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성민은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역시나 그렇군, 하고 생각했다.
어제 보았던 민환의 옆에 있던 그 계집이 사진 속에 들어있었으니 당연했다.
“강경아 사진인데, 이 녀석이 나태민을 버린 데는 도민환이라는 녀석이 개입되어 있더군.
알아보니까, 전에 한번 봤던 그 놈 이던데 무슨 사이야? 친동생은 아닌 것 같던데.”
“맞아. 친동생은 아니야. 하지만 피만 안 섞였지 친동생 같은 존재야. 도이한테는.”
“그 자식, 조심 좀 시켜야겠던데? 나태민이 단단히 벼루고 있는 것 같더라고.
아마도 그 녀석을 기점으로 활기치고 다닐 모양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강경아와 도민환, 이 두 사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에
더 깊게 파고 들어가자면 들어갈 만도 하겠지만 진오는 거기서 질문을 마쳤다.
외려 민환을 걱정하기까지 한다.
사실 그들에게는 강경아와 도민환이 원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한번쯤 부딪힐 일이라며 준비를 해오고 있던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본래 사내 녀석들의 주먹다툼이 그렇듯, 남자들의 세계가 그렇듯
최고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 어느 누가 자신이 존경하는 친구가, 자신의 짱이,
세컨드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겠는가?
표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그 무엇을 봐도 기왕이면 퍼스트가 좋지 않겠는가?
“짐작이긴 하지만, 이 짐작이 단지 짐작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아마도 한동안 꾀나 시끄러워 질 거야.
최소한 경오를 위해서라도 이글이 이 일에 나설 테니 말이야.
도민환과 나태민을 떠나서 말이야.”
“그래.... 그렇게 나태민이 다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는 거겠지....
그렇다면 더욱 치열한 전면전이 되겠군....
어차피 경오가 다친 이상 내가 뒷전에서 느긋하게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순 없으니까.”
“…….”
“기왕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면 세컨드보다는 퍼스트가 좋지.
그럼 천천히 준비를 해 볼까?”
.
.
넓은 공터에 다소 많은 놈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인상은 날카로운데다가 개성이랍시고, 멋이랍시고
색색의 물감으로 알록달록하게 머리를 만져놓은 놈들이었다.
비구름 하나 가릴 수 없는 하늘이 훤하게 뚫린 공터지만 제법 깊숙하고 외진 곳에 있는지,
여기저기 제멋대로 널린 바이크와 몇몇 가동되는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사방을 울려 퍼져도
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것이 머리가 다 아플 지경 이지만
단속이랍시고 시끄러운 사이렌을 울리면서 쫓아오는 경찰차도 보이지 않았다.
“태민이는?”
곤색의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건들건들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세준은
가까운 곳에 둘러앉아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던 놈들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자는 것 같던데?”
“그래?”
“응.”
세준은 잠시 야구 모자를 벗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라. 같이 한잔 하자.”
“근데 오늘따라 얘들은 왜 이렇게 많아?”
“많긴 뭐가 많아?”
“원래 이 시간엔 다들 딴 일 하는 놈들 아냐?”
“재밌는 일이 있었거든.”
세준은 자신의 몫으로 따라진 잔을 들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재밌는 일?”
“조만간 더 재밌는 일이 있겠지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어떤 쥐새끼가 한 마리 기어들어왔거든. 겁 대가리를 상실한 놈이었지.”
“쥐새끼?”
“근데 그 쥐새끼가 아주 영양가 풍부한 미끼라는 거지.”
“혹시, 이글 쪽 놈이었냐?”
“알고 있었어?”
“역시....”
“응? 뭐가?”
“왜, 내가 뒤밟는 놈, 이글 쪽이랑 관련이 있는 놈 같다.”
“뭐?”
“권성민이랑 꾀나 친분이 있어 보이더라고.”
“권성민? 이글 총장?”
“응.”
“그러니까 즉, 별거 없어 보이는 놈이 권성민이랑 관계가 깊다는 거 아냐?”
“뭐, 그런 셈이지?”
“웬 쥐새끼 한 마리가 얼씬거리나 싶었더니만 이유가 있었군. 우리 움직임을 눈치 챘나?”
“아마도. 나를 봤거든.”
“뭐? 그럼 들켰단 말이야? 천하의 조세준이?”
“같은 학교에다가 백송이나 민진오만큼 친분이 있어 보였으니까 걸리는 건 시간문제지.
전혀 모르고 밟았던 거잖아. 보기 좋게 뒤통수 맞았지.”
“같은 학교라니? 내가 알기로는 그 새끼, 희망고로 알고 있는데?”
“알아보니까 권성민이 한 달 전에 희망으로 옮겼더라고.”
“왜?”
“그건 나도 모르지. 아무튼 일이 공교롭게 됐어.
전혀 생각 못했던 놈이 연결되어 있으니 말야.”
“…….”
“아무리 나태민이라도 상대가 권성민이라면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당장 벌이고자 했던 일은 좀더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뭐 그래도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 어차피 처음부터 두 쪽을 다 생각 하고 있었던 거니까.”
“그건 좀 더 두고 봐야지.”
.
.
전화를 주겠다는 성민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같이 있자는 다희를 구태여 돌려보낸 후,
이런저런 생각들에 두통을 느끼던 도이는 전화가 오면 어떻게 받아야하나,
이런저런 갈등을 많이 느꼈다.
뒤에서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막상 그 앞에서는 나약해지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전화로 이야기를 할까, 싶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전화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입에서 모진 소리가 나올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다행이도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그런데 또 그것이 무척이나 서운하게 느껴진다.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참으로 이기적이고 못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어제 전화 못해서 미안해.”
변함없이 도이네 집 앞에서부터 함께 등굣길에 오른 성민은
도이를 보자 제일 먼저 이렇게 말했다.
아침부터 하기엔 더 없이 모진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도이는 그 짧은 한마디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얼굴은 무척이나 까칠해졌다.
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도 오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하고 또 피곤한 안색만이 가득했다.
오늘은 꼭 말을 해야지, 수십 번도 수백 번도 더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이 맥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가뜩이나 부드러운 웃음만 봐도 굳게 다짐했던 그 일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언제 그런 마음을 먹었냐는 듯이 성민의 미소에 미약하게나마 함께 웃었는데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게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보여 지는 근심으로 인해
차마 모진 소리 한마디 못해 다음으로 미루는 도이다.
“할 말이 뭐야?”
하지만 도이는 하루를 모두 쏟아 생각하고 또 생각 해 보았다.
이미 수십 번도, 수백 번도 넘게 생각 한 일이지만 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은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하루라도 더, 한 시간이라도 더, 한번이라도 더 성민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마음속의 성민의 존재가 더욱 커져만 간다.
그 녀석도 도이가 성민을 매몰차게 밀어낼 것을 알고 있는지,
성민의 존재를 더욱 크게 부각시켜 절대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수를 쓰고 있는 것만 같다.
꼭.
“정말, 정말 많이 생각한건데 말이야....”
급한 게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자는 성민을 구태여 끌고 온 민주의 놀이터.
왜 굳이 민주의 놀이터를 생각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민주 옆이라면
성민을 보낸 후에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무거울 것 같았다.
그래서 도이는 성민을 그 곳으로 데리고 왔다.
“오늘이 아니면 영영 못 할 것 같아서....”
어렵게 두 입술이 떼어지면, 도이는 벌써 두 눈에 눈물을 머금는다.
분명 마음은 성민을 원하지만 유민의 곁에서처럼 도망가는 자신이 너무도 싫다.
민아의 말이 화근이 되어 이런 마음을 먹고 유민의 곁에서 그랬던 것처럼
치러야 할 난간의, 그 벽의 높이를 채 재보지도 않은 채
도망부터 치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눈물부터 흘릴 만큼 성민을 좋아하면서
독한 마음먹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너무나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