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집으로 향하던 민환의 발걸음이 그 방향을 고쳤다.
막상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뒤 돌아서서 무척이나 힘겨워 하는 민환은 민주를 찾았다.
지금 민환의 얇은 입술 사이에 물린 하얀 담배는,
그리고 그 연기는 민환의 기분만큼이나 쓸쓸해 보인다.
“하아......”
도대체 왜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걸까?
민환은 왜 오랜만에 찾아온 누나의 옆에서 저리도 낮은 한숨을 쉬는 것일까.
“미치겠다.... 미치겠다, 도민주....”
짙게 베인 담배 향이 유난히 독하게 느껴진다.
늘 맡아오던 향이 분명한데도 너무나 쓰다.
“자꾸만 네가 보여서... 미치겠다... 정말....”
그 맛도, 향도, 모든 것이.....
삐그덕, 삐그덕―
잔뜩 녹이 쓴 차고 거친 소리를 들으면서 민환은 그네를 천천히 움직여본다.
그 크고 예쁜 눈을 꾸욱 감았다.
왠지.... 얇은 눈물이 흘러내려간다. 그 다음엔 침이 꿀꺽 넘어갔다.
손등에서부터 땀이 나기 시작한다.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왔다.
도통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얼마간을 그 상태로 앉아 있었다.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성택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때는 아직 방학을 하기 전이었고, 경아와의 사이도 이렇게 진전이 되기 전이었다.
물론, 말만 사귀는 것일 뿐, 경아는 민환의 겉껍데기를 손에 넣었을 뿐이지만.
“....상준 형한테 연락이 왔다.”
“상준 형?”
“응.”
성택이 말 한 최상준.
그는 오래전 민주를 데리고 갔던 은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늘 모이던 장소에서 함께 만남을 가졌었고,
당시 은호가 리더를 맡고 있던 그들의 무리에서 또 다른 지지대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맞으면서 은호의 자리를 상준이 이어받았지만
친구의 자리였던 만큼, 그 자리가 너무나 아파 조용히 청산하고 말았다.
늘 함께하던 무리들과의 만남도, 은호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던 가슴 아픈 방황도,
길고도 짧지만 생에서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추억도 모두를......
“갑자기 왜?”
“다시 부르셔.”
“누굴?”
“너, 나, 그리고 태영이, 그리고.....”
“그 때의 친구들까지... 모두겠지....”
“맞아.”
“이유가 뭐야?”
“아마도...”
“역시 나 때문인가?”
“분명히 말 하는데, 그건 아니다.”
“어떻게 할 거냐?”
“뭘?”
“가야 되는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상준형이잖아. 최상준이잖아.”
“그래.”
“아마,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렇겠지. 모두가 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대도 틀린 말은 아닐 테니.”
착잡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자신 때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엇보다 상준형은 너를 제일 기다리실 거다.”
“…….”
“은호형이 계실 때도 사실, 널 가장 아껴주신 건 상준형이잖아.
자신보다 친구를 더 섬기는 널 알면서도.”
왜 마찰을 일으켰을까? 왜 그 닮은 모습에서 민주를 찾고 혼동을 느꼈을까?
평소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굴었더라면..
민주를 꼭 빼다 박은 경아의 앞에서 냉정하게 굴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태민과의 마찰도 없었을 거고,
항상 태민을 주시했을 상준의 귀에 아무런 소식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을.....
“죄송해요. 형.”
근 1년 6개월 만에 다시 마주친 상준 앞에서 민환은 제일먼저 이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라 반갑다는 말 대신,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를 묻는 일 대신 이 말을 먼저 꺼냈다.
“뭐가?”
“...다요... 모든 게... 다....”
“약해 빠진 소리만 늘었구나.”
“…….”
“그딴 헛소리 집어치우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 술이나 한 잔 받아라.”
오랜만에 만난 상준과의 자리는 어렵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장시간 떨어졌다가 만남을 가졌을 때는
조금씩 어색하고 불편하기 마련이지만
상준과의 만남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만남은 단 하루를 거르지 않고 만나왔던 사람들 마냥
편안하고 좋기만 했다.
은호가 있었을 때.
사내로써 존경하고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웃고 떠들었을 때,
그 때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굳이 다르다면 그건 늘 은호가 앉아있던 자리엔 이젠
그 대신 그의 오른팔이었던 상준이 앉아있다는 것 뿐.
정말 오랜 시간을 새벽이 찾아오는 것도 모르면서 장시간 회포를 풀었던 그 날 밤의 일.
마치 한편의 꿈같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치부해버렸던
오래전의 기억을 싹 지워버렸던
너무나 좋았던 시간에 많은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론되었던 민주와 경아의 이야기. 또 나태민의 이야기....
도대체 상준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으며
또 그들은 어찌하여 상준의 부름 하나에 만사를 제쳐두고 모여든 것일까?
.
.
길고 긴 생각에 알싸한 두통을 느끼며
한층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이제는 그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는데,
그 순간 민환은 차라리 눈을 감고 있었을 걸 하며 후회를 하고 말았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명상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눈을 뜬 순간 제일먼저 보이는 저 무리들.
자신을 둘러싼 낯선 저 무리들이 반가울 일은 없었다.
“기다리느라 좀 힘들었어.”
“뭐야? 너희들.”
“같이 가 보면 알겠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잠시였다.
민환은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목 뒤쪽으로부터 전해져오는 통증과 맥없이 감기는 눈을,
한 순간 희미해져가는 정신은 아무리 날고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
.
몇 시간 전,
태민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라이더의 아지트 안은
한 겨울의 시베리아 벌판보다도 더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첫 번째 타깃을 정하고 본격적인 움직임을 가졌는데, 그 타깃에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
이글의 최형준을 목표로 시작을 하려했는데, 그 시작이 좋지 않았다.
어찌 된 노릇인지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민환의 주변에 이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움직임을 더욱 신중하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경아를 좋아하고, 경아에게 체였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해도
민환의 주변부터 살필 것을 그랬나보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글 쪽에 두루 명성이 떨쳐진 세준을 미행에 붙이지는 않았을 테니.
적어도 그랬다면 이글과의 전면전은 한 가지 일을 처리 한 후에
시작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본래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기 마련인데, 시작부터가 삐끗하고 말았으니....
“그래서.”
더 이상은 딱딱하게 굳어질 것도 없어 보이는 태민의 얼굴.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조각 같은,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만이 물씬 풍기는 그런 얼굴을 보며 세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OK하던데?”
“…….”
“근데 존나 웃긴 게, 그 새끼는 강경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거지.
즉, 강경아 혼자 목메는 것 같더라 이 말이지.”
주변에서 힐끔힐끔, 태민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준은 기가 막힌 이야기를 또 이어갔다.
“그런데 그 놈 주변에 웬 계집 하나가 있더군. 조사를 해 보니까 학교 선배 같았는데...
두 연놈들의 낌새가 수상쩍단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도민환이란 그 놈이, 그 계집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어.”
“뭐?”
“강경아를 보는 눈빛이랑 그 계집을 보는 눈빛이 무지 달랐거든.
그리고 그 앞에서 행동하는 것들도 그렇고...
하나부터 열까지, 좋아한다. 이외에는 굳이 뭐.”
“씹새끼.”
부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한소린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흐지부지하게 말끝이 흐려지면서 확실하지 못하게 매듭을 지어버린 세준의 말에
곧장 나직한 욕설을 내 뱉는 태민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골 때리는 건, 그 계집이 권성민이랑 썸씽이 있었던 것 같아.”
한참을, 살기 어린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하던 태민.
꼭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주위에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갔고,
한층 누그러들었는지 의외로 차분한 음성으로 태민이 말한다.
아니, 폭주족 라이더에게 명한다.
“그 새끼, 당장 잡아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