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도이는 괜스레 마음이 심란한 탓에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몰려들은 귀차니즘으로 인해 곳곳에서 추려낸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도이는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 쓰레기들을 그대로 방치 해 둘 수 없어 낑낑거리며
들고 나온다.
정원을 지나 대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도이는 더 이상 밖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에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그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려오는 곳에 등을 기댔다.
작은 대문 앞에는 성민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가로등이 바로 가까이에 있어 성민은 도이를 보지 못한대도
도이는 성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성민아.....”
당장이라도 달려가 와락, 녀석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무던히 애써본다.
이런 도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지막이 터져 나오는 성민의 한숨소리에 도이의 가슴이 메어진다.
미안했다고, 잘못했다고, 그러니 잊어달라고...
우리 다시 전처럼 지낼 수는 없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용기를 내기 까지가 너무나 멀었다.
그 사이, 어느새 바뀌어버린 성민의 핸드폰이 조용히 울린다.
♬그래요 아직 그녀를 난사랑 합니다.
그래요 바보처럼 또 기다려 봅니다.
잔잔히 울려 퍼지는 가사 말에 도이의 눈에선 눈물이 새어 나온다.
그 가사가 꼭 성민이 도이에게 하는 말 같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어, 그래.”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가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함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말이 황홀하다지, 사실은 그 순간 느껴지는 황홀함보다는 더 많이 가슴이 아려왔다.
“뭐?.....어......그래....알았다......”
너무나 짧게 끊어져버린 전화.
그리고 더 이상은 들려오지 않는 성민의 목소리.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성민의 향기.
투벅투벅,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소리.....
이내 가동되는 엔진소리에 도이는 다급하게 문을 열고 뛰쳐나가보지만
이미 성민은 저만큼 멀리 떠나고 없었다.
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 부었다.
.
.
“도대체 무슨 소리야?”
“왔구나?”
다급히 아지트로 향한 성민은 다소 거칠게 문을 열어 재끼면서부터 무언가를 물어왔다.
상당히 상기된 표정의 얼굴은,
그리고 착잡해 보이는 얼굴은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자세히 좀 말 해봐.”
“그게, 경오가 입원했던 병실에 웬 놈이 하나 있었잖아.”
“경오 병실?”
“네. 제 옆에 누웠던 형인데요.”
한 가운데 자리를 파고 들어간 성민은 진오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다가 옆을 돌아봤다.
그 곳엔 아직 병실에 있어야 할 경오가 있었다. 팔, 다리 하나씩 깁스를 한 채로.
“왜요, 교통사고로 들어왔었다고, 제가 말한 적 있었잖아요.”
“아......”
“오늘 점심때 쯤, 그 형한테 손님이 찾아왔었어요.”
경오는 침착하게 하나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래도 전, 라이더 총장인 것 같아요.”
“틀림없어?”
“아마도요.”
“이름이 뭐야?”
“죄송해요. 물어보지 못했어요.”
“인상착의는.”
“보지 못했어요. 제가 자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그 사람이 들어왔던 게....
문득 목이 말라 깨기는 했는데,
워낙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터라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은 아주 잠깐 머물다 돌아갔고요.”
“씨빠빠.....”
“그래도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거기서 경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길지 않게 약간의 뜸을 들이고는 마저 남은 이야기를 꺼냈다.
“부활한다고 했어요. 다시 돌아 갈 거라고 했어요.”
“어디로?”
“2년 전으로.....”
“2년 전이라.... 그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때를 말하는 건가.”
“나태민과의 소란이 있었을 때기도 하지.”
작게 중얼거리는 성민의 말에 백송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
“아주 교묘하게 나태민을 밟아놨었지. 그 때 말이야.”
“그래서 나태민이 소년원까지 행차하시고.”
“도대체 무슨 일일까?”
“우리를 경계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 애석하게도 말이지.”
여기저기서 낮은 한숨이 연달아 토해져나왔다.
“참,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요.”
“…….”
“다시는 일어서게 하지 못하겠다고. 철저히 밟아 놓을 거라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4대 총장의 자리를 줄 거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아....”
경오는 양미간은 한껏 좁혔다.
분명히 듣기는 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러나 성민은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다소 다급하게 물어왔다.
“4대 총장을 세운다고?”
“네.”
“정말이야? 확실해?”
“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해요.”
“...내분이야.”
“…….”
짧고 간결한 말에 경오는 물끄러미 성민을 바라다 봤지만
그 양 옆에 앉은 송과 진오의 고개가 가볍게 움직이는 걸 보아선
어쩐지 생각 했던 것 보다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음에 마음이 놓인다.
“역시 내분이야. 한번 마찰이 있던 사람을 도울 리는 없잖아.”
“내분이라뇨?”
“2년 전에도 내분이 있었다고. 제 3대 총장 나태민과 제 2대 총장 사이에서 말이지.”
“어떻게 그런 일이....”
모든 상황이 정리 된 듯 편안해진 성민을 보며 경오는 도통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때문에 성민이 경오를 위해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태민은 말이 3대 총장이지 라이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놈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2대 총장, 그러니까 이름이... 아.. 그 이름이....”
성민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그 이름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때, 2대 총장이 무슨 이유에선지 해산을 선포했어.
갈길 가라면서 라이더에 묶여 있던 놈들을 하나하나 죄다 놓아줬지.
내 기억으로는 일대총장이 외국인이었을 거야.
그 이름이.... 아, 그래. 엠마뉴엘이었지.....
어느 날 갑자기 그 엠마뉴엘이 사라졌는데,
그로부터 엠마뉴엘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 된 게 없는 걸 보면 제 나라로 돌아갔을 테지.”
“…….”
“그 때, 라이더의 해산을 반대하는 무리가 몇 명 있었어.
그 무리가 강북 쪽에서부터 다시 활약을 했을 거야.
물론, 처음에는 작게 움직였는데 그 때,
아마도 그 때 그 놈들이 나태민을 만났고 나태민의 밑에서 갑자기 커버렸지.”
“…….”
“2대 총장은 라이더의 부활을 완강히 거부했던 사람이야.
더군다나 3대 총장이라면 제 밑에 있던 놈들 중에 한 놈이 이어가야 마땅한데
어서 보지도 못한 놈이 떡 하니 앉아있으니 기분이 좋을 일이 없지.
그래서 그 자식이 수를 부렸어.
놈의 세력도 세력이지만, 아버지가 서울법원 검찰청의 청장이었거든.”
“…….”
“한동안 소년원에서 조용히 지내는 나태민이 출감 되었을 땐,
다시 활약을 할지도 모르는 걸 염두에 두어두고 주시를 했을 테지. 그 사람이라면 말이야.”
“우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경오는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성민을 우러러봤다.
“그 때가 이글이 막 결성되기 바로 전이었거든.”
“아아.....”
“우선은 그 쪽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움직이도록 하자.
아마 도움이 되면 됐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거야.
나태민이라면 몰라도 그 사람이라면 잘 구슬려서 아군으로 만들어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적어도 그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먼저 해를 가하지 않으면
치고 들어올 일은 없는 사람이거든.”
“…….”
“100%는 아니어도 70%는 장담한다. 그러니까 경오는 그만 병원으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