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후(2)
해가 뜨기 직전이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한다. 새벽 4시, 수현은 혹시라도 달빛이 방 안으로 들이쳐 중대사를 망칠까 봐 조그마한 창문의 커튼을 쳐둔 채 누나가 보내준 에스퍼를 기다렸다.
잠도 자지 못해 예민해져 있던 김수현의 귀에 현관문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틈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수현은 이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베개를 넣어두고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김수현을 툭툭 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다음, 현관 쪽으로 되돌아갔다. 자신도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깨금발을 들고 남자를 뒤따라갔다.
에스퍼가 징벌방 문을 닫고는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김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떠한 대화도 나눠서는 안 된다는 뜻일 터였다. 그는 자신에게 운동화와 덧신을 건넸다. 맨발에 운동화를 꿰어 신고 그 위를 덧신으로 감쌌다. 덧신이 소리를 흡수해준 덕분에 한결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에스퍼는 철제 계단을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움직임이 느리니 차기주가 올 때마다 그의 방문을 알려주던 둔탁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수현도 계단 손잡이를 잡고 철제 계단을 한 칸씩 밟았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몸짓은 마치 관객으로 하여금 없는 것을 있다고 느끼게 하는 무언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철제 계단은 센터 본관 5층에서 끊겼다. 나머지는 비상 출입구로 들어가 본관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이용해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감시 카메라에 움직임이 잡혔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때 에스퍼가 김수현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에스퍼는 방금 헬멧을 꺼냈던 아공간에서 클라이밍 하네스를 꺼내 사타구니에 찼다. 튜브 형태의 하강기에 등산용 로프를 끼운 후 하네스와 여닫을 수 있는 게이트, 카라비너를 결속했다. 그가 김수현을 마주 보고 안았다.
김수현은 에스퍼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고 목에 팔을 둘러 그에게 매달렸다. 철제 계단 손잡이에 로프를 단단하게 묶은 에스퍼가 장갑 낀 손으로 빠르게 줄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팔심이 좋으면 자신이란 큰 짐을 매달고도 버틸 수 있나 싶어 감탄밖에 안 나왔다. 물론 에스퍼이니 가능한 거겠지만, 무늬만 에스퍼인 김수현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바람은 안정된 땅을 딛고 서 있을 때와 달리 발이 허공에 뜬 상태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흉흉한 소리를 냈다. 인간이 최고로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m라고 했던가. 아마 지금 자신이 수직 낙하하는 5층 높이가 그와 엇비슷할 것이다.
이를 악무느라 턱 근육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이러다가 어금니를 깨먹겠다 싶어 구명줄인 양 에스퍼를 사지로 옥죄었다.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힘들게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와중에 레슬링 기술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수현은 미안함에 얼른 팔과 다리에서 힘을 풀었다.
땅에 내려온 그가 하네스와 연결된 로프를 풀어내고 모든 장비를 아공간으로 회수했다. 김수현이 헬멧마저 벗어 넘기자 자신들이 옥상에서 탈출했다는 증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스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김수현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금세 맨홀 뚜껑이 있는 곳에 도착한 에스퍼가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 엄청난 악취가 풍겨 나오는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보다.
수현은 선뜻 에스퍼를 따라 사다리를 탈 수 없었다. 이런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먼저 하수구로 들어간 에스퍼가 자신의 바짓단을 재촉하듯 잡아당겼다. 그 간결하고도 다급한 손길에 할 수 없이 숨을 참고 하수구 안으로 내려갔다. 그가 머리에 이고 있던 맨홀 뚜껑을 내려놓자 희미한 달빛에 비쳤던 사물들이 온통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
에스퍼가 헤드 랜턴을 꺼내서 머리에 썼다. 완벽하게 사라졌던 시야가 돌아오자 끈적거리는 오물로 가득한 하수구 안이 보였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차기주, 이 씹새끼 때문에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도저히 사다리에서 내려가 더러운 물속에 다리를 처박고 싶지 않았다. 물에 쥐의 사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수현은 저도 모르게 녹슨 사다리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러다 문득,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제 손등을 쳐다봤다. 악, 비명을 지르려던 자신의 입을 에스퍼가 얼른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큰 움직임에, 바퀴벌레가 자신의 손등을 지나가다가 멈춰 섰다. 수현은 급히 손을 털어 바퀴벌레를 떨궜다. 그래봤자 곰팡이 낀 벽면에는 지네와 딱정벌레, 바퀴벌레들이 득실거렸다. 물론 하수구라는 게 더러운 곳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런 수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에스퍼가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가 안전지대라 온갖 벌레가 몰려든 겁니다.”
“네?”
“센터가 제일 안전하니까 벌레든, 설치류든, 새든 다 여기로 기어들어오는 겁니다. 일종의 노아의 방주처럼 느껴진 거죠. 괴수에게 절대 함락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니까요.”
설명을 끝낸 에스퍼가 어서 움직이자고 보챘다. 이사님이 눈치채면 자기 목숨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에 김수현은 눈을 딱 감고 구정물에 다리를 처박고 걸었다. 발에 밟히는 돌들은 이끼가 꼈는지 죄다 미끌미끌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뭔지 모를 물컹한 것들이 밟혔다. 수현은 진저리를 치며 그게 무엇인지 상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무릎까지 잠긴 물속에서 무언가 턱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다. 부패한 사슴의 사체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껏 살려고 들어와놓고는 숨이 끊어져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하얀 애벌레들이 썩은 살점을 파먹기 위해 우글거렸다. 일찍이 파리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들도 보였다.
에스퍼가 헛구역질하는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빨리 움직여요. 시간이 없습니다.”
헤드 랜턴을 장착한 에스퍼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단지 더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공포로 인한 신체 반응일 것이다. 김수현은 그가 차기주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제게도 전염되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의 다리가 거센 물살을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
긴 통로를 건너 도착한 끝에는 쇠창살이 출구를 막고 있었다. 에스퍼가 쇠창살을 손으로 우지끈 잡아 뜯었다. 일반인은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괴력이었다.
그렇게 하수구를 빠져나온 그들은 겨우 스산한 숲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젖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동물의 배설물이 밟혔다. 에스퍼가 말해준 대로 동물들이 살기 위해 센터로 찾아들어서 그런 것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다람쥐가 나무뿌리 아래에 숨어 있는 은신처로 달려 들어갔다. 에스퍼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야 한다며 덤불을 파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김수현은 그의 등에 바짝 달라붙어서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고서야 발견한 픽업트럭은 암녹색 방수용 천을 덮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어서 위장해둔 상태였다. 그가 그것들을 치우면서 수현에겐 캠핑용품을 잔뜩 쌓아둔 뒷자리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다.
운전석에 앉은 에스퍼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모습은 수상쩍기 그지없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 몸을 씻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수구를 통해 센터 정문을 무사히 통과했다고 해도 군사기밀 지역이 된 태백산을 그냥 내려갈 순 없었으니까.
길목마다 무장한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에스퍼는 사원증을 꺼내 얼른 목에 걸었다. 얇은 줄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차기주에게 걸리면 산 채로 내장이 꺼내어질지도 몰랐다.
그게 차기주의 주특기였다. 괴수들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굳이 손으로 몸속을 헤집다가 핵을 꺼내는 것.
능력을 사용하면 아마 이 지구상에 나타나는 괴수들을 단 1초 만에 죽일 수도 있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가이드가 없어서 무력을 행세한 거라 쳐도 그 잔인한 손버릇이 그냥 나왔겠는가. 그는 타고나길 잔인한 괴물임이 틀림없었다. 새벽에 내려오는 픽업트럭을 발견한 군인들이 야광봉을 흔들었다.
차를 몰던 에스퍼, 문정인은 출입 통제용 차단 바 앞에 픽업트럭을 세웠다.
“사원증 확인하겠습니다. 퇴근 목적을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문정인은 오물 냄새 때문에 차창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군인이 유리창에 노크를 해댔다. 그는 목에 건 사원증을 유리에 가져다 붙이고 말했다.
“여자 친구가 아프다고 해서 서울 내려갑니다.”
군인이 서류에 문정인의 이름과 퇴근 시간, 퇴근 이유를 적었다. 차기주가 이 기록을 추적해 그를 찾아내 족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단 김수현을 구하고 봐야 했다.
그는 김아영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김아영과 자신은 각인도, 본딩도, 심지어는 페어를 맺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가끔 가이드인 그녀가 허락해줄 때 달려가서 가이딩을 받는 여러 에스퍼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즉,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문정인은 동생을 구해달라는 김아영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로 그녀는 자신에게 빚을 졌다. 그러니 그녀 또한 페어를 맺어주길 바라는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기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름다운 가이드를 원하는 에스퍼는 많았고, 문정인 또한 그중 하나였으니까.
문정인은 차기주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리를 달달 떨면서도 그녀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에스퍼란 족속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이드를 위해서 목숨까지 걸려고 드는 법이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문정인과 그의 트럭을, 군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통과시켰다. 운전석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픽업트럭이 차단 바를 무사히 통과했다. 군인은 유유히 지나가는 픽업트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전기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여기는 까마귀. 여기는 까마귀. 방금 햄스터 도착했습니다. 빅보스 응답 바랍니다.”
―여기는 빅보스. 알았다. 오버.
무전기는 아무런 대화도 오간 적 없다는 듯 조용해졌다. 태백산을 벗어난 픽업트럭의 바퀴가 차도 위를 굴러갔다. 캠핑용품에 파묻혀 잔뜩 웅크리고 있던 김수현은 그제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꼭 쇠망치로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이러다 몸살 나지 싶었다.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수현이 깊은숨을 쉬었다. 운전석에 앉은 문정인은 그와는 반대로 되레 긴장했다. 이렇게 그들을 놓아줄 차기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사님이 어떤 분인데 이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정확하게 말해서 그냥 놓아준 것이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안내 음성이 명랑하게 알려주는 길을 따라 픽업트럭이 나아갔다. 문정인은 차 안 가득 차오른 악취를 빼기 위해 창문을 다 내렸다.
휘이이잉. 언덕 위에 있는 초라한 오두막에게는 작은 바람도 위협적이듯, 달리는 트럭 안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식은땀에 젖어 김수현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작약꽃의 향기를 품은 페로몬이 바람을 따라 차 밖으로 새어나갔다. 어둠에 잠겨 검은 벨벳을 깔아놓은 것 같은 차도 한가운데, 검은 정장을 입은 차기주가 서 있었다. 그가 검은색 코트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차기주는 입에 담배를 물고 손으로 감싼 채 불을 붙였다. 비틀린 입꼬리를 비집고 뿌연 담배 연기가 탄식처럼 새어 나왔다. 김수현도 자기가 진짜로 도망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까지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뇌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이렇게 귀여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차기주는 진심으로 나들이를 떠난 김수현이 조금이나마 기뻐하고 있기를 바랐다. 김수현에게 미움받는 자신이 그를 기쁘게 해줄 방법은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길 위에 ‘강원도 홍천군’이라고 적힌 커다란 초록색 표지판이 나타났다. 산을 뚫어서 만들어놓은 터널 속으로 픽업트럭이 달려 들어갔다.
가오리처럼 생긴 괴수와 맞닥뜨렸던 곳이었다. 본능적으로 김수현의 어깨가 굳었다. 하아……. 수현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려 애썼다. 어차피 괴수는 죽었다. 이미 죽어버린 것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체력과 감정을 소비할 바에는 어떻게 차기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나 궁리하는 게 백배 천배 나았다. 수현은 마음을 다잡으며 눈에 힘을 줬다.
일단 옷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오수에 처박혀 흠뻑 젖은 바지 때문에 아무리 차창을 내리고 있어도 계속 불쾌한 냄새가 났다. 찬 바람에 달달 이를 떠는 자신의 모습을 에스퍼가 백미러로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가 김수현을 힐끔 살피더니 빠르게 실내 온도를 조절해줬다. 김수현은 가까운 시내로 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딜 가서 어떻게 씻으며, 새 옷은 또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문정인은 누가 재벌 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손이 참 많이 간다고 작게 투덜댔다.
“5성급 호텔은 못 가고, 싸구려 옷밖에 못 구해줘도 괜찮으면요.”
“상관없어요. 일단 어디든 가주세요.”
이건 또 의외였다. 하긴, 징벌방에서 탈출할 때도 군말 없이 잘 따라왔지. 게다가 엄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김수현의 안색이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정인은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변경했다.
“수현 씨, 저체온증 온 것 같으니까 팔을 X자로 교차해 겨드랑이 밑에 끼우세요.”
그는 백미러를 통해 김수현이 자기가 알려준 대로 자세를 취하는 걸 확인했다. 김수현의 상태를 보니, 일단 속초 쪽으로 이동해 옷을 사 입히고,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 * *
아직 이른 새벽이기 때문에 문을 연 가게는 없을 것 같았지만, 관광 지구라 그런지 모텔과 관광호텔이 많았다. 정인은 추워하는 수현을 위해 차창을 닫고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속초 중앙동에 도착한 문정인은 네온사인으로 호텔이라 써진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픽업트럭 운전석에서 내린 그는 뒷좌석에 구겨진 종잇장처럼 웅크린 김수현을 내리게 했다.
지하 주차장 천장에 매달린 전구는 수명이 다했는지 빛이 깜빡거렸다. 그가 그 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기묘한 그림자는 기둥 뒤에서 아른거리며 몸을 숨겼다.
문정인은 누가 주차하다가 박기라도 했는지, 수리를 위해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구역을 힐끔 쳐다봤다. 페인트와 회반죽을 담아놓은 양동이, 그리고 작업하던 사다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지하의 특성상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자동차에서 나는 엔진오일 냄새와 먼지 때문에 공기가 텁텁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뒷좌석에서 짐들과 엉켜서 한참을 달린 김수현은 속이 메슥거리고 멀미가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간 그들의 몰골을 보고 프런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직원이 퍼뜩 깨어났다. 직원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남자 둘을 내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김수현은 그런 직원의 마음을 알아챈 듯 재빨리 선수를 쳤다.
“하루 숙박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지금 숙박 가능한 방, ……한 곳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루 숙박비는 25만 원이에요.”
“핸드폰으로 결제할게요.”
관광지에 있어서 그런지 숙박비가 초라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많이 나갔다. 혹 직원이 방을 내어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방값을 비싸게 불렀나 싶어 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곧 그런들 어떤가 싶어 눈에 힘을 풀었다. 지금 이 꼴로는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수현에게는 다른 곳을 찾을 여력이 없었다.
김수현은 습관처럼 숙박비를 핸드폰으로 결제한 뒤, 그제야 아차 싶어 뒤늦게 전원을 껐다. 경황이 없어서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당할 수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 도망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핸드폰을 버리는 건데 말이다. 심지어 자신은 그 핸드폰으로 결제까지 했다. 혹시 이 실수 때문에 차기주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내진 않았을까 초조해져 죄 없는 입술만 물어뜯었다.
“혹시 룸서비스 가능할까요? 새 옷과 속옷을 구하고 싶은데.”
“원하신다면 세탁을 해드릴 수는 있는데 아직 세탁실 직원분들이 출근하지 않으셔서 오전 10시는 되어야 가져다드릴 수 있어요. 맡기실래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망설여졌다. 오래 머물면 차기주에게 따라잡힐지도 몰랐다.
“옷은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다행히 누나가 보내준 에스퍼가 나서서 그 문제를 해소해주겠다고 했다. 김수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갈 수 없었다.
재벌 집 도련님으로 지내면서 눈이 높아진 탓일까? ‘802호’가 적힌 낡은 플라스틱 키링을 매단 열쇠가 김수현을 당혹게 했다. 호텔에서 보통 사용하는 매끈한 신용카드 같은 스마트 키가 아니었다.
김수현은 어쨌든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중요하다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반쯤 체념하고 직원에게서 열쇠를 넘겨받았다.
김수현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한 손님이라도 있는 건지 방금 그들이 내린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 있어서 기다려야 했다. 김수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에스퍼에게 이름을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문정인입니다.”
“늦었지만 인사드려요. 절 구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영 씨의 부탁이었는걸요.”
둘의 대화는 얼마 가지 못해 끊겼다. 김수현은 굳이 문정인과의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고 전자 패널에 표기된 숫자만 올려다봤다. 누르는 게 늦었는지, 지하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자신들이 있는 1층을 지나 4층에 멈춰 선 후에야 다시 내려왔다. 그 덕에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조용한 복도에 열쇠가 짤랑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휑한 복도를 따라 걷다 802호 앞에 멈춰 선 수현은 문고리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렸다. 삐거덕거리며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방 안은 하루에 무려 25만 원짜리라고 하기에는 처참한 수준의 침실이었다. 이름만 호텔이지, 모든 것이 싸구려 모텔이나 다름없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수현은 여기서 자고 갈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
“수현 씨는 따뜻한 물로 씻고 계세요. 전 갈아입을 옷과 먹을 것 좀 구해오겠습니다.”
문정인은 김수현을 바래다주고 곧바로 떠났다. 김수현은 문정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잠그고 불을 켰다. 형광등이 켜지자 등 안에 갇혀 있던 벌레들이 타다닥 날갯짓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벌어진 입을 얼른 닫았다. 당장은 씻는 데에나 집중하자.
수현은 젖은 운동화를 벗기 위해 끙끙거리며 잡아당겼다. 덧신은 하수구 안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맨발에 운동화를 신은 채 물에 들어갔더니 발이 퉁퉁 불어 있었다. 겨우 신발을 벗어내고 빨갛게 물든 맨발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불을 켜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드문드문 깨진 타일 사이로 검은 곰팡이가 핀 실리콘 마감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니다. 이런 몰골로 왔는데 받아준 게 어디야.
물을 머금어 쉬이 벗겨지지 않는 바지를 힘겹게 벗어 바닥에 던졌다. 마음을 다잡고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는 고장 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들어 올렸다. 그 고생을 했지만 곱게만 살아온지라 비누 걸이에 놓인 초록색 오이 비누를 사용하지 말까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내키진 않았지만 이것 외엔 다른 호텔 어메니티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호텔이라 하기도 좀……. 또 불결해 보이긴 했지만 비누 자체는 약산성이라 세균이 생성되기 어렵고, 계면활성제 때문에 오염되어도 세균이 쉽게 떨어져 나간다고 배웠다. 그러니 물로만 씻는 것보다는 비누로 씻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수현은 촌스러운 꽃무늬 샤워 커튼을 걷어내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눈을 감고 얼굴부터 물을 쐤다. 그리고 오이 비누로 정수리를 문질러 거품을 냈다. 김수현은 머리부터 시작해 얼굴, 나아가 몸까지 오이 비누 하나로 해결했다. 군대를 가보지는 않았지만 갔으면 이렇게 씻었을 것만 같았다.
물소리에 끽 열리는 문소리가 묻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안을 살피고 금세 도로 나갔다. 김수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기분이 나아진 상태였다. 기껏해야 오이 비누로 씻은 게 뭐라고 더 이상 몸에서 하수구의 악취가 풍기지 않았다.
수현은 뻣뻣한 수건 하나를 챙겨 젖은 머리를 말리고 몸도 닦아냈다. 수건이 달랑 두 개밖에 없어서 하나는 문정인을 위해 양보해야 했다. 더러운 옷은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버려둔 채 나왔다. 알몸으로 있기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아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오래된 장롱 속에 넣어둔 듯 나프탈렌 냄새를 풍기는 이불이라고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겠지만, 지금은 눈만 감으면 깊게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새벽부터 온갖 고생을 하다 겨우 안정을 느낀 탓이었다. 꿈결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분명 문을 잠가뒀는데 어떻게 문정인이 들어왔나 싶었다. 여분 키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피로에 푹 젖은 뇌가 잘 돌아갈 리 없었다. 수건으로 말리기는 했지만 드라이를 하지 않은 탓에 축축한 머리카락을 그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왜 만지냐고 그 손을 쳐내야 했지만, 손이 꼭 추를 달아놓은 듯 무거웠다.
언제 갈아입은 건지, 검은 코트를 입은 그가 테이블을 보고 혀를 찼다. 아까 보니 담배꽁초에 그을린 자국이 있던데, 그걸 본 것 같았다. 그가 손에 든 종이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방을 나가자 문고리가 찰칵 돌아가며 잠겼다. 김수현은 자신을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 문정인이 어딜 가는 거냐고 속으로 꿍얼거리다 완전히 수마에 집어삼켜졌다.
그 시각, 정작 문정인은 열지 않은 가게들의 문을 두드리며 갈아입을 옷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마땅한 소득 없이 돌아온 참이었다. 그의 손에는 24시간 편의점에서 구매한 빨간 삼각팬티와 검은 드로어즈, 샌드위치와 온장고에서 막 꺼낸 따뜻한 두유밖에 없었다.
문정인은 반드시 검은 드로어즈는 자신이 차지하리라 다짐하며 802호의 문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수현 씨, 문 좀 열어주세요.”
김수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김수현 씨, 문 좀 열어달라고요.”
배려 없이 두드려대는 노크 소리에 수현은 이불을 망토처럼 온몸에 두르고 일어났다. 그러곤 눈살을 찌푸린 채 문을 열어줬다.
“알아서 들어오지, 사람을 왜 깨워요.”
“꿈꿨어요?”
문정인은 문이 잠겼는데 어떻게 들어오냐고 말대꾸하려다가 말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김수현 너머로 테이블이 보였는데, 그 위에 처음 보는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본 순간, 김수현의 잠꼬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절벽 아래로 던져버린 듯 심장이 손쓸 틈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평온하게 하품이나 하고 있는 걸 보니, 김수현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수현은 뒤늦게 문정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종이 가방을 발견했다.
“이 시간에 옷을 어떻게 구한 거예요? 와, 니트다.”
김수현은 부드러운 하얀색 니트에 뺨을 파묻었다. 얇은데도 따뜻한 걸 보니 캐시미어로 된 것 같았다. 어깨에 두른 이불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정인은 얼른 등을 돌렸다. 김수현의 벗은 몸을 봤다가 정신 나간 에스퍼에게 살해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수현은 알몸에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소매를 잡아당겨 냄새를 맡았다.
“와, 좋은 냄새.”
자신을 싸구려 호텔에 데려온 문정인에 대한 짜증은 따뜻한 니트와 함께 증발하였다. 종이 가방을 뒤져서 회색 드로어즈를 꺼내 입고, 고무줄이 들어가 편한 베이지색 니트 바지도 입었다. 꼼꼼하게 양말과 운동화까지 챙겨준 센스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김수현은 여전히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문정인에게 슬그머니 다섯 걸음 정도 멀어졌다.
“어서 씻으세요. 아 참,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할걸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여기서 절대 샤워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그대로 괜찮으시겠어요?”
“넵, 당연하죠. 아, 일단 이거 드세요.”
문정인이 비닐봉지에서 샌드위치와 따뜻한 두유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김수현은 그것들을 챙겨 침대에 누운 채 포장지를 뜯었다. 달콤한 두유 한 모금을 먼저 마셨다. 빈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오자 뒤틀렸던 속이 풀리면서 살 것 같았다. 빈약한 양상추와 햄이 아쉬운 샌드위치였지만 먹으니까 속이 든든했다.
가뜩이나 졸린 와중에 위장에 뭔가 들어가니까 눈꺼풀을 누가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수, 수현 씨……, 혹시 졸리신가요?”
문정인이 마치 자신을 깨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소곤거렸다. 그 작은 속삭임에 김수현은 머쓱해져 하품하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네.”
“어서 가야 할 것 같은데 걸을 순 있으시죠?”
맞다. 집에 가야지. 김수현은 차기주가 쫓아오기 전에 여길 떠나야 한다는 걸 되새겼다. 아무리 자신이 재벌가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25만 원이나 냈는데 더러운 화장실에서 고작 목욕 한 번만 하고 가려니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새삼 이게 다 차기주 때문이다 싶어 분노로 눈이 번쩍 떠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프런트로 내려가 열쇠를 반납했다. 또다시 지하 주차장에 있는 픽업트럭 뒷좌석에 올라타 캠핑용품 사이로 몸을 숨겼다. 김수현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다시 눈을 뜨면 집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눈을 감았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던 김수현은 어느 순간 의식이 돌아와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얀 시트를 손으로 문지르고 포근한 거위 털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구나.
안도한 그는 실컷 자고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일어났다.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던 수현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여긴,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멍청하게도 집이라고 여긴 곳은 로프를 타고 하수구 오물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벗어나려고 했던 이능력 센터의 징벌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분명, 이 감옥 아닌 감옥을 탈출해 서울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붙이자며 문정인만 믿고 잠들었는……. 수현은 자신이 잠든 사이 문정인이 자신을 도로 징벌방으로 되돌려놓았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문정인, 이 거지 같은 새끼.
차라리 탈출하느라 고생을 안 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니 더 열이 받았다. 누나한테 왜 그딴 거지 같은 에스퍼를 보냈냐고 문자로 따지려고 보니 핸드폰이 안 보였다.
“아, 씹……. 호텔에 두고 왔나 봐.”
잠결에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걸 어떻게 되찾나 아픈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차기주에게 핸드폰 좀 찾아와달라고 하면 찾아다 주기야 하겠지만, 지난밤의 탈출을 들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부탁해야 했다.
모른 척 차기주를 가이딩해주고 나서, 가이드인 누나를 불러달라고 하면 되려나? 빠르게 계산을 끝낸 김수현은 자신에게 아침밥을 먹이러 올 차기주를 기다렸다.
오전 8시가 되자 철제 계단을 밟는 구두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던 발소리가 징벌방 문 앞에서 잠깐 멈추어 섰다. 짧은 침묵이 혹시 자신을 만나기 전 차기주가 몸단장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수현아, 들어갈게.”
문고리가 돌아가고 아침임에도 완벽한 정장 차림을 한 회사원이 걸어 들어왔다. 각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정장은 그를 한층 우아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온화한 미소가 맴도는 표정을 보건대 새벽에 자신이 잠시 외출했던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누나를 만나면 자신 대신 문정인 좀 주먹으로 때리라고 말해야겠다. 그 멍청한 놈이 겁을 먹는 바람에 완벽한 계획을 모두 망쳐버렸다.
“잘 잤어?”
“…….”
심통이 가득한 김수현의 표정을 보며 차기주는 얼른 뒤돌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입술을 맞물렸다. 간밤에 나들이를 참 재미있게 했지.
그는 웃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문 채 정장의 더블 버튼을 풀었다. 요리를 할 동안 재킷이 더러워지지 않게 아일랜드 식탁에 있는 의자에 걸어두고, 소매 단추를 풀어 와이셔츠 팔을 걷어붙였다.
프라이팬을 꺼낸 근육질의 팔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놓고 손에 검은 라텍스 장갑을 꼈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한참 고르다가 양파와 당근을 싱크대에서 깨끗이 씻고, 진공 포장한 베이컨을 뜯었다.
그는 익숙한 듯 순식간에 모든 재료들을 볶아 오므라이스를 뚝딱 만들어냈다. 평소라면 안 먹겠다는 김수현과 한바탕 기 싸움을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개고생을 하고 와서 그런지 수현은 군말 없이 수저를 들었다. 차기주는 얌전히 밥을 먹는 수현이 기특해, 냉장고에서 케첩을 꺼내 근처에 놔줬다. 김수현은 귀엽게도 케첩으로 계란 위에 하트를 그렸다. 역시 스무 살이 어리긴 어리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도 자기가 들키지 않았다고 여기는 거겠지. 김수현이 자주 나다니는 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밥을 잘 먹는 걸 보니 앞으로 산책이라도 시킬 겸 종종 내보내줘야 할 듯싶었다.
문정인이 잠든 김수현을 데리고 센터로 돌아온 건 맞다. 그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저보다 먼저 돌아와 징벌방 문 앞에 서 있는 차기주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사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들은 이 징벌방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단 한시도 차기주의 감시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차기주는 문정인이 김수현을 싸구려 호텔로 끌고 들어갔을 때 잠깐 그의 목을 뽑아버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호텔 건물은 총 8층이었고,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간 지점인 4층에서 내렸다. 상대가 어느 방에서 머물지 모르는 상태일 땐, 중간층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 어디든 빠르게 쫓아갈 수 있으니까.
그는 김수현이 탔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 층수를 확인하고 비상계단을 통해 8층까지 올라갔다. 차기주에게 있어, 이 층의 수많은 방 중에서 김수현이 어느 방에 들어갔는지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청각과 후각, 시각, 촉각까지, 모든 감각이 항상 지나치게 예민해서 문제 되는 SS급 에스퍼였다. 아무리 감각을 억누른다고 한들, 그 심한 하수구의 오취를 맡지 못할 리 없었다.
문 안에서 물소리가 났다. 차기주는 침착하게 염력을 이용해 안에 있는 잠금쇠를 풀었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그 소리는 물소리에 묻힌 듯했다. 차기주는 고양이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침대에 문정인이 누워 있다면 조용히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문정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차기주는 피식,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목숨줄 하나는 쓸데없이 긴 녀석이었다.
샤워기 물소리가 멈췄다. 그는 곧바로 802호를 나왔다. 합판으로 만든 듯 보이는 얇고 낡아버린 문을 사이에 두고 차기주는 김수현이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는 소리가 들렸다. 차기주가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대자, 그새 잠이 들었는지 곤한 숨소리가 났다.
그는 다시 한번 802호로 들어갔다. 핸드폰만 달랑 챙긴 채 도망갔으니 갈아입을 옷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정인은 아마 그래서 바로 나간 것이리라.
차기주는 아공간에 넣어둔 종이 가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징벌방에 맨몸으로 끌려온 김수현을 위해 사둔 옷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증표였다. 자신이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드러낼 증표.
그는 그걸 본 문정인이 엄청난 공포를 느낄 거라는 걸 알았고, 아무런 노력 없이 김수현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예상대로 공포에 질린 문정인은 픽업트럭을 끌고 태백산으로 돌아왔다.
“문정인 씨.”
“네, 이사님.”
“수현이도 그러더니, 대체 날 어떻게 본 겁니까. 난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국가 간의 정상회담 때마다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유엔에서 연설을 하며, 사기업 주제에 대통령에게 정부 지원금을 뜯어내는 그 ‘차기주 이사’가 평범한 회사원일 리 없다. 그야말로 대체 평범한 회사원을 어떻게 본 건지 모르겠다.
차기주가 그렇게까지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가진 건 그가 역사상 유례없는 S급 에스퍼이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하나로 나라 하나쯤은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그런 살아 숨 쉬는 핵무기가 바로 차기주 이사였다.
“가끔 수현이 데리고 다니며 나들이나 시켜줘요. 콧구멍에 바람 좀 넣어줘야 허튼 생각 안 할 테니까.”
“네?”
“자살이니 뭐니 하며 우울해하는 것보다 열성적으로 도망 다니는 게 낫다고. 모르는 척 눈감아줄 테니까 적당히 어울려줘요.”
“프락치 역할을 하면 되는 겁니까?”
문정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이게 맞나 확인했다. 차기주는 그런 문정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의 어깨 너머만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던 문정인은 아차 하며 급히 제 등에 업혀 있던 김수현을 차기주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김수현이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차기주는 문정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문정인은 언제 일어났냐는 듯 그새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문정인 씨를 프락치로 써먹겠다는 게 아니라 보모로 두겠다는 거지 않습니까.”
“아, 아.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차기주는 프락치란 표현은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꼭 김수현을 농락하는 거 같지 않은가. 그는 그저 김수현이 하고 싶은 대로 풀어주는 것뿐인데, 이런 자신의 배려마저 곡해되어 김수현에게 악당 취급을 당하면 속상할 것 같았다.
“김아영 씨 페어 자리를 노리는 것 같던데, 문정인 씨도 적당히 장단 맞추다 보면 그 자리를 얻지 않겠습니까.”
가이드에 대한 욕심으로 문정인의 목젖이 순간 크게 출렁였다. 문정인의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게 없는 일이었다. 김아영은 자신의 남동생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문정인에게 진 빚을 어떻게든 갚아야 할 테니까.
단침을 삼키는 그를 내려다보던 차기주는 구둣발로 무릎 꿇은 허벅지를 지그시 밟았다.
“문정인 씨, 잘합시다.”
“넵! 이사님.”
“목소리는 좀 죽이고. 수현이 깰라.”
차기주는 사원증을 꺼내 징벌방 센서에 가져다 댔다. 잠금장치가 풀렸다. 사고를 친 에스퍼를 가두는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기 때문에 갇힌 이를 제외한 센터 소속 직원이라면 누구나 문을 열 수 있었다. SP는 밥과 물은 꼬박꼬박 먹이면서 혼내는 인도적인 회사였다. 물론 김수현은 혼날 이유가 없었다. 그의 잘못을 굳이 꼽자면, 불쌍하게도 자신의 페어인 점이겠지.
잠시 지난밤을 회상하던 차기주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을 한 김수현을 쳐다봤다. 김수현은 그가 만들어준 오므라이스가 맛있었는지 접시에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싹싹 긁어 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입가에 묻은 케첩을 혀로 핥아 먹었다. 붉은 케첩을 핥는, 케첩만큼 붉은 혀에 차기주의 시선이 절로 따라붙었다. 어린놈이 지랄맞게 야해빠졌다.
차기주는 같은 알파에게 발정하는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일절 생각지 않고 김수현의 말간 얼굴만 탓했다. 전부 김수현이 나쁜 거였다. 자신이 발정하는 것도, 자신이 그를 가둘 수밖에 없는 것도. 그는 빈 접시를 챙겨서 싱크대에 쌓았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꼭 빗소리 같았다. 차기주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접시를 닦아냈다. 김수현은 그런 차기주의 등을 바라보다가 자꾸만 그와 겹쳐 보이는 누군가를 지우려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자꾸 선배가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이불 속에 숨어 선배의 등을 바라보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뒤로한 채 밀린 설거지를 해주던 선배……. 미쳤다. 미쳤어. 어떻게 저 인간이랑 선배를 겹쳐 볼 수 있지?
“씻고 준비해. 학교 가고 싶다며.”
설거지를 끝낸 차기주는 고무장갑을 벗어서 싱크대에 걸쳐놨다.
“정말 보내줄 거예요?”
“가기 싫으면 가지 말든가. 나는 그게 좋지.”
“아니에요! 바로 준비할게요.”
김수현은 언제 그를 외면했냐는 듯,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고 잽싸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오이 비누로 머리를 감고 덜 마른 상태로 잠들어서 그런가. 뻣뻣해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물 조금 묻힌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수현은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머리통을 가져다 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여름에 축구를 하고 나서 학교 친구들이랑 하던 짓을 여태 하는 걸 보면 사람은 쉽게 안 바뀌는 것 같다.
한 손으로 샴푸를 펌핑했다. 손바닥에 덜어진 샴푸에서 작약꽃 향기가 났다. ‘이런 우연도 다 있구나’ 하며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샴푸를 문댔다. 차기주도 명색이 알파다. 설마, 같은 알파인 자신의 페로몬 냄새가 좋아서 그걸 느끼는데 다른 냄새가 방해하지 않도록 비슷한 향을 준비했을 리 없다. 그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참 상상력이 좋았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글러먹었지만.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고개를 들었다. 피가 살짝 쏠린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호텔에서 썼던 것과는 달리 보송보송하고 보드라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찬물로 세수했다. 새 칫솔을 꺼내 양치까지 깔끔히 마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차기주가 빈 행거에 차곡차곡 옷들을 걸고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니트와 비슷한 디자인의 옷들이었다. 김수현은 순간 하, 헛웃음을 뱉었다. 왜 문정인이 잠든 자신을 징벌방에 도로 데려다 뒀는지 알 것 같았다. 차기주가 호텔 방을 찾아온 걸 알아차려서였다. 수현은 헛숨을 삼켰다. 일단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차기주 쪽에서 알 수 없도록 태연하게 화장대에 앉았다. 가이딩을 핑계로 누나를 불러 핸드폰을 부탁해야 하는 건 변함 없었다.
화장대에는 스킨과 에센스, 선크림까지 여러 가지 화장품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감금당하는 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김수현은 맨얼굴에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덜 마른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렸다.
“앞으로 정석훈이 등하교시켜줄 거야. 어차피 경호원 데리고 다니는 삶은 익숙할 테니까 같이 다녀.”
“알았어요.”
김수현은 군말하지 않았다. 지금 차기주가 이쪽을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다 말리고 행거에 걸린 옷들을 다시 살폈다. 손으로 만져보니 하나같이 부드러운 옷감들이었다. 김수현은 한참을 고민하다 베이지색 니트와 슬림한 핏의 하늘색 청바지를 골랐다. 정장만 입고 다니는 아저씨 주제에 찢어진 청바지를 준비해줄 줄은 몰랐다. 하필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스타일이어서 혹시 이런 것도 뒷조사를 한 건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잠시 차기주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던 김수현은 옷을 챙겨 들고 유일하게 감시 카메라가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아 참, 수현아. 줄 게 있는데…… 기다려봐.”
차기주가 식탁 의자에 걸어뒀던 재킷을 챙겨입더니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상한 태도에 김수현은 평소처럼 뭔가 챙겨주겠거니 싶었다.
“뭔데요?”
“괜히 고생하지 말라고.”
내밀어진 손 위에 잃어버린 휴대폰이 올라왔다. 미친. 그게 내 핸드폰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경악한 자신을 보며 그가 여우처럼 밉살스럽게 눈가를 접었다. 속내가 꿰뚫린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등을 차기주가 떠밀었다.
“강의 시간 늦겠다. 어서 가.”
차기주가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센서에 가져다 대자 문이 열렸다. 충격에 홉뜬 눈으로 그걸 유심히 바라본 김수현은 저걸 어떻게 훔치나 싶어 암담함을 느꼈다.
저번에 보니까 염산인지 뭔지, 독을 질질 흘려대는 괴수를 맨손으로 때려잡던데, 자신의 신체 능력은 그에 비하면 그냥 허접쓰레기였다. 그의 사원증을 도둑질할 바에야 차라리 은행 강도가 되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징벌방 문을 열고 나오자 초록색으로 페인트칠한 착륙장에 잠자리처럼 내려앉은 헬리콥터가 보였다. 프로펠러가 빙빙 돌아가면서 일어난 돌풍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김수현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헬리콥터 기체 쪽으로 다가갔다. 안에 타고 있던 정석훈이 자신에게 헤드셋을 건넸다. 얼른 머리에 쓰고 좌석 시트에 앉았다.
“안전벨트 매세요.”
“네?”
“안전벨트!”
“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정석훈이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바보처럼 몇 번이고 되물었다.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정석훈이 자기 안전벨트를 툭툭 쳤다. 수현은 멍청이처럼 굴지 않은 척 잽싸게 안전벨트를 끌어서 착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가 문을 닫자 헬리콥터가 서서히 떠올라 센터 옥상을 벗어났다.
새벽에는 어둠에 집어삼켜져 거대한 열대우림 같았던 태백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뭇잎들은 으스스한 기운에서 깨어나 햇빛에 반짝이는 풍성한 잎을 자랑했다. 김수현은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울창한 숲을 구경했다.
이렇게만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온갖 벌레와 동물들이 괴수를 피해 살겠다며 모여들어 있을 터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동물들의 배설물이 밟히고, 이미 죽어 썩은 사체들은 벌레가 꼬인 채 여기저기 널려 있겠지. 평화로워 보이는 숲의 이면을 겪을 대로 겪은 김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뭐든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였다.
초록 일색의 산을 벗어나자 잿빛 도로들이 보였다. 땅과 달리 하늘은 가로막는 것이 없어 헬리콥터가 막힘 없이 나아갔다. 김수현은 이동하는 내내 창밖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석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호기심 가득한 김수현의 옆얼굴을 지켜보느라 그랬다.
정석훈은 수현을 지켜보느라 오랜 시간 뜨고 있는 눈이 건조한 줄도 몰랐다. 그는 취조실에서 겪은 엄청난 감각이 아직도 신체를 지배하는 것만 같아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불안정 파동이 순식간에 잠잠해지는 그 압도적인 감각은 쉬이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헬리콥터는 김수현이 다니는 대학교와 가까운 호텔 옥상에 착륙했다. 김수현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이 벨보이로 위장 취업했던 그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배인이 해고 통지를 보냈던 문자 내용을 떠올렸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 김수현 씨는 해고입니다. 그동안 일했던 아르바이트비는 이번 달 월급날에 지급하겠습니다.]
어차피 차기주한테 붙들려서 출근할 수 없게 된지라 차라리 잘되었다고 여겼더랬지. 다만 이윤석과 술까지 마시면서 친해져 놓고 갑작스레 잠적을 해서 좀 미안하긴 했다. 그런데 양반은 못 되는 듯, 호텔 로비를 지나가는데 유니폼을 입은 이윤석과 딱 마주쳤다.
“너!”
“아, 안녕.”
“안녕은 무슨. 갑자기 그만둬서 놀랐다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윤석은 자신과 함께 있는 정석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귓가에 바짝 다가왔다.
“지배인님이 너 그만뒀다고 그러던데 펜트하우스에 룸서비스 올라간 일 때문이야?”
김수현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둔 거야.”
“그래? 다행이다. 난 또 나 때문인 줄 알고, 휴.”
이윤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부탁해서 들어준 것뿐인데 미안해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더 좋은 녀석 같았다.
“나도 수업 때문에 곧 호텔 일 그만두는데. 넌 어느 대학 다녀? 난 한국대.”
“어, 나도 한국대인데!”
“그래? 세상 진짜 좁다……. 나중에 학교에서 마주쳤으면 좋겠다.”
“응, 정말 신기하다. 아, 그래. 혹시 만나면 같이 밥 한번 먹자.”
온종일 호텔 밖에 서 있느라 다리가 퉁퉁 붓고, 고객들의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허리가 뻐근해지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차기주 욕을 하곤 했었는데. 결국 차기주에게 잡혀버렸으니 전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보니,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옅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로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호텔 입구를 벗어나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리*진을 발견하곤 올라탔다.
* * *
차 안은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하는 김수현의 핸드폰 키보드 효과음으로 가득 찼다. 정석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김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땀으로 젖은 두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때, 핸드폰 신호음이 작게 울렸다. 김수현은 정석훈의 뜨거운 시선을 모르는 척, 화면을 확인했다. 자신에게 이상한 부탁을 받은 같은 학부 선배, 최유정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어:)]
함정을 준비한 김수현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턱을 괴고 창문만 내다봤다.
차기주는 학교 가는 김수현에게 정석훈을 붙였다. 김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을 대신해 감시하길 바란 것일 테지.
김수현을 속여서 그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낸 함정 수사 때도 정석훈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차기주가 가장 믿는 부하 직원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정석훈을 회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차기주 정도 되는 사람이 전적으로 믿을 정도이니 그 신뢰를 쌓기 위해 정석훈이 보인 충성심은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러니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생각을 해선 안 됐다.
궁극적인 목표는 피폐물 BL 소설, 『농락』의 스토리를 여주인공 진설해와 차기주가 이어지는 원작 『능력자들』 스토리대로 진행하는 거였다. 둘은 같은 세계관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진설해를 만나 차기주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해야 했다. 그런데 센터 징벌방은 24시간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진설해를 불러들이긴 무리였다. 그러니 무조건 학교에 간다고 징벌방에서 나온 그 틈에, 강의를 빠지고서라도 진설해와 접선해야 했다.
이때 문제는 정석훈이었다. 그가 자신이 수업에 빠진 걸 차기주에게 보고할 테니까. 그런데 그건 반대로 차기주의 눈인 정석훈만 먹통으로 만들면, 자신은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징벌방 밖의 세상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다. 오로지 정석훈만이 차기주의 눈이 되어줄 뿐.
차는 한국대 서울 캠퍼스 교문을 통과하고도 한참 동안 들어갔다. 미술 학관이 캠퍼스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오래된 10층 건물은 정보 통신 센터와 도서관, 학생회관에 둘러싸여 초행인 외부인은 찾기조차 힘든 곳이었다.
그 덕에 운전기사에게 지리를 몇 번이고 설명해줬음에도 기숙사 건물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미술 학관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저지대에 위치해 낮에도 응달지고 음습한 분위기를 뽐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석고 조각을 하면서 날린 분진으로 시야가 뿌예지고 유화물감의 기름내가 코끝을 찔렀다. 야간작업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들은 통로마다 습작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마 1학년들은 사람 같은 몰골을 갖추고 있지, 4학년만 되면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물감과 페인트, 석고 등 다양한 재료와 그 냄새로 절여진 더러운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채 좀비처럼 걸어 다녔다. 청소업체 직원들마저 포기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미술 학관에 들어선 정석훈이 머뭇머뭇 난장판인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미리 연락을 받은 최유정이 김수현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수현아!”
다크서클이 깊게 눌러앉은 눈가는 그녀가 얼마나 피곤한지를 알려주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느라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학교에 남아 작업에 열중했겠지. 많이 피곤할 텐데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부탁에 흔쾌히 따라주는 것이, 김수현으로서는 참 고마웠다.
그녀는 조금 전 차 안에서 김수현이 보낸 메시지대로 말했다.
“이따가 11시 30분에 교양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수줍음을 담은 발끝이 바닥을 콩콩 두드렸다.
“그래요.”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핫팩을 쥐고 있었을 최유정의 손에서 일회용 컵에 든 얼음이 빠르게 녹아 달그락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최유정이 김수현을 만나 설렘을 느낀 나머지 열을 내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포인트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들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가에 꽂았다. 김수현은 에스퍼인 정석훈이라면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그 미묘한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알아챌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정석훈은 감시 대상이 아닌 최유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포착했기 때문일 터였다. 단단하게 팔짱을 낀 그림자가 복도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럼 전 강의가 있어서.”
“응, 응. 들어가. 이따가 봐.”
최유정이 시선을 느꼈는지 불현듯 뒤를 돌아 김수현과 눈을 마주쳤다. 무안함을 무마하고자 지은 억지 미소로 인해 뽀얀 김수현의 얼굴에 인디언 보조개가 패었다. 아마 정석훈의 입장에서는 김수현이 최유정을 보고 환히 미소 지은 것처럼 보였으리라.
예상대로 정석훈은 그 모든 미묘함을 눈에 담았다. 등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척 김수현은 사물함을 열어 드로잉 스케치북과 필통을 챙긴 후, 실습실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이젤 앞에 앉아 드로잉 스케치북을 펼쳤다.
정석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잠시 머뭇거리다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같은 학과 학생들은 그를 힐끔거렸다가 수현의 보디가드겠거니 하며 금세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김수현은 필통을 열어 뾰족하게 깎아둔 4B 연필심이 깨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필통을 들고 오다가 깨진 건지, 끝이 상한 게 있어서 커터칼을 빼 들었다. 그가 열심히 연필심을 갈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의아함이 가득한 김수현의 표정은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윤석이 호텔에서 김수현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지은 표정을 지금은 반대로 김수현이 짓고 있었다.
“너―.”
“안녕.”
어쩜 대사도 똑같을까. 안녕은 무슨, 갑자기 만나서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태평하단 말인가. 이윤석이 그랬듯 김수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이윤석은 방학 동안 헤어졌던 짝꿍을 만난 아이처럼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 너 문신 있었어? 봐도 돼?”
정석훈은 문득 김수현의 말을 듣고 이윤석의 팔을 살폈다. 호텔 유니폼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반소매 티를 입으니까 팔 안쪽으로 문신이 보였다. 김수현은 금세 문신에 정신을 빼앗겨, 재회의 반가움도 뒤로한 채 이윤석의 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딱히 무섭거나 하진 않고 그저 이렇게나 솜씨가 대단한 타투이스트가 있다는 게 신기해 눈길이 갔다. 예술 학도의 본능이랄까.
“응. 근데 나 안 반가워?”
“반가워.”
“엎드려 절 잘 받았습니다.”
이윤석이 유쾌하게 웃고는 문신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팔 안쪽을 보여줬다. 그대로 두 팔을 맞대니 나팔을 불고 있는 일곱 천사 그림이 완성되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김수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이윤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너 원래 이 강의 들었어?”
“응.”
“이상하다.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글쎄. 네가 주위에 너무 무신경한 거 아닐까.”
맞는 말이라 조금 머쓱해진 김수현은 손등으로 턱을 문질렀다. 실습실로 들어온 교수님으로 인해 김수현과 이윤석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 안녕. 주말 잘 지냈어요? 오늘은 데생 삼총사 중 미남 줄리앙을 그려볼게요. 이왕이면 잘생긴 조각 미남을 그리는 게 좋죠?”
학생들 사이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대 입시를 위해 줄리앙, 아그리파, 비너스 조각상을 눈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그렸는데, 교수님이 그걸 또 그리라고 시킨 탓이다. 대학교에 오면 멋진 작품을 그릴 줄 알았건만 교수님들은 1학년에게 ‘기본부터 다시’를 외쳤다.
데생의 기본은 점이었고, 그 점이 모여서 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선들이 겹쳐 명암이 생겨났다. 툭 치면 나올 것 같은 기본 지식을 줄줄이 되뇌던 김수현은 제 스케치북을 넘겨보았다. 매번 기본을 이야기하는 교수님들 덕에 김수현을 비롯한 학생들의 스케치북에는 입시 미술을 할 때처럼 명암 연습을 한 선들과 그 연습을 통해 빛과 어둠을 표현한 사과, 원통, 사각기둥, 삼각뿔 그림이 즐비했다. 오늘은 줄리앙이 새겨질 차례였다. 김수현은 질린 얼굴을 하는 것도 잠시, 금세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4B 연필과 지우개를 필통에 넣었다. 나름 조심하면서 작업했음에도 손날에 흑연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윤석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김수현에게 건넸다.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김수현은 손을 가볍게 닦아낸 뒤 스케치북을 덮었다. 실습을 끝낸 학생들은 실습실을 벗어나기 위해 짐을 챙기느라 북적였다. 강의실을 빠져나온 김수현은 복도에 있는 사물함을 열었다가 다른 사람 걸 잘못 열었나 싶어 이름표를 확인했다.
사물함 문을 붙잡고 꼼짝 안 하는 김수현에게 정석훈은 무슨 문제가 있느냐 질문했다.
“아니에요. 그냥…….”
“잠시 나와주시죠.”
정석훈은 애매한 김수현의 태도에, 제네시스 광신도들이 차기주 이사의 페어를 알아내 폭발물이라도 설치해둔 줄 알았다. 걱정과는 달리 사물함 안에는 전공 서적과 물감, 붓, 물통, 파스텔 같은 그림 도구들만 보였다.
“사실 색연필이 사라져서요.”
“네? 색연필이요?”
미술에 문외한인 정석훈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김수현의 말에 따르자면 이랬다.
먼저, 김수현이 잃어버린 건 무려 여섯 단짜리 상자에 색이 200가지나 되는 전문가용 색연필이었다. 보통 사람은 장미꽃을 보고 단순히 빨간색이라고 표현하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장미가 한 가지 색이 아니란다. 그렇기 때문에 물감의 경우 여러 색을 섞고, 색연필 색도 과할 정도로 욕심내게 된다고 했다. 빨간색만 해도 적색, 홍색, 적토색, 휴색, 갈색, 추향색, 육색, 주색, 담주색, 진홍색, 선홍색, 연지색, 훈색, 장단색, 석간주색, 흑홍색 등으로 나뉘어 있다고……. 정석훈은 김수현 덕분에 빨간 계열이 그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튼 자연에 있는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다 담아낼 순 없지만 미묘한 차이를 둔 색연필을 사용함으로써 그림의 퀄리티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니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김수현에게는 200가지나 되는 여러 색의 색연필을 잃어버린 일이 퍽 큰 사건인 것이다.
괴수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센터 소속 에스퍼, 정석훈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종류의 속상함이었다. 그는 사물함 문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는 김수현을 내버려두고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빠진 거였다.
자신은 김수현의 감시 및 보호 임무를 위해 그의 옆에 있는 거지, 잃어버린 색연필을 찾아주는 보모가 아니었다.
“사물함 열어놓고 뭐 해?”
교양 강의를 같이 가기 위해 찾아온 최유정이 사물함 앞을 떠나지 못하는 김수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색연필이 사라졌어요.”
“뭐? 정말? 어떡해. 속상하겠다.”
매정한 정석훈과 달리 김수현과 꽤 친밀해 보이는 조소과 여대생은 김수현의 속상함에 확실히 공감해줬다.
“괜찮아요. 다시 사면 돼요.”
“다시 사긴. 그거 200만 원 넘는 거 아니야? 학과실에 이야기해서 CCTV 확인하고 범인 잡아야지. 네가 그냥 넘어가면 다른 학생들 것도 훔칠걸? 그러니까 꼭 잡아.”
김수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망설였다. 다음 교양 수업을 들으러 인문사회관까지 걸어가는 데 20분 정도 걸렸다. 그런데 지금 여유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학과 사무실에 들르면 지각할 게 분명했다.
“나 같으면 고민할 시간에 학과 사무실 가겠다.”
최유정이 김수현의 팔을 잡고 끌었다. 주춤거리던 발걸음은 어느새 빨라졌다. 덩달아 정석훈도 걸음을 빨리했다. 사무실에 방문한 그들을 보고 조교가 컴퓨터 의자에서 일어났다.
“수현아, 무슨 일이야.”
“해주야, 네 눈에는 수현이만 보이지? 나도 있거든.”
“하하. 유정이 너도 당연히 반갑지.”
그렇게 말하는 조교의 얼굴 방향은 김수현에게만 향해 있었다. 김수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렬한 관심을 받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조교님, 제가 사물함에 넣어둔 색연필을 도난당해서요. 혹시 CCTV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 학교 규정상 학교 폭력 신고 없으면 확인 못 하는데, 어쩌지. 미안해, 수현아. 도움 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최유정이 그것 좀 확인하면 어떠냐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김수현은 교양 강의를 지각하면서까지 저와 함께 와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다정한 눈으로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최유정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선배. 저 때문에 괜히 헛걸음이나 하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당연히 같이 와야지. 수현이 너야말로 너무 속상하겠다. 도둑질당한 게 아니라 누가 빌려 간 거면 좋을 텐데.”
예상대로 그들은 강의에 늦었다. 미안함을 느낀 김수현은 강의가 끝나고 그녀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조용히 김수현을 따르던 정석훈은 이 사실을 이사님께 보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안 그래도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센터에 있는 이사님이 서울로 달려온다고 해도 이미 둘의 식사는 끝나 있을 터였다. 분란을 만들 바에야 차라리 보고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김수현에 대한 약간의 호감이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정석훈은 진심으로 어린 나이에 이사님에게 붙잡힌 김수현이 불쌍했다. 센터에는 가이드로 등록되었지만 김수현은 틀림없는 에스퍼였다.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사님의 페어가 될 일도 없는 존재였다.
김수현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또한 어린 김수현이 불쌍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석훈의 내면에 작은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뿌리 깊게 내린 이사님에 대한 충성심을 흔들 만큼 강력한 폭풍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대학교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이 김수현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인문사회관 건물을 벗어난 김수현은 뒤돌아서 정석훈을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밖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데…… 차를 빌릴 수 있을까요.”
“예, 대기하겠습니다.”
정석훈은 학교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운전기사에게 연락했다. 매끄러운 검은 자동차가 그들 앞에 소리 없이 멈춰 섰다. 차를 본 최유정은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비명을 질렀다.
“꺄! 수현아, 나 태어나서 리*진 처음 타봐.”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김수현은 최유정이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운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선배, 뭐 먹고 싶어요? 제가 다 사드릴게요.”
“정말? 그럼 나 W 호텔에서 밥 얻어먹어도 돼? 사실…… 오늘 내 생일이라 점심에 친구들이랑 가서 밥 먹으려고 예약해뒀거든.”
“네? 정말요? 그럼 저랑은 나중에 식사해요.”
김수현은 당장이라도 차를 멈추고 내릴 기세였다. 최유정은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아니야. 친구들은 일이 생겨서 어차피 못 온다고 했어. 그래서 그냥 예약 취소하려고 했는데, 마침 네가 밥 먹자고 해서. 수현이 네가 함께 가주면 기쁠 것 같아. 그래 줄래?”
정석훈은 룸미러로 여학생의 눈빛을 봤다. 그녀의 눈은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라고, 이 바보야!’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운 채 흘러내린 단발을 귓가에 꽂았다. 습관에 불과할 테지만 그는 그 행동이 몹시 거슬렸다.
“당연히 같이 가야죠. 식사는 제가 살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선배.”
호텔에 도착한 차는 VIP 주차장에 멈춰 섰다. 셋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서 있던 금빛 명찰을 단 직원이 그들에게 예약 여부를 물었다.
“네, 최유정으로 2시에 예약했어요.”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또각또각 바닥을 딛는 직원의 구두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밟은 조명 아래에서 대리석 바닥과 하얀 식탁보가 눈부시게 빛났다.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림색 수국과 연분홍색 장미를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최유정이 마주 앉았다. 정석훈은 그 옆의 다른 테이블을 차지했다. 어색한 남녀 사이의 공기를 드뷔시의 「달빛」이 잔잔하게 채웠다.
직원이 두 사람에게 메뉴판을 나눠줬다. 정석훈은 김수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김수현은 역시 재벌이라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제일 비싼 A 코스 두 개를 주문하는 게 어떻겠냐고 최유정에게 제안했다. 이런 곳에 많이 와본 것처럼 주문하는 데 있어서 막힘이 없고 유려했다.
두 사람의 식탁에는 식전 빵으로 바게트와 버터계의 명품이라는 라꽁*에뜨 버터가 나왔다. 별것도 없는데 최유정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만. 나 사진 좀 찍고.”
김수현은 그녀를 기다렸다가 치즈 스틱처럼 길쭉한 버터를 잘라 빵과 함께 먹었다. 정석훈은 김수현의 작은 손짓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두 눈에 담았다. 그런데 주문을 하지 않은 정석훈의 테이블로도 같은 메뉴가 서빙되었다. 정석훈은 의아한 얼굴로 직원을 올려다봤다.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왼편에 앉아 계신 고객님이 주문하셨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정석훈은 직원의 말에 김수현을 돌아봤다. 그가 “식사는 하셔야죠”라며 웃었다. 그 미소에, 정석훈은 마치 물침대를 밟고 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다정함에 곧은 마음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식전 빵 다음으로 나온 해산물 샐러드까지 먹자 제대로 입맛이 돌았다. 상큼 달콤한 맛에, 정석훈은 잠시 감시도 보호도 전부 잊은 채 식사에 집중했다. 고객이 식사하는 시간을 계산한 건지, 다음 메뉴가 조금도 늦거나 빠르지 않게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식용 꽃으로 장식한 카르파치오부터 부드러운 비프웰링턴까지. 눈과 혀를 즐겁게 하는 음식들이 쉴 새 없이 테이블에 놓였다가 떠나갔다.
정석훈 또한 이런 곳에 오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굳이 호텔을 찾아 식사하는 수고를 들이지는 않는 편이었다. 몰랐는데, 음식과 서비스는 비싼 만큼 그 값을 하는 모양이었다. 새삼 돈이 참 좋구나 싶었다.
식사 내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는 최유정과 음식이 나올 때마다 하나하나 설명하려 드는 직원 때문에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근사한 식사를 대접한 김수현에게……. 정석훈은 김수현을 힐끔 훔쳐봤다. 김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이 그의 임무이건만, 왜 굳이 은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수현아, 우리 여기서 기념사진 찍자.”
“네. 같이 찍어요.”
최유정이 전면 유리창 너머 복잡한 서울을 배경으로 김수현과 사진을 촬영했다. 김수현은 사진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잘 나왔네요.”
“응. 나 이거 친구들한테 자랑해도 돼?”
“그건 좀……. 죄송해요, 선배.”
김수현은 마주 보며 대화하느라 앞으로 숙였던 몸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둔 김수현을 본 최유정이 섭섭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네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유명한 스타와 사귀고 있으나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해 숨어 지내는 연인처럼 처량해졌다. 정석훈은 발걸음이 무거워진 최유정과 미안한 듯 곤란한 얼굴을 한 김수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알다가도 모를 것 같았다.
대학교 주차장에 고급 세단이 세워졌다. 뒷좌석 문을 열고 최유정이 먼저 내렸다.
“오늘 고마웠어.”
“아니에요. 선배, 생일 축하해요.”
김수현이 그 뒤를 이어서 뒷좌석에서 나왔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이 리*진에 한 번, 그다음으로 최유정에게 한 번, 마지막으로는 수현에게로 날아들었다.
김수현은 따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미술 학관으로 들어갔다. 복도에서 사물함을 열어 교재를 꺼내려는데 사라졌던 색연필이 돌아와 있었다. 약속한 그대로였다.
그는 사물함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생각해둔 대사를 외웠다.
“하, 뭐야? 분명 없었는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도난당했던 색연필이 돌아왔다는 것을 정석훈에게 인지시킬 만한 말이었다. 수현은 색연필 도난 사건으로 인해 최유정에게 빚을 졌다. 그리고 수현이 식사를 제안하자 최유정은 기다렸다는 듯 수현을 이끌었다. 생일이라며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다 못 나와 자신에게 밥을 얻어먹은 건 누가 봐도 억지였다. 정석훈은 최유정이 김수현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모든 것을 꾸몄다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차기주에게 보고하기에는 애매한 단계일 터였다. 그래서 수현은 정석훈이 이 시기에 차기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게 만들 생각이었다.
차기주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구도 아닌 차기주의 심복 정석훈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차기주에게 맞춰주는 척 순순하게 굴면 정석훈은 차기주가 김수현을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그게 집착으로부터 비롯된 작위적인 다정함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김수현은 여러 심리 트릭을 사용해 정석훈을 착각에 빠뜨릴 예정이었다. 차기주를 좋아하는 듯 굴어놓고서 학교에서는 다른 여자를 만나는 척하면, 과연 정석훈은 차기주에게 수현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걸 보고할 수 있을까? 그 진실을 말하는 순간 주인의 행복이 깨질지 모르는데?
충성심 깊은 그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김수현은 차기주를 계속 사랑하는 척해준다는 조건으로 정석훈을 부하처럼 부리면 된다.
만일 정석훈이 차기주에게 자신의 양다리를 고하겠다고 나와도 상관없었다. 수현은 그럼 이렇게 대응할 생각이다.
‘이 모든 건 제가 석훈 씨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꾸민 판이었어요.’
오히려 수현 쪽에서 진실을 밝히는 거다. 자신이 보기에 정석훈의 약점은 너무나 명확하다.
‘유정 선배에게 보낸 메시지를 이사님께 보여주면 어떨 것 같아요? 자기가 석훈 씨를 낚기 위한, 한낱 수단으로 쓰인 걸 알고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차기주가 날 사랑하는 거, 석훈 씨도 잘 알잖아요. 석훈 씨가 나에게 협조해주면 계속 이사님을 사랑하는 척할게요. 석훈 씨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오직 침묵뿐이에요. 앞으로 내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든 이사님께 보고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그 대단한 주인님이 슬퍼하는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수현이 정석훈을 위해 마련한 함정의 정체는 그의 충성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와도 같을 테니까. 그가 자신에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감금된 상황에서는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할 거 아닌가.
―징징징.
핸드폰 진동이 사념을 깨웠다. 카드 사용 알림을 확인했는지 김정석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수현은 애써 모르는 척 통화가 끊어지길 기다렸으나 진동이 계속 울렸다. 전화를 안 받고 버틴다고 순순히 포기할 놈이 아니어서 초록색 통화 버튼을 스와이프했다.
―걸레 새끼야, 집에도 안 들어오면서 대낮부터 호텔에서 밥을 처먹냐? 왜? 차 이사 그 거지새끼가 너랑 떡쳐놓고 밥은 네 돈으로 내래?
입에 걸레를 물었나. 김정석은 정말이지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 하는 개새끼였다. 센터에서 집으로 연락했는지 형은 자신이 차기주의 페어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을 가이드라 여기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수현이 정말 가이드였으면 마음의 상처가 될 만한 비난이었다. 자기 화를 참지 못했는지 물건을 때려 부수는 소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형, 술 마셨어요?”
―씨발, 마셨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걸레 새끼야.
“술 깨고 다시 연락하세요. 그런다고 형이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좆 같은 새끼. 더러운 남창 새끼. 알파면서 알파한테 다리나 벌리고, 그럴 거면…….
김수현은 더 이상 들어주지 않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귀에 물을 넣어도 중이염에 안 걸린다는 보장만 있으면, 당장 물로 형이 뱉어낸 말들을 씻어냈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김수현은 허구한 날 욕이나 먹는 제 처지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강의를 들으러 갔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정석훈은 자신을 센터 징벌방에 데려다 놓았다. 김수현은 문을 잠그고 가려는 그에게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게 성립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최유정을 끌어들여서 한 연극은 말짱 도루묵이었다.
“석훈 씨, 혹시 석훈 씨가 화장실에 카메라 설치했어요?”
“죄송합니다.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두라는 이사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화장실 감시 카메라에 ‘KSHobservation3’이라는 아주 정직한 이름을 붙인 감시자의 정체가 밝혀졌다. 우직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름이다 싶었는데, 역시 정석훈이 맞았다.
“그럼 여기 있는 감시 카메라도 전부 석훈 씨가 관리 중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확인 완료. 예상대로 이곳의 카메라를 관리하는 것도 정석훈이 맞았다.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가 의심해선 안 됐다. 김수현은 적당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저 옷 갈아입을 때 보지 말아주세요.”
“예,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감시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건 알지만, 딱히 눈앞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번번이 화장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귀찮았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행거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이때를 노리고 그런 건 아니지만 그간 불편한 티를 팍팍 내서인지, 정석훈은 김수현의 말에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징벌방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김수현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정석훈이 징벌방에 있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므로 이제부터는 보란 듯이 차기주와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기만 하면 됐다. 그가 알아서 착각하고 오해할 테니까.
일이 너무 쉽게 풀려 싱거울 정도였다. 바글바글 물 끓는 소리에 싱크대 찬장을 뒤졌다. 머그잔에 인스턴트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따뜻한 잔을 손으로 감싼 채 호호 불었다. 뜨거운 김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밖에서 철제 계단을 오르는 구두 소리가 들린다. 선배가 저를 보러올 때면 저런 소리가 났었는데.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그는 선배가 아니다. 수현은 성급하게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가 입천장을 데었다. 아, 젠장. 동요하지 마.
어항에 갇힌 금붕어라도 된 것처럼 선배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흐려져 차기주와 겹쳐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선배에게서 풍겼던 살 내음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스러운 냄새였다. 자신은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등에 뺨을 비비곤 했었다. 선배는 그것이 섬유 유연제 냄새일 거라고 했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게 황홀하고 포근하고 멋진 향이 겨우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싸구려 따위일 리 없지 않은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굳게 잠긴 문을 쳐다봤다.
“수현아, 들어가도 되니?”
시큰거리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공포인지 설렘인지 모르는 그 감정을 잠시 치워두려 애썼다.
“들어오세요.”
차기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수현은 신발장에 정갈하게 벗어둔 구두 한 켤레와 아무렇게나 벗어둔 운동화를 눈에 담았다.
너무나 다른 두 알파다. 어떻게 해야 이렇게 다른 우리가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차기주와 침대에서 뒹구는 거겠지만 몸을 헤프게 굴리면서까지 계획을 실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장 피하고자 하는 결말이 차기주와의 섹스인데, 단순히 여자주인공과의 만날 계획을 세우겠다며 접점을 만들기 위해 그 짓을 하면 얼간이밖에 더 되겠는가.
“우동이랑 김밥 포장해왔어. 먹어.”
“저 방금 입천장 데었어요.”
또 단식투쟁을 하는 건가 싶어 의심으로 가득 찼던 눈이 식탁 위에 놓인 뜨거운 커피를 발견하고는 금세 풀어졌다. 차기주가 자신의 턱을 잡고 양 볼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수현은 그게 아프면서 은근 기분이 나빠 눈썹을 찡그렸다.
“입 벌려봐. 봐줄게.”
“됐어요. 뭘 그런 걸 봐요.”
“벌려.”
“……씨, 이 아저씨가 미쳤나.”
“벌리라고.”
깊은 눈동자가 김수현의 눈을 들여다봤다. 내리깔린 시선이 강요를 담아 입술을 응시했다. 하얀 손이 김수현의 뺨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딱딱한 엄지가 입술을 가로로 긋다가 아랫입술 가운데를 내리눌렀다.
강압적인 태도에 못 이겨 입을 살짝 벌렸다.
“더.”
수현은 마지못해 입을 ‘아’ 하고 크게 벌렸다. 마치 치과 진료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 안을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그가 김수현을 놓아줬다.
“얼음 물고 있어. 허물 벗겨질 것 같으니까 당분간 뜨거운 거랑 매운 음식 먹지 말고.”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야단법석을 부려요.”
분명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차기주는 대꾸도 하지 않고 냉동실 문을 열어 투명한 얼음을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아이에게 사탕을 주듯 김수현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으, 차가워.”
수현은 얼음을 물고 있는 뺨을 동그랗게 부풀린 채 차기주가 가져온 종이 가방을 뒤졌다. 따뜻한 우동과 김밥 다섯 줄이 들어 있었다. 애매하게 다섯 줄일 것은 또 뭐람. 반줄은 나눠 먹자는 건가. 애초에 왜 이렇게 많이 싸 온 거지.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을 후룩 들이켜며 우동 포장을 뜯는데, 그가 김밥만 먹으라며 냉큼 포장 용기를 빼앗아 갔다.
“뜨거운 거 먹지 말라니까.”
사람을 가둬놓은 주제에 이렇게 잔소리까지 해대다니. 역시나 자신이 악감정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남자다. 입 안에 든 얼음을 어금니로 아그작 깨트렸다.
차기주가 하는 꼴을 보니 정석훈을 속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주 이 도움 안 되는 자식. 속으로 차기주 욕을 실컷 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차기주가 핸드폰에 대고 차가운 메밀국수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설마 나 입천장 식히라고 찬 음식 준비시킨 거예요?”
“그거 아니면 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하겠어.”
“이사님, 생각보다 섬세하시네요.”
“너한테만 그런 거야. 난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안 하거든.”
설마 지금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런다고 돌려서 변명한 거야? 작업 멘트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자신이 웃는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차기주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주 좀 웃어. 보기 좋다.”
“갇혀 지내는데 웃게 생겼어요?”
“그래도 학교는 보내주잖아.”
이상한 소리를 태연하게 하니까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아, 맞네’ 하고 수긍한 자신까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이딩을 명목으로 자신을 감금해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같이 밥을 먹으려 드는 차기주도 미친놈이고, 그 미친놈에게서 벗어나겠다고 별 짓거리를 다 해가며 진설해와 접촉하려는 자신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한참 웃다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차기주가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모양새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파르르 떨렸다.
“왜 그래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손으로 뺨을 더듬거렸다. 차기주가 얼굴을 가린 자신의 손을 잡고 떼어냈다.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손이 붙들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절로 긴장시키는 눈빛에,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젖이 아래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차기주가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난생처음 동물원에 간 아이 같은 눈이었다. 엄청난 발견에 호기심이 가득해진, 그런 눈 말이다. 차기주는 한참 동안이나 수현을 쳐다봤다. 똑똑, 정석훈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차기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사님, 정석훈입니다.”
“아. 그래, 들어와.”
수현의 손목을 놓아주는 그의 손가락 끝이 아쉽다는 듯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정석훈이 식탁에 종이 가방을 놔두며 차기주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다 처음 보는 이사님의 모습에 고장 난 로봇처럼 멈춰버렸다.
“뭐 해, 안 가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수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정석훈은 차기주가 자신을 과보호한다고 여길 터였다. 차기주가 자신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거고. 수현조차 차기주가 왜 그런 얼굴로 자신을 보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차가운 메밀국수를 자신의 앞에 놓아준 차기주가 나무젓가락 포장지를 뜯어서 국수 옆에 놔줬다.
수현과 마주 앉은 차기주는 식사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지, 먹방 시청자처럼 대놓고 턱을 괸 채 수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현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은박지가 아닌 고급스러운 찬합에 든 김밥을 집어서 입에 밀어 넣었다.
“김밥이랑 우동 좋아하는구나.”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다정한 선배의 목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자꾸만 차기주에게서 선배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니야, 이 사람은 아니라고. 고작 좋아하는 메뉴 두 번 가져온 걸로 망상하지 마.
“천천히 먹어.”
차기주의 엄지가 자신의 입가에 묻은 밥알을 떼어내 가져갔다. 꼭 자신을 감금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정한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하루를 묻는다.
“오늘 학교에서는 뭐 했어?”
“뭐 하긴요. 강의 들었지.”
“친구는 많아? 하긴 넌 예뻐서 가만히 있어도 다들 친해지고 싶어 하겠다.”
인기 많다고 착각해줘서 고맙긴 한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는 건 맘에 안 들었다. 차기주의 상체가 어느새 아일랜드 식탁의 절반이나 넘어와 있었다. 수현은 재빨리 의자를 뒤로 밀어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차기주가 보이는 집착과 관심을 애정인 척, 정석훈을 속이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만일 『농락』을 읽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 다정함을 오해했으리라.
수현은 김밥 두 줄과 메밀국수까지 먹어서 약간 더부룩한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아놓고 깔끔하게 쓰레기를 치우는 차기주의 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무는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하는 화장실 캠페인을 떠오르게 했다.
“이만 쉬어. 오늘 처음 헬기 타고 등교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검은 양말을 신은 발이 윤택이 흐르는 구두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쓰레기를 챙겨서 징벌방을 나섰다.
김수현은 닫힌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멍하니 뉴스를 시청하다 금세 흥미를 잃고 핸드폰을 찾았다. 강의를 듣기 위해 무음으로 돌려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50통이나 와 있었다. 김정석, 이 미친 또라이 새끼.
자신이 무슨 일이냐고 먼저 전화하면 괜히 먹잇감만 던져 주는 꼴이고, 그렇다고 수신 차단을 하자니 여러 번호를 사용해 전화 테러를 가할 게 분명했다.
수현은 조금만 더 모르는 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0시쯤 되어서야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핸드폰을 보니 그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125통으로 늘어 있었다. 이쯤에서 전화를 받아야겠다. 안 그러면 내일 아침 핸드폰 알람까지 묻혀버릴 터였다.
―야, 씹 걸레 새끼야, 내 전화를 씹어? 뒈지고 싶냐? 차기주 좆 받아먹더니 간덩이가 부어서 아주 정신이 나갔어? 존나 좆 맛에 빠져서 여태까지 떡 치다가 받는 거지, 어!
“형, 미친 소리 좀 그만해요. 자꾸 전화해서 이렇게 쌍욕을 하는데, 제가 전화를 받고 싶겠어요? 그리고 저 이사님하고 안 자요.”
―좆 빨던 주둥이라고 구라 치긴. 네가 그런다고 헌 구멍이 새 구멍 되는 줄 알아?
“제 구멍 사정에 관심 두지 마시고요. 도대체 왜 자꾸 전화하는 거예요. 제가 호텔에서 밥 한 끼 사 먹은 게 그렇게 불만이세요? 그럼 아예 제가 아버지 돈 못 쓰게 절 호적에서 파버리시든가요.”
미친개처럼 왈왈 짖어대던 형이 조용해졌다. 이제 진정한 건가 싶어 맘을 놓으려던 찰나,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잤지? 차기주랑 잤지! 씹새끼. 좆 같은 새끼. 이 걸레 새끼! 네 구멍에 칼을 쑤셔 박아서 속을 다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도대체 또 뭐에 발작 버튼이 눌렸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통화를 끊어버리자 바로 진동이 울렸다.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버려두면 어떻게든 센터까지 쫓아올 놈이라 결국 못 이기는 척 받았다. 감금 중이라 좋은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김정석과 같은 집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안 잤지? 안 잤다며. 차기주랑 안 잤지?
“네, 안 잤어요.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왜 자꾸 물어요.”
이번에는 형이 먼저 통화를 끊어버렸다.
두 달 전만 해도 자신은 『농락』에 빙의했는지, 『능력자들』에 빙의했는지도 모른 채 ‘김수현’ 역할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다. 김정석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구석이 많은 놈이었다.
회사에 있어야 할 사람이 학교에서 돌아온 자신을 기다렸다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형, 왜 그러세요. 어디 가요?”
“잔말 말고 따라와.”
납치범 같은 대사였지만 김수현의 가족이니, 설마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겠나 싶어 그대로 끌려갔다. 김정석이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 조수석에 자신을 밀어 넣고는 혹여 도망갈세라 얼른 운전석에 타 차를 출발시켰다. 무언가에 잔뜩 들뜬 어깨가 운전하는 내내 들썩거렸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저렇게 기뻐 보이는데 왜 그런 의미 없는 거짓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정석은 다 큰 어른인 주제에 마치 그동안 가지고 싶어 했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닥치고 있어. 설마 내가 널 섬에 팔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한참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랬더니 건물이 드문드문해지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이 나타났다. 차는 속도를 낮추고 분홍색 꽃길을 천천히 지나쳤다. 창문을 내리고 벚꽃을 보는 김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김정석은 수현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느라 운전 중인데도 정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김정석의 시선을 느낀 수현이 급히 앞을 돌아봤다. 다행히 교통 정체로 멈춰 있었으니 망정이지 달리던 중이었으면 사고가 날 뻔했다.
“형, 형. 앞 좀 보세요.”
“씨발. 누가 너 쳐다봤다고 그래.”
날 쳐다봤다고는 안 했는데. 수현은 욕을 안 쓰면 대화가 불가능한 10대 청소년처럼 구는 김정석을 잘 달랬다. 불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사고를 당해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과천 포니랜드였다.
도박에 문외한인 자신은 평일에 경마를 보러 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형과 자신은 경마에 돈을 수십억 처박은 도박꾼들이나 들어갈 수 있다는 클럽 하우스에서 경기를 직관하기로 했다.
클럽 하우스는 유리 벽 너머로 경기장 코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지상층에 위치해 있었다. 사무실처럼 책상을 갖춘 건 물론이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대화할 수 있도록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경주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호텔 직원처럼 정장을 갖춰 입은 경마장 직원이 샴페인과 카나페를 가져다줬다. 수현은 형이 왜 자신을 이런 곳에 끌고 왔나 알 수 없어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혹시 자신이 경마에 푹 빠져서 인생을 망치길 바라는 걸까?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클럽 하우스 안에 비치된 현금인출기가 눈에 밟혔다.
“야, 내가 오천만 원 빌려줄 테니까 말 골라서 돈 걸어.”
“싫어요.”
“경마장에 놀러 왔으면 돈을 써야 할 거 아니야. 오천만 원이 오억 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형이 자신의 욕심을 부추기기 위해 재킷에서 수표책을 꺼내 들었다.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반대쪽 무릎에 올린 채 달달 떠는 그는 수현이 도박에 손을 대지 않자 초조해 보였다. 그렇지만 수현은 경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지라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굳이 돈을 걸고 싶지 않았다.
“씨발, 왜 안 하겠다는 거야. 경마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경기 시작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형의 다리 떠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살수차가 나타나 경기장에 물을 뿌리고, 그레이더가 흙을 평평하게 다졌다. 곧이어 특수촬영물에서나 볼 법한 형광색이 들어간 화려한 옷을 입은 기수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말이 빨리 달리는 데에 부담이 없도록 체중 조절을 하는지, 하나같이 마르고 왜소한 체구였다. 번호를 붙여놓은 게이트 안에서 기수들은 출발을 기다렸다.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기수와 말을 빠르게 소개하는 방송이 묻혀, 수현은 미처 듣지 못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이 울리자 눈을 한 번 깜빡이려는 찰나에 기수들이 달려 나갔다. 물에 젖은 흙이 덩어리째 공중으로 떴다가 가라앉고, 스탠딩 객석이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죄다 일어난 관중들은 기수와 말을 향해 고함과 욕설을 질러댔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5번 말이 앞서 나갔다.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물을 뿌려놓은 흙을 벅벅 거칠게 부수며 코스를 가로지르는 말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손에 마권을 진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말 번호를 외쳤다. 클럽 하우스까지 그들의 열기가 전해져 왔다. 피가 저절로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경마를 잘 모르는 김수현조차 어느새 5번 말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승선에 가까워지자 3번 말이 갑자기 뛰어나와 결국 5번 말을 제치고 1등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절규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마시던 맥주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수현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역시 돈을 걸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야. 김수현.”
“네?”
유리 벽에 바짝 달라붙어서 경마를 구경하던 수현에게 형이 언제 초조하게 굴었냐는 듯, 되레 평소보다도 멀쩡한 얼굴로 질문했다.
“너 내가 죽도록 싫지?”
죽도록 싫지는 않고 엄청 싫기는 했다. 수현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김정석이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일어나.”
그는 마권을 산 것도 아니고, 경기를 제대로 구경한 것도 아닌데 볼일 다 봤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역시 그는 처음부터 경기 따위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경마에 중독시켜 돈의 노예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뜬금없이 자신을 끌고 와 이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김정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동차 전면 창에 갇힌 맑고 푸른 하늘과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벚꽃은 여전히 캔버스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운전을 하기 위해 앞을 주시하고 있는 형의 얼굴은 마치 장례식장의 상주처럼 지치고 초라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누나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형을 보자마자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너 수현이 데려가서 뭐 했어? 뭐 했냐고! 미친 새끼. 개새끼. 죽어! 죽으라고!”
“아, 씨발.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형이 누나를 밀쳐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빨갛게 부은 뺨을 문지르며 그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 아파. 술이나 마실래.”
그는 고용인을 불러서 양주를 가져오게 했다. 고용인은 트레이에 아이스 버킷과 얼음용 집게, 유리잔과 함께 양주병을 들고 형을 쫓아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수현이 고용인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 동안 누나는 연신 막냇동생의 몸을 만지며 확인했다.
“정말 무슨 일 없었지?”
“나 안 맞았어. 그냥 경마장 놀러 갔다가 왔어.”
“……그래, 수현아. 그런데 앞으로는 정석이랑 어울리지 마.”
누나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 깊이 그렇게 마음먹은 수현이었다. 누나는 씻고 밥 먹자며 자신의 등을 쓸어줬다. 형은 그날 술에 잔뜩 취해서 한밤중에 자신의 방문을 딱따구리처럼 머리통으로 쿵 쿵 박아댔다.
“수현아. 수현아. 김수현.”
물귀신이 강으로 끌고 가기 위해 희생자를 부르듯 끈질기고 애달픈 목소리였다.
―빠빠빠 빠빠 빠 빠빠빠빠 굿모닝. 윽, 오랜만에 형한테 욕을 실컷 듣고 잤더니 예전 꿈을 꾼 것 같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팔등으로 가렸다. 좀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알람을 끄지 않아서 계속 핸드폰이 경쾌하게 굿모닝을 외쳤다. 팔을 내리고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알람을 끄며 확인하니 새벽 사이에 문자가 와 있었다. 형이 보낸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발신 번호가 ‘1004’였다.
스팸 문자 같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리보기에 뜬 내용 때문에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김수현 씨. 저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제가 메시아로서 김수현 씨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네요. 김수현 씨는 스스로를 김수현이 아니라고 믿을지도 모르겠어요. 또다시 일종의 빙의, 뭐 그런 걸로 여기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당신은 빙의한 게 아니라 회귀를 한 거예요. 혹시 다시 만나야 할 존재가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그 또한 김수현 씨처럼 살아났을 겁니다.
회귀의 증거 그 첫 번째로, 일주일 뒤 김수현 씨의 형인 김정석 씨가 자살합니다.
예전의 당신은 그를 구하지 않을 걸 후회했는데, 과연 이번엔 어떨까요?]
“뭐야, 이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메시아는 차기주의 적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당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런 문자를 보낸단 말인가. 이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찜찜했다. 내가 빙의가 아닌 회귀를 했고 곧 형이 죽는다고?
일단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걸어주십시오.
이 번호가 진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조작된 번호였다. 혹시 몰라 핸드폰 알람을 일주일 뒤에 울리도록 설정하고, 자칭 메시아에게 온 문자는 삭제했다. 차기주가 자신이 이런 문자를 받은 걸 알면 학교조차 보내지 않고 핸드폰마저 빼앗을 게 뻔했다.
메시아가 보낸 문자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는 메시아가 차기주의 페어인 자신을 찾아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차기주에게서 벗어나 선배를 찾아 나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빙의가 아닌 회귀를 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선배가 어딘가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선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자신이 차기주의 곁을 떠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겠지.
어째서 회귀 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신이 회귀 후에 부잣집 아들로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문자가 사실이라면, 일단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선배 또한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 있다는 뜻일 테니까.
예로부터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다. 메시아로서는 차기주에게 페어가 없어야 하고, 자신은 차기주로부터 벗어나야 하니 우린 한시적인 동료인 셈인 것이다. 만약 문자를 보낸 것이 진짜 메시아라면, 위험한 인물이긴 하지만 같은 걸 바라고 있는 이상 한번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죽일 마음은 없으니 먼저 연락한 것이겠지.
선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면서 눌린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겼다. 차기주가 아침밥을 차려주러 올 시간이었다. 그가 언제 오는지는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마침 카랑카랑한 소리가 울렸다. 잠깐의 정적이 맴돈 후,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수현아, 들어가도 되니?”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린다. 신이 자로 잰 듯 완벽하게 설계해놓은 아름다운 알파가 들어온다.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조명처럼 차기주를 비춘다. 선배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영혼은 그를 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친다.
선배의 목덜미를 빨아 이 그리움을 갈급히 채우고,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채 흥분을 가라앉혀야 하건만 자꾸 자신의 시야에 차기주가 걸어 들어온다. 그의 존재가 선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자꾸만 침범한다.
이것은 차기주가 너무나 완벽한 존재라 일어난 비극이었다. 선배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면서 자신의 첫사랑 또한 이런 탈인간급 미남일 거란 자신의 콩깍지가 오작동을 일으킨 탓이다.
차기주는 선배라고 하기에는 자신과의 나이 차이가 많았다. 메시아의 문자처럼 정말 자신이 회귀한 것이라면 차기주는 절대 선배가 될 수 없었다. 차기주는…… 선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