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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회귀 후(1) (1/17)

회귀 후(1)

건물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 객실에선 밤이 되면 도시가 선사하는 근사한 마천루가 보인다.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호텔을 상징하는 이곳,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물소리가 들린다. 가이드가 샤워를 하고 있다. 넥타이가 점점 목을 죄어오는 듯한 환상통에 남자는 매듭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끌어내렸다.

어차피 소용 없는 짓이다. 그에게는 그 어떠한 가이딩도 통하지 않고, 타이머가 고장 난 폭탄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가이드가 샤워를 마쳤는지 더 이상 물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둠이 객실 내 소음을 집어삼킨 것처럼 적막하다. 그럼에도 그 고요함 속에서 오직 남자만이 록 페스티벌에 참석한 관중처럼 엄청난 자극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자는 피부를 감싼 서늘한 밤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바닷물에 고개를 처박은 것처럼 숨을 쉬어도 숨을 쉰 것 같지가 않다. 언젠가 그는 미쳐서 돌아버리든지, 아님 미쳐서 세상을 멸망시키든지 둘 중 하나는 꼭 해버리고야 말 것이다.

털이 고르고 촘촘한 진회색 카펫에 발이 파묻히는 소리가 남자의 사색을 깨트렸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조차 남자에게는 마치 지구 멸망을 앞둔 공룡의 발악처럼 크게 들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사님.”

남자를 둘러싼 모든 자극과 예민한 감각이 소멸한다.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공격하는 듯 날뛰었던 에스퍼 능력이 일순 잠잠해졌다. 오늘 처음 만난 가이드의 효과인가 싶어 남자는 반색한다. 희망으로 젖은 남자의 눈은 어찌 보면 눈물이 차오른 듯 반짝거렸다.

드디어 자신의 가이드를 만난 것일까.

“룸서비스 왔습니다.”

간만에 느끼는 가이딩의 감각에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트롤리를 끌고 호텔리어가 펜트하우스로 들어섰다. 분명 들어오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코르크 마개를 딴 호텔리어는 와인 병에 에어레이터(*와인 입구에 끼우는 도구. 와인이 공기와 만나게 되어서 맛이 좋아진다)를 끼웠다. 와인 잔에 맑은 루비 빛 와인이 채워진다.

남자는 호텔리어의 움직임을 단 한 컷조차 놓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가이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긴 남자에게 다가와 뺨을 쓰다듬었다.

“이사님, 제 가이딩이 마음에 드시나요? 벌써 혈색이 좋아지셨어요.”

이게 이 가이드의 가이딩 덕분이었다고? 남자의 고개는 호텔리어에게서 가이드로 향했다. 자꾸만 그의 신경은 호텔리어에게 곤두서는데 정답은 여기란다.

그는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가이드를 보다가 혀로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저 호텔리어를 확인해야 했다. 어쩌면 센터에 등록되지 않은 무자각 가이드일지도 몰랐다.

에스퍼와 달리 가이드들은 특별한 힘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 발현하면 본인이 가이드인 줄 모른 채 살아가곤 했다. 하여 이능력 센터(Special Police), 소위 SP는 전 국민을 상대로 무조건 1년에 한 번 가이드 검사를 하라 요구했고, 정부는 1년은 너무 과하다며 4년 주기로 전 국민이 가이드 검사를 받도록 법을 제정했다.

어쩌면 저 호텔리어는 지독한 행운아고, 남자는 지랄맞은 불운아라 시기가 엇갈려 센터에서 만나지 못한 건지도 몰랐다.

남자는 손을 뻗어서 호텔리어의 손목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호텔리어가 잽싸게 손을 피했다. SS급 에스퍼의 움직임을 피할 만큼 재빠르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호텔리어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그의 동체 시력과 움직임에 에러가 생긴 것처럼.

“그럼 쉬세요.”

호텔리어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남자가 다시 한번 호텔리어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그가 너무 빠르게 객실을 나가버려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에 빈손만 쥐었다가 펼쳤다를 반복했다. 가이드는 외부인이 사라지자 샤워 가운을 벗고 남자를 잡아끌었다.

“어서 섹스 가이딩을 시작하죠.”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던 남자는 침대 위로 넘어졌다. 남자의 시선은 가이드의 가슴쯤에 맺혔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사라진 호텔리어뿐이었다.

‘정말 이 가이드가 내 가이드인 걸까?’

몸에 일어난 변화만큼 확실한 게 없는데도 남자는 단정할 수 없었다.

* * *

그야 당연했다. 남자가 가이드의 정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차기주가 에스퍼 능력의 과부화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눈앞에 있는 가이드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차기주는 일시적으로 능력을 완벽하게 봉인당해 평범한 사람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차기주의 능력을 봉인한 존재는 방금 객실을 나선 김수현이었다.

김수현은 무효화 능력을 가진 S급 에스퍼이자 PL 그룹의 셋째 아들이었다. 다정한 성격과 청순하면서도 잘생긴 외모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캐릭터다. 그리고 자신은 그 김수현에게 빙의한 전직 독자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김수현이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서브남으로 나오는 원작 로맨스 소설 『능력자들』이 아닌, 『능력자들』의 2차 창작 BL 소설 『농락』에 빙의했다는 점이다.

BL 소설 『농락』의 내용은 원작과 완전 딴판이었다. 남자 주인공 차기주에게 서브남이 납치·감금·강간 3종 세트를 당하는 피폐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능력자들』 연재 당시, 독자들 사이에서 여러 번 재창작된 설정이었다.

여주인공 진설해에게 가랑비에 옷 젖듯 가이딩을 받을 게 아니라, 김수현의 능력 무효화로 아예 차기주의 능력을 없애면 고통의 근본이 사라지니 최고 아니냐고.

팬들은 이 설정으로 BL 소설을 수도 없이 연재했다. 그중 『농락』은 독보적인 조회수를 자랑하던 작품이었다.

호텔리어로 변장한 김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피폐물 BL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자신이 그런 인생을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차기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계책을 펼치기로 했다. 그건 바로 여주인공 진설해와 결탁하여 자신이 차기주의 능력을 완벽히 무효화한 걸 그녀가 가이딩한 것처럼 속이자는 거였다.

『농락』의 진설해는 원작과 달리 신분 상승 욕구가 많은 악역 캐릭터였기에 순조롭게 그녀와 편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PL 그룹 셋째로서 아무 걱정 없이 부유한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이제 해방이었다. 언제 차기주가 자신을 납치해 강간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차기주로부터 집안을 망하게 하겠다는 협박 또한 당하지 않게 되었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48층까지 올라오길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엘리베이터에 탄 김수현은 미소를 꾹 참으며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히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객실에 있어야 할 차기주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복도를 달려오는 게 보였다.

김수현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죽어도 저 인간에게 붙잡혀서는 안 됐다.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작동해 남자가 문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가까스로 문이 닫혔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긴장했던 게 한순간 풀어지며 수현은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이제 살았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닫혔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김수현은 위압적인 모습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바보였다. 자신이 닫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것처럼, 그 또한 바깥에 있는 버튼을 눌러서 엘리베이터 문을 열 수 있었다.

샤워 가운 차림을 한 차기주의 잘생긴 얼굴은 토끼 사냥에 성공한 범처럼 배부른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수현의 허리를 잡아 지탱해주며 말했다.

“이런, 조심해야지.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고객이 불렀는데 호텔리어 따위가 멋대로 나가버리기나 하고. 지배인을 불러서 추궁이라도 해야 하나?”

당연히 김수현은 호텔리어 따위가 아니었다. 오늘을 위해 이 호텔에서 미리 벨보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재벌 3세였으니까.

“죄, 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못 들었나 봅니다.”

김수현은 이 계획을 설계할 당시, 절대 자신의 정체를 들기지도 집안을 약점으로 잡히고 패가망신 당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겁먹어서 그런 거라 여겼는지 부족한 연기 솜씨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차기주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향한다.

“이름표는 어디에 있어? 복장 불량으로 클레임이라도 넣어줘?”

강압적인 화법은 그가 한순간도 피지배자였던 적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여기서 잘리면 등록금 못 내요.”

내야 할 등록금은 이미 아버지가 내줬다. 회장 아버지가 좋긴 좋더라.

김수현은 불쌍한 척 울상을 지었다. 차기주가 김수현의 팔뚝을 잡고 주물렀다.

‘아, 씨. 이 새끼 왜 이래? 변태인가?’

어디선가 들었는데, 팔뚝을 만지는 게 가슴의 촉감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팔뚝 만지는 새끼는 개 놈의 자식이니 조심하라 했었지.

김수현의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지나갔다.

“이름.”

“…….”

“이름.”

강압적인 물음에 김수현은 눈을 감았다.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아무 이름이나 뱉으며 제발 이 개 놈의 자식님이 속아 넘어가기를 빌었다.

“이윤석이요.”

“좋아. 오늘은 보내줄게. 옷차림이 이래서 말이야.”

차기주가 순순히 김수현을 놓아줬다. 그가 멈춘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옷을 챙겨 입기 위해 객실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김수현은 문이 닫히자 그대로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그래도 안 들킨 거 같지?”

이윤석한테 미안하다고 밥 한 끼 사줘야겠다. 순간 죄 없는 동료의 이름이 떠오를 건 또 뭐란 말인가. 일단 그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듯하니, 일이 커지기 전 적당한 타이밍에 호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기가 말하는데 제멋대로 객실을 나가버려서 화난 것일 뿐, 아직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린 건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차기주가 자신을 놓아줄 리 없었으니까.

김수현은 몸을 일으켜 엘리베이터 1층 버튼을 눌렀다. 이대로 곧장 직원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퇴근할 거다. 집에 가서 얼른 누나한테 가이딩을 받아야 했다. 개미들이 피부를 갉아 먹는 것처럼 신경이 들끓었다. 오점 없이 완성할 수 있었던 계획을 자신의 조바심으로 그르친 것 같아서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거칠게 로커 룸을 열고 옷을 갈아입었다. 혹시 몰라 자신의 이름표를 떼고 가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차기주한테 찍혀서 집안 말아먹을 뻔했다.

“오올, 김수현. 등짝 좀 보소. 왜 이렇게 몸이 좋아.”

방금 전 자신이 사칭한 이윤석이 김수현의 곧은 허리를 손으로 짓궂게 쓸어내렸다. 김수현은 소름이 돋아 몸서리치며 그를 떨쳐냈다.

“아주 백옥 같은 피부야. 야, 너 정말 오메가 아니야?”

이 새끼만 보면 주먹이 날아가지 않게 간수하느라 온 정신을 쏟게 되었다. 동갑이라 대꾸를 해주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짜증 나는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몇 번이나 알파라고 했지. 네가 알파였으면 내 페로몬으로 죽사발을 내줬을 텐데, 베타라 안타깝다.”

이윤석 때문에 티셔츠를 목에 낀 채 서 있던 김수현은 마저 옷을 입고,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덩달아 이윤석이 자기도 지금 퇴근한다며 같이 삼겹살이라도 먹자고 추근거렸다.

김수현은 평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차기주에게 이윤석이라 사칭한 죄도 있고, 고작 벨보이 아르바이트 주제에 객실 팀 직원 유니폼을 빌려 입고 대리로 펜트하우스에 룸서비스를 간 일도 있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윤석이 얼른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짐을 챙겨 들었다. 김수현의 어깨에 팔을 걸친 그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가자, 가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자고.”

분명 자신은 삼겹살을 먹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이야기는 제멋대로 술 약속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술까지 마셔야 한다니, 서브남에게 빙의한 후 곱게 살아와서 그런지 예전과 달리 사회생활 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윤석에게 전생에 술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은 건지, 김수현은 새벽이 되어서야 술에 반쯤 떡이 된 그를 떼어내고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알싸한 소주 냄새와 돼지기름 냄새가 너무나 친숙해 꼭 빙의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늦은 새벽길, 택시를 잡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가 피식 웃었다. 어플로 택시를 부르지 않아도 전화 한 통이면 자신을 데리러 와줄 운전기사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이미 버스가 끊긴 버스 정류장 벤치에 무너지듯 앉은 김수현은 운전기사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전화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할 게 없어서 멍 때리던 중 버스 정류장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능력 센터 SP에서 “복권 구매가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순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검사는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에스퍼와 함께하는 행복. 당신도 가이드일 수 있습니다” 하며 검사를 권고하는 캠페인에 대한 광고였다.

어이가 없어서 입술 틈새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에스퍼 좋자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끄집어내 구렁텅이에 처박는 주제에, 저런 광고는 너무 그럴싸하지 않은가.

김수현은 자신이 술에 취한 줄도 모른 채 광고 속 차기주와 눈싸움을 시도했다. 이 지독한 새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반면 그의 눈꺼풀은 누가 아래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웠다. 수현은 꾸벅꾸벅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선잠에 들었다. 잠결이라 그런지 누가 자신의 고개를 받쳐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수현은 누군가의 따듯하고 넓은 어깨에 기댄 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농락』에 빙의하고 나서 처음으로 선배를 꿈에서 만났다. 그가 작은 방과 욕실 하나밖에 없는 옥탑방으로 올 때면 층계참에서부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선배는 참 많이 잘생겼고 키가 컸다. 어떻게 같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냐는 아버지의 말에 당당하게 ‘선배가 잘생겨서 좋아요’라고 했다가 매만 더 벌 만큼 말이다.

자신은 얼굴과 몸에 든 얼룩덜룩한 멍을 숨기기 위해 그를 내다보지 않았다. 매미 소리 우렁찬 한여름임에도 한기가 들어서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는 척했다.

집에 들어선 그는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교복 와이셔츠 소매부터 걷어 올리곤 빨간 고무장갑을 손에 끼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선배 몰래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그의 등을 쳐다보는 게 좋아서 일부러 설거지를 안 해두곤 했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자신의 수작질에 넘어간 선배 덕분에 수영 선수처럼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뒤에서 몰래 감상할 수 있었다.

계속 두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담아내다가 왠지 그걸론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눈을 감으면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샤워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선배는 자신을 친한 동아리 후배쯤으로 여길 테지만 자신에게 있어 그는 몽정의 대상이었다. 우리 집 세탁 세제가 빨리 닳아가는 건 다 선배 탓이었다.

“왜 또 학교 안 나왔어.”

자신의 집은 천장이 낮고 좁은 덕분에 그가 그윽한 목소리로 말할 때면 크게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잘 들렸다.

“학교 선배가 말하는데 대꾸도 안 하지? ■■■, 너 혼날래?”

그가 자신을 혼낸다는 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가 자신을 해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설거지가 끝날 때쯤 다시 이불로 얼굴을 감췄다. 그가 맨바닥에 깔린 이부자리로 다가왔다. 이불을 내리려는 손길에 낑낑대며 버텨봤지만, 그의 완강한 힘에 쉽사리 지고 말았다.

“누구야. 누가 너 이렇게 만들었어.”

선배가 다친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화내주는 것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 혼자 밤에 체조하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그런 허술한 변명으로는 그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선배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운 날씨 탓에 흘린 땀인지, 아님 아파서 흘린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냄새나고 더러웠을 자신을 그가 끌어안아줬다.

덩치 좋은 선배가 자신의 위로 내려앉듯 감싸는데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기만 했다. 새삼 그가 얼마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지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난…….”

그의 울먹거림에 자신은…….

* * *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자신을 깨우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흐릿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뚜렷하지 않은 초점이 깜빡이는 눈 사이로 점차 뚜렷해져 갔다. 세단에서 내린 김수현의 눈에 3m나 되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대저택이 보였다.

저택 주차장에서 내려주지 않고 대문 앞에 차를 댄 걸 보면 아무래도 아버지가 단단히 화난 것 같았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걸렸으니까.

김수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새벽 3시에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다 깨게 이게 무슨 짓인지.

인터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줌마, 저예요.”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김수현은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스키장에서나 켤 법한 대형 조명이 정원을 밝히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이었으면 거실 불을 켜놓고 자식을 기다렸을 텐데 재벌 집이라 스케일이 달랐다. 6층 높이에 달하는 새하얀 저택의 회벽이 거대하게 솟은 채 반사판 노릇을 했다. 수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시린 눈을 내리깔았다.

퍼팅 연습용 잔디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좁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이 몇 시냐.”

“……새벽 3시요.”

“이리 와. 정신머리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도대체 여태 뭘 하고 싸돌아다닌 거야.”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채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온 김수현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고는 더욱 성을 냈다.

“어쭈? 꼴에 술까지 처마셔? 이 천박한 음식 냄새는 또 뭐냐.”

아버지가 재벌 회장님이라 좋은 점은 예전과 달리 큰 방에서 아무런 생활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자신은 돈을 인생 최고의 덕목이라 여긴 덕분에 서브남으로 살기 좋다 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매 맞는 건 똑같았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파라는 이유로 몸은 퍽 튼튼해서 버틸 만했다.

김수현은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내줬다. 딱딱한 골프채가 엉덩이를 강타했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신음을 참았다. 아픔에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도 무덤덤한 척하려고 애썼다. 아픈 티를 내봤자 아버지는 군대에서 기합 주는 선임병처럼 더 난폭하게 굴 뿐이었다. 20대 정도 맞은 자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었다.

아무리 자신이 S급 에스퍼라고 해도 다른 에스퍼의 힘을 무효화하는 능력을 가져서인지, 전투계 에스퍼들과 달리 초인적인 신체 스펙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고작 골프채에 맞아서 아프다고 빌빌대지 않았을 테다. 아버지는 폭력 앞에 굴복한 자신을 희열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굳은살 박인 손이 자신의 머리통을 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소유라고. 한 번만 더 내 품격을 더럽히는 짓 하고 돌아다니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알겠냐.”

“예, 흐흑…… 으, 윽…….”

숨을 꺽꺽거리며 우는 자신을 버려두고 아버지가 사라졌다. 자신도 주섬거리며 몸을 일으켜 저택으로 향했다. 아픈 엉덩이 때문에 뒤뚱거리며 걷는 꼴이 꼭 못난 오리 새끼 같았다.

집으로 들어간 자신을 누나가 거실에서 맞이해줬다.

“수현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친구 좀 만나느라고.”

“다음부터는 혹시 늦을 거 같으면 누나한테 먼저 전화해. 아버지가 집에 계신지 안 계신지 물어보고 놀아도 늦지 않잖아.”

“누나, 나 많이 기다렸어?”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니?”

누나가 다정하게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흩트려놓았다. 다행히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 싸가지 없는 형과 달리 다정한 누나가 이 집에서 숨통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걷는 자신을 본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손을 잡아줬다. 가이드인 누나와 스킨십을 하자 상쾌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는 듯싶더니 고통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너 파동이 불안하던데 혹시 바깥에서 힘 사용했니?”

“아, 우연히 에스퍼를 길에서 마주쳤는데 어쩌다 보니까 시비가 붙어서.”

“어디 다친 데는 없지?”

“그랬으면 내가 지금 살아 있겠어?”

누나는 참 사람 말을 못 믿었다. 아님 자신의 말을 안 믿는 것이든가. 몇 번이나 꼼꼼하게 자신이 멀쩡한지 확인한 후에야 늦었으니까 얼른 자고 내일 학교에 가라며 방으로 보냈다.

김수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음식 냄새가 밴 옷을 벗어냈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하고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았다. 엉덩이가 끔찍할 정도로 아파서 거울로 확인하니 단단하게 뭉친 붉은 자국이 보였다. 내일이 되면 아마 보랏빛으로 멍이 들겠지. 잠옷을 입은 뒤, 할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서 잠을 청했다.

자는 동안 끙끙 앓으며 식은땀을 흘려냈다. 도대체 전생에 자신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버지들이 자신만 보면 쥐어패지 못해서 안달 난 것처럼 굴까.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제 아버지라는 사람은 심기가 뒤틀리면 꼭 사람을 샌드백 대용으로 썼다.

김수현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그건 바로 김수현을 낳다가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유였다. 예전의 아버지는 그게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매를 들며 면죄부로 써먹고는 했다. 김수현의 아버지도 입 밖으로 말하진 않지만 같은 이유로 김수현을 쥐어패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향한 적의 어린 눈을 볼 때면, 그 시선은 꼭 아들이 아니라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메가버스 BL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남자끼리도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어서 좋다고 여겼는데, 오메가를 죽이고 태어난 아들이란 타이틀을 차지하니까 그게 꼭 좋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오메가에 대한 알파의 엄청난 집착은 자기 피붙이에게조차 살의를 느끼게 하니 말이다.

김수현은 ‘그래도 돈은 많잖아’ 하고 웅얼거리며 눈물을 삼켜냈다. 선배가 있었으면 아프다고 어리광이라도 부렸을 텐데, 아쉬웠다. 그렇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곳에서의 자신과 선배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싸구려 페인트와 조잡한 옥탑방을 이루던 자재들이 불타면서 났던 매캐한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천장을 따라 넘실대는 연기가 문 밑으로 흘러들어오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봤자 자신의 몸은 이미 숯 검댕 고기가 되었을 터였다. 혀를 날름거리듯 벽을 타고 천장을 덮쳤던 불길 속에서 자신은 어떻게든 선배를 지키기 위해 그를 끌어안았지만 소용없었다.

뜨거운 열기에 창문이 터져 나가고, 우리는 겁에 질린 채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때 받은 충격이 커서일까. 자신은 자신의 원래 이름도,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불길은 작은 옥탑방을 불태운 것도 모자라 자신의 소중한 추억까지 화마가 되어 집어삼켰던 것이다.

* * *

옆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모를 어두운 밤이다. 하늘에 닿을 듯 뻗은 나무들로 인해 숲속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를 켠 G*겐이 출입 통제용 차단 바 앞에 멈춰 섰다. 경비 초소 입구에서 군인이 나와 차량 탑승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검문을 나온 군인은 차기주의 얼굴만 보고 바로 차단 바를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경비 초소에 있던 다른 군인이 버튼을 눌러서 출입을 허용했다. 차는 별다른 검사 없이 이능력 센터 안으로 진입하였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이 기밀 지역은 작은 마을 같았다.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식당과 스낵바부터 시작해 세탁소와 은행까지, 일상에 필요한 각종 편의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수영장, 볼링장, 농구 코트, 헬스장 같은 취미 공간이 모두 갖춰진 이곳은 마치 ‘너희 같은 괴물은 얌전히 여기 갇혀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능력자들은 엄연히 말하면 군인도, 민간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Special Police’라는 명칭을 가진 정부 협력 단체였다.

센터 안은 일정한 간격에 맞춰 놓인 가로등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잘 다림질한 제복을 입은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데이트를 위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공격 능력이 있는 에스퍼들은 센터에 머물며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게이트 개방과 괴수의 출현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과 페어를 맺은 가이드들 또한 자연스럽게 센터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일반인에게 이능력자들은 센터에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박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군인이 아닌, 그냥 회사원일 뿐이었다. 통제된 공간에 갇혀 있음에도 언제든지 이곳을 벗어날 자격이 있었다.

차기주가 G*겐에서 내렸다. SS급 물리계와 원소계 공격 능력을 가진 그의 업무는 의외로 괴수를 처치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국가 재난 위기를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평소에는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했다. 다른 에스퍼들처럼 출동을 나가기 위해 센터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가끔씩만 센터로 출근을 했다. 그랬던 그가 근무 시간이 아닌 시각에 센터에 방문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목에 사원증을 건 능력자들과 연구원들이 차기주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그는 일일이 부하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상냥한 상사가 아니었기에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만난 진설해와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섹스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완벽하게 차기주의 능력 사용 부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엄청난 변화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 어떠한 가이딩도 에스퍼의 파동을 완벽하게 안정시킬 수 없다. 갓 각성한 에스퍼도 아니고, 파동이 잠시나마 아예 불안정 수치 0에 이를 정도로 안정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손목에 찬 시계형 파동 측정기에 찍혔던 숫자는 오류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파동 위험성이 이렇게 오랫동안 0%를 유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런 가이딩이 이론상 가능하긴 했다. 0.2mm의 종이를 49번 접으면 그 두께가 5,629만 km가 되어 지구에서 화성까지 갈 수 있다는 계산법이 맞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녀와 자신의 매칭률은 100%라도 된다는 것일까? 무슨 영혼의 반쪽이라도 되나 보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그녀에게서 운명적인 끌림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때 룸서비스를 하러 들어온 호텔리어 쪽이…….

차기주는 같은 알파였음에도 감미롭게 느껴졌던 페로몬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키는 자신보다 반 뼘 작은 것 같았으니 182cm 정도 될 것이다. 직각으로 깎인 어깨와 역삼각형 상체는 전형적인 알파의 체형이었지만 얼굴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섬세한 선을 가진 미인이었다.

참으로 앙큼한 녀석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뻔히 알 텐데도 이름을 거짓말 치고 도망쳤다. 혼나는 게 무서워서 그랬을 테지만 그가 자신의 가이드만 아니라면 그런 실수쯤은 봐줄 수 있었다. 자신의 가이드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 녀석을 어떻게 할지는 지금 하는 검사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그의 외형에 끌렸던 거라면 그와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차기주는 그를 찾아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와그작 씹어 먹어 배 속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너는 내 거라고.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미리 예약해둔 검사실 들어섰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검사할 생각이었다.

그는 캡슐 형태의 기기 안에 들어갔다. 연구원이 자신에게 귀마개를 씌워주고 뚜껑을 닫았다. 시계형 파동 측정기는 오차 범위가 있는 편이지만 이 검사는 그렇지 않았다. 강한 자기장을 이용해 몸속 수분에 있는 수소 원자핵의 파장을 읽어내는 방식이라 가장 정확한 검사라 할 수 있었다. 아스팔트를 드릴로 깨는 듯한 엄청난 소음이 울렸다. 귀마개를 하고 있어도 굉음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다.

30분 동안 소음 공해에 시달린 후에야 검사가 끝났다. 연구원이 캡슐을 열자마자 눈을 빛내며 대뜸 차기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사님, 매칭 가이드를 찾으셨어요?”

“그래서 몇 퍼센트야.”

“당장 그 가이드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SS급 가이드일 수도 있다고요.”

“그래서 내 파동 위험도 몇 퍼센트냐고.”

“3%요. 이건 거의 숨만 쉬어도 생겨나는 불안정 파동 수치 범위예요. 아예 에스퍼의 몸을 새롭게 재구성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수치라고요.”

연구원은 흥분해서 당장 그 가이드 좀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차기주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자신이 느낀 게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자 웃음만 나왔다.

아무래도 정말 제 파동이 초기화라도 됐던 모양이다. 자신의 등급이라면 연구원의 말처럼 숨만 쉬어도 저 정도 불안정 파동 수치가 생겨난다.

그는 당장 진설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가이드인지 아닌지 알아볼 차례다. 무작정 일반인인 호텔리어를 갖겠다며 사냥하기엔 그가 가진 이능력 센터 이사라는 직함에 걸린 제약이 많았다. 그러니 뭐든 확실하게 천천히 단계를 밟아나가야 했다.

차기주는 연구원에게 가이드와의 매칭 검사도 준비시켰다. 호텔에서 헤어진 진설해에게 연락해 당장 센터에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페어 에스퍼가 없는 그녀는 센터 외부에 집을 얻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차기주는 할 일 없이 시간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데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했다.

검사실에 도착한 진설해에게 매칭률 검사를 할 거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자기와 페어를 맺고 싶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히죽 웃었다. 차기주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사람들은 그가 몸을 일으키자 공간을 꽉 채우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매칭 검사를 위해 차기주와 진설해는 탈의실로 향했다.

매칭률 검사는 물속에서 에스퍼와 가이드가 파동을 개방하면 그에 따른 물의 순환 속도를 계산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잠수복을 입고 검사실로 돌아왔다. 21세기가 되어서도 20세기에나 했던 검사 방법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인류의 과학은 어떻게 에스퍼와 가이드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사람마다 파동의 강도에 따라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걸 알아내 임의로 등급을 매긴 게 최초이자 최후의 업적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모두 파동 에너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이 인체에 미치는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에스퍼는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파동 에너지가 불안해지는데 그게 쌓이다 보면 결국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에스퍼의 폭주는 폭탄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재앙이었다.

반면 가이드는 곁에 에스퍼가 없는 이상 본인에게 파동 에너지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힘 또한 에스퍼와 달리 매우 안정적이어서 웬만해서는 폭주를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가이드가 파동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생명력이 소진되어 가이드 본인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에스퍼만 외면하면 위험해질 일이 없기 때문에 ‘1차 대변혁’ 때만 해도 숨어 지내는 가이드들이 많았다.

그들을 대대적으로 국가에서 검사하고 에스퍼에게 붙이는 작업에는 강압적인 힘이 작용했다. 지금은 정부가 각종 언론을 통해 ‘가이드가 되면 에스퍼의 페어로서 그 부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이미지 세탁을 한 상태지만 말이다.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착용한 차기주는 연구원들의 지시에 따라 수족관 안으로 입수했다. 몸이 가라앉았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의 그것처럼 하얀 물보라에 감싸였다.

차기주의 기억은 물 아래로 깊게 가라앉을수록 선명해졌다.

* * *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공기통 대신 어린 시절의 그는 소총을 메고 다녔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하늘)의 성기를 거세했을 때, 그것이 바다에 떨어져 아프로디테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인공적으로 능력자들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아프로디테’라고 불렀다.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는 수많은 능력자들을 생산해냈으나 그렇게 만들어진 능력자들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선천적으로 각성한 자들과 달리 가이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차기주는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384’였다. 그 이전에 383명의 실험체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그 혼자뿐이다.

실험체들은 괴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개조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개발된 M16A4 소총이나 M4 카빈 같은 무기에 불과했다.

그는 제일 강했기에 살아남았다.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실험실의 아버지들을 죽이고 탈출해 자유를 얻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실험은 여전히 차기주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차기주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32살이면 실험체 중 최고로 오래 산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더 살고 싶었다. ‘384’가 아닌 차기주로서.

연구원이 마이크로 매칭률 검사를 위한 지시를 내렸다. 물속에 있어서 소리가 웅웅 울리며 고막에 뭉그러지듯 들렸다.

“가이드님, 파동 개방 부탁드립니다.”

진설해로부터 잔잔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수족관을 채우고 있는 물은 그 힘을 흡수했다. 잔잔했던 수면이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이제 에스퍼와의 교감을 알아볼 차례였다.

“에스퍼님, 파동 개방 부탁드립니다.”

차기주는 천천히 힘을 개방했다. 그는 자신 앞에 펼쳐진 황무지의 환상을 무감각하게 쳐다봤다. 자신은 그것을 ‘레아’라고 불렀다. 크로노스가 결혼한 대지의 여신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 다른 에스퍼들은 이런 환각을 보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차기주는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레아를 본다는 사실을 숨겼다.

레아는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오려는 힘에 지진을 일으키며 갈라졌다. 혈관에 독을 탄 것처럼 그의 신체가 이상 반응을 보였다. 내장이 뒤틀리고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고통이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 위로 헤엄쳐 나왔다.

“매칭 테스트 중단합니다. 가이드님도 물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진설해가 밖으로 나왔다. 차기주는 스쿠버다이빙 호흡기를 입에서 뱉었다. 머리에 쓴 다이빙 마스크를 벗어 던진 그는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몸에서 떨어진 물방울들 때문에 콘크리트 바닥 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역시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젠 자신의 먹잇감을 사냥할 시간이었다.

* * *

센터 옥상. 알파벳 H가 그려진 헬리콥터 착륙 장소에 다가갈수록 고속 회전 중인 프로펠러 소리가 커졌다. 헬리콥터 안에는 헤드셋을 쓴 조종사가 그를 서울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넥타이가 교수형을 내리듯 그의 목을 잡아당겼다. 차기주는 아예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 붕대처럼 손에 둘둘 감았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마치 무스를 발라 고정한 것처럼 굳어, 헬리콥터에 탑승한 이후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 스타일에 신경 쓸 새 없이 조금이라도 굉음을 막고자 서둘러 헤드셋을 썼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헤드셋을 통해 나오는 조종사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나서야 그는 그 말에 따를 수 있었다.

그 호텔리어를 만났던 순간이 절실했다. 과민했던 신경이 가라앉으며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평화로웠던 그 순간이. 그건 마치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체질 탓에 감각이라도 없애고자 공기통을 등에 메고 잠수를 할 때처럼 세상과 자신 사이가 단절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 어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초조하고 불안했다. 솜털조차 가시지 않은 알파인데……. 같은 알파가 자기 에스퍼라는 소리를 순순히 반기지 않을 테다.

부디 그가 속물이어서 돈에 눈이 멀었길 바랄 뿐이었다. 차기주가 가진 것이라고는 돈과 권력,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무기 같은 불안정한 능력이 다였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아무리 돈과 권력이 좋아도 시한폭탄 같은 그를 감내하려들 리가 없었다.

차기주는 다리를 달달 떨며 헬리콥터가 이륙하길 기다렸다. 언제 떠나나 싶어 고도·속도·방향 등의 수치를 알려주는 계측기로 가득한 대시 보드를 노려봤다. 재촉이 담긴 그의 눈초리에 조종사가 RPM 수치를 104까지 올렸다. 콜렉티브 조종간을 헬기가 뜨기 직전까지만 들고, 다지관 압력은 18~20까지 유지했다. 동시에 조종사는 콜렉티브 조종간을 든 만큼 왼쪽 페달을 찼다.

헬기가 옆으로 움직이지 않게 사이클릭 조종간의 중립을 잡아주며 콜렉티브 조종간을 드니, 드디어 헬기가 뜬다. 인공적인 불빛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태백산 위를 헬리콥터가 날았다. 산 중간을 민둥하게 밀어버리고 지어놓은 센터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땅에 떨어진 별똥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차기주는 눈을 감고 단 한 번 만났음에도 영혼에 새겨놓은 것처럼 선명한 호텔리어의 얼굴을 되새겼다. ‘넌 나의 것이 되기에는 참 예쁘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 *

헬리콥터는 비행경로를 따라 정확히 예상 시간에 맞추어 호텔 옥상에 착륙하였다. 잔잔한 바람만 있는 좋은 기상 상태 덕분이었다.

옥상에는 차기주를 마중하기 위해 호텔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는 헤드셋을 벗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엉망진창으로 눌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겨 단정히 했다. 그래봤자 서울에 오는 내내 엄청난 소음 공해에 시달려 초췌해진 얼굴은 복구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윤광이 보이는 검은 구두가 초록색 페인트칠이 된 콘크리트를 밟았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지체 없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걸었다. 옥상을 벗어난 차기주는 별다른 인사말 없이 본론을 꺼냈다.

“보고하세요.”

“예, 이사님. 어제저녁 8시에 펜트하우스로 룸서비스를 간 직원은 저희 호텔에서 벨보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원래 객실 담당이었던 이윤석과 친분이 있어서 유니폼을 바꿔 입고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처벌을 원하신다면 당장 해고하겠습니다.”

차기주는 대학교 등록금을 내야 한다며 애원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절망하며 울 때 자신이 도와주는 척하면 쉽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세요.”

“예, 바로 해고 처리하겠습니다.”

“이름은 뭡니까.”

“예?”

최 사장은 실수를 저지른 아르바이트생 이름을 왜 차기주 이사가 알고 싶어 하는지 의아한 얼굴로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는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능력자들과 관련된 일이면 얽혀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김수현입니다.”

“좋아요. 그럼 전 전산실에서 CCTV를 확인할 테니, 최 사장은 김수현 씨 이력서 가져오세요.”

차기주는 몇 시간 전의 김수현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김수현은 직원 탈의실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진짜 이윤석’과 퇴근하였다. 둘이 함께 가는 모습을 보니 단순히 집에 돌아가는 것 같진 않았다.

몹시 들떠 보이는 이윤석의 얼굴이 기분 나빴다. 찌푸려진 눈썹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는 그에게 최 사장이 김수현의 이력서를 가지고 왔다.

“하, 이거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네.”

집 주소가 성북동에 있는 부촌이었다. 그리고 차기주는 김수현의 집이라고 적힌 주소가 누구의 집인지 잘 알고 있었다. PL 그룹 회장 댁이었다. 이력서에 붙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는 김수현의 발칙한 거짓말을 되새겼다.

“하,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여기서 잘리면 등록금 못 내요.”

회장의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의 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김수현은 스무 살짜리라 그런지 순진했다. 간덩어리가 부어서 자신을 만나려고 한 것에 반해 이력서에 대놓고 ‘나 회장님 아들이요’ 하고 적어뒀다. 한국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김수현이라면 김 회장의 셋째 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김 회장이 자신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을 때 한 번쯤은 만나볼걸 그랬다. 그랬으면 진작 김수현을 만났을 텐데. 아, 아니다. 김수현에게도 성인이 되기 전까진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었다. 만약 자신을 미리 만났다면 지금쯤 그는 어딘가에 갇혀 있었을 테니까. 차기주는 증명사진이 붙은 이력서를 능력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공간(亞空間)에 집어넣었다.

허공에서 종이가 갑자기 사라지는 모습을 본 보안팀 직원들이 놀라는 게 보였다. 능력자들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일반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김수현이 어째서 동료와 유니폼을 바꿔 입고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도망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이들과 같은 호기심이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S급 에스퍼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가니까. 다만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경이었다면 김수현이 자신의 가이드여서는 안 됐다.

자신의 사슴이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서식지로 잡으러 가는 일만 남았다. 차기주는 호텔 정문에 대기 중인 세단에 올라탔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운전기사는 과속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기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새벽이 된 밤거리를 지나던 차였다.

“멈춰.”

“네?”

“당장 차 세우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운전기사 때문에 차기주는 능력을 사용해 세단을 공중에 살짝 들어 올렸다. 운전기사가 혼비백산하며 핸들에서 손을 놓았다. 잔뜩 겁먹었는지 운전기사의 발이 액셀을 계속 밟고 있어 자동차 바퀴가 허공에서 공회전을 했다.

차기주는 친절하게 자동차 시동을 꺼주고 세단을 차도에 내려놓았다. 그는 뒷좌석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모델을 한 광고 전광판 불빛 아래 김수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재벌 아들치고는 소탈하게 소주와 진한 고기 냄새를 풍기는 것에 차기주는 약간 멈칫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일상을 과연 자신이 깨도 되는 건가 싶었다. 물론 그러한 죄책감은 아주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잠시 후엔 말끔히 없어졌다.

자신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서 버텼을 뿐, 지금 상태가 괜찮은 건 결코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가이드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인내심을 가질 순 없었다.

김수현은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였다. 뜨거운 사막을 헤매던 길 잃은 자 앞에 나타난 오아시스였으며, 죽을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바리공주가 찾아다닌 꽃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상모를 돌리듯 흔들리는 김수현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놨다. 그는 김수현의 알파 페로몬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슬에 흠뻑 젖어서 향이 짙어진 작약꽃 같았다. 김수현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자상한 성격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페로몬은 대부분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차기주는 그가 알파라서 약간 아쉬웠다. 오메가였으면 임신시켜서라도 자신의 곁에 묶어둘 수 있을 텐데, 알파라서 다리를 자르지 않는 한 속박할 구실이 없었다. 그래도 알파니까 튼튼해서 자신의 것을 잘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김수현의 손을 잡았다. 정말 신기한 가이딩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체질이 특이해 이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김수현의 가이딩은 그동안 알려진 가이딩과는 전혀 달랐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파동을 진정시켜주는 존재였다. 가이드는 에스퍼와의 매칭률이 높을수록 보다 효과적으로 파동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성난 파도가 순식간에 고요한 호수처럼 변하지 않듯, 가이드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에스퍼의 파동을 단계적으로 진정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수현은 달랐다. 그에게는 오직 온 앤 오프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용량 과부하가 걸린 컴퓨터를 초기화하기 위해 껐다가 다시 켜는 것처럼, 가이딩받기 전과 후의 차이가 확실했다.

길거리에서 잠들어버린 도련님을 데리러 온 마이*흐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차기주를 본 김 회장의 운전기사가 놀라서 허리를 굽혔다. 차기주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술에 취해 잠든 김수현을 뒷좌석에 태웠다.

차기주는 술에 취해 붉게 물든 김수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그에게 키스할 것처럼 입술 가까이 다가가 멈췄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감긴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뜨거운 숨이 자신의 입술을 간질이는 감각을 실컷 즐긴 다음에야 차기주는 김수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조만간 찾으러 갈 거니까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숙였던 상체를 차에서 빼냈다. 뒷좌석 문을 닫아주니 얼빠진 운전기사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차를 몰았다. 차기주 또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 측에서 마련해준 세단에 올라탔다. 서재를 뒤져보면 PL 그룹 김 회장이 보낸 초대장이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과연 김수현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그를 보고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 차기주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김 회장 반응도 내심 궁금했다. 알파 아들에게 자신이 청혼하러 온 걸 알면 어쩌려나? 욕심이 많은 자이니 자기 새끼든 뭐든 팔아치우듯 줘버릴지도 모르겠다. 부디 자신의 예상대로 김 회장이 추잡한 인간이었으면 싶었다. 그럼 이야기가 몹시 쉽게 풀릴 테니까.

김 회장은 자신이 원했던 대로 센터에서 얻은 마정석의 가공 수주를 따내고, 차기주는 가이드를 갖는 것이다. 당사자만 빼면 행복한 거래가 될 것이다.

* * *

일주일 뒤, 김 회장이 보낸 초대장을 가지고 PL 그룹 셋째 아들의 전시회에 참석했다. 아직 학생에 불과한 아들의 전시회를 열어줄 만큼 사랑 넘치는 아버지 콘셉트인 건 알겠다. 그래도 선은 지켜야 할 거 아닌가.

김수현의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은 김 회장이 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 아들을 과시하듯 끌고 다니며 인사시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수현은 알파 중에서도 무척이나 미형이었다.

김수현은 무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살갑게 구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 쪽은 시큰둥해 보였다. 입구에서 초대장 검사를 받은 차기주는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온갖 기업체와 단체에서 보낸 화환이 놓인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우아한 쇼팽의 「녹턴」 연주가 흘러나오는 전시회는 김수현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김수현 본인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김 회장이 왜 자신을 이곳으로 초대했는지 차기주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브리티시 스타일의 네이비 슈트를 입은 김수현은 몹시나 세련되어 보였다. 어두운 옷감과 대비되는 하얀 얼굴은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 단 하나의 오점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김 회장은 자기 아들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거다. 차기주가 김수현을 보면 그를 가지고 싶어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확신이라도 하듯이. 자신이 알파를 좋아하게 될지 어떻게 알고 그런 덫을 놓았나 싶지만 김 회장의 자만심은 전혀 터무니없지 않았다.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갈증을 느끼고 입 안을 혀로 훑으며 잘생기고 어린 알파에게 다가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차기주의 등장에 갤러리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 한가운데에서 차기주는 입술을 뗐다.

“김 회장님, 난 내 거 누가 만지는 거 안 좋아합니다.”

“예?”

김 회장은 차기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반문했다. 차기주가 오만하게 턱짓을 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는 김수현의 어깨를 감싼 김 회장의 팔이 있었다.

김 회장은 얼른 팔을 내렸다. 냉엄함이 감돌던 차기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깃들었다. PL 그룹 회장의 초대를 받고 방문한 갤러리들은 차기주가 말한 ‘내 거’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다.

김수현이 가이드로 각성이라도 한 것일까. 뻔한 추측이었음에도 다들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인 김수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잘근거리며 씹어댔다.

“제가 왜 당신 거죠?”

당돌한 어린 알파의 질문에 차기주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야 내 눈에 띄었으니까.”

“저 아세요?”

“적어도 단순한 호텔리어가 아니라는 건 알지.”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을 째려보는 것조차 귀엽게 느껴졌다. 키가 멀대처럼 큰 알파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그가 자신을 지옥에서 구원해줄 가이드여서이리라.

김수현은 슬쩍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또 무슨 짓을 저질렀냐는 얼굴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김수현은 발걸음을 뗐다. 수현의 옆자리가 원래 자기 자리라는 듯 차기주가 바짝 붙어 섰다.

갤러리들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아무런 장식 없이 하얗게만 페인트칠한 벽에는 자신이 빙의하기 전, 그러니까 진짜 김수현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자리했다.

사실 자신이 봤을 때 이 그림들은 그다지 잘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순히 캔버스를 검게 칠하거나 사각형을 그렸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초등학생이 미술 시간에 그릴 수 있을 법했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네. 진품은 추정 가격만 1조 원으로 평가받고 있지.”

예술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이 봤을 땐 이건 만 원에 팔아도 안 살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작품이 유명 화가의 작품이고 천문학적인 액수를 자랑한단다.

“물론 네 작품에는 그런 가치가 없어. 사람들이 말레비치의 그림에 비싼 가격을 매긴 건 그가 추구한 존재에 대한 열망을 높이 샀기 때문이니까.”

‘하, 어이없네. 이거 돌려서 멕이는 건가?’

자신도 김수현의 그림값을 만 원 이하로 매겨놓고선 불순하게 차기주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제 것이라고 하지를 않나, 네 그림은 가치 없다고 하지를 않나. 기분이 나빴다.

“네가 내 가이드가 되어준다면 네 그림을 그 가격에 사줄게.”

“미친.”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고 말았다. 차기주가 작게 풋,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눈매를 버드나무 잎처럼 부드럽게 접었다.

전시회에 차분한 클래식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플루트 잔에 담긴 샴페인을 홀짝이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알파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갤러리들 또한 김수현 못지않게 질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김수현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차기주를 감상했다. 그의 등 뒤로 캔버스가 걸려 있었는데, 간소하기 그지없는 액자 안 그림과 차기주의 인영이 겹치면서 그 또한 예술품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아, 그러고 보니 원래의 자신도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 같다. 옥탑방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햇살에 의해 흐릿한 기억 속 선배의 얼굴이 뿌옇게 지워져 있다. 자신은 그가 문방구에서 사다 준 스케치북에 파스텔로 그림을 그렸다.

거친 종이에 서걱거리며 선배의 잘생긴 귀를 그렸다. 파스텔을 만질 때면 손가락 끝에 얼룩덜룩하게 가루가 묻어서 더러워지곤 했다. 자신이 그림을 다 그려 비누로 손으로 빡빡 닦아낼 동안, 선배는 자기 귀를 만지작거렸다.

“왜 하고많은 부위 중에 하필 귀를 그리는 거야?”

“그야 거기가 제일 빨간걸요.”

“……변태.”

수줍게 웃은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멍하니 선배의 귀를 떠올리는 자신의 시야에 차기주의 창백한 귀가 들어왔다.

차기주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알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김수현은 심장에 해로운 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꽃이 아닌 좆 같은 미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꽃은 선배뿐이니까.

“전 가이드가 아니에요.”

“아니, 넌 내 가이드야.”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원하신다면 센터에서 가이드 검사를 받겠습니다.”

가이드 검사를 받아봤자 에스퍼인 김수현은 가이드가 아니라고 나올 테다. 자신 있어 하는 자신을, 차기주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치기를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내려다봤다.

“그래, 그러도록 해.”

여유 있고 거만한 태도가 정말…….

“재수 없어.”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내뱉어버리는 자신은 그의 생각대로 아직 어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아직 어린 게 맞았다. 아마 진짜 자신도 김수현과 비슷한 나이였을 거다. 왜냐하면 선배가 자신이 성인이 된 것을 기념 삼아 처음으로 삼겹살에 소주를 사줬기 때문이었다.

선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건 좋지만 왜 혼자 있을 때는 힘들었던 게 이 사람 옆에 있으니까 이렇게 쉽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빙의하고 나서 처음으로 선배에 대한 꿈을 꾼 것도 차기주를 만나고 나서였다.

찍찍 소리를 내는 정장 구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헤어스프레이 냄새가 진하게 나는 알파는 높은 볼륨을 준 올백 머리를 하고 있었다.

김수현의 형, 김정석이었다. 형이라고는 하지만, 크게 달갑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김정석이 너스레를 떨며 김수현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김수현은 그의 손톱이 자신의 살갗에 파고들지 않게 막아주는 값비싼 양복에 남몰래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제 동생이 아직 어려서 이사님께 말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김정석이 말할 때마다 강한 구강 청결제 냄새가 났다. 형은 차기주에게 동생을 자기 것이라고 과시라도 하고 싶었는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 미친놈의 새끼가 또 이상한 데서 핀트가 어긋났나 보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한 김수현은 그 숨결에서 미약하지만 독한 양주 냄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입술끼리 닿을 것처럼 간당간당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전시회에 있는 샴페인 따위를 마신 게 아니었다.

없는 게 도와주는 거라 찾지 않았는데 대낮부터 술을 마시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지.

“못 들은 것 같으니 다시 말하지. 난 내 거 누가 건드리는 거 싫어한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며 차기주가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김수현의 어깨에 올라간 김정석의 팔이 허공에 들리더니 비틀렸다.

“으아아악!!”

“이 집 알파들은 왜 자꾸 남의 걸 함부로 만질까. 사람들도 많은데 자꾸 손버릇 안 좋게 구는 걸 보면 아주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지. 내 말이 우스워? 하루 종일 웃게 아가리라도 찢어줘?”

김수현은 장내가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김정석과 차기주 사이에 끼여서 새우 등 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열고 싶어서 연 전시회도 아니고 억지로 끌려 나온 자리였다.

그는 인파 틈에서 살굿빛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누나를 찾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한 그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파묻혀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작약꽃을 꽂아 올림머리를 고정시킨 그녀의 뒷덜미에는 애교머리가 나와 있었다.

알파들은 매끄럽게 빠진 누나의 목을 보느라 시선이 죄다 아래를 향해 있었다. 김수현은 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기꺼이 잘생긴 알파들 사이에서 자신을 선택해줬다.

하얀 슬링백 구두가 에폭시 바닥을 걸을 때마다 다급한 소리를 냈다. 자신과 함께 떠나는 누나를 보고 알파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소문이 맞나 봅니다. 김 회장님 오메가가…….”

“하나도 안 닮은 게 그런 것 같죠?”

“그래놓고 죽었으니 오죽 미울까. 김 회장님이 참 속도 좋습니다.”

떠나던 자신의 발길을 이상한 말들이 붙잡았다. 자신이 돌아보려고 하자 누나가 팔을 잡아끌며 고개를 저었다.

“얼른 가자. 나 피곤해.”

누나는 이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그러나 자신은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누나가 등을 보이자마자 대놓고 뒷말하는 알파들에게 다가갔다.

“왜요. 내가 어디 밖에 나가서 낳아온 사생아래요?”

“…….”

“자기 아내 죽이고 태어난 사생아한테 어느 알파가 미쳤다고 전시회를 열어주나요?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한 번만 더 제멋대로 떠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실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포주처럼 자신을 데리고 상류층 사람들에게 자랑하던 아버지였다. 그림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회였음에도 아무도 김수현이 그려놓은 그림은 쳐다보지 않았더랬지.

이 자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고객에게 상품을 선보이는 자리였을지 모른다. 형이 입버릇처럼 하던 ‘널 세상에서 가장 추한 늙은이한테 비싸게 팔아치울 거야’라는 말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닐 수 있었다.

누나와 함께 도망치려던 김수현은 고래 싸움이라고 보기에는 일방적으로 김정석을 발로 차고 있는 차기주에게 돌아갔다. 직각으로 접혔던 다리가 살포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제 와서 내숭을 떨어봤자인데 본인은 모르나 보다.

“그래서 대답은?”

자기 가이드가 되어주면 1조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를 주고 자신의 그림을 사겠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김수현은 자신을 가이드라고 확신하는 차기주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좋아요. 대신 내가 가이드가 아니면 그쪽이 날 깨끗이 포기하는 걸로 해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차기주의 한쪽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영리한 독사 같은 남자라 자신의 수작질에 넘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네가 내 파동을 잠재울 수 없는 존재라면 포기하지.”

자신이 상대하기에 그는 너무 음흉한 존재였던 건지 모르겠다. 혹시 자신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걱정이 되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와이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니요. 그쪽이 나한테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가이드가 아니면 포기해야죠.”

“이런 식의 대화라면 죽을 때까지 도돌이표일 거 같은데? 순순히 포기해.”

“그쪽이야말로요.”

“그쪽이 아니라 기주 씨.”

“이사님이라고 불러드릴게요.”

『능력자들』에서 김수현은 진설해를 사랑하지만, 집안의 압력에 못 이겨 정략결혼을 하며 극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농락』은 차기주가 악당 메시아를 죽이러 갔다가 그를 죽이지 않는 조건으로 김수현에게 ‘우린 사랑하는 사이야’라는 기억을 심게 해 두 사람의 메리 배드 엔딩으로 끝났다.

자신이 빙의한 건 『농락』이니 차기주만 조심하면 문제 될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원작 소설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가족이란 복병이 있었다. 김수현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늙고 추한 오메가에게 장가를 가지 않고, 차기주에게 납치·감금·강간도 당하지 않을지 생각해봤다.

집안일은 우시장에 팔려 가는 소처럼 되기 전에 도피 자금을 마련해서 해결하고, 차기주는 그의 가이드가 진설해라는 확신을 갖게 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여주인공이었던 그녀를 다시금 만나봐야 했다.

자신을 센터로 데려가기 위한 롤*로이스 고스트가 아트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차기주는 혹여나 자신이 도망칠세라 뒷좌석 문을 열어 먼저 타게 했다. 명성대로 배기음 없이 유령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차였다.

그러나 옆자리에 탄 차기주의 고운 이마에는 어울리지 않는 주름이 접혀 들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정작 그런 말을 내뱉은 김수현은 바늘방석 위에 앉은 사람처럼 몸을 곧추세웠다. 푹신한 좌석 시트와 상관없이 얼룩소의 반점처럼 얼룩덜룩하게 멍든 엉덩이에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김수현 씨가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요?”

아무리 제가 지금 부뚜막에 앉은 송아지 꼴로 엉덩이를 달싹이고 있다지만, 좋은 차를 얻어 타서 좋아하는 중이었는데 왜 저런 말을 하나 싶었다. 혹시 비싼 차를 좋아하는 모습이 속물 같아 보였나?

“김수현 씨의 개인사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지.”

그렇게 말하는 차기주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솟아올랐다. 아!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김수현은 『농락』의 내용을 떠올리며 차기주가 했을 법한 오해를 헤아려봤다. 구겨진 얼굴을 보니 아마도 난잡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남자의 날카로운 턱선과 높은 콧대는 험악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옆선을 이뤘다. 한숨을 내쉰 듯 차창에 뿌연 김이 서렸다. 수현은 무심하게 밖을 쳐다보는 그의 눈꺼풀을 뚫어지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유리창에 비친 수려한 이목구비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엉덩이를 맞아서 앉을 때 불편해한 거예요. 얼마 전에 새벽 3시까지 친구랑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갔거든요. 설마 이상한 생각하신 거 아니죠?”

그에게 더러운 오해 따위 받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었다. 잘해보려는 의도 따위가 아니니 선배도 이해해줄 거다.

그가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이 미끄러졌다.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농락』의 김수현은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맞은 걸 차기주가 다른 남자와 섹스한 거라 오해해도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갔다. 그 때문에 차기주는 김수현을 문란한 알파로 오인했다.

소설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숨겼는데, 이 정도 원작 비틀기가 크게 문제 되진 않겠지? 어차피 자신이 그의 가이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만 하면 그와는 더 이상 만날 일 없는 사이였다.

“왜요? 이사님이 했던 오해가 아니어서 실망했어요?”

“……그게 아니라. 그런데 김 회장도 너무하군. 도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내가 다시는 손대지 못하게 해둘 테니 앞으로는 맞고 다니지 마.”

김수현은 어떻게 무표정임에도 미안해하는 게 느껴지나 신기해서 그를 더 놀렸다.

“아닌데요? 저 때릴 데 엄청 많은데. 제가 이래 봬도 샌드백 체질이에요.”

그러자 차기주가 차창에 뒀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응시했다.

“김수현 씨.”

“네. 혹시 재미없었어요? 농담인데.”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누가 내 거에 손대는 거 기분 나쁜데. 그딴 것도 개그라고 하는 거면 그만하면 안 될까. 내가 김 회장을 찾아가 죽여버리면 어쩌려고 이래. 그딴 쓰레기도 아버지라고, 막상 죽이면 날 미워할 거면서.”

수현은 저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둔 손을 말아 쥐었다. 어째서인지 선배의 피맺힌 절규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새끼 죽여버릴 거야! 다신 너 못 때리게 내가 배를 가르고 그 창자로 줄넘기를 해버릴 거라고! 씨발. 좆 같은 새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자꾸 때리고 지랄이야!”

격분한 선배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각막에 맺힌 눈물이 시야를 뭉개놓았다. 자신은 그넷줄을 양손에 꽉 쥐며 애꿎은 발만 흙에다 마구 굴러댔다. 손에 땀이 배어 나오면서 오래된 쇳내가 옮겨왔다.

그러나 자신에게 풍기는 쇠 냄새의 출처는 녹슨 그넷줄이 아니라 코에서 나는 코피였다.

왜 깊은 수면 아래 가라앉은 돌멩이처럼 잠잠한 차기주의 얼굴을 보는데 격정적인 파도처럼 화를 내던 선배가 떠오르는 걸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수현은 묘한 기분에 메마른 얼굴로 유심히 차기주를 관찰했다.

“수현 씨 나쁜 버릇이 있네. 이건 고치도록 해.”

그가 자신의 주먹 쥔 손에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쳤다. 조금만 더 내버려 뒀으면 손바닥에 피가 났을 모양새다. 수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차기주의 얼굴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자꾸만 그의 얼굴에 눈이 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잘생겼고, 선배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실재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농락』에 빙의한 것처럼 선배 또한 이곳에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애초에 빙의가 그리 일반적인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만일 우리 둘 다 누군가에게 빙의했다고 해도 선배가 김수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긴 힘들었다. 자신 또한 선배가 누구에게 빙의했는지 알아차릴 수 없을 테고.

그렇다고 텔레비전에 나와 ‘나는 빙의자입니다. 내 원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매일 얻어터졌고 옥탑방에 살았고 그림을 취미로 그렸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선배는 성북동으로 와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꼴을 보면 아버지가 당장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둘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선배를 향한 사랑은 ‘나’와 김수현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신은 손을 주물럭대는 차기주에게서 손을 빼내었다. 내 손은 선배의 손을 잡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차기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왜 난 수현 씨가 날 피하는 거 같지? 내가 궁금해서 유니폼까지 바꿔 입고 룸서비스 온 거 아니었어?”

그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진설해와 자신의 연결점을 전혀 찾지 못한 것 같으니 자신의 무효화 능력만 들키지 않으면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맞아요. 호기심에 이사님 보러 간 거. 근데 그게 이사님의 가이드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전 가이드도 아니고요.”

차기주의 눈동자는 새벽녘 도시의 풍경처럼 고요했다. 이미 그의 안에 자신이 그의 가이드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센터에 도착해 검사를 받으면 금방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김수현은 일일이 대꾸하기도 지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터널에 진입한 차량 안으로 나트륨램프의 주황빛이 들이쳤다. 인공적인 빛은 불규칙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차기주와 김수현의 형체를 스쳤다.

어둠 속에서 차기주의 동공은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위해 눈조리개를 여닫았다. 매연과 먼지가 자욱한 터널 안에서 589nm 파장 길이를 가진 저압 나트륨램프의 빛은 사물들에 선명한 음영을 부여했다.

자동차 그림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마름모꼴의 그림자가 그들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기주는 급하게 외쳤다.

“엎드려!”

그는 어리둥절하게 있는 김수현의 머리통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가오리처럼 생긴 괴수가 그들이 탄 자동차의 천장을 날려버렸다. 괴수는 이곳에 차기주가 있을 거란 걸 알기라도 한 듯 구멍 뚫린 천장에 매달려 안을 들여다봤다. 엇나간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수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평범한 점액질이 아니라 염산이라도 들었는지 그것이 닿은 차 내부가 녹았다.

김수현은 처음으로 괴수를 만난 거였다. 공포심이 사나운 짐승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수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운전기사 또한 패닉에 빠졌는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빠르게 달리고 있던 차가 멈춰 서며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났다. 다행히 차들이 주변으로 피해 가고 있던 덕에, 차는 사고 없이 저 홀로 멈춰 섰다. 김수현은 차에서 내리기 위해 도어 잠금장치를 잡아당겼다.

갑자기 뛰쳐나간 그를 발견한 괴수의 눈알이 기괴하게 돌아갔다. 거대한 지느러미가 김수현을 감싸려고 했다. 수현은 마치 죽음을 받아들이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뜻밖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그머니 찌푸린 눈을 떴다. 그제야 자신을 끌어안은 차기주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오리처럼 생긴 괴수가 차기주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김수현은 숨을 쉬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피를 흘리는 차기주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내가 팔을 풀면…… 주저앉는 거야. 그건 할 수 있지……?”

턱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거덕거렸다. 이를 달달 떨어대느라 억눌린 신음만 나왔다. 김수현은 눈을 최대한 또렷하게 뜨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잘했어.”

자신을 조르던 팔의 힘이 사라졌다. 즉시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차기주가 등에 매달린 가오리를 떼어내기 위해 빠르게 회전했다. 종잇장처럼 날아간 괴수가 자동차 옆면에 부딪혔다.

차기주는 강력한 독을 흘리는 괴수가 무섭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괴수의 입을 공격했다. 그의 주먹이 강철로 이뤄진 것도 아니건만, 그는 주먹이 무기라도 되는 양 몸을 사리지 않았다.

김수현의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감지되었다. 차기주의 팔은 가오리 괴수의 이빨들을 뭉그러뜨리며 입속으로 들어갔다.

깊은 곳을 뒤적거리던 그가 괴수의 핵을 끄집어냈다. 입 부근이 완전히 일그러져 뻥 뚫린 가오리는 흐물흐물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지친 차기주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오지 마.”

그러나 그의 다급한 명령에 엉거주춤하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뭐가 묻었을지 몰라.”

차기주가 차 안에 있는 미니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는 손을 씻고 자동차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기절한 운전기사를 살폈다. 핸드폰을 꺼낸 차기주는 단축 번호를 눌렀다.

“여기 R21 구역인데 염산형 괴수 회수하러 와. 나와 내 가이드는 따로 이동할 거니까 차량은 두 대 필요해.”

―R21 구역은 안전지대잖습니까. 얼마 전에 게이트 청소도 했는데 괴수가 나왔다고요?

“그래, 아무래도 메시아가 보낸 녀석 같아. 지능을 가진 것처럼 내 차량만 노렸어.”

일반적으로 괴수들은 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아무나 무작위로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괴수가 출현하면 기물 파손과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가 크게 따랐다. 그런데 이번 출현은 차기주의 차만 폐차하고 종료되었다. 이것이 뜻하는 건 괴수가 암살자처럼 목표를 정하고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지구 곳곳에 게이트가 발생했고, 인간들은 이를 ‘1차 대변혁’이라고 명명했다. 이세계에서 건너온 괴수들은 인간 세계로 나와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때 이 괴수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들을 에스퍼라고 불렀다. 에스퍼들은 잘 싸웠으나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지 못하고 능력을 남발하다가 급기야 폭주했고, 괴수보다 더 큰 피해를 야기했다. 가이드는 마치 폭주하기 시작한 에스퍼의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듯 뒤늦게 나타났다. 그로 인해 인류는 안정기에 돌입한다. 세상은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게이트에서 아이템을 얻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메시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지금의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2차 대변혁을 예고하며 에스퍼들을 선동했다. 무소속 에스퍼들은 센터를 습격해 가이드는 납치하고 에스퍼는 공격했다. 괴수가 신이 보낸 사자라고 믿는 사이비 단체 ‘제네시스’까지 생겨나면서, 그들에 의해 센터는 전복되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하얀 머리칼을 가진 메시아를 보고, 차기주는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닌 사람처럼 생긴 괴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괴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물의 돌연변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높은 등급의 괴수들 중에서는 두 발로 걸으며 무기를 손에 드는 놈도 있었다. 그러니 최종 진화를 거친 괴수의 왕이라면 맨발로 복도를 달려오는 저 청년처럼 생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메시아를 둘러싼 기백은 괴수를 맞닥뜨렸을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그의 손이 차기주의 목을 날려버리기 위해 뾰족한 검으로 변했다. 차기주는 자신을 죽이러 온 메시아를 보며 한 가지 숙명을 느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듯, 그와 자신은 동시대에 공존할 수 없는 능력자라는 것을.

차기주는 날카로운 칼날을 손으로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차기주의 주먹이 메시아의 배에 파고들어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그대로 심장까지 올라가 핵을 파괴하려 했으나 메시아에게 박치기를 당해 놓치고 말았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를 쫓아가듯 다량의 피를 따라 추격했으나 센터 건물을 벗어난 메시아를 거대한 독수리 괴수가 낚아채 데려갔다. 그 뒤로 센터는 메시아를 특급 범법자로 지정, 그를 사살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쫓고 있었다.

정확한 능력치를 측정했던 건 아니었으나, 괴수를 조종하는 능력과 더불어 메시아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추측 중이었다. 센터 에스퍼들에게 붙잡힌 제네시스의 에스퍼들에게는 메시아가 그 어떠한 소원도 이뤄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존재했다.

당연히 진실은 아닐 것이다. 세뇌로 정신을 조작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니 눈속임으로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차기주는 괴수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도착한 센터 소속 트럭을 발견했다. 자신들을 데려가기 위한 두 대의 차량 또한 천장이 날아간 자동차 뒤로 다가왔다. 그는 에스퍼 직원에게 김수현과 운전기사를 차에 태워 센터로 데려가라고 했다.

그는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독성 분비물을 염려해 혼자 차를 몰고 센터로 향했다. 신체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으나 피에 젖은 옷은 먼지와 탄 냄새로 엉망이었다.

태백산에 위치한 센터에 도착한 그는 김수현을 만나기 전 샤워실로 발걸음 했다. 벗기조차 힘든 옷은 찢어서 위험 폐기물 수거함에 버렸다. 그는 허리에 수건을 묶고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세라믹 타일에는 물기가 전혀 없었다. 불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샤워 부스 중 가장 안쪽에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치부를 감췄던 수건을 풀어 수건걸이에 걸었다. 레버를 누르니 천장에 고정된 해바라기형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나오다가 점차 따뜻해졌다. 세면대 위에는 기본적인 세면도구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쓰다 보니 그리 위생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밖으로 치약이 새어 나온 치약 튜브는 뚜껑이 사라져 있고, 말라붙은 비누에는 머리카락인지 음모인지 알 수 없는 검은 털이 붙어 있다. 차기주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만 온몸으로 맞았다.

세면대 위에 부착된 거울은 어째서인지 여러 지문들이 찍혀 있었다. 손자국을 통해 이 안에서 씻은 아무개의 자세를 유추해낸 차기주는 뒷걸음질 쳤다가 물컹한 무언가를 밟았다.

아, 젠장. 콘돔. 이 새끼들이 죽으려고.

그는 불결함에 몸서리치며 수건을 챙겨 도로 샤워 부스를 빠져나왔다. 유리문을 열어서 일일이 위생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후미진 곳일수록 더럽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센터 이사로 부임한 이래 한 번도 공용 샤워실을 사용한 적이 없어서 몰랐다. 이곳을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난교장으로 써먹는다는 걸.

가이드가 있어본 적 없는지라 시도 때도 없이 붙어먹는 페어들이 안 좋게 보였다. 그렇지만 차기주 또한 페어를 찾았으므로, 자신이 경멸했던 부류처럼 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젠 함부로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입구 근처라 가장 인기가 없는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고 레버를 눌러 샤워기 물을 틀었다. 먼지와 피에 뒤엉킨 머리카락이 물을 머금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회용 샴푸를 뜯어 손에서 거품을 내고 머리에 도포했다. 손가락에 뭉친 머리카락이 걸렸으나 몇 번 빗질을 하니 부드럽게 풀렸다.

유리 칸막이 안으로 온수가 내뿜는 김이 차올랐다. 군장을 메고 전쟁터를 누볐던 어깨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자 더욱 넓어 보였다. 갈비뼈부터 시작해 골반까지 이어진 복직근이 굵직하게 파여 물방울을 여러 가닥으로 나눠 흘려보냈다. 코어가 발달한 신체는 어느 곳을 봐도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깨에서부터 척추 기립근으로 떠내려간 물줄기가 위로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 보조개에서 잠시 굽이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기주는 일회용 보디 워시 여러 개를 뜯어 몸에 문질렀다. 부드러운 구석 하나 없는 제 몸을 문지르며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괴수의 흔적을 지웠다. 조금이라도 김수현에게 해를 끼칠 만한 건 원천 차단해야 한다.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 하수구로 흘러들던 물소리가 멎었다. 차기주는 젖은 몸을 수건으로 문질러 물기를 닦아냈다. 그는 하반신에 수건을 두르고 샤워 부스를 나왔다.

아무도 없던 탈의실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을 마친 에스퍼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땀내를 풀풀 풍겼다. 그들은 이런 곳에서 뵐 수 없었던 센터 이사님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차기주는 아공간에 예비용으로 놔둔 브리프와 양복을 입기 위해 수건을 풀었다.

“헉.”

“말도 안 돼.”

“다리가 세 개야.”

누굴 괴수로 아나. 차기주의 이마 위로 혈관이 툭 튀어나왔다. 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브리프를 챙겨입고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하얀 와이셔츠에 두 팔을 꿰었다. 그러곤 에스퍼들의 열렬한 시선을 받으며 하의를 챙겨 입었다. 검은 정장 바지 안으로 와이셔츠 밑단을 집어넣자 탄탄한 상체가 부각되었다.

차기주는 마무리로 검은 재킷을 걸쳤다. 그런다고 위압감 넘치는 덩치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넥타이를 매는 대신 와이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곧은 쇄골과 목덜미가 경직된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검은 양말이 고급 구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착했다. 차기주는 샤워실을 나오자마자 검사실로 향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이드, 아니 에스퍼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 * *

센터에 도착한 김수현은 직원에게 부상이 없는지 확인받고 검사실로 안내되었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온갖 전자기기들이 들어차 있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연구원이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이름, 나이, 성별, 형질과 같은 아주 간단한 인적 사항이었다. 김수현은 손에 든 볼펜을 돌리기만 하고 적지 않았다. 연구원이 어서 적어달라며 재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문항지를 채웠다.

“지금 받으시는 검사는 가이드인지 알아보는 검사고요. 파동 크기 검사받으실 때 약간 아플 수 있어서 진통제 놔드릴 거예요.”

“저 가이드 아니에요.”

“아, 네. 검사받으시면 결과 나올 거예요.”

이미 차기주 이사의 말로 자신을 가이드라고 확신한 상대에겐 그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았다. 연구원은 김수현에게 팔을 내밀라고 했다. 고무줄로 팔뚝을 묶고 혈관을 찾아내 알코올 솜으로 문질렀다. 주사기에 앰풀을 채운 연구원이 그것을 김수현의 팔뚝에 주사했다. 폐주사기 수거함에 자신이 맞은 주사기가 버려졌다. 구멍 난 피부 위에 귀여운 캐릭터 밴드가 붙여졌다.

“탈의실 가셔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검사실 들어가세요.”

김수현은 전시회에서부터 입고 온 정장을 벗어 로커 룸에 넣었다. 차라리 검사를 통해 가이드가 아니라고 밝혀지는 게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몰랐다.

그는 안부도 물을 겸 자신의 검사 소식을 알리기 위해 진설해에게 센터에 왔다고 연락했다. 문자를 받자마자 그녀 쪽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김수현은 초록색 통화 버튼을 스와이프했다.

“여보세요.”

―김수현 씨가 왜 센터에 와요?

“이사님이 자기 가이드라며 절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가이드 검사를 받으라고 센터로 데려오더군요. 진설해 씨, 이사님이랑 매칭 검사 안 했어요?”

―……중간에 이사님이 파투 내서 못 받았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잠깐 얼굴이나 봐요.

“17번 구역에 있어요. 파동 크기 검사한대요.”

―네? 17번 구역이요? 거긴 에스퍼들 심문하는 곳인데.

김수현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굳었다. 연구원이 가이드 검사라고 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진설해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침묵하였다.

―……이사님이 김수현 씨 능력에 대해 알아낸 거 아니에요?

“혹시 가이드 검사 전에 주사 맞습니까?”

―아니요.

자신이 가이드가 아니라고 우겨서 그가 합리적인 의심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스퍼인데 파동을 잠재울 만한 어떤 능력이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알아보려고 한 거라면?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주사를 놓은 것이란 말인가.

김수현은 도로 자신의 옷을 챙겨 입기 위해 허리끈을 풀었다. 가운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김수현 씨, 아직 탈의 중이신가요?”

연구원이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을 안 하자 연구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가 문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김수현 씨, 계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가운을 벗고 정장을 챙겨 입기에는 늦었다. 김수현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풀었던 허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탈의실에 들이닥친 연구원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했다.

“무슨 일이죠?”

“아, 도망간 줄 알고. 얼른 나오세요.”

연구원이 저도 모르게 본심을 말했다. 그 사실을 그는 자각하지 못했는지 김수현의 옆에 바짝 붙어서 검사실로 데려갔다. 안에는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미 의자 하나에는 웬 남자가 앉아 있어서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정면에 한쪽 벽면을 차지한 거울이 보였다. 김수현은 얼굴을 손으로 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거 빼도 박도 못하는 취조실이잖아.

“안녕하세요, 김수현 씨. 저는 정신 능력을 가진 A급 에스퍼 정석훈이라고 합니다.”

씹, 차기주 새끼. 날 속였어.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가 맞은 주사는 뭔가요? 마취제라는데 혹시 절 고문하실 건가요?”

“하하, 그런 거 아닙니다.”

정석훈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달라고 했다. 김수현은 여기서 자신이 난동을 부려봤자 대우만 안 좋아질 걸 알아 얌전히 그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정석훈의 능력에 무효화를 걸었다.

“김수현 씨, 당신은 가이드입니까?”

“아니요.”

“그러면 에스퍼입니까?”

매직미러를 통해 김수현을 지켜보고 있던 차기주는 대답을 기다렸다.

“예.”

진실을 말한 김수현은 당황해서 정석훈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능력 무효화가 통하지 않았다. 정석훈이 순순히 자신의 손을 놓아줬다. 패닉에 빠진 김수현은 다시 그에게 능력 무효화를 걸었다.

“정말 놀랍네요. 불안정하던 파동이 순식간에 가라앉다니.”

정석훈은 손목에 찬 시계형 파동 측정기를 확인했다. 수치가 0이었다. 일부러 김수현이 능력을 사용하도록 정석훈이 정신 능력을 가진 에스퍼라고 속이고 손을 잡은 거였다. 실제 그의 능력은 화염이었다.

김수현이 진실을 말한 건 미리 맞혀둔 자백제 덕이었다. 만일 차기주의 예상처럼 김수현이 무효화 능력을 가졌다면 정신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테니까.

차기주는 모든 수를 내다보고 치밀한 판을 짜 김수현의 정체를 순식간에 까발렸다. 김수현은 취조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구로 달려갔다.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김수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생긴 차기주의 얼굴이 공포 영화 속 살인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는 김수현의 공포에 젖은 눈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설마 날 두고 도망가게, 수현아? 그러다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

“이거 놔요.”

차기주의 손이 수현의 어깨를 단단히 틀어잡았다.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은 먹이를 사냥한 매의 발톱처럼 강인했다.

“나무꾼이 네 날개옷 훔쳐서 도망 못 쳐. 그 꼴로 어딜 가려고 해.”

젠장, 젠장. 가운을 입힌 게 이런 용도였어?

“잘해줄게. 사례도 섭섭지 않게 해줄 거고, 네가 원하는 건 다 네 손에 쥐여줄게. 그러니 정중하게 말할 때 내 페어가 되는 게 좋을 거야.”

차기주가 무언가 뒤늦게 생각나기라도 한 듯 진한 눈썹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 물론 앞으로 네 방은 못 벗어나. 혹시 누가 너를 빼앗으려고 하면 어떡해, 너는 내 에스퍼인데. 그래도 가끔 산책은 시켜줄게.”

“당신 미쳤어?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가두는 게 어딨는데!”

김수현은 주먹으로 차기주의 가슴을 내리쳤다. 그는 그까짓 거 전혀 타격이 없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진심으로 안타깝다. 네가 오메가였으면 각인하고 좀 더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었을 텐데. 알파라 그냥 도망치면 땡이잖아. 그치?”

“언제부터 알았어요? 내가 에스퍼라는 거.”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해?”

불길함은 벌어진 가운의 목깃으로 서늘한 한기가 되어 돌아왔다. 수현은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채 차기주를 올려다봤다.

“네가 가이드가 아니라고 자신하기에 그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에스퍼겠구나 싶었어. 난 가이딩이 불가능한 체질이거든. 그래서 네가 가이드가 아니라고 잡아뗄 때 오히려 확신했지. 날 위해 존재하는 페어라고.”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전시회장에서 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확신했다는 거네요.”

“그래.”

가이드 검사를 하자며 차에 태워놓고는, 내가 에스퍼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그는 애초에 자신을 놓아줄 생각 따위 없었다. 터널에서 김수현을 구해준 것도 단지 파동을 잠재워줄 유일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마음의 빚을 졌다고 여겼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 차기주는 그냥 자신의 소유물을 지킨 것뿐이니까.

소설 『농락』의 내용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오히려 차기주의 눈에 몇 개월씩이나 일찍 띄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이대로 그의 손에 끌려가면 피폐물 BL 소설의 주인공처럼 감금된 채 차기주와 메시아의 합작으로 ‘기억’이 심어지겠지.

만일 이게 소설이라면 그렇게 끝을 맺겠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독자가 볼 수 없는 결말 이후의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야 했다. 거짓된 기억에 휘둘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믿으면서 키스하고 자발적으로 몸을 열겠지. 그럴 순 없다. 선배를 두고 다른 남자랑 잘 순 없다.

차기주가 자신에게 원하는 건 오직 ‘가이딩’뿐이다.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다. 『농락』의 김수현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뇌한 남자다. 그런 자의 소유물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감금당한 채 강간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감금되는 상황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강간만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맞아요. 전 무효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예요.”

대리석을 보고 그 안에 숨은 천사를 봤다던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를 ‘대리석에서 필요 없는 나머지 돌들을 깎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의 작품이 가장 아름답고 완전무결하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그런데 차기주는 그 천재 예술가가 만들었다는 완전무결하고 잘생긴 청년, 다비드를 멱살잡이라도 할 것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얼굴도, 그 성질머리도.

그래서인지 미모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그의 얼굴은, 종종 사람이 아닌 대리석 조각상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차라리 무표정으로 있을 땐 그를 무생물 취급할 수 있어서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눈매가 가늘어질 때면 새삼 차기주가 얼마나 아름답게 생겨먹은 생물인지 실감 나 판단력이 흐려질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이상하게도 희뿌옇게 지워진 기억 속 선배의 목 위로 차기주의 얼굴이 겹쳤다. 김수현은 정신을 다잡고 하려던 말을 이었다.

“가이딩이라고 해서 굳이 저랑 손을 잡거나 키스하거나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저한테 가이딩 받고 싶으면 절 건드리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이사님의 파동을 잠재우고 나면 꼭 가이드를 불러주시고요. 저도 가이딩을 받아야 살죠. 그게 제 조건이에요.”

“좋아. 그러도록 하지.”

“말로만 하지 마시고 계약서 써주세요.”

어차피 그런 종이 쪼가리는 있어봤자다. 차기주가 마음만 먹으면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제재를 가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조금이라도 신사적으로 굴 때 안전장치를 해두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었다.

취조실 문을 막고 서 있던 차기주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밀실에 남아 있던 정석훈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정석훈을 흘깃 쳐다본 차기주가 그에게 종이를 가져오라는 잔심부름을 시켜 내보냈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기주는 종이와 펜을 가져온 정석훈에게 스위스 은행에 김수현의 계좌를 만들어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감금하는 조건으로 정말 돈을 주려는 건가 싶어 기가 찼다.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낀 차기주가 자신을 돌아보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가이드가 되어주면 1조 원을 주겠다고 한 건 농담이 아니었어.”

“아아, 네. 근데 갇혀 사는데 돈이 무슨 소용일까요. 무인도에 표류하는 사람의 자산이 1조 원인 게 이사님께는 중요한가 보죠?”

차기주는 두 손을 모으고 깍지를 꼈다. 김수현의 비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닥치고 얌전히 굴라며 겁주고 싶었지만, 그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재벌가 아들이었다. 개복치처럼 포획하자마자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그에게는 오직 김수현이란 희망밖에 없었다.

남들은 영광으로 여겼을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했으면서 김수현은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일단은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잘 달래둘 생각이었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발적으로 가이딩을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하는 행동만 봐서는 쉽지 않을 듯싶었다.

차기주라고 해서 이렇게 강압적으로 김수현을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흰 종이에 페어 계약서를 적어 내렸다.

페어 계약서

에스퍼 차기주와 에스퍼 김수현은 페어를 맺는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김수현은 차기주의 파동이 불안정해지면 어느 때라도 능력을 사용해 파동을 가라앉혀준다.

1.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1조 원 상당의 보상을 지급한다. (기간 20**년 **년 **일 이내)

2. 차기주는 김수현을 겁탈하지 않는다.

김수현이 페어 계약서 내용을 보더니 유사 성행위도 금지한다는 조건을 추가해달라 했다. 차기주는 그 내용을 세 번째 조건으로 적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고도 적어주세요.”

도대체 김수현이 자신을 어떻게 보기에 이런 조건들을 내거는 건가 싶었다. 이를 악문 차기주의 고운 이마에 혈관이 곤두섰다. 그는 볼펜으로 종이를 꾹꾹 눌러서 네 번째 조건을 적었다.

“그리고 나 학교는 보내줘요. 때려치울 생각 없으니까.”

김수현은 어리지만 결코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분명 갇혀 지내게 될 거라 했건만 이에 반하는 제안을 해댔다.

만일 그가 공식적인 검사를 통해 센터 소속이 되었다면 센터 이사인 자신을 어렵게 여겼을 텐데, 일반인으로 살아와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자기 앞에 있는 게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자꾸만 협상을 하려고 드는 거였다.

차기주는 굳이 김수현의 겁대가리를 짓밟지 않았다. 살면서 김수현만큼 예쁘장한 걸 본 적 없어서 그런가, 몰랐는데 자신은 예쁜 것에 취약한 듯했다.

“위험해, 날 노리는 상대가 많아서. 그중 주제 모르는 것들이 너까지 건드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요. 이사님이랑 페어를 맺지 않으면 나한테 일어날 리 없는 일인데. 설마 그것 때문에 나더러 자퇴를 하라는 건 아니죠?”

차기주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바락바락 대드는 김수현을 눈에 담았다.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를 내놓으라고 주인의 손가락을 깨무는 정도의 타격감이었다.

“알았어. 그럼 센터에서 학교를 다니도록 해. 헬기로 이동하면 한 시간 안에 서울까지 갈 수 있으니까 내가 붙여주는 에스퍼랑 동행하고.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PL 그룹 따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김수현은 이미 소설 『농락』을 통해 알고 있는 협박 레퍼토리가 나오자 코웃음을 쳤다. 차기주는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김수현의 태도에 고개를 내저었다.

김수현이 앞으로 생활하게 될 장소는 센터 본관 건물에 위치한 옥탑방이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옥탑방을 본 그가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냐고 펄펄 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얼굴 하나 통과하기 힘들 만큼 작은 창문에조차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영화를 보면 죄수가 수년 동안 벽을 수저로 파내 탈출하던데, 이곳은 그럴 수도 없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벽 안으로 철벽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수현의 불만대로 이곳은 죄를 지은 에스퍼를 가두는 징벌용으로 사용되는 방이었다. 그래도 감옥 같은 외관과 달리 실내로 들어가면 그렇게 험악하지 않았다.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김수현을 위해 그림 도구를 구비해두라 지시한 덕분에 내부는 아트 스튜디오를 방불케 했다. 그림물감을 색깔별로 분류해둔 선반을 벽에 달고, 다양한 호수의 캔버스를 꽂아둔 책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한쪽 벽면에는 대형 냉장고와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도록 마련된 인덕션, 그리고 싱크대가 아일랜드 식탁을 중심에 두고 ‘ㄱ’자를 이뤘다. 비록 작업 공간과 부엌, 침실이 벽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 원룸 형식이었지만 공간만 보자면 32평으로,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정도 평수에서 가족 단위로 살 테니까.

김수현은 물건을 검품하는 직원처럼 깐깐하게 집 안을 둘러보다가 크림색 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천장을 확인했다. 천장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탁 트인 공간을 사각지대 없이 비췄다.

“설마 화장실에도 카메라 설치한 건 아니죠?”

“거긴 없어.”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은 핸드폰을 들어 와이파이를 켰다. 연결할 수 있는 기기 목록에 ‘KSHobservation3’라는 해괴한 이름이 떴다.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초소형 카메라에서 잡힌 신호였다. 얼마나 정직한 사람이면 자신의 이름 이니셜 뒤에 ‘관찰3’이라고 붙였을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을 정도였다.

김수현은 이것 좀 보라며 차기주에게 핸드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저기요, 차기주 이사님. 혹시 변태 새끼세요? 제 벗은 몸은 찍어서 어디다 쓰시려고요.”

“……이건 내가 사과하지. 그런데 정말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라고 지시하진 않았어. 당장 해체하라고 할게.”

아무리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어도 자신은 『농락』의 김수현처럼 살 생각이 없었다. 수현은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단호한 척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팔짱을 단단하게 꼈다. 직원이 와서 화장실에 설치한 카메라를 회수하는 걸 쫓아가 직접 감시하기도 했다.

“이사님도 이만 가보세요.”

감시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는 직원의 등을 보며 김수현은 열린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식사 차려줄게.”

“됐거든요. 제가 앞으로 해야 하는 건 이사님 가이딩이지, 이사님과의 동거 생활이 아니잖아요.”

차기주는 예민한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구는 김수현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갑자기 페어를 맺자며 무작정 가두면 수현이 아닌 누구라도 이렇게 분노에 찰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구두를 신었다.

징벌방 문을 닫자마자 안에서 씨발, 씨발 거리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신이 S급 에스퍼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테니, 배 째라는 식으로 구는 거지 싶다. 차기주 입장에서는 차라리 김수현이 기죽지 않고 화내는 게 나았다. 우울증이니 뭐니 하며 목을 매달거나 손목을 긋는 짓을 하면 매우 곤란했다. 사실상 집 안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김수현의 탈출을 막기보다는 김수현을 김수현 자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고작 애송이 하나 도망간다고 자신이 잡지 못할 리 없으니 말이다.

센터에 자신의 페어를 가둬뒀으니 차기주 또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태백으로 들어와야 할 성싶었다. 그는 사내 부지 안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방공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이 나라 대통령이 차기주를 시한폭탄 취급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방공호 벽은 80cm로, 핵폭탄이 터져도 그 열과 압력을 차단할 수 있는 수준의 두께였다. 아마 그는 차기주가 폭주하기 전 거기로 기어들어가 무덤으로 삼길 바라며 만들어뒀을 것이다. 방폭용으로 제작된 문은 1t을 웃도는 무게였기에 함부로 여닫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걸 숙식용으로 줬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66억이나 들여서 만들어놓은 방공호였다. 그곳에는 냉난방 기능이 있는 공기 여과 장치와 태양열로 충전되는 발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기주는 사다리를 타고 구덩이로 내려가 육중한 문에 설치된 잠금장치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잠금장치가 풀렸다. 육중한 문은 은행 금고와 같은 구조였다. 열심히 자동차 핸들을 돌리듯 문에 붙은 장치를 돌려서 열어야만 했다. 차기주는 안으로 들어가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내부는 생활에 밀접한 업무용 책상, 단출하기 그지없는 킹사이즈 침대, 리클라이너 소파 같은 가구가 갖춰진 게 다였다. 설마 멀쩡한 정신으로 여기에 들어와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김수현이 감금당했다고 억울해하면 너만 그런 게 아니라며 여길 보여줘 동정심이라도 살까 싶었다.

화장실은 어떻게 되어 있나 살폈다. 다행히 세면대와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변기는 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 우주선에나 쓸 법한 중력 공급법으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물을 흘려보내는 일반적인 배수 시스템이 아닌 진공청소기처럼 강하게 빨아들여 배출시키는 방식인 것이다. 홀로 우주에 내던져진 것처럼, 모든 것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거라면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는 이 방공호를 에스퍼들이 와인 저장실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덕에 라벨이 보이도록 와인을 비스듬히 놓은 상자들이 즐비했다. 차기주는 나무 상자에서 와인 병 하나를 꺼냈다. 1993년에 생산된 빈티지 와인, 보졸레 누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싸게 팔린 적이 있는 유명한 녀석이었기에 기주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코르크 마개가 부서지지 않도록 와인 오프너의 나선형 스크루를 살살 돌려서 박아 넣었다. 그리고 와인 잔을 찾아내 화장실 세면대에서 씻었다. 주인 없는 방공호를 그동안 다들 얼마나 열심히 애용했는지 말린 과일과 초콜릿, 견과류, 치즈와 같은 안주들이 굴러다녔다.

차기주는 와인 잔에 레드와인을 따른 뒤, 시계 방향으로 돌려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와인 향이 꽃처럼 피어나며 스모키한 느낌이 강해졌다. 첫 모금을 마셨을 때 혀에 엄청난 풍미가 퍼졌다.

그 향을 한껏 음미하던 차기주는 문득 김수현에게도 와인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김수현이 뭘 하고 있나 보기 위해 업무용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사원 번호를 입력해 김수현의 징벌방 화면을 띄웠다.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식탁이 말끔했다. 차기주는 조금 늦게 먹으려는 건가 싶어 기다렸다. 그러나 김수현은 아예 굶을 작정인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였다. 딱 9시까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도 식사를 하지 않으면 전화해서 꾸짖을 셈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한 손에 와인 잔을 든 채 김수현의 실루엣을 감상했다.

이불을 돌돌 말고 있어서 꼭 애벌레 같은 저 뭉치가 뭐라고 이렇게 눈길이 가는 걸까. 자신을 구원해줄 유일한 존재라서 그런 걸까.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생체 실험을 당했을 때, 차기주는 자신이 병신이 되거나 죽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우수한 에스퍼가 되어서 그곳을 탈출했다.

물론 그게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SS급 에스퍼가 그동안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못한 건 그것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능력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태양 빛에 눈이 지져지는 것 같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고막을 강타하는 것만 같은 고통이 따라다녔다. 모든 신경이 한껏 곤두서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였다.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체질임에도 불안정 파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자신을 위한 가이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기적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나마 품지 않으면 절망에 잠식되어 세상을 멸망시켜버릴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김수현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렇게 고요한 세상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드높은 신이었던 자신이 무력한 인간으로 추락하였음에도 그 타락은 달콤했다.

차기주는 감금된 김수현을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셨다. 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차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에 전파가 잡히지 않아 잠시 방공호를 나왔다. 통화 한 번 하겠다고 1t씩이나 되는 문을 여는 짓은 번거로운 일이었으나 그는 기꺼이 그 수고를 감수했다. 김수현이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 않아 무려 열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통화가 연결되었다.

“김수현,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식사하지 못해?”

―안 먹어요.

“하, 이 애새끼가…….”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버릇없는 김수현의 행동에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혹시나 하고 방공호로 돌아와서 관찰했지만, 김수현은 그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잠들어버렸다. 차기주는 인내심 좋게 아침은 먹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날, 정작 잠에서 깬 김수현은 씻고 나와서 이젤 앞에 앉아 그림만 그렸다. 차기주 또한 덩달아 식사를 거르고 출근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비서에게 업무를 보고 받으면서도 컴퓨터 화면 속 김수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오전 업무를 하는 내내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김수현이 뭘 하나, 혹시 식사를 하지는 않나 하며 화면을 힐끔댔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그는 예술혼을 불태우느라 끼니를 챙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차기주는 이게 김수현이 하는 협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저러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지?”

김수현이 체격 좋은 알파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기주는 마치 그 몸이 버들잎보다 가녀린 것처럼 굴었다. 만일 김수현을 멸종 위기 1급으로 선정해 보호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밥을 굶는 김수현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차기주는 사내 전화로 김수현에게 연락했다.

“점심 보낼 테니까 먹어.”

이번에는 아예 대답이 없었다. 차기주는 사람을 보내봤자 김수현이 먹지 않을 거란 생각에 직접 임직원 전용 식당을 찾아가 초밥 도시락을 주문했다. 일류 일식 셰프가 검은 자개함에 연어, 광어, 성게, 장어, 간장 새우, 날치알, 참다랑어, 꽃등심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초밥을 정갈하게 담아줬다.

그는 초밥을 먹기 전 김수현의 빈속을 달래줄 잣죽도 챙겼다. 센터 본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비상 출입구로 나와 건물 외벽에 있는 철제 계단을 올랐다. 구두가 철제 계단과 부딪히며 카랑카랑한 소리를 냈다. 거침없던 그의 발걸음은 막상 현관문 앞에 도달하자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차기주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정장을 정돈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수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 과정이 꽤 오래 걸렸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 노크를 했다.

“수현아,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젤 앞에 앉은 김수현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차기주는 가져온 초밥을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뒀다.

“언제까지 굶을 거야.”

“내가 밥을 먹든 안 먹든 이사님이 무슨 상관인데요?”

김수현의 말처럼 전혀 상관없긴 했다. 차기주는 가이딩만 받으면 되니까. 그렇지만 그는 김수현이 밥을 안 먹는 게 몹시 신경 쓰이고 못마땅했다. 그러니 이번엔 기필코 식사하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먹어. 내가 직접 입에 처넣기 전에.”

“해볼 테면 해봐요.”

둥그런 밤톨 같은 머리통이 약 올리듯 캔버스만 주시했다. 생긴 게 지랄맞게 예뻐서 그런지 성격도 지랄맞았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턱관절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고 초밥을 쑤셔 넣는 상상을 했다. 그 예쁜 입을 벌린 채,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는 김수현의 얼굴은 꽤 볼 만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초밥이 아닌 자신의 성기를 그 입에 집어넣는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순간 그의 심장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심장판막이 펄떡거리며 빠르게 피를 흘려보냈다. 차가운 인상의 얼굴과 달리 차기주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리 눈썰미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 그가 발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차기주는 한참 동안 무시당하다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밥 먹을래.”

“주말엔 집에 보내주세요.”

“안 돼.”

“그럼 저도 밥 안 먹어요.”

“네가 사택에서 지내면 널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스퍼들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알아?”

“그럼 학교는 왜 허락해준 건데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 안 하세요? 그냥 이사님은 절 햄스터처럼 작은 공간에 가둬놓고 지켜보고 싶은 거잖아요.”

김수현은 자신의 단식투쟁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실험 중이었다. 그리고 차기주의 인내심은 고작 반나절밖에 안 갔다. 그가 아무리 강한 S급 에스퍼라고 해도 그의 유일한 희망인 제 앞에선 그저 좆밥인 것이다. 이 정도면 도망쳤다가 붙잡혀도 무사할 듯싶었다.

캔버스에 잘못 그린 선을 지우개로 지우고 제도용 빗자루로 털어냈다. 의자에서 일어난 김수현은 차기주가 아일랜드 식탁에 놓아둔 자개함을 곁눈질했다.

“손 씻고 올게요. 이사님도 식사 전이면 같이 먹든가요.”

자신의 한마디에 차기주가 재킷 단추를 풀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말 잘 듣는 개처럼 바로 자리에 착석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그가 자신과의 식사를 기대하는 것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세면대 물을 틀고 손을 적셨다. 비누로 손날에 묻은 4B 연필의 흔적을 꼼꼼히 문질러서 지웠다. 화장실을 나오자 식탁 위에 곱게 모셔뒀던 자개함이 열려 알록달록 예쁜 초밥을 자랑하고 있었다. 수현은 젓가락이 놓여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먼저 잣죽부터 먹고 속 달래. 빈속에 날생선 바로 먹으면 탈 나.”

“그걸 알면서 왜 초밥을 싸 오셨어요?”

“네가 좋아하잖아.”

날카로운 김수현의 질문에 차기주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흠칫 놀랐다. 김수현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 차기주를 의심하며 째려봤다.

“설마 내 입맛까지 뒷조사한 거예요?”

“그건 아니야. 그냥 직감. 내가 감이 좀 좋거든.”

말하는 차기주도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수현은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잣죽을 한술 떴다. 빈속이라 뒤틀리는 것 같았던 위장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차기주는 제사상을 받은 조상님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김수현은 잣죽 한 그릇을 빠르게 해치운 다음, 젓가락으로 연어 초밥을 집어 먹었다. 연주황빛 연어가 이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며 기름지고 고소한 맛을 냈다. 게 눈 감추듯 초밥을 집어 먹다가 뒤늦게 머쓱해져서 차기주는 뭐 하고 있는지 슬쩍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안 드세요?”

“아, 난 괜찮으니 먼저 먹어.”

차기주는 김수현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김수현은 저 혼자 다 먹어버린 게 민망했지만 도망치려면 기운이 있어야 한다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다행히 감금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게도 핸드폰을 빼앗기지 않은 덕에, 누나에게 연락해둔 상태였다.

누나가 자신을 구할 에스퍼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차기주가 바보는 아니니 이 정도 시나리오는 예상했을 텐데, 혹시 자신이 도주하나 안 하나 시험해보려고 핸드폰을 빼앗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차기주는 자신 한정 좆밥이니까 마음 놓고 도주 계획을 실행해보기로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생각보다 훨씬 자신에게 약한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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