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잠시 화를 내던 모습에서 보여줬던 차가운 모습.
낯선 모습. 그때의 표정과 행동들은 이제 보니, 모든 게 양반이었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성민의 얼굴.
그 때와는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상대로 하여금 절로 긴장하게끔 하는 차가운 얼굴.
그 얼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지금 성민이 얼마나 심기가 좋지 않은지를 알 수 있었다.
“나태민....”
마치 살인충동이라도 이른 듯한 살기어린 음성으로 성민이 말한다.
“내 이름 석자 걸고, 내 친구 이름 석자 걸고...
.....도민환이라는 그 이름 석자 걸고 맹세한다....”
“…….”
“네 놈을 그 자식 곁으로 보내주겠어. 반드시!”
정말 큰일이라도 치를 듯 성민은 위태로워 보였다.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태민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뀔 뿐
아주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긴장을 하진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다.
휙― 예고 없는 공격이 날아갔다.
휙― 제법 묵직한 힘이 바람을 가르고 아찔한 충격을 전해준다.
성민은 무작위로, 정말이지 무작위로 주먹을 내리 뻗었다.
오른다리를 번쩍 들어 작지만 큰 타격을 가했고,
왼쪽다리를 번쩍 들어 날카로운 킥을 날렸다.
휙― 바람이 갈리지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몸을 낮추고 방어하는 태민.
휙― 하고 연속적으로, 쉴 세 없이 날아오는 매서운 공격의 흐름을 읽기 시작한다.
잔뜩 화로 일그러져 이성보다는 감성이 월등한 성민과는 달리
상당히 냉정하고 차분한 움직임으로 성민의 패턴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태민.
한두 번 싸움을 해 본 풋내기가 아니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연속적으로 내리꽂는 공격은 분명,
현재에는 태민이 불리해 보일지 몰라도 이대로 계속 간다면 필시,
성민이 분리하게 될 것이다.
먼저 지쳐버리고 말 테니. 먼저 지쳐버리고 말 테니.....
휙― 이번에는 태민 쪽에서 공격이 감행 되었다.
제법 큰 힘이 턱 끝에서부터 전해져온다. 정신이 다 번쩍 든다.
퍼억― 그러나 곧장 매서운 주먹을 날리는 성민.
처음에는 일방적인 공격으로 성민의 주먹이 훨씬 많은 수를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마치 원터치를 하는 양, 한번씩 주고받는 꼴이 되었다.
픽, 하니 성민 쪽에서 주춤 물러나고 쓰러지고 나면,
다음번에는 태민쪽에서 주춤 물러나며 중심을 잃는 일이 생겼다.
넓디넓은 공터를 뱅뱅 돌아가면서 메마른 땅을 수차례 구르는 두 사람.
그리고 언제부턴지 모르게 터져버린 이 안에서의 전쟁.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매서운, 위협적인 행동들. 소리들.
둔탁한 소음들. 정해지지 않은 방향으로 막무가내로 날아다니는 위협적인 무기들.
그리고 그 사이로 간간히 들려오는 미세한 신음소리들.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들. 서로를 향해 욕설을 난발하는 거칠고 투박한 함성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하아... 하아.....”
입가에 번진 피를 손등으로 한번 쓱, 훔쳐내고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성민.
예상대로 너무나 빨리 지쳐버린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정확히 민환을 위해선지, 아니면 슬퍼하는 도이를 위해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난생처음 느껴본 슬픔이라는 감정에,
쉽게 동요하는 감정에 대한 호소인지도 모를 공격. 이 엄청난 일.
하지만 큰 싸움 앞에서의 신중치 못한, 치우치는 감정대로 몸을 움직이는 성민의 모습.
생전 처음 보이는, 백송도, 민진오도, 이글의 많은 녀석들도
다 놀라고 안타까워하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성민의 불안한 모습.
도대체 성민은 왜 저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좀처럼 냉정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친구를 위한 복수도 좋다지만...
과연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고도 웃을 수 있을까?
저 하늘 위에서 성민을 내려다보는 민환이.... 웃어줄 수 있을까?
“하아... 하아....”
서서히 지쳐가는 성민. 눈앞이 뿌옇게 바래져가는 현실에 그저 절망스럽다.
내가 고작 이 것뿐이 되지 않았던가....
이렇게.... 어찌 보면 사사로운 감정 하나에 치우쳐
큰일을 흐지부지하게 매듭짓는 한심한 놈이었던가....
고작 이 정도에 헐떡이는 나약한 놈 이었던가...
성민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했다.
그러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정신을 부여잡고,
여전히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세이지만....
제 입으로 말 했던 것처럼 친구의 이름으로.... 도민환이라는 그 이름 석자로...
버티는 성민이다.
그 이름석자에 미안하지 않도록... 그 이름석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감정으로 인해 상황판단을 못한다면 오기로 인해 버티는 성민이었다.
곳곳에서 신음을 호소하는 이들은 점차적으로 늘어갔다.
어느 새인가 초대 라이더 구성원조차도 이글을 도와 태민을 공격한다.
어차피 벌어진 싸움 동네 불구경 하듯 지켜 볼 수도 없었지만
독기어린 시선으로 분노가 폭발하는 듯한 애처로운 모습으로 했던 말처럼
가족을 잃고 우상을 잃었다는 현실이 그들의 분노하는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부릉― 부릉― 부르릉―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는 말이 절로 튀어 나오는 상황에,
양쪽이 한참 대립 대는 가운데, 어마어마한 진동이 지표로부터 느껴진다.
어마어마한 소음이 귓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칠흑 같은 어둠을 흩트려 놓는 눈부신 빛이 선명하던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리고 등장한, 하나같이 검은 하늘처럼 검은 옷을 입은 개미 때.
일순간... 분산하던 이 곳이, 엉망진창 뒤죽박죽 난장판이었던 이 곳이 조용해졌다.
그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상준.
저벅저벅 크지 않은 보폭으로 조용히 거리를 좁혀오는 상준의 표정이 차게 얼어있었다.
바람에 망가진 듯 보이는 머리는 아마도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듯 보인다.
“나 태민.....”
너무 감정에만 치우친 나머지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 빼버린 성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가쁜 호흡을 몰아 내쉬며 거칠게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몇 번이고 닦아낸다.
태민은 그런 성민의 앞에서 다소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런 태민에게 조용히 상준이 말 한다.
“일차 전을 치르느라 수고가 많았군.
그 정도면 몸은 다 풀어 놓은 듯 보이는데, 어때? 이제 나를 상대 해 보는 게.”
“기다리던 중 반가운 말이군.”
태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린다.
“언젠가는 최상준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후훗. 참 재밌는 세상이야. 그렇지?”
“...그래... 참 재밌는 세상이군....
너 같은 놈이 감히 제 멋대로 우리의 이름에 먹칠을 하질 않나...
본래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인재를 죽여 놓지 않아.... 훗, 참 좆같은 세상이지.”
“인재라. 참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놈들이로군. 그런 약해빠진 놈을 다 인재라 칭하다니.”
“약해빠진 놈이라... 과연 그럴까?
치사하고 야비한 수작으로 한 생명을 너무나 쉽게 앗아가 놓고도
약해빠진 놈이라 말 할 수 있다니. 훗. 기가 막혀 말이 다 안 나오는 군.”
“야비한 수작이라.... 후훗.”
“호언장담 하는데, 네 놈과 도민환 이 두 사람이 일대일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뤘다면,
겨뤄보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괜히 도민환이.... 심심해서 차기 총장 후보감으로 앉아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제는 없는, 이제 다시는 존재 할 수 없는,
이제 다시는 함께 웃고 떠들 수 없는 민환의 생각에 상준의 두 눈가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상당히 자신만만하게 얘기 하는 군. 하지만 이미 얼마 전에도 한번은.....”
“그 때, 아무런 대책 없던 그 모습과 어제의 모습은 분명 달랐을 텐데....?”
딱 부러지는 상준의 말에 태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민환을 만났던 날과 어제의 싸움은 정말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또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다면 그건 분명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제의 그 싸움이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었다면,
정말 상준의 말처럼 결과는 장담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멀찌감치 에서 민환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던 태민도 민환의 몸놀림을 보고 의아해 했으니까.
동시에 감탄을 마지않았으니까......
“이런, 사사로운 감정싸움은 딱 질색인데, 너무 시간을 지체했군.”
“감정싸움 따위는 계집애들에게 제격이지.”
천천히 두 사람의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팽팽하게 맞선 또 다른 접전. 본격적인 접전.
답지 않게 감정에 치우쳐 버린 성민과 다르게
처음으로 큰 싸움 앞에서 감정에 치우쳐 버린 성민과 다르게 냉정하고 차분한 상준.
그리고 태민이 대립되어 한시를 늦출 수 없는 긴장감이 주변을 휘어 감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무슨 기가 막힌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막 정말 중요한 대립을 앞두고. 정말 최후를 앞두고....
민환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태민을 벌하고자 하는데....
삐용삐용―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고막을 뚫는 듯한 사이렌 소리.
수많은 헤드라이트 불빛. 가까워지는 그 불빛. 그리고 보이는 경찰들.
..아아....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 순간 나에게... 우리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상준은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하고 이대로 엉거주춤 끝을 봐야 하는 현실에
주최 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맥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져
민환이 눈을 감은 순간까지도 피멍이 들 만큼 꾹 깨물면서까지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