누나가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를 버리고 나가서 둘이 살 거라고 했다. 편의점에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랑 민트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 있으면 둘 다 먹고 싶어서 고민한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사실들을 적어 내리던 메시아는 페이지를 넘겨 다람쥐가 전해주는 정보를 적었다.
그 아이는 김밥과 우동을 무지 좋아한다.
으드득. 메시아의 어금니가 맞물려 흉악한 소리를 냈다. 요 며칠 징벌방에 차기주가 오지 않아서 기뻤건만 그 새끼가 오늘 김밥과 우동을 들고 찾아왔다. 김수현은 그 별거 아닌 분식을 받고 감동했는지 차기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도 김밥이랑 우동 좋아하는데.”
메시아는 분한 얼굴로 연필을 책상에 쾅 내리찍어 심을 박살 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계속 연필로 책상을 쾅 쾅 찍으며 혼잣말을 해댔다. 결국 연필이 두 동강 나버렸다.
“나도 수현이가 좋아하는 거 사줄 수 있는데.”
그는 망가져 버린 연필 조각을 등 뒤로 휙 던져버리고 필통을 뒤집어서 안에 든 필기구를 몽땅 쏟아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연필을 하나 챙기고 나머지를 필통에 욱여넣었다. 필요한 것만 찾아 꺼내는 융통성을 갖추지 못한 탓이었다.
입을 댓 발 내민 메시아는 노트를 괜히 손으로 쓸어서 빳빳하게 펴냈다. ‘차기주 좆 같은 새끼’라고 만 번 정도 적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노트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글씨를 예쁘게 쓰기 위해 목을 거북이처럼 쭉 내민 채 허리를 구부렸다. 집중하느라 꼭 눈코, 입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았다.
메시아는 몰두하고 있던 작업을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그러곤 김수현이 김정석에게 맞은 뺨과 같은 쪽 뺨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난 차기주랑 달라. 차기주는 자기를 사랑한다고 수현이를 완전히 세뇌했고 나는 단순히 조금 착각하게 만드는 거잖아. 거짓말은 나쁜 거지만 난 인간이 살아생전 수억 개의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할 동안, 한 손에 꼽히는 수의 거짓말을 했을 뿐이니까 크게 잘못하는 게 아니야.”
스스로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메시아는 진작 지상을 떠났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인간과 닮아가기 전에. 여전히 자기 이름이 루시펠일 거라 믿는 거짓말쟁이는 네모난 양심이 둥글게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그는 그 모든 행위를 사랑이라고 포장했지만 만일 그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줄 이가 있었다면 제발 정신 차리라고 말했을 게 분명했다. 메시아는 두 날개를 잃고 타락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