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1)
휘발유, 경유, 고급유의 시세가 적힌 판이 세워진 주유소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지독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르바이트생들은 기름 냄새에 두통과 구역질이 이는 걸 참아내며 손님을 기다렸다.
주유하러 오는 차를 기다리는 내내 아무것도 안 한 채 계속 서 있기만 하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그리 녹록한 노동인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주유소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면 한 달을 채 못 견디고 도망가곤 하니까.
주유소 사장은 사무실에 앉아 창문으로 아르바이트생들을 감시하며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셨다. 주유소로 2.5t 화물 트럭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아르바이트생 중 하나가 사장의 눈치를 보며 잽싸게 화물 트럭으로 다가갔다. 아르바이트생은 허리를 굽혀 운전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얼마 넣어드릴까요?”
“가득.”
운전자가 고개를 돌린 상태라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달칵, 주유구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르바이트생은 거치대에 걸려 있던 주유기를 손에 들고 기름때로 찌든 화물 트럭의 고무 노즐에 꽂았다.
주유기 레버를 누르자 호스를 타고 기름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유기 펌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화물 트럭 룸미러에 달린 천사 조각상이 달랑거렸다. 운전자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기다렸다.
빠른 속도로 화물 트럭 연료 탱크에 기름이 담기고 있지만 용량이 100L나 되는지라 주유하는 데 한참 걸렸다. 아르바이트생은 사무실로 뛰어가 생수와 싸구려 여행용 티슈를 가지고 나왔다.
운전석 창문에 대고 그것들을 건네려고 했는데 운전자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니 회색 담벼락에 빨간 스프레이로 그려놓은 화살표를 따라 화장실로 향하는 등이 보였다.
운전자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쓰레기를 담은 종량제 봉투에 들어가도 이보다는 깨끗하리라. 그는 여러 사람이 밟고 지나가 검게 더럽혀진 화장실 타일 위로 가래침을 뱉었다.
나프탈렌을 매달아놓았으나 조준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줌을 싼 사람들 때문에 소변기에서 지린내가 심하게 났다. 그는 그 앞에 서서 오줌을 누며 손으로 얼굴을 벅벅 긁었다.
하얀 각질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시도 때도 없이 긁어 살점이 팬 상처에 피가 맺혔다. 심각한 아토피 피부염을 앓고 있는 그는 수년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별다른 차도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같은 반 아이들은 그를 괴물 취급하며 피해 다녔다. 그가 있는 자리에 수북이 쌓인 하얀 각질들은 타인의 혐오를 불러일으켰고, 잠 못 이루게 하는 가려움은 멀쩡한 피부조차 수없이 난도질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겨우 아토피 피부염이라고 할지 모르나, 오랜 시간 고통받아온 그는 이 병만 고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텔레비전 건강 프로에서 본 대로 유기농 채소를 갈아 마시고, 가공식품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 혹독한 식단을 유지했다. 병원도 빼먹지 않고 다니며 독한 약을 먹고 연고를 발랐다. 또 무의식중에 몸을 긁지 않기 위해 손을 묶어두고 잠을 잤다.
고대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쌓아 올린 것과도 같은 고행을 견뎠으나, 그의 피부병은 좋아졌다가 나빠지길 반복했다. 그러던 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개척 교회에서 메시아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메시아는 인간 세계를 구원할 위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거룩한 신의 분신이었다. 그분께서는 신이 인간계에 내려보낸 사자를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센터 에스퍼들을 무찌르는 정의 단체 ‘제네시스’를 설립하셨는데, 그 일원으로 자신을 들이고 싶다고 하셨다.
“정말 제가 제네시스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요? 저처럼 쓸모없는 버러지가 그런 위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하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을 바라보는 눈빛은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축 처진 둥그런 어깨를 메시아가 다정하게 두드려줬다.
“제가 형제님을 선택함으로써 형제님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형제님은 이제 선택받은 자입니다.”
다행히 그는 이능력 센터, SP에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에스퍼였다. 나라에서는 4년마다 능력자 검사를 시행했는데, 그가 27살에 각성하여 운 좋게 검사를 피할 수 있었던 덕이었다.
그는 ‘염산 생성’이란 아주 위험하고 희귀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면 감시 대상자로 선정되어 24시간 센터에게 감시받을 게 분명했다.
오줌을 다 싼 그는 히죽 웃으며 바지 지퍼를 올렸다. 메시아에게 인정받아 제네시스의 일원이 된 그는 아주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만일 제대로 해낸다면 그분께서 이 지긋지긋한 병을 치료해주시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화물 트럭을 향해 걸었다. 팔을 벅벅 긁으며 운전석에 올라타려는데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이 말을 걸어왔다.
“야, 너 정화고 3학년 1반 폼페이 맞지? 잘 지냈냐?”
그의 기억 속에 깊게 박힌 목소리가 아는 체를 해왔다. 언젠가 저를 괴롭혔던 악당의 목소리였다. 폼페이는 화산 폭발로 멸망한 고대 도시의 이름인데, 떨어지는 각질이 마치 화산재 같다며 같은 반 아이들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붙인 별명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눈앞의 동창생이 쓰레기통을 뒤집었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힘들게 벌어온 돈을 빼앗고, 매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 오라며 때렸었지.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은 금세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 그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목을 움츠려서 어떻게든 얼굴을 숨기려고 했다. 동창생이 킥킥 웃어대는 소리만 들리지 않았더라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와, 넌 어떻게 그때랑 똑같냐.”
그는 동창생이 여전히 붉은 상처 자국과 떨어지는 하얀 각질로 가득 찬 자신의 얼굴을 흉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드 단말기를 손에 든 동창생이 기름값을 말했다. 그는 허겁지겁 운전석에 올라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결제가 끝난 카드 단말기에서 영수증이 나왔다. 그는 빠르게 영수증만 받아 도망치는 사람처럼 시동을 걸고 주유소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화물 트럭은 멈춰 섰다.
그는 평소보다 기름값이 4만 원은 더 많이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몹시 억울하고 마치 학창 시절 당했던 괴롭힘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핸들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오른 기름값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뻘게진 눈으로 주유소로 되돌아갔다. 거대한 화물 트럭이 주유기를 거세게 들이박았다. 차 문을 열고 내린 그는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동창생을 찾았다.
두려움에 확장된 동공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이제 자신은 과거의 그 나약한 아이와는 달랐다. 자신은 메시아에게 선택받은 존재였다. 자신에겐 저 쓰레기를 심판할 힘이 있었다. 그는 제 행동이 옳다고 믿었다. 그가 이 얼굴 때문에 괴로워한 만큼 그를 비웃은 동창생도 똑같은 비참함과 괴로움을 응당 맛봐야 했다.
울긋불긋한 얼굴의 남자가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서 물총처럼 투명한 액이 발사되었다.
“으아아악! 아아아!”
염산에 맞은 동창생이 기름때로 가득한 주유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표피에 감춰져 있던 근육과 인대가 드러났다. 남자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누군가를 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자신을 괴롭히던 악당을 제 손으로 벌했다. 몸의 모든 신경과 정신까지 신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느끼기 무섭게, 그의 육체가 마치 풍선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지느러미를 가진 거대한 마름모꼴의 괴수가 되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메시아의 목소리가 괴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터널로 가서 차기주를 공격하세요.’
드디어 임무를 실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이 임무만 무사히 마친다면……. 그러나 가오리 괴수는 차기주를 만나자마자 맨손으로 찢기고 핵이 뽑혀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끝내 빛나지 못한 삶이었다.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버려진 화물 트럭이 세워진 주유소로 하얀 머리를 가진 청년, 메시아가 나타났다. 염산에 의해 피부가 녹아버린 남자가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메시아는 그런 남자를 외면한 채, 화물 트럭 룸미러에 달려 있던 천사 조각상을 챙겼다. 주유소에는 부상자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가 거기에 누군가 숨어 있음을 알려줬다. 쓸모없는 멍청이가 괴수로 변하는 모습을 본 목격자들을 처리해야 했다.
메시아는 넘어진 주유기에서 흘러내린 검은 기름을 향해 불붙은 라이터를 던졌다. 석유가 흘러넘치는 주유소가 폭탄을 던져놓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지상에 머무는 검은 뭉게구름이 바람을 타고 매캐한 냄새를 실어 날랐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여섯 대의 소방차와 수십 명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진압하려 애썼다. 하지만 불길이 너무도 거세 다가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결국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한 채 주유소는 연소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뉴스에 나온 주유소 화재 사고와 가오리형 괴수의 출몰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그 두 사건을 관련 짓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김수현이 센터 징벌방에 감금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김 비서가 차기주에게 정신병원에 출몰한 괴수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게이트가 열린 것도 아닌데 괴수가 나타났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차기주는 보고서를 거칠게 넘기며 내용을 읽었다.
“물론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이미 전력이 있지 않습니까. R21 구역 말입니다.”
보고서에는 괴수가 출몰한 정신병원이 전소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이러면 현장을 찾아가도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는 센터가 발견하지 못한 게이트로부터 건너온 괴수가 정신병원에 숨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만, 이런 보고서를 올린 걸 보면 이 괴수가 무언가 특별하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낸 게 틀림없었다. 차기주는 손에 든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클라우드 방식 CCTV라 통신사 서버에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영상 준비했습니다. 보시죠.”
차기주는 김 비서가 건넨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의료 카트를 끈 간호사들이 종합병원식 복도를 이동했다. 세탁실에 침구류를 가지고 들어가는 푸른 작업복을 입은 직원과 병동을 순찰하는 경비원들은 특별한 것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회진을 돌고 있던 의사를 환자 한 명이 덮쳤다. 그들의 몸싸움을 막기 위해 경비원이 달려들었다. 체구가 작은 여자가 발버둥 치며 의사의 귀를 물어뜯었다. 그러곤 뜯어낸 귀를 병원 복도에 퉤 뱉어냈다.
그녀의 입에서 의사의 피가 흘러내렸다.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건 당일 성소윤 씨가 주치의 박명준을 습격했습니다. 확인 결과, 주치의가 지속적으로 성소윤 씨에게 약을 먹여 성폭행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게이트 없이 괴수가 출몰한 것과 관련 있나 보지?”
눈치 좋은 상사를 모신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주는 태블릿에서 두 번째 영상을 재생시켰다. 박명준이 구속복을 입고 누워 있는 성소윤의 침대를 끌고 수술실로 이동 중이었다. 그의 귀에는 피에 젖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차기주는 귀를 잃은 복수로 저 새끼가 성소윤의 귀를 잘라버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성소윤 씨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부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낙태 수술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
세 번째 영상은 수술실 앞 복도였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와 굳게 닫힌 수술실 문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술실 문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날아갔다. 곧바로 수술실에서 거대한 캥거루처럼 생긴 괴수가 뛰어나왔다.
“김 비서는 성소윤이 괴수가 되었다고 생각해?”
“예. 그렇습니다.”
“그럼 마지막 영상에 그 증거가 담겨 있겠군.”
성소윤이 주치의 박명준의 귀를 물어뜯어 뱉어냈던 복도에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차기주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어두운 복도를 맨발로 걷고 있는 메시아가 천장에 매달린 CCTV로 다가왔다.
하얀 얼굴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치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의 깊게 잘 보라는 듯이.
파란색 얼룩으로 가득한 손이 라이터의 불을 켰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술 모양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안녕, 인어공주.’
차기주와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 사람처럼 손으로 목을 붙잡은 메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놓았다. 라이터가 바닥에 떨어지자 불꽃이 흐르는 강물처럼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바닥에 석유를 뿌려둔 것이다. 순식간에 복도가 불길에 휩싸였다. 마지막 영상은 그것으로 끝났다. 차기주는 메시아의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어공주? 그게 뭐야.”
“동화책도 안 읽어보셨어요?”
내게 동화책 따위를 읽을 여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차기주는 진심이냐는 얼굴로 김 비서를 째려봤다. 김 비서는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얌전히 「인어공주」의 내용을 읊었다.
“안데르센이 쓴 동화인데 인어가 왕자를 사랑해서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어주고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왕자가 자길 구해준 존재를 이웃 나라 공주라고 착각해 그녀와 결혼해버려요.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어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바다에 뛰어들어 물거품이 되고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차기주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바로 메시아가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의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신의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자 아름다운 신이 되었다는 신화에서 프로젝트명을 따온 생체실험이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였다. 인어와 바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그러니 그 실험의 정체를 아는 이라면, 차기주를 인어 취급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말 못할 비밀을 가진 인어.
한때 ‘384’로 불렸던 그는 연구원에 의해 수도 없이 물에 처박혀 매칭 가이딩 검사를 받았다. 차기주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어두운 물속에서 일어난 물보라는 레이스처럼 부드럽게 그를 감싸 안는다. 낮은 수온은 산 자마저 시체처럼 얼어붙게 만든다. 어둡고 차가운 물 속, 죽은 듯 얼어버린 그에겐 그 누구의 가이딩도 통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실험체 ‘384’에게 죽임당하기 직전까지 왜 그 혼자만 SS급 에스퍼로 각성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주사를 놓았고, 몇 번이고 배를 갈라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차기주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말아 쥔 탓에 손바닥이 하얗게 질려갔다. 차기주는 동요를 숨긴 채 정적인 눈으로 태블릿 화면을 껐다.
메시아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려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것까지 알아냈다면 이미 김수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확률이 컸다. 특이체질인 그는 김수현의 가이딩이 아니면 늦든 빠르든 무조건 죽게 되어 있었다. 메시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김수현을 죽이거나 빼돌릴 테지.
차기주는 반드시 자신의 페어를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김수현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이번에야말로 메시아와 제네시스를 완전히 뿌리 뽑아버려야 했다. 차기주는 어느새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채 냉철한 눈을 했다.
메시아가 차기주의 정체를 안다며 자신만만하게 굴었지만, 차기주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의 왕은 괴수를 부릴 줄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을 괴수로 만들 수 있는 거였다. 그를 따르는 괴수들은 한때 인간이었던 자들이다. 그 변이자들을 추격하다 보면 메시아에 대한 꼬리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센터로 데리고 올 때, 그들을 급습한 가오리 괴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다른 괴수들과 달리 의지와 목적을 가진 것처럼 자신만 공격했던 괴수. 그날 강원도의 한 주유소에서 났던 큰 화재, 괴수로 변한 성소윤과 모습을 드러낸 메시아, 그리고 불타 사라진 정신병원. 모든 사건이 하나둘 퍼즐처럼 맞아 들었다.
그는 김 비서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얼마 전에 강원도 주유소에서 큰 화재 사고가 났었어. 경찰 측에 협조 공문 보내고 사고 당일 주변 CCTV와 지나갔던 차량 블랙박스 확보하도록 해.”
김 비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이사실에서 물러났다. 차기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짓누른 채 눈가를 찌푸렸다. 적의 몸집이 얼마나 큰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센터의 보안을 뚫고 쳐들어온 제네시스에 의해 가이드 10명이 납치당했었다. 차기주는 메시아와의 결전을 벌였으나, 중간에 그를 놓치는 바람에 큰 수확 없이 난장판이 된 센터의 뒷수습이나 해야 했다.
당시 센터는 제네시스의 뒷배를 봐주는 권력자들의 정체를 밝혀낼 생각으로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그 본진을 면밀히 관찰 중에 있었다. 그러나 자기 가이드를 제네시스에게 빼앗긴 에스퍼들은 참지 못하고 멋대로 가이드 구출 작전을 벌였다.
그로 인해 나라를 좀먹고 있는 거물급 인사들은 센터의 계획을 눈치채고 빠르게 흔적을 지운 채 잠적해버렸다. 그렇게 제네시스 세력을 일망타진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괴수를 신의 사자라고 떠드는 미친 사이비 집단을 후원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국민의 두려움으로 돈과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인, 기업인뿐만 아니라 센터 내부에도 제네시스를 환영하는 인사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있을 게 분명했다.
센터의 존립은 괴수를 물리치고 국민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괴수가 없으면 그들이 존재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면 센터 내 고위 인사들은 적에게 내부 작전을 흘리고, 센터 보안을 마비시켜 제네시스 신도들을 들이고도 남았다.
제네시스가 존재함으로써 국민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센터 소속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고마워하고, 또 의존했다. 제네시스의 출현 이후 SP에 할당된 국가 예산이 기존보다 10배 이상 뛴 게 그 증거였다.
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계가 바로 센터 에스퍼들이 돈을 얼마나 물처럼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메탈 시계는 에스퍼의 파동 오염도를 측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계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해내는 물건이었다. 센터 소속 에스퍼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었지만 그 기능이 웬만한 명품 시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제작 단가가 수억을 넘겼다.
시곗바늘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어느 나라에 있느냐에 따라 위치가 달라졌다. 해외 출장이 잦은 에스퍼들이 출장을 갈 때마다 일일이 시간을 맞추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 번거로움을 방지하기 위해 스위스 시계 명인들은 중력 보정 장치, 투르비용을 손수 깎아 동전만 한 공간에 밀어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날짜가 알아서 세팅되는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 스카이 차트에 북반구를 그려놓아 달의 몰락과 별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셀레스티얼 컴플리케이션 기능, 수시로 잠수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해저 500m에서도 방수가 되는 기능까지. 쓸데없이 비싸다고 하기엔 2,000여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시계에는 제법 공이 많이 들어갔다.
그는 시침과 분침이 오후 6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서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김수현을 만나게 되면서 차기주의 일상은 마치 태양 주위를 맴도는 지구같이 일정해졌다.
이사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보고 센터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차기주는 늘 그랬듯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임직원 전용 식당으로 들어갔다. 셰프가 매일같이 식당을 찾는 차기주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오늘도 2인분 맞으시죠?”
“네. 삼겹살 구이로 부탁드립니다.”
창백한 뺨과 달리 차기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김수현의 식사를 챙기는 일은 어쩐지 늘 부끄럽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기주는 화끈거리는 귓불을 손으로 쓸어낸 뒤 음식이 준비될 동안 괜히 민망해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우면서 나온 연기가 환풍기에 빨려 들어갔다. 도시락 칸마다 구릿빛 삼겹살과 명이나물, 김치, 부추무침, 쌈장, 편 마늘, 밥이 채워졌다. 상추와 깻잎은 별도로 포장되어 종이 가방에 담겼다.
양손 묵직하게 식사를 든 그의 발걸음이 갈수록 빨라졌다. 그는 자신이 어느새 거의 달리다시피 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징벌방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차기주는 징벌방 문 앞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넥타이를 조였다. 어차피 들어가면 풀어버릴 정장 상의 단추를 굳이 채워 최대한 행색을 단정히 한 다음, 노크했다.
“수현아, 들어가도 되니?”
“들어오세요.”
그는 사원증을 센서에 대고 문을 열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는 김수현의 둥근 등이 제일 먼저 보였다. 차기주는 종이 가방을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두고 그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뒤에서 지켜봤다.
음식이 식기 전 먹이고 싶어서 달려온 주제에, 그림을 그리는 김수현을 재촉하지는 못했다. 캔버스에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기주는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러다 손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양팔을 교차했다가, 돌연 팔짱을 풀어 정장 주머니에 손을 넣는 둥 부산스럽게 굴었다.
차기주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동안 무심한 등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차기주는 그사이 평정심을 되찾아 본래의 차가운 인상으로 되돌아왔다. 때마침 김수현이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 닦고 올게요. 먼저 드세요.”
말 잘 듣는 개처럼 냉큼 아일랜드 식탁에 앉은 차기주는 도시락을 꺼내 수현이 나오자마자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세팅해뒀다. 그는 김수현이 볼이 미어지도록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현이 맛있게 먹든 말든 가이딩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피식,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김수현이 삼겹살 구이를 보고 눈을 빛냈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아끼는 듯 구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웃기도 잠시, 수현의 두 눈에 박힌 별들을 세느라 할 말을 잃었다.
“잘 먹을게요.”
쌀밥을 듬뿍 뜬 수저가 입 안으로 숨었다.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턱을 괴고 김수현이 식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뭐 해요. 안 먹고.”
“너 먹는 거 구경하려고.”
“기분 나쁘니까 보지 마요.”
“내가 보는 게 기분 나빠?”
“그럼 좋겠어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니까 이때만큼은 저도 자유를 보장해달라고요.”
수현을 센터에 감금 중인 주제에 같이 식사를 한다고 자꾸 현실을 까먹었다. 김수현은 자발적으로 차기주의 옆에 있어주는 게 아니었다. 차기주가 풀어주는 순간, 김수현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겠지. 차기주를 여기, 홀로 남겨둔 채로.
그도 이 관계가 강압적인 방식으로 성사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파동이 불완전해지면 김수현은 무효화 능력으로 그를 리셋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게 그들의 계약이었다.
그런데 왜 차기주는 허락되지 않은 김수현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고, 또 그와 감정을 교류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넋이 나갈 뻔하지 않았던가. 이 정체 모를 갈망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고, 과부하 걸린 신체의 부작용으로 괴로웠다. 그러다 김수현을 만나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그러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그에게 집착하는 것이 분명했다. 차기주는 이 감정에 섣불리 ‘사랑’이란 곱디고운 이름표는 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을 싫어하는 알파를 사랑하게 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들은 같은 알파였다. 페어 계약서를 작성할 때 김수현이 내건 조건들에는 차기주와 손끝 한번 스치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빤히 자신을 싫어하는 게 보이는 상대를 사랑할 만큼 그는 어리석지도, 또 어리석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차기주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잔뜩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바라봤던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조금만 덜 조급하게 굴었다면, 둘의 사이는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페인트 희석제가 담긴 양동이에서 페인트 붓을 꺼냈다. 김수현은 과감한 몸짓으로 붓이 머금은 하얀색 페인트를 휘날렸다. 바닥에 비닐을 깔아두고, 그 위에 올려놓은 우주 배경 캔버스에 하얀 점들이 눈처럼 찍혔다. 즉흥적이고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별들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림을 한쪽에 옮겨두고 페인팅 물감이 튄 작업복을 벗었다. 그러자 수현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이윤석이 벌떡 일어났다.
“이제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밥!”
“잠깐만. 사인만 하고.”
수현은 오른쪽 하단에 자신의 이니셜인 ‘K.S.H’를 적어 넣었다. 예전에 거의 다 완성한 과제를 학교에 놔두고 간 적이 있었다. 다음 날 그림을 완성해서 제출했는데 교수님이 큰소리로 화를 냈다. 어떻게 남의 그림을 훔쳐서 과제로 낼 수 있냐면서.
그로 인해 다른 학생이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넣어서 이미 점수를 받은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작업한 걸 날려버리다 못해 도둑놈 취급을 받은 자신이 억울함에 바락바락 대들자 교수님이 조교에게 당사자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그림을 훔친 학생은 처음엔 인정하지 않다가 수현이 그 그림을 작업하는 걸 봤다는 증언이 나오고 나서야 사실을 인정했다. 그 뒤로 그 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해 누구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소문 때문에 휴학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수현은 목장갑을 아무렇게나 뒤집어서 벗어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정석훈이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를 밟았다. 복도에 나와 있던 최유정이 손을 흔들어서 인사했다.
조각을 하기 위해 끌과 망치를 쥐는 그녀의 손은 마디마디 굳은살이 울퉁불퉁 박여 있었다. 고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손이었지만 김수현은 못난 굴곡마다 최유정의 열정이 녹아 있는 것 같아서 그 손이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석훈을 의식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이런 연기를 하냐는 유정의 질문에 적당한 핑계로 집에서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해서 여자 친구가 있는 척하는 거라고 둘러댔었지. 최유정은 재벌 아들도 할 게 못 된다고 혀를 차며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오늘 메뉴 뭐야?”
“돈가스래요. 우리 얼른 가요.”
최유정의 질문에 이윤석이 대답했다. 자신을 매개체로 두 사람이 자주 만나다 보니 어느새 친해진 듯싶었다.
학교 식당에 도착한 그들은 학생회관 지하로 내려갔다. 4,200원짜리 학식인데 밥과 돈가스, 버섯매운탕, 마파두부, 파래자반볶음, 배추김치, 야채샐러드가 식판 한가득 담겼다. 이만한 가성비가 따로 없었다.
김수현은 수저로 국물을 먼저 떴다. 푹 끓여서 그런지 감칠맛이 장난 아니었다. 수현은 눈앞에 있는 음식을 빠르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최유정이 열심히 식사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요? 뭐 묻었어요?”
“아니, 좀 의외여서. 난 너 학식 잘 먹는 거 보면 신기해.”
이윤석이 돈가스를 수저로 조각내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돈가스를 김수현의 식판에 옮기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난 수현이가 우리 같은 서민인 줄 알았잖아요.”
“야, 수현이 외모를 봐. 적어도 상류층이지.”
“하긴 그렇긴 해요. 등짝 보니까 피부도 장난 아니게 좋더라고요.”
이윤석이 은근히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흘렸다. 김수현은 선을 넘는 그를 째려보며 그가 넘겨준 돈가스를 젓가락으로 돌려줬다. 왔다 갔다 하는 돈가스를 본 최유정이 너희 뭐 하는 짓이냐며 어이없어했다.
“플러팅 중인데요?”
“방어 중이고요.”
“와, 이렇게 재미난 걸 직접 관전하게 될 줄이야.”
최유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자기 식판에 있는 돈가스를 김수현에게 통째로 넘겨줬다.
“그럼 나도 플러팅.”
“감사합니다.”
김수현은 군말 없이 그녀의 돈가스를 받아서 먹었다. 이윤석이 억울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걱정 마. 네 건 내가 먹어줄게. 나 반찬 없어. 아, 오해하진 말고. 이건 약탈이니까.”
“아, 씨. 선배!”
이윤석이 입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최유정은 이윤석의 돈가스를 빼앗아 가며 키득키득 웃었다. 풋풋한 그들을 보던 정석훈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김수현은 이윤석 때문에 로맨스 기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최유정이 눈치 좋게 김수현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정석훈을 속이고 있음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윤석은 다 안다는 듯, 두 사람의 겹친 손에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정석훈을 흘깃 쳐다봤다.
* * *
[선배, 진짜 수현이랑 안 사귀는 거 맞죠?]
[맞다니까. 너도 알면서 뭘 자꾸 의심하고 그래!]
기초 서양화 강의를 들으러 간 김수현을 따라 정석훈도 강의실 뒤편에 서 있었다. 이윤석의 핸드폰 화면을 통해 그가 최유정과 주고받는 메시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지나치게 좋은 시력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도움을 줬다. 김수현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가 자신을 오해하게 만들려는 걸 눈치채고야 말았다.
도대체 왜 김수현이 최유정과 썸을 타는 척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지 정석훈은 당최 알 수 없었다. 별로 중요한 이슈는 아니었으나 충직한 개는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바로 주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차기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석훈은 잠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전화 받았습니다.”
―네가 봤을 땐 김수현이 무슨 꿍꿍이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난 알겠는데?
차기주는 학교에 보내주자마자 또다시 도망칠 계획을 세우는 김수현의 깜찍한 행동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수현은 정석훈의 충성도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주인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면 침묵하라는 식의 협박을 하려는 거겠지.
김수현 딴에는 차기주가 자신에게 애정을 쏟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리라. 정석훈이 봤을 때 차기주가 김수현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낄 만큼. 그렇게까지 자신이 김수현에게 쩔쩔맸나 싶어서 혀를 찼다.
어쩜 스무 살짜리 뇌는 이리도 풋풋할까. 차기주는 새삼 김수현의 지능을 의심하게 되었다. 한국대에 들어갈 정도면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닐 테고,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뿐이겠지 싶었다.
그딴 계획에 정석훈이 휘둘릴 거라고 여기는 게 너무 순진하다 못해 깜찍했다. 이래서 애송이를 돌보는 일은 질리지가 않는다.
“일단 김수현이 뭘 하려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속아 넘어가주자고.”
―알겠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차기주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김정석이 이를 악물고 목울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기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앞에 놓은 뜨거운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입에 머금은 커피가 쓰다. 요 며칠 김수현이 타주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더니 그 맛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내 동생이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고요, 차기주 이사님.”
“예, 많이 지고 있죠.”
“……너 뭐라 그랬냐?”
김정석은 비꼬기 위해 한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차기주 때문에 속에 든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반말은 하지 마시고. 혀가 반토막 난 거면 마저 잘라주지.”
“……아닙니다.”
S급 에스퍼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장된 동공이 보였다. 축축하게 양복을 적시는 땀의 시큼한 냄새가 후각을 괴롭혔다. 느껴지는 숨결이 가쁘고 거칠다. 이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을 만나겠다고 연락할 만큼 김수현이 사랑받는 동생은 아니었던 것 같아 찜찜했다.
전시회에서 보인 김정석의 폭력성과 집착, 김수현을 사생아라며 뒷말하던 갤러리들의 수군거림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차기주는 말을 할 듯 말 듯 벌어졌다가 닫히는 입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대체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러시나. 마른침을 삼킨 김정석이 “둘이 자, 잤……” 하며 말을 더듬었다.
“잤냐고요?”
“……예.”
“왜? 그쪽이 먼저 자고 싶은데 내가 먼저 잤을까 봐?”
테이블에 놓은 찻잔이 스르륵 움직였다. 연보랏빛 테이블보를 잡아당기는 손길 때문이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불끈 쥐었을 주먹이 상상되었다. 목에 핏대가 일어선 김정석이 벌떡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본색을 들키자 꼬리에 불이 붙은 쥐새끼처럼 도망친다. 말 못할 감정을 품은 그가 결코 불쌍하지는 않았다. 불쌍하다면 저런 놈한테 집착 당하는 김수현을 페어로 둔 차기주, 자신이 그랬다. 잘생긴 알파를 페어로 둔 죄인 걸까. 얌전히 있는 제 페어를 찔러보는 놈들을 치우느라 머리가 아팠다. 역시 꽃이 너무 향기로우면 벌레가 꼬이는 법이라니까.
차기주는 앞에 놓았던 커피 잔을 들어 다시 한번 뜨거운 커피를 입에 담았다. 입이 썼다. 정석훈의 보고에는 공백이 있었다. 방금 보고로 그는 김수현이 최유정을 좋아하는 척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원래라면 김수현이 그런 행동을 한 즉시 그 사항에 대해 전달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정석훈은 임의로 김수현과 최유정의 관계를 함구하였다. 차기주는 그 사실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흔들렸구나, 석훈아.”
바람은 잔잔했다. 뿌리를 건드릴 만큼 강한 폭풍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는 흔들렸고, 바람에게 몇 개인지도 모를 나뭇잎을 내줬을 테다. 그는 너무 모질게 정석훈을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바다를 건너면 폭풍이 된다고 했다. 차기주는 그 작은 바람이 폭풍이 되어 나무의 뿌리를 드러낼 때까지 자신의 개를 살려둘 셈이었다. 만일 정석훈이 죽는다면 그 죽음까지 살뜰하게 이용해먹을 생각으로.
그것이 주인으로서 자신을 배신한 개에게 내리는 마지막 자비였다. 충견이 충견으로 죽을 수 있길.
커피를 다 마신 차기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둔 검은 코트를 가지고 지배인이 다가왔다. 검은 코트를 어깨에 살짝 걸친 그는 딱딱한 구두로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김 비서가 그런 차기주에게 따라붙으며 익숙하게 보고를 올렸다.
“강화도 주유소 화재 사건 보고서입니다.”
태블릿을 건네받은 그는 글자를 사선으로 읽어 내렸다. 빠르게 내용 파악을 마친 차기주의 입매가 일자로 굳어졌다.
“캥거루는 찾았나?”
“아직……. 죄송합니다, 이사님.”
“어차피 나한테 보냈을 거야. 나 혼자 처리하고 갈 테니까 수현이 잘 지켜.”
금색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평소와 달리 옥상이 아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김 비서는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차기주는 차량에 올라타 보고서에 첨부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사건 시각에 주유소를 지나쳤던 자동차 차주를 만나 입수한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구부정하고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화물 트럭에 올라타 갑자기 주유기를 들이받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그 입에서 무언가가 발사되었고, 그것을 맞은 아르바이트생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차기주가 만났던 가오리 괴수와 같은 능력이었다. 메시아는 정말로 인간을 괴수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던 거다. 그는 찌푸려진 미간에 손을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에게 운전석에 앉은 김 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 이사님. 성소윤 씨 말입니다.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건 인간이었을 때 이야기지. 지금은 괴수잖아.”
“하지만 영상에서 캥거루 주머니에 든 아이가 움직이는 거 보셨죠.”
“…….”
차기주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하필 임신부라니. 그렇다고 메시아가 보낸 캥거루 괴수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터. 죽지 않으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김수현 씨 능력이 무효화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차기주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왜 여기에 그를 끌어들이냐는 공격적인 태도에 김 비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아내와 딸을 가장 사랑하는 가장은 임신부의 죽음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소윤을 죽이고 어떻게 집에 돌아가 가족을 볼 수 있겠는가.
“한 번만 부탁해봐주시면 안 될까요?”
“미쳤군. 능력 무효화로 괴수화가 풀릴 거라고 누가 보장하지? 괜히 옆에 같이 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이사님께서 김수현 씨가 안 다치게 잘 보호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사님 능력 있으시잖아요.”
차기주는 입술을 깨문 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단정했던 앞머리가 그의 복잡한 속내처럼 헝클어졌다.
“다른 건 제가 고집부리지 않잖습니까. 성소윤 씨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젠장.”
그는 결국 핸드폰을 들고 말았다. 김 비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게 감사 인사를 했다.
김수현을 보호해주기로 계약해놓고 그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끝내 비정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아직 수업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 아니 그가 거는 전화는 스팸 전화 취급하며 믿고 거르는 김수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 능력이 필요해. 살리고 싶은 사람과 아이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세히 말해봐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역시 일부러 피하는 거였다. 차기주는 간략하게 임신부가 괴수로 변했다는 사연을 전했다. 바로 김수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로 가면 돼요?]
메시아에 의해 변이한 캥거루 괴수의 목표는 차기주일 게 분명했다. 행방이 묘연한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인명 피해가 나지 않도록 외진 장소에서 제 발로 찾아올 그녀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긴 태백산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무성해진 수풀로 인해 길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전부 사라진 채였다. 1차 대변혁 이후 사용된 적 없는 이정표는 세월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한때 사찰 주차장으로 쓰였던 공터로 검은 세단이 들어섰다.
“김 비서는 센터로 돌아가 있어.”
“넵. 수고하십시오.”
김 비서 홀로 차에서 내렸다. S급 에스퍼가 가진 위력을 아는 그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자리를 뜨기 위해 곰 퇴치용 산탄총을 챙기고 등산화에는 아이젠을 찼다.
꼬불꼬불한 흙길을 아이젠의 날카로운 발톱이 파고들었다. 태백산의 초입이라 가파른 경사는 아니었으나 잎사귀들이 떨어져 길이 미끄러웠다.
홀로 등산을 하는 김 비서는 갈수록 산세가 험해져 나뭇가지에 옷가지가 찢기기도 하고 땅에 반쯤 박힌 돌을 보지 못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탑처럼 쌓아 올린 돌탑들을 볼 때면 이 산을 평화롭게 거닐 수 있었던 시절을 절로 그리워하게 됐다.
지금의 태백산은 센터라는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려 몰려든 동물들로 인해 가벼운 등산조차 온몸을 무장하고 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장소가 되었다.
머리 위로 독수리가 날아갔다. 나무 몸통을 뱅글뱅글 도는 다람쥐를 잡아먹기 위해 하강할 시기를 노리는 듯했다.
무거운 등산화에 어디선가 굴러떨어진 돌멩이가 부딪쳤다. 김 비서는 얼른 등에 멘 산탄총을 빼 들었다. 그는 안전장치를 풀고 사방을 경계했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두피를 할퀴듯 거센 돌풍이 불어닥쳤다. 김 비서는 바람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캥거루의 주먹에 맞아 날아갔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려 있던 탓에 산탄총이 엉뚱한 장소로 발사되었다.
탕! 총알이 다람쥐를 노리고 있던 독수리의 날개를 관통했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독수리에게서 뽑혀 나온 갈색 깃털이 공중에 떠다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하늘을 지배하던 맹금류는 추락해 바닥을 기며 김 비서를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김 비서는 독수리와 같이 바닥을 기며 이대로 자신이 죽는구나 싶었다. 자신이 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사님, 살려주세요!”
사람만 보면 자신의 귀여움을 한껏 뽐내던 다람쥐도 진작 도망친 후였다. 바닥을 기던 독수리는 머리가 바닥에 부딪힌 충격이 컸는지, 이내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굳어버렸다.
불길하다.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이 김 비서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눈물이 차올라 흐릿해진 시야에 거대한 곰 같은 그림자가 맺혔다.
“김 비서, 괜찮아? 뼈 부러진 거 같아?”
“흡흡흑. 이사, 흑. 님!”
김 비서는 온갖 서러움을 담아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반가운 건 알겠는데, 거추장스러우니까 다리 멀쩡하면 자리 좀 비켜줄래?”
사람이 감동할 기회를 안 주는 걸 보니 제 앞에 서 있는 건 역시 차기주 이사가 맞았다. 잠시 주위를 경계하던 캥거루 괴수가 빠르게 다가와 주먹으로 차기주를 때렸다. 차기주는 팔을 올려 막기만 할 뿐 맞서 공격하지 않았다. 한 대라도 때렸다가 실수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김수현이 와서 캥거루 괴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무리 때려도 멀쩡한 차기주를 보고 캥거루 괴수가 커다란 콧구멍으로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은 피했음에도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공격에, 에스퍼의 파동이 급격하게 사나워졌다.
손목에 찬 시계가 삐빅 경고음을 냈다. 차기주는 캥거루 괴수의 공격을 막아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입으로 후, 불어서 날렸다. 슬슬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팔 정도는 부러트려도 되려나?”
회피와 방어만 하고 있던 차기주는 김수현이 오기 전까지 이 괴수를 얌전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주먹을 던지던 캥거루 괴수는 어느새 감을 잡았는지 권투 선수처럼 자세를 잡고 상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상대방이 틈을 보일 때를 기다리며 스텝을 밟았다. 차기주 또한 숨을 고르며 캥거루의 두 팔을 부러트리기 위한 순간을 재단했다. 훅. 후욱.
인간과 괴수의 입에서 산의 서늘한 기온과는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대치를 이어가던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풍겨오는 희미한 작약꽃 향기에 차기주의 주의력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그는 김수현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뒤늦게 캥거루 괴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캥거루 괴수는 차기주에게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떼지 않고 있었기에 그의 미세한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견고한 성과도 같았던 가드에 인 균열 사이로 주먹이 파고들어 왔다.
퍽! 주먹은 차기주의 뺨에 정확히 꽂혔다. 그의 입가가 살짝 찢어져 피가 흘렀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턱뼈가 으스러져 얼굴이 뭉개졌을 정도의 타격감이었다. 차기주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간 얼굴을 바로 하고 캥거루의 팔을 손쉽게 잡아챘다. 그러곤 괴수가 김수현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뒤에서 끌어안은 채 온 힘을 다해 두 팔을 결박했다.
“수현아.”
김수현은 캥거루 괴수를 보고 얼어붙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붙잡힌 캥거루의 주머니에 든 무언가가 움직이며 배가 울퉁불퉁하게 융기되었다. 배 속에 든 아기였다.
그걸 보고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수현은 무효화 능력을 캥거루에게 쏟아냈다. 차기주에게 붙잡힌 캥거루 괴수에게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발치에서 반 토막 난 천사 모양 조각상이 떨어졌다.
“으아아! 아파, 아파.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인간으로 돌아온 성소윤이 비명을 질러댔다. 차기주는 얼른 그녀를 놓아줬다. 두 팔을 늘어트린 그녀는 팔을 움직이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했다. 심증뿐인 판단이었으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정말 메시아는 인간을 괴수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뼈 어긋날 수도 있으니 움직이지 마세요.”
차기주는 부목으로 쓸 만한 두꺼운 나뭇가지를 주워 왔다. 재킷을 벗어 망설임 없이 찢어낸 그는 성소윤의 부러진 팔에 나뭇가지를 대고 강하게 묶었다.
“걸을 수 있습니까.”
“흐윽, 흣. 윽, 못 걸어요. 흑.”
성소윤이 다친 건 다리가 아닌 팔이었지만, 그녀는 난생처음 겪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울기만 했다. 차기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등과 오금 뒤에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안긴 성소윤은 그제야 차기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흐윽, 아프…… 차기주?”
“네, 절 잘 아시니 이야기가 쉽겠군요. 성소윤 씨 보호자 분께 연락드릴 거니까 일단 센터에 가서 치료받읍시다.”
김수현은 곧 이곳을 떠날 분위기라 성소윤에게서 떨어져 나온 천사 조각상을 챙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차기주가 엄한 목소리로 그런 수현을 제지했다.
“수현아, 그게 뭔지 알고 만지려고 들어. 이따 센터 에스퍼들 와서 회수할 거니까 만지지 마.”
혹 산짐승들이 물고 가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그의 말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만약 조각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괴수가 되는 거라면, 성소윤과는 달리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려줄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뒤로 물러나는 발걸음에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차기주는 자동차를 주차해둔 장소로 이동했다. 김수현은 그의 입가에 맺힌 피를 보고 괜찮냐고 물었다. 그것 말고는 아주 멀쩡해 보여서 예의상 물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차기주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 죽을 것 같아. 이따 가이딩 부탁할게.”
“아. 네.”
그들이 페어를 맺은 이후 처음으로 하는 가이딩이었다. 김수현은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능욕』에는 능력 무효화를 통해 가이딩을 받은 차기주의 감상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김수현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은 마치 100층 건물이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에 깔린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팔다리가 으깨지고 쇠꼬챙이에 폐를 찔려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죽어가는데도 언젠가 구조될 거라 믿는 어리석은 생존자. 그것이 자신이었다.
끊임없이 산의 정상에 돌을 운반해야 하는 벌을 받은 시지프처럼 영원한 형벌을 받은 죄인, 그 죄인이 김수현을 만나는 순간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콘크리트의 무게가 사라지고 숨을 쉬기가 편안해졌으며 그 어디도 아프지 않았다. 한순간에 평생 저를 괴롭힌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황홀한 감각을 자신이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을까. 자신은 절대 그를 놓아줄 수 없다. 그와 자신은 그럴 운명이었다.’
성소윤은 콧물을 들이켜며 김수현을 힐끔거렸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먹이는 눈망울이었다. 차기주가 성소윤을 땅에 내려놓고 혹시 몰라 차를 덮어두었던 방수천을 걷어냈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타려 했다.
“성소윤 씨 말고.”
턱으로 뒷좌석을 가리키는 태도가 몹시 재수 없었다. 성소윤은 부러진 팔이 아파 죽을 것 같아, 무자비한 데다가 싸가지까지 없는 차기주를 속으로 욕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가 자신을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 같으니 쌍욕까지는 안 하고 ‘나쁜 놈’이라고만 했다.
김수현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차기주가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채워줬다. 성소윤은 뒷좌석에서 백미러에 비친 김수현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걸 눈치챘다. 벌레를 피하듯 뒤로 밀려난 김수현의 턱과 앙다물어진 입매가 꼭 박명준을 본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섭게 침전됐다. 썩어가는 나뭇가지가 오프로드용 자동차 바퀴에 부러졌다. 자잘한 돌들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커다란 원통에 자갈을 넣고 돌리는 소리를 냈다. 튼튼한 G*겐은 비틀거리면서도 곧잘 산을 올랐다.
성소윤이 운전석에 앉은 차기주의 귀를 향해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그랬듯 차기주의 귀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러나 입으로 차기주의 귀를 문 순간, 턱관절이 억센 손에 붙잡혔다.
“성소윤 씨, 평생 입 못 다물고 살게 해줄까? 뇌만 안 다치면 코 아래로는 얼굴 없어도 딱히 사는 데 지장은 없는데, 어때. 그렇게 살아볼래?”
겁먹은 그녀는 울면서 물러났다. 코 아래로 얼굴이 없는데,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리가 없었다. 살짝 깨물려 피가 맺힌 귓바퀴에서 순식간에 새살이 차올랐다. 감히 S급 에스퍼의 귀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어차피 귀가 통째로 없어져도 새로 생길 괴물인데, 제 목숨 아까운 줄 몰랐다.
“참고로 난 여자라도 안 봐줘. 양성평등주의자거든.”
“근데 왜 반말하세요.”
“수현아, 지금 내 귀를 물어뜯으려고 한 식인종한테 존대하게 생겼어? 그러게, 대접해줄 때 잘했어야지.”
김수현은 손바닥에 고인 땀을 청바지 무릎에 문질러 닦아냈다. 차기주는 어깨가 굳은 채 필사적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는 김수현이 귀여워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겁이 많은데 도망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센터 앞 검문소에 세 사람이 탄 G*겐이 들어섰다. 출입 통제용 차단 바가 운전석에 앉은 인물을 확인하자마자 올라갔다. 차기주는 임원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재주 좋게 도망친 김 비서가 말끔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사님.”
“고생은 김 비서가 했지. 몸은 괜찮나.”
“넵.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김 비서는 차기주에게 허리를 숙여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 옆에 다섯 명의 에스퍼들이 일렬로 서 있다가 차기주의 시선을 받자 일제히 경례했다. 팔꿈치 각도가 다 똑같을 만큼 군기가 들어간 에스퍼들에게 차기주는 으레 그렇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는 설명 들어서 알 거다. 수상한 물건을 발견했으니 회수해 오도록.”
“Yes, sir.”
다섯 명의 에스퍼들이 동시에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절도 있는 발동작은 마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처럼 딱딱 맞아떨어졌다. 어찌 보면 독재자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기주의 한마디면 도망친 김수현을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와 잡아갈 번견들이었으니.
김수현은 이런 자들을 부리는 차기주를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차기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점점 도망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를 따르며 정석훈을 속이고 진설해를 만나려던 계획을 재고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진설해와 센터 로비에서 마주쳤다. 그녀가 차기주에게 인사를 하고 김수현을 지나쳤다.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지나가던 그녀의 손이 김수현의 손과 부딪쳤다. 마치 자신의 마음은 변함없는데 넌 어떠냐고, 우리가 다시 만나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고 묻듯이 말이다.
성소윤은 임신 중이기 때문에 배를 납 가운으로 가린 채 두 팔의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깔끔하게 부러진 뼈가 X선을 통해 확인되었다. 센터 의사는 진료실에서 성소윤의 엑스레이 정보를 컴퓨터로 열어보고 ‘깔끔하네’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기주 이사의 솜씨가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일부러 수술할 일 없게 부러트린 게 분명했다. 센터 의사는 처치실로 걸음을 옮겼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성소윤이 그를 보자 새끼를 보호하려는 삵처럼 이를 드러냈다.
그러든가 말든가 물 받은 대야에 석고 붕대를 적신 의사는 그녀의 부러진 팔을 감싸 고정해줬다. 석고 붕대는 물이 마르자 돌처럼 단단해졌다. 양팔에 석고를 해 뻣뻣한 걸음으로 처치실을 나온 성소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정석훈이었다.
“이제 취조받으러 가실 겁니다.”
“내가 무슨 취조를 받아요. 나 환자라고. 놔, 놓으라고!”
성소윤의 양팔을 에스퍼들이 붙잡았다. 앞서가던 정석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열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부디 제네시스와 관련 없으시길 바랍니다. 피아노, 계속 치셔야죠.”
난동을 부리던 그녀의 몸짓이 급격하게 굳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건지, 부러트리겠다는 건지 모를 협박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성소윤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취조실에 강압적으로 밀려서 들어갔다. 의자에 앉으니 한쪽 벽을 거울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차기주가 지켜보고 있을까?
맞은편에 앉은 정석훈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린 성소윤에게 지시를 내렸다.
“테이블 위에 두 손 올리세요.”
“으……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취조니까요.”
“언론에 고발할 거야, 센터가 민간인에게 강압 수사했다고!”
“하세요. 말리지 않습니다.”
덤덤한 정석훈의 표정을 본 성소윤은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메시아께서 내린 중대한 임무를 완수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게 생겼다. 그녀는 차기주에게 몸서리쳤던 김수현을 떠올리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라도 과거의 자신처럼 무력하고 안쓰러운 그 알파를 구원해주어야만 했다.
“그럼 지금부터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에 대한 취조를 시작하겠습니다. 취조 내용은 녹화되고 있으나 법정에서 성소윤 씨의 유죄를 고발할 때만 사용될 수 있으며, 이능력 센터 SP의 반인륜적 수사 방식에 대한 증거 자료로 사용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 *
철제 계단을 오르던 차기주는 급격하게 허리를 숙이며 넘어졌다. 계단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마치 인두에 지지는 듯 뜨거워 얼른 도로 놓았다. 커다란 몸체가 무력하게 바닥에 처박혀 숨을 헐떡였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고 있던 김수현은 깜짝 놀란 채로 달려와 계단에 엎어진 차기주를 추슬렀다.
“이사님!”
“가…… 이딩.”
사막에 조난돼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쩍쩍 갈려졌다. 김수현은 이렇게 될 때까지 가이딩을 부탁하지 않은 차기주가 답답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미 무효화 능력을 사용한 후였지만, 수현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차기주에게 무효화 능력을 쏟아부었다.
차기주의 날뛰던 파동이 순식간에 제로의 영역에 들어섰다. 폭주하던 기관차는 관성 때문에 브레이크를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의 능력은 평범한 가이딩이 아니었다. 미친 듯 달리던 기관차는 한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춰 섰다. 차기주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미세한 먼지들마저 지나치게 선명해, 되려 뿌옇게 보이던 시야가 맑아지고 폐를 찌부러트리는 것 같던 공기가 상쾌해졌다. 물기를 머금은 산속 공기가 이렇게나 신선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았다.
능력을 잃고 급격하게 무거워졌던 몸이 한순간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가벼워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고통으로 메말랐던 입술은 뜨거운 숨을 뱉느라 촉촉해지고 입 안에는 달콤한 침이 고였다.
그 기분 좋은 감각에 흠뻑 취해 있는데, 이번엔 무리하게 능력을 사용한 김수현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차기주는 자신의 어깨에 엎어진 김수현을 번쩍 든 채 가뿐해진 몸으로 철제 계단을 올랐다.
징벌방 문을 열고 침대에 김수현을 눕혔다. 김수현은 그 짧은 사이에 땀을 잔뜩 흘렸는지, 옷이 그의 몸에 달라붙어 유려한 굴곡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기주는 침을 삼켰다. 애써 김수현을 향한 충동을 삼키며 정장 재킷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김아영에게 연락했다.
“김아영 씨. 여기 징벌용 방입니다. 당장 올라오세요.”
―네? 이사님. 그게 무슨……. 제가 왜 그 방에 들어가요.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수현이에게 가이딩이 필요해서 부른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얼른 갈게요.
김아영이 다급하게 대답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김수현이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들썩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해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뻣뻣하게 선 혀가 보였다.
하얀 침대 시트를 발로 밀어내며 손으로 움켜쥐는 모습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이었다.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욕정하고 말았다. 차기주는 그런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싫었다. 그런데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김수현에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김수현의 가슴을 느릿하게 그어 올렸다. 초점이 풀린 눈을 들여다보며 티셔츠 밑단을 열어젖혔다. 납작한 배에는 11자 복근이 날렵하게 자리해 있었다. 살구 꼭지처럼 작고 귀여운 배꼽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주는 손으로 김수현의 배를 문지르다가, 오메가라면 자궁이 자리했을 아랫배를 덮었다. 파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건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주는 누군가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을 멈춘 채 김수현의 배를 구경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김수현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도대체 이토록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상대를 가지고 뭘 하겠다고 이러는지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차기주는 지금 이 순간 김수현이 가진 단아한 곡선에 단단히 홀려 있었다.
그와 입을 맞추고 목을 깨물고 어깨를 핥고 싶었다. 오메가도 아니건만, 차기주는 자신의 페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집어삼켜 배 속에 밀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알파에게 발정하는 스스로가 추악할 뿐이라고 느끼면서도, 차기주는 그를 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능력 사용 부작용으로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던 김수현은 정신을 차렸는지 경악하며 차기주를 밀어냈다. 차기주는 어느새 김수현의 몸에 완전히 올라탄 채였다.
“비켜! 비키라고!”
“수현아. 수현아.”
차기주는 몸을 웅크리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널 가지고 싶어 미치겠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그냥 널 가지고 싶어 죽겠어.
그는 반항하는 김수현의 등을 어루만지며 꼭 끌어안았다. 작약꽃 향기가 흐드러진 가운데 차기주의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에스퍼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이딩 후유증이었다.
김수현은 에스퍼였지만 가이드와 똑같은 역할을 해서인지 차기주에게 가이드로 인식된 듯했다. 에스퍼들은 자신의 파동을 잠재워주는 가이드에게 엄청난 성욕을 느꼈다. 파동 불안정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낀 본능의 선택이었다. 본래 가이드는 긴밀한 신체 접촉을 통해 에스퍼의 파동을 통제했다. 가벼운 스킨십에서 시작해 긴밀한 점막 접촉까지, 에스퍼와 가이드의 신체가 깊이 연결되면 연결될수록 보다 높은 가이딩 효율을 보였다. 차기주는 에스퍼의 본능에 따라 김수현과 몸을 섞고, 그를 통해 다시 그 황홀경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모든 걸 잊은 채, 그렇게 수현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제로에 가까운 파동 수치는 가이딩 결핍으로 오랫동안 시달린 에스퍼에겐 과한 선물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였지만 차기주는 이미 김수현의 능력 무효화 효과에 중독된 상태였다. 김수현은 주먹으로 차기주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하는 흉흉한 타격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계약한 거 잊지 말고요. 나 건드리면 우리 페어 끝인 거, 기억하죠?”
우스운 협박이었고 솜방망이에 불과한 주먹이었다. 평소라면 아프기는커녕 코웃음 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맞은 게 세상 서러웠다. 맞은 뺨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엄마에게 혼난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비켜요. 내 얼굴 두 번 다시 안 보려는 거 아니면.”
차기주는 순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징벌방은 두 알파가 신경전을 벌이느라 뿜어낸 페로몬으로 가득했다. 차기주는 그마저도 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어떻게든 눈앞의 먹음직스러운 김수현을 외면하기 위해 창살에 코를 바짝 붙이고 숨을 들이켰다. 맑은 공기를 쐬며 번들거리는 눈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고 징벌방 문이 열렸다.
“윽, 여기 왜 이래요.”
오메가인 김아영이 괴로워하며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밖을 서성였다. 자신의 가이드를 발견한 에스퍼는 언제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냐는 듯 헐레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갔다. 김수현이 김아영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김아영이 수현의 품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수현아.”
“누나, 나 아파. 윽, 나 너무 아파.”
차기주가 김수현에게 그랬듯 김수현은 김아영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렸다. 김수현의 엉망으로 널뛰는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김아영은 동생의 뺨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기주는 자신의 페어가 다른 여자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손길을 받는 것을 두 눈 뜨고 노려봤다.
만일 김아영이 김수현의 누나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참을 수 있었을까. 차기주는 지독한 질투를 느끼며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파이도록 주먹을 쥐었다. 목에 불끈 곤두선 혈관이 흉흉했다. 내 페어이고 내 사람인 그를, 감히…… 네가 빼앗으려는 건가?
차기주는 입 밖으로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피맺힌 절규를 삭여야만 했다. 아무리 질투에 이성을 잃을 것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김수현 또한 한 명의 에스퍼로서 가이딩을 받아야 살 테니까.
현관에서 김아영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가이딩을 받는 수현을 보며 차기주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에스퍼를 페어로 둔다는 게 이런 의미였음을, 새삼 깨달은 차기주는 앞으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슬픔과 고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가이딩을 받은 김수현이 뽀얀 얼굴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살 거 같아.”
“정말 괜찮아? 가이딩 더 안 필요해?”
“응. 충분해. 고마워, 누나. 역시 난 누나 없으면 안 돼.”
차기주는 가슴이 욱씬 아파오는 기분이 들어 제 가슴께에 손을 대어보았다. 김아영과 김수현이 남매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간신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수현의 등급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이딩 직후 A급 가이드인 김아영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김수현이 자연스레 그녀를 안아서 침대로 데려갔다. 차기주는 그들 사이에 조금도 끼어들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이렇게나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존재는 김수현이 처음이었다.
차기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이좋은 남매를 바라봤다. 시선은 점점 아래로 떨어져 바닥으로 향했다. 무거운 한숨을 소리 없이 내뱉고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왼팔로 오른쪽 팔뚝을 감싸 안았다.
기주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김수현의 등만 바라봤다. 한 번이라도 돌아봐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해명이라도 할 텐데. 그는 지쳐 쓰러진 김아영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 차기주에게는 가벼운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사님, 이만 가세요.”
“수현아.”
“제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당장 사과해야 했다. 널 보고 욕정했다고, 네가 몹시도 가지고 싶었다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내가 잘못했음을 안다고. 에스퍼라면 자신의 파동을 가라앉혀준 대상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과 집착을 가지게 되는지, 너도 알지 않냐고.
구차한 변명들이 목구멍 안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높은 콧대와 반듯한 이마,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이 주는 차가운 인상과 달리, 차기주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혹시라도 김수현이 자신과의 페어 계약을 깨겠다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그가 계약을 깨겠다고 할지라도 절대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차기주는 이제 절대로 김수현을 놓을 수 없었으니까.
현관을 벗어난 순간, 축 처져 있던 차기주의 어깨가 도로 빳빳해졌다. 차기주의 약함은 어디까지나 김수현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내 잘못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날 봐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만들어진 몸짓에 불과했다.
손바닥에는 아직도 김수현의 배를 쓰다듬었을 때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기주는 그 작은 흔적을 놓칠세라 손을 꽉 쥐었다.
노을에 물드는 하늘처럼 새빨개진 귓가의 열기를 찬바람이 식혀줬다. 그는 철제 계단을 내려가면서 설마 남매끼리 붙어먹진 않겠지, 하는 저급한 걱정을 했다.
김수현이 알았으면 차기주를 경멸하다 못해 혐오했을 생각이었다.
* * *
흐느끼듯 이는 바람에 나뭇잎들은 몸을 비비댄다. 하얀 인영이 짐승의 울음처럼 흉흉하게 진동하는 숲을 지난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진다.
메시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사이사이로 별이 반짝였다. 나무 기둥 뒤에서 탐스러운 다람쥐의 꼬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사람만 보면 마치 ‘너도 저기 살아? 나 귀엽지? 나 데려갈래?’라고 말하는 듯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유혹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듯하자, 금방 나무뿌리 아래 숨겨둔 은신처로 들어가버렸다.
메시아는 다람쥐를 따라갔다. 다람쥐가 ‘나 데려가려고 왔어?’라고 묻는 듯 반짝이는 눈을 한 채 도토리를 물고 뛰쳐나왔다. 메시아가 손을 내밀자 재빠른 몸짓으로 그의 손목을 타고 팔을 걸어 올라가 어깨에 자리한다. 그는 검지로 조심스럽게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 나랑 가자.”
그는 다람쥐와 함께 성소윤이 떨어트린 성물을 회수하기 위해 나아갔다. 어깨에 앉은 다람쥐가 신나서 앞니로 도토리 껍질을 깠다. 양 볼이 미어지도록 도토리를 입에 넣었다가 하얀 얼굴을 보고는 손에 도로 뱉었다.
다람쥐는 메시아에게 선심을 쓰듯 먹으려고 했던 도토리를 내밀었다. 메시아는 검지로 도토리를 밀어 다람쥐에게 돌려줬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담갈색 주둥이가 움찔움찔 움직였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다람쥐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토리를 다시 입 안에 머금었다.
메시아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귀곡성과도 같은 소리를 내는 나무 그늘 사이에서도 두려움이라곤 알지 못하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사 조각상을 덮고 있던 낙엽을 걷어내고 그것을 여유롭게 회수했다.
이미 센터에 잡힌 성소윤이, 그 안에서 움직여 김수현을 빼낼 거란 기대는 없었다. 센터가 알아차리는 건 시간 문제겠지만, 그녀는 귀한 가이드였다. 그런 그녀를 센터에서 죽일 리가 없으니, 그녀는 계속 거기 있으며 김수현의 마음을 흔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차기주의 페어를 메시아가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또한 S급 에스퍼로서 김수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본인 의지로 차기주를 버리고 자신에게 와주기만 한다면 일이 조금 번거롭더라도 이만한 공을 들일 가치가 있었다.
성물을 회수한 메시아는 다람쥐와 함께 산을 내려갔다. 고속도로까지 걸어 내려온 메시아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눈처럼 하얗기만 했던 피부엔 평범한 사람처럼 생기가 덧그려졌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세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문을 내린 채 웅장한 태백산을 조롱하듯 바라보며 최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 저 윤석이요.”
―어? 네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야?
“저번에 알려주셨잖아요.”
―어? 그랬나?
“네, 선배 왜 그래요.”
이윤석이 뻔뻔하게 굴자 핸드폰 너머에서 그녀가 헷갈리는 듯 잠시 머뭇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더욱 세밀하게 상황을 꾸며내 말을 이어갔다.
“수현이랑 학식으로 쫄면 먹었을 때 알려주셨잖아요.”
―아아. 그래. 맞아. 기억난다.
기억이 날 리가. 최유정은 쫄면을 먹었다는 사실만 기억해내고 나머지는 이윤석이 밀어붙이는 대로 믿는 것뿐이었다. 그는 사람이 왜 자신의 기억보다 타인의 기억을 더 믿고 정작 자신의 기억은 왜곡시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라면 절대 상대방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을 테다.
“저 그런데 선배, 혹시 수현이랑 사귀세요?”
그림을 쥐뿔도 모르는데, 단지 김수현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한국대 미술학과에 학생인 척 잠입했다. 이윤석은 손가락에 묻은 뒤, 아무리 비누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푸른 물감을 쳐다봤다. 최유정이 의아해하면서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
“아니, 수현이랑 선배 사이가 좋아 보이긴 하는데…… 사귀는 거라고 하기에는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 같지도 않고, 썸 타는 거라고 하기에도 둘 다 눈빛이 비즈니스적이랄까?”
―하하하. 뭐야, 그게. 그렇게 티 났어?
최유정이 웃긴다는 듯 질문했다. 이윤석은 “네” 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능글맞게 웃으며 너 정말 수현이 좋아하는구나, 하고는 자기들이 무슨 연기를 하는지 알려줬다.
―수현이가 오죽 잘사는 집 아들이야. 걔네 아빠가 정략결혼 시키려고 해서 비밀 연애 콘셉트 잡고 애인 노릇 해주고 있는 거야. 수현이랑 같이 오는 경호원 알지? 그 사람한테 보여줘야 해서.
“아아. 그렇구나.”
이윤석은 김수현이 왜 이런 하찮은 연극을 차기주의 개에게 보여주려고 한 건지 추측해봤다. 어떻게 생각해도 차기주의 질투만 유발할 뿐, 수현에겐 손해일 뿐인 짓 아닌가? 예전에도 그 짓을 했다가 차기주에게 끌려가 강간이나 당한 주제에. 하여간 발전이 없었다.
김수현은 자신에게 고맙다고 절을 올려야 했다. 자신이 강의실에서 조작된 문자를 정석훈에게 보여줘 그 관계가 가짜임을 알려줬으니까.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을 거다.
호텔에서 진설해와 짜고 그녀를 차기주의 가이드로 삼아주려 했던 계획에서부터 알아봤다.
김수현은 얼굴만큼이나 뇌도 청순한 과였다.
“저 수현이 좋아하는데 혹시 선배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어, 내가?
최유정이 난처해하며 머뭇거렸다.
“뭐야. 선배도 수현이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어떻게 PL 그룹 도련님을 좋아할 수 있겠어.
그게 좋아한다는 거 아닌가. 인간들은 왜 이렇게 하찮은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런데 윤석이 너, 베타 아니었어? 수현이는 우성 알파라 베타 남자는 안 만날걸.
자기는 오메가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라서 김수현을 만날 수 있다는 은근한 암시를 담은 말이었다. 어쭙잖은 견제에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형질에 얽매여서 생각하긴 싫어요. 저한테는 수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한걸요.”
―어, 어. 그렇지. 사랑이 중요하지.
말꼬리가 갈수록 늘어지더니 마지막 ‘지’ 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하던 최유정이 이만 끊어, 하면서 먼저 통화를 꺼버렸다. 자신의 가이드가 되어줄 남자에게 꼬리를 흔들던 여우가 그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이윤석은 유쾌해져서 운전석 의자를 주먹으로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들었어? 어? 들었어?”
“예. 들었습니다.”
“와, 인간들이란 어쩜 이토록 어리석을까. 이대로만 가면 김수현이 날 좋아하게 되는 건 시간 문제겠어!”
흥분한 이윤석은 운전석 머리 받침대를 흔들다가 그대로 뽑아버렸다. 그가 이토록 흥분한 건 인간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속이기 쉬운 존재였음을 알아차려서였다.
최유정은 이윤석의 거짓말을 의심할 생각조차 안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가 친분을 만들어뒀기 때문이었다.
제네시스의 멤버로 유명한 사기꾼이 들어온 건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기꾼이 ‘거봐라’라는 듯 그를 칭찬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금융 사기의 67%가 친구, 직장동료, 친척같이 가까운 사이입니다. 김수현한테도 똑같이 뻔뻔하게 나가세요. 사람의 불안, 욕망, 신뢰. 이 세 가지만 잘 이용하시면 됩니다. 상대방이 간절히 원하는 걸 쥐여주면, 분명히 금방 넘어올 겁니다.”
“응, 네 말대로 할게!”
계획은 간단했다. 김수현의 옆을 맴돌며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선배인 척을 하는 거였다. 김수현은 자신을 친구로 신뢰하고 있고, 선배를 다시 만나길 욕망했으며 차기주에게 감금당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김수현을 잘만 속이면 그는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다.
설령 차기주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는 결코 진실을 고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김수현을 사랑하니까! 자기가 김수현을 기만했다는 걸 들키기 두려워하며 침묵하겠지. 어깨에 앉아 있던 다람쥐는 차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이윤석 때문에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뒷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약해빠진 다람쥐의 꼬리를 잡아서 들어 올렸다.
“불쌍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약하다니. 걱정하지 마, 다람쥐야. 내가 널 구원해줄게.”
이윤석은 문신이 새겨진 두 팔을 겹쳐 일곱 명의 천사 그림을 맞췄다. 그림이 맞아 들어가는 순간, 검은 머리였던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었고 그는 순식간에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다. 그의 모습이 그의 정체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능력 센터 SP의 주적, 제네시스의 메시아였다.
그는 오른손을 날카로운 단검으로 변형해 자신의 왼손에 찔러 넣었다. 부러진 천사 조각상에 그의 피가 흘러들자, 둘로 나뉘어 있던 파편이 자석처럼 달라붙더니 감쪽같이 하나가 되었다.
메시아는 축 늘어진 다람쥐에게 물었다.
“네 소원이 뭐니?”
다람쥐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겨우 센터에 들어가는 거야? 그래, 들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거기 가서 내 에스퍼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아내야 해,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사 조각상을 자그마한 다람쥐 위에 올렸다.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며 천사 조각상이 다람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래 그는 인간들에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예외를 뒀다. 왜냐하면 다람쥐가 바란 건 다람쥐가 가진 힘만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물을 흡수해 지능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다람쥐에게, 그는 센터로 들어갈 수 있는 하수도 통로를 알려줬다.
다람쥐가 열심히 두 손을 모은 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차 세워.”
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멈추어 섰다. 메시아는 차 문을 열어줬다. 메시아의 명령을 머릿속에 아로새긴 다람쥐가 뒷좌석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작지만 무서운 괴수가 태백산 방면으로 달렸다.
다람쥐는 신성한 힘을 빌려 그토록 들어오고 싶었던 센터에 너무나도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걱정과 달리 귀여운 외모의 괴수를, 그 어떤 에스퍼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다람쥐는 메시아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철제 계단을 올랐다.
현관 앞에 선 차기주는 한참이나 들어가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 박스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차기주가 다람쥐를 발견하고는 저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그런다고 물러날 다람쥐가 아니었다.
차기주는 동그란 검은 보석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다람쥐를 차마 무자비하게 발로 차지 못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틈을 노려 다람쥐도 재빨리 몸을 날려 안으로 진입했다.
그는 화가 난 김수현의 비위를 달래기 위해 준비한 하와이안 피자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비장의 카드가 제발 먹혔으면 싶었다.
“수현아, 밥 먹어야지.”
“안 먹어요.”
김수현이 이젤 앞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차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자 박스를 묶었던 리본을 풀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익은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였다. 차기주 스스로도 어떻게 이런 메뉴를 김수현이 좋아할 거라 여겼는지 모르겠다.
식탁을 흘끔 확인한 김수현이 입을 댓 발 내민 채 씩씩거리며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김수현의 어린 나이를 드러내는 지표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그를 외면하는 김수현의 등을 볼 땐, 꼭 나락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차기주는 예쁘기만 한 애송이한테 휘둘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정말 어쩌자고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나온 김수현이 겨우 이런 걸로 마음을 풀기 머쓱했는지 사나운 눈으로 피자를 노려봤다.
“하도 이사님이 애걸복걸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주는 거예요.”
“그래, 고맙다.”
차기주가 한 거라고는 밥 먹자며 익힌 파인애플을 보여준 것뿐이었다. 그는 괜히 웃었다가 간신히 풀린 기분을 망칠까 봐 입술을 일자로 꽉 다물었다.
유리병에 든 수제 피클을 포크로 꺼내 먹던 김수현은 뒤늦게 식탁에 엎드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람쥐를 발견했다.
“…… 이사님이 데려온 애예요?”
차기주도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김수현이 마치 부모를 조르고 졸라 반려동물을 받아낸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차기주는 그 눈을 보고서 차마 너 밥 먹이고 데리고 나가려 했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곤란함에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햄스터와 다람쥐의 조합이라.
“엄청 귀엽다. 이 오동통한 꼬리 좀 봐요.”
피자를 먹느라 손에 기름기가 묻은 김수현은 직접 손대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손을 움찔거리며 좋아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니, 멋대로 산에 돌려보냈다가는 간신히 회복된 관계가 또 어그러질지 몰랐다. 그렇지만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는 야생동물을 아무런 검사도 없이 기르게 둘 순 없다.
차기주는 고민 끝에 다람쥐를 손으로 덥석 잡았다.
“병 있는지 검사만 하고 기르자.”
허락받은 김수현은 감탄으로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초승달처럼 그린 듯 휘어진 눈매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차기주는 제 요동치는 심정처럼 덜커덩 큰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당장 다람쥐를 검사실에 맡길 생각이었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되는데, 굳이 직접 가는 본인의 행동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그를 따라 현관까지 마중 나온 김수현을 보자 자신의 이상 행동을 내버려 두길 잘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다람쥐는 그의 손에 의해 곧장 센터 의료진들에게 맡겨져 진찰을 받고 케이지에 갇혔다.
이로써 괴수는 김수현의 곁에 머물며 메시아의 명령을 순조롭게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
메시아는 다람쥐의 눈을 통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이미지를 보며 노트를 펼쳤다. 푸른 물감이 묻은 손이 연필을 쥐고 빠르게 글을 적어 내렸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교 후배가 있다. 그 아이는 옥탑방에서 살았고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언제나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 아이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피자를 들고 집에 방문하곤 했다.
날 반기는 너의 미소가 햇살보다 눈부셨다.
더 많은 정보가 모여서 이 노트가 채워지면 김수현은 그를 선배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현에 대해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그의 ‘선배’뿐일 테니까.
사물함에서 서양 미술사 교재를 꺼내는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수리에 쏟아지는 뜨거운 숨에, 목덜미에서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김수현은 자신을 가두듯 가깝게 다가온 사람에게 팔꿈치를 휘둘렀다.
“악.”
고통에 찬 신음은 분명 이윤석의 목소리였다. 뒤늦게서야, 낯선 상대였으면 정석훈 선에서 정리되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뭐야, 너.”
김수현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벌리기 위해 이윤석의 배를 손으로 밀쳐냈다.
“야,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어떡해.”
“네가 징그럽게 붙었잖아.”
“난 그냥 반가워서 인사하러 온 건데.”
입술을 삐죽 내민 그가 고개를 떨궜다. 김수현은 과장되게 상심한 척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사물함 문을 닫았다. 복도를 걸으면서 아직 가라앉지 않은 팔의 닭살을 쓰다듬었다. 이윤석은 착하긴 해도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수현아, 같이 가. 나도 서양 미술사야.”
“너도?”
호텔에서 벨보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렇게나 많은 과목을 함께 듣는지 몰랐다. 어지간히 자신이 무심했구나 싶었다. 수현은 502호 강의실에 들어가 눈에 띄지 않는 뒷줄에 앉았다. 자신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이윤석이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필기구를 꺼냈다.
정석훈은 강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구석으로 가 서 있었다. 이윤석이 필통에서 볼펜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냈다. 수현의 시선이 그런 그의 손에 묻은 푸른 물감에 박혔다. 유화물감 같은데 왜 지우지 않고 계속 묻히고 다니는 거지.
“나 클렌징 오일 있는데 빌려줄까?”
“뭐? 그게 뭔데.”
“너 손에 유화물감 묻은 지 며칠 되지 않았어?”
이윤석이 “아하!”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마치 자기가 무슨 물감을 사용했는지도 몰랐다는 태도였다. 이런 녀석이 어떻게 미대에 들어온 걸까.
“응. 빌려줘.”
“이따 수업 끝나고.”
김수현은 찜찜한 마음을 품은 채 수업을 듣기 위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이윤석이 옆자리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교재를 펼쳤다. 깨끗한 교재를 보아하니, 그동안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 없는 게 분명했다. 볼펜으로 열심히 하트를 그리는 게 전형적인 학습 부진 아동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니 이윤석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았다. 수현은 애써 잡생각들을 밀어낸 채, 수업에 집중했다.
강단에 선 교수님이 빔프로젝터를 켰고, 하얀 스크린에 오늘 배울 서양 미술사의 르네상스에 대한 설명이 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해 공부할 겁니다. 14세기 이탈리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유럽 전역으로 퍼졌던 이 혁신 미술은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얀 반 에이크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다수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죠.”
학생들은 앞줄에서 프린트물을 받아 뒤로 넘겼다. 김수현은 받은 프린트물에 수업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했고, 이윤석은 그 프린트물로 종이접기를 하고 놀았다. 수현은 그런 모습을 흘긋 바라보며 심각하게 이윤석과 거리를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소지품을 챙겨서 일어서자 이윤석이 따라붙으며 클렌징 오일을 빌려달라고 했다. 수현은 사물함에 무거운 교재를 넣으면서 드러그 스토어에서 산 클렌징 오일을 건넸다.
화방에 가면 유화물감을 지우는 용액을 팔기는 하지만 그걸 사용하면 피부가 많이 상해서, 수현의 경우 화장품을 지울 때 쓰는 제품을 썼다. 어차피 화장품이나 유화물감이나 색이 첨가된 기름이기 때문에 잘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다녀온 이윤석의 손에 아직도 푸른색이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사용법을 모르는 듯했다.
“마른 손에 클렌징 오일을 바르고 문지르다가 물을 살짝 묻혀. 그럼 하얗게 유화 작용이 일어나거든. 빡빡 비벼서 유화물감 지우고 물로 씻으면 돼.”
“수현이 너는 잘생겼는데 모르는 것도 없는 거 같아.”
“내 외모와 클렌징 오일 사용법이 무슨 상관인가 싶긴 한데 칭찬 고마워.”
제대로 손을 씻고 온 이윤석이 자랑하듯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어이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자꾸만 귀찮게 굴고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까칠해졌던 눈길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이윤석은 조금 이상하지만 순진한 아이 같은 부분이 있었다.
“클렌징 오일 사용하는 게 번거로우면 클렌징 티슈가 있거든. 들고 다니면서 사용하기는 그게 더 편할 거야.”
“그런 건 어디서 사? 편의점에서 사면 돼?”
“드러그 스토어에서 사면 돼. 학교 안에 있는데 같이 갈래?”
“응. 수현이 너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
“내가 뭘 대단하다고 자꾸 그래.”
이윤석이 배시시 웃으며 자신에게 팔짱을 끼었다. 김수현은 당황해 그 손을 밀어냈다.
“야, 나 이런 스킨십 안 좋아하거든. 함부로 하지 마.”
“왜?”
“왜긴 안 좋아하니까 안 좋아한다는 거지. 내 팔이 너랑 팔짱 끼려고 있는 건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도 너무 까칠하게 굴었나 싶었다. 그런데 자꾸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건 싫었다. 정말로 이쯤에서 그와의 연락을 차단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윤석이 깔끔하게 물러났다.
“미안. 네가 유정 선배랑은 팔짱 잘 끼고 다니기에 팔짱 끼는 거 좋아하는 줄 알았어.”
보통 남자랑 여자가 그러고 다니면 사귀는 거라고 오해할 텐데. 하여간 독특한 정신세계였다.
“몰라서 그런 거니까 사과받아줄게.”
이윤석과 한쪽 팔 길이만큼 떨어져서 나란히 걸었다. 정석훈은 그들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중앙 도서관 건물 1층에는 카페테리아와 매점, 드러그 스토어와 편의점이 있었다. 김수현은 화장품 진열 코너에서 클렌징 티슈를 찾아냈다.
막 쓰는 용도이기 때문에 가장 가격이 저렴한 걸로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몸에 밴 절약 습관이었다.
“윤석아, 이거 어때.”
“응. 좋아.”
사려고 하는 제품만 빠르게 골라서 계산한 둘은 곧장 드러그 스토어를 나왔다.
“고마워, 수현아. 내가 오늘 맛있는 거 살게.”
“아니야, 됐어. 뭘 이런 거 가지고.”
“어차피 우리 밥 먹으러 가야 하잖아. 응? 내가 피자 쏠게.”
“그럼 유정 선배 불러도 돼?”
“왜?”
“왜긴 우리끼리 먹으면 어색하잖아.”
이윤석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게 느껴졌다. 김수현은 그의 기분을 눈치챘지만, 보란 듯 최유정에게 연락했다. 어느 정도 그와 선을 긋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침 강의 없다면서 중앙 도서관으로 오겠다고 했다.
“수현아. 나 왔어!”
그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일행과 합류한 최유정이 김수현에게 자연스레 팔짱을 끼었다. 이윤석이 그 팔을 노려보면서 빈정거렸다.
“유정 선배, 수현이 팔짱 끼는 거 안 좋아하는데 모르나 봐요?”
“아니, 아는데. 근데 난 특별해서 상관없어. 왜? 넌 거절당했어?”
이윤석과 최유정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금방이라도 서로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김수현이 자기 거라며 싸울 기세라, 수현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윤석이가 오늘 피자 쏘기로 했어요.”
“윤석아, 잘 먹을게.”
이윤석은 얄밉게 구는 최유정을 째려봤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크로스백 끈을 움켜잡은 그의 손에 힘을 얼마나 준 건지, 피가 통하지 않아 손등이 금세 하얘졌다.
김수현은 얼른 이 살벌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정석훈을 돌아봤다.
“저 차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예. 대기시키겠습니다.”
주차장에 있던 차체가 긴 검은 자동차가 중앙 도서관 앞에 멈춰 섰다. 리*진을 본 이윤석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최유정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대학을 다니며 호텔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정도면 넉넉한 형편은 아닐 텐데, 막상 그가 학교에 입고 다니는 옷들은 명품인 데다가 그다지 돈에 쪼들려 보이지도 않았다.
그 또한 김수현처럼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잠시 위장 취업했던 걸지도 몰랐다. 가령 자신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였다든가…….
이윤석은 평범한 동시에 수상쩍었다. 처음부터 그를 의심한 건 아니다. 의심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유화물감 지우는 방법을 몰라 며칠이나 손에 묻힌 채 돌아다닌다든지. 그런 사소한 행동이 애초에 미술 전공자로서 말이 안 됐다.
그동안은 자신이 무심해서 그가 같은 강의를 들어도 몰라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정말 그를 알기 이전에도 그와 같은 강의를 들었었는지 떠올려봤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붙인 사람일까? 아니면 아버지? 그 대가로 돈을 받아 명품을 사 입는 거라면 갑자기 같은 학과에 나타나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그의 행적도 이해가 되는 듯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학교를 벗어난 자동차의 차창 너머로 초록색 대문과 비상하는 독수리 조각상이 잡혔다.
“기사님. 근처에 세워주세요.”
캠퍼스만 벗어나도 유명한 브랜드 간판이 즐비한 상업 거리였다. 적당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내린 네 사람은 프랜차이즈 피자집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 서버가 나눠준 물티슈로 손을 닦은 최유정이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쉬림프 피자 사진을 일행에게 보여줬다.
“우리 이거 먹을래?”
“아니요. 하와이안 피자로 시킬래요.”
물주인 이윤석은 메뉴판에서 익은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를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최유정이 기겁하며 그런 걸 누가 먹냐고 성을 냈다.
“무슨 파인애플 피자야.”
“그럼 다수결로 하든가요. 수현아, 넌 뭐 먹을래?”
차기주가 가져다준 하와이안 피자를 먹은 지 얼마 안 됐는지라 수현은 쉬림프 피자를 먹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윤석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길게 늘어졌다. 구부러진 눈썹과 주름진 이마가 세 사람을 둘러싼 기온을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김수현은 어린아이보다 더 매너 없이 구는 이윤석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유정에게도 이만 가자고 했다.
“어?”
“선배, 일어나요. 우린 다른 데 가서 먹어요.”
최유정이 머뭇거리며 일어섰다. 당황한 이윤석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설령 형이나 아버지가 보냈을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어도, 어차피 그와는 처음부터 성격이 맞지 않았다. 이젠 한계였다.
“미안해, 수현아. 내가 잘못했어.”
이윤석이 그의 손목을 잡고 올려다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심통 가득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한껏 비굴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볼 근육이 실룩거리며 경련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잖아. 선배한테 무례하게 굴었으면 선배한테 사과해야지.”
“선배, 죄송해요. 수현이가 하와이안 피자 좋아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에 고집부렸어요.”
“아니야. 됐어. 뭘 이런 걸 가지고 싸워.”
최유정은 아직도 서 있는 김수현의 팔을 잡아끌어서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과장되게 웃으며 이윤석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런 거였으면 말하지, 그랬어. 누가 보면 너만 수현이 아끼는 줄 알겠다. 우리 하와이안 피자 먹자.”
“야, 이윤석. 난 너랑 피자 먹는 게 처음인데 네가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아? 너 뭐야.”
김수현은 팔짱을 낀 채 정체 모를 상대를 마주 봤다. 그 날카로운 시선과 방어적인 몸짓에, 이윤석이 다급하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거 아는데. 수현아, 사실 나 꿈에서 널 본 거 같아서 너 만나러 호텔에 취업했던 거야. 우리 집 사실 잘 살아.”
단단히 교차하고 있던 팔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너 서양 미술학 전공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전과한 거고. 사실 나 그림 잘 몰라. 기계공학과였어.”
김수현이 느꼈던 이상한 점을 이윤석이 수상할 정도로 쏙쏙 골라서 해명했다. 이윤석은 잔뜩 속상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손바닥에 가려졌다. 사기꾼은 언젠가 김수현이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고비가 다가올 거라고 했다.
이때 그가 먼저 선수 쳐 약점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믿을 거라고 했다. 사기꾼은 이윤석이 손에 묻은 푸른색 물감을 지우지 못한 시점부터 이 순간을 예고해왔다. 손가락 사이를 벌려서 김수현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런 듯싶었다.
경악으로 커진 동공이 보였다. 이윤석은 ‘이제 다 넘어왔네’ 하고 순진한 김수현을 비웃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그러나 김수현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과대망상 스토커라도 마주한 듯, 이윤석을 경멸 어린 눈으로 본 그는 최유정과 피자 가게를 나가버렸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이윤석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씨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 * *
한 남자가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무덤가로 걸어 들어갔다. 매끄러운 대리석 비석들은 멀리서 보면 달빛이 반사돼 마치 유령처럼 흰빛이 어른거렸다. 잘 가꾼 잔디밭이 바스락거리며 밟혔다. 무덤을 찾은 남자, 일명 ‘사기꾼’은 비석 앞에 경건하게 섰다.
그는 포장지에 싸인 노란 복수초를 내려놓았다. 성물을 흡수하지 않으면 괴수가 되지 않는 줄 알았으나 그것을 곁에 둔 동생은 변이했다.
그 아이를 진작 단체에서 데리고 나가지 못한 그의 잘못이었다. 사기꾼은 동생을 빼내기 위해 제네시스에 합류했으나 동생을 잃은 지금, 그는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남을 생각이었다.
복수.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그 미치광이를 그의 손으로 직접 처단할 셈이었다.
그는 손목에 매달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초록색 소주병을 꺼냈다. 뚜껑을 따서 무덤 주위에 뿌려주고 나머지는 제 입에 가져갔다.
“바보 녀석. 그 녀석은 에스퍼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나쁜 놈일 뿐이야. 병은 병원에서 고쳐야지 왜 교회에서 고치려고 들어.”
무덤 위에 놓인 사진에는 살아생전과 달리 깨끗하고 하얀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 밝은 얼굴이 우느라 일그러진 사기꾼의 얼굴과 대조되어 유난히 환해 보였다. 넌 이제 편하냐? 난 너 하나 지키지 못하고……. 그는 한참 동안 두 팔을 힘없이 늘어트린 채 무덤 옆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다음에 또 올게.”
무덤에 놓고 간 생화는 아직도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산 자의 그리움이자 맹세였다.
* * *
“메시아,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신께서 타락한 세상을 벌하기 위해 내려보냈다는 천사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소파에 있는 장식용 쿠션에 파묻혀 있던 하얀 머리가 사기꾼을 돌아봤다.
“다 망한 거 같아.”
메시아가 도로 쿠션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그는 소파로 다가가 아직도 앳된 소년 같은 청년의 등을 쓰다듬어줬다.
“벌써 계획이 실패했습니까? 다람쥐가 정보를 제대로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와이안 피자 좋아하는 거 안다고, 꿈에서 널 봐서 접근한 거라고 말했는데 수현이가 나 보고 미친 새끼라며 가버렸어.”
“아아.”
고작 미끼 한 개를 얻어놓고 월척을 낚으려고 해 망한 거였다. 1년 동안 천천히 공들여서 미끼를 던지고 김수현이 그를 진짜 선배인지 아닌지 의심하며 추궁할 때 말을 꺼내도 성공할까, 말까 한데 설익은 밥을 먹으려고 든 탓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너무 어려워. 인간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다시 천계로 돌아가고 싶어.”
임무를 마칠 때까지 신은 그에게 날개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메시아는 하루빨리 인류를 멸망시키고 천계로 복귀하고 싶었으나 인간들 편에 차기주가 있었다. 그 녀석을 떠올릴 때마다 무섭고 소름이 돋았다.
예전의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센터에 쳐들어갔다. 인간 중 가장 강한 놈 하나만 죽이면 금방 끝날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네시스까지 창설하여 센터에 쳐들어갔을 때 그는 자신이 임무를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차기주를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차기주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분명 메시아와 같은 S급 에스퍼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절대로 같지 않았다.
그에게선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자 고귀하고 거룩한 영혼이신 그분을 맞닥뜨렸을 때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완전히 압도당해 차기주에게 배가 꿰뚫린 이래로, 메시아는 직접적으로 그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원죄를 가진 에스퍼들을 성물로 깨끗하게 정화해 괴수로 만들어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신성한 힘이 담긴 괴수들은 차기주에게 잔인하게 찢겨 죽었다. 메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 이전에 인간계에 내려왔던 첫 번째 메시아처럼. 그럼 영영 날개를 되찾지 못하고 인간처럼 늙어서 죽게 되겠지.
인류에게 벌을 내리기엔 차기주가 무서웠고, 혹 하늘의 심판을 열자니 김수현이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메시아는 김수현을 자신의 짝으로 삼아 함께 천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께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으니, 김수현 또한 천사로 삼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천사가 인간을 사랑하는 건 벌 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그는 지금 인간계에 있었고,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지상의 모든 것까지 일일이 굽어살필 수 없었다. 하늘이 낮과 밤으로 나뉘어 있듯 신께는 두 개의 자아가 있었다. 그분께서는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며,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그렇기에 신은 인류를 심판하려는 동시에 인간들이 이렇게 악해질 때까지 그들을 없애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천사들의 힘을 빌려 심판을 내릴지언정.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메시아의 설명을 들은 사기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메시아께서 ‘사실’이란 단어를 무려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게 왜?”
“사실, 진짜와 같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하는 단어는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서 나오는 입버릇입니다. 경찰들이 범인 심문을 할 때 종종 그걸로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보기도 합니다.”
천사인 그는 거짓말에 능하지 못했다. 김수현이 사랑하는 선배인 척 쉽게 호감을 사려고 했던 메시아는 큰 실망감을 느꼈다. 김수현은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속상했다. 정말 거짓말쟁이는 차기주인데…….
소파에 누워 있던 그는 크리스털이 전구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샹들리에를 눈에 담았다. 샴페인 잔에 따른 황금빛 술처럼 영롱한 그 빛을 보며 처음 김수현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회귀하기 전, PL 그룹 전무였던 김정석이 죽었다. 아직 학생에 불과했던 김수현이었지만 전무이사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메시아는 김 회장의 초대를 받고 그곳을 방문한 객이었다.
김수현은 몸에 딱 달라붙는 이탈리아 클래식 슈트를 입은 채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자리를 찾아주신 모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김정석 전 전무이사를 대신해 PL 그룹을 잘 이끌어가는 전무가 되겠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은 승리를 위한 성배였으나 어둡게 그늘진 눈가가 마치 그것을 독배처럼 보이게 했다. 샴페인에 살짝 젖은 김수현의 입술은 붉은 기가 돌았다. 메시아는 세상에서 인간계에 내려와 본 생명체 중에서 그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역시 그를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내 잘못을 만회할 수 있지?”
메시아는 김수현을 구하고 싶었다. 그가 무서운 차기주에게 강간당하지 않았으면 싶었고, 집안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았으면 싶었다. 그때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도 알지 못했으나 김수현이 불타 죽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가 없는 세상은 필요 없다는 걸. 메시아는 김수현을 사랑하고 있었다.
슬픔에 젖은 천사는 절규했다. 차기주도 김수현과 함께 죽어, 비로소 메시아는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었다. 그 강한 차기주가 그 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놈은 가짜 사랑을 얻어놓고도 만족하지 못해 자살한 것이 분명했다.
괴수를 게이트 밖으로 내보내자 그 누구도 완전히 메시아를 막아내지 못했다. 강력한 수호자를 잃은 인류는 마치 작은 바람과 짐승이 무섭다고 한 어린 왕자의 장미꽃처럼 연약했다.
인간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 올린 123층짜리의 바벨탑이 무너졌다. 유리로 된 외벽이 깨지고 콘크리트가 부서졌다. 거대한 빌딩은 별똥별처럼 추락해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군인들은 탱크를 끌고 거리에 나오고, 에스퍼들은 전력으로 괴수들 앞을 가로막았다.
국가 안보에 큰 위협을 느낀 정부가 비상 사이렌을 울렸다. 그 소리는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 같았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았다. 하늘은 지상에서 흘린 피만큼이나 붉은빛으로 물들어갔다.
임무를 완수한 천사에게 신께서 물으셨다.
‘나의 천사 루시펠,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으니 약속대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시간을 되돌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또다시 같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소원을 빌려는 것이냐?’
“예, 그러합니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의 하얀 날개에서 깃털이 휘날렸다. 하늘에 있던 메시아의 날개뼈에 달려 있던 날개에서 깃털이 하나둘 뽑혀 나갔다. 풍성한 하얀 깃털로 둘러싸여 있던 날개는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측한 몰골이 되었다. 아아. 아버지. 고통스럽습니다. 살려주세요. 제가 추락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절대 성급하게 구시면 안 됩니다. 지금 김수현에게 선배인 척 접근하는 건 오히려 더 큰 반감만 살 뿐입니다. 고작 좋아하는 피자 하나 알아냈다고, 하아.”
사기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럼 어떻게 해?”
“김수현이 메시아를 미친놈 취급했다 하셨죠?”
두통이 이는 듯 머리에서 손을 내린 사기꾼은 확신에 찬 눈으로 메시아를 바라봤다.
“선배가 아닌 작가가 되세요.”
“뭐? 작가? 그게 무슨 말이야?”
“김수현은 자기가 어떤 소설에 빙의를 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김수현은 자신이 소설에 빙의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제가 봤을 때, 메시아는 선배인 척하는 것보다 작가인 척하는 편이 김수현을 속이기 더 쉬울 겁니다.”
사기꾼은 사회성이 결핍된 메시아가 제대로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고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기를 치려는 목적만 놓고 생각해봐야 했다.
메시아가 자신이 선배인 척, 김수현을 속이려는 건 그의 신뢰와 애정을 받기 위함이었다. 꿈에서 널 봤다며 스토커처럼 굴었던 존재는 사랑하는 연인 역할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연인이 아닌 새로운 배역이라도 만들어서 조력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
사기꾼은 메시아가 이 계획을 성공해 자신이 그에게 더 큰 신임을 얻길 바랐다. 그렇다면 사기꾼에게도 언젠가 그의 뒤를 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올 테니까.
“작가는 세계의 모든 걸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죠. 책에 빙의한 인물을 알아내 필사적으로 도와주려고 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메시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급한 행동으로 신뢰를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써야죠. 글을 쓰세요. 메시아, 당신께서 알고 계신 과거의 이야기를 소설로 연재하세요.”
* * *
『능력자들』이란 소설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그 소설 속 인물, 김수현에게 빙의한 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연일 뿐, 여주인공 진설해에게는 페어이자 연인인 남자주인공 차기주가 있었다. 정작 그가 빙의한 김수현은 나이 많은 여인과 결혼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이 된 누군가는 소설 속 운명을 바꾸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 능력자 검사를 받은 그는 자기가 얼마나 쓸모 있는 인물인지 증명해 센터에서 한자리 차지하려고 했다. 자신에게 직위가 있으면 아버지가 함부로 팔아치우지 못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무효화 능력을 단순히 에스퍼의 공격 능력을 없애는 수준으로 여겼던 센터는 그 힘으로 불안정 파동을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차기주 이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김수현은 자신의 의도대로 끔찍한 정략결혼은 하지 않을 수 있었으나, 대신 차기주에게 감금당하게 되었다. 징벌방에 갇힌 그를 처음부터 차기주가 강간했던 건 아니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능력을 통해 안정을 찾으며, 날이 갈수록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그런 차기주를 경멸했고 둘의 사이는 서서히 틀어져 갔다. 김수현은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했고 차기주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비열한 차기주는 집안을 망하게 하겠다는 협박을 해서 김수현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김수현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다리를 벌렸으나, 차기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혐오를 내비치는 김수현에게 화풀이하기 위해 PL 그룹의 자금줄을 틀어막고 언론에 비리를 터트렸으며, 천문학적인 세금을 부과했다.
김수현은 모든 상황을 지켜본 후 손목을 그었다. 차기주가 겨우 그를 살려내면 또 손목을 긋고, 그러지 못하게 묶어두면 벽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자해했다. 김수현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차기주는 이대로 가면 김수현이 진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를 찾아왔다. 자신은 김수현을 강간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자신을 증오해서 품을 내어주지 않는다며.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기주는 몹시 추악하고 난폭한 에스퍼라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메시아에게 협력 관계를 제안했다. 더 이상 선량한 메시아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테니, 제발 김수현이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메시아는 그런 그에게 김수현을 놓아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메시아는 그 제안에 따라 김수현의 기억을 조작했고, 그렇게 차기주는 김수현의 고등학교 선배가 되었다. 김수현은 망해버린 집안 때문에 아주 낡고 좁고 초라한 옥탑방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은 온종일 바퀴벌레가 지나다니고, 옷장보다 작은 화장실에서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더 이상 지금의 김수현에게서는 PL 그룹 전무이사 취임식 때 봤던 반짝거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항상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을 담아 초점이 흔들렸고, 등은 웅크려진 채 펴지지 않았다.
김 회장은 김정석이 자살하고 회사가 망하게 된 게 다 막내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을 마실 때나 마시지 않을 때나 김수현을 죽도록 팼다. 김수현을 유일하게 보호해주던 누나, 김아영은 어떻게든 빚을 탕감하기 위해 에스퍼들에게 섹스 가이딩을 대가로 거액을 받으러 다녔다.
에스퍼들은 손에 닿을 수조차 없이 고고했던 여왕의 추락을 비웃으며 조롱했고, 그녀를 함부로 다루며 모욕했다. 김아영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며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절망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 날 동생에게 이렇게 전화했다.
―누나가 돈 많이 벌어서 올게. 우리 수현이 기다릴 수 있지?
김수현은 누나가 지방에서 힘겹게 공장을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아무도 그를 가두지 않았음에도 옥탑방에 갇혀 미친개처럼 구는 아버지에게 맞는 일상을 보냈다.
차기주는 본인이 원했던 결과물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과거를 후회하며 괴로워했다. 진정으로 김수현을 사랑했기에,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김수현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정석훈은 그가 추락하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정석훈은 김수현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차기주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린 그는 옥탑방에 불을 질렀다.
차기주는 절대 김수현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 김수현이 자유로워질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불길이 피어오른다. 김수현을 만나러 옥탑방에 온 차기주는 오열한다. 수현아, 수현아. 목의 핏줄이 터져라 이름을 부른 차기주가 불 속으로 뛰어든다. 갑자기 나타난 선배를 지키기 위해 김수현은 그를 끌어안는다.
차기주는 좁은 공간을 삼키기 위해 번져오는 불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뜨거운 문고리를 맨손으로 잡고 방문을 닫는다.
“바보도 아니고 여길 왜 들어와.”
“그럼 널 여기에 혼자 두게.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내가 왔어.”
차기주는 김수현을 구하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살아 나간다고 해도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걸 알았다.
“수현아,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널 욕심 내지만 않았어도 넌 행복했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내가 널 망친 거야.”
“아니야. 내가 왜 선배 때문에 망가졌대. 내 불운과 가난이 선배 탓도 아닌데.”
차기주의 눈물은 결국 방까지 침범한 화마에 삼켜져 흐른 적도 없다는 듯 사라진다. 김수현은 진실을 죽고 나서야 듣는다. 아니, 어쩌면 죽기 전 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그런 거야. 미안해. 흐윽, 수현아. 미안해.”
김수현과 달리 S급 에스퍼인 차기주의 신체는 까맣게 타고도 재생됐다. 평범한 불 따위는 그를 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이 김수현을 해함으로써 차기주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지옥의 불길이 되었다.
차기주는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쿵쾅쿵쾅. 살겠다고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을 괴수들의 핵을 뽑아냈을 때처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뽑아냈다. 손에 잡힌 뜨겁고 붉은 생명의 조각이 으깨진다.
메시아는 김수현을 감금하고 강간해놓고선 그 기억마저 조작한 차기주가 참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쓴 소설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농락』
<2권에서 계속>
에스퍼×에스퍼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