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71화 (72/91)

71.

도이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그 보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게

꼭 성민에게 잔뜩 속은 것만 같은 느낌에 기분이 몹시도 나쁘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차 있는데,

한 몫 단단히 거드는 이 소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째서 성민이 신일그룹의 배경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많고 많은 배경중에 왜 하필이면 그런 엄청난 기업의 배경을 갖고 있단 말인가?

도이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유민과의 교재에서도 무엇 때문에 도이가 그토록 갈등을 했던가?

유민의 넘처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루하루가 편치 않았던 이유는,

유민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도이와 맞지 않는 그가 가진 배경.....

도이에게는 너무나 과분하고 부담스러울 만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의 배경이 아니었던가?

그 배경으로 인한 그들의 멸시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짓밟혀 짓이겨지는 자존심과

그 망가진 자존심이 만들어낸 오기로 결국 끝까지 갔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성민이 유민보다 더 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절차를 고스란히 되밟아야 하는 일은 불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아아.....”

도이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도이는 이해 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성민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 좀처럼 어찌 할 수가 없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 하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왜 하필이면 민아였을까?

성민에게서 전해 듣지 못한 이야기를,

성민에게서 전해 들어야 할 이야기를 왜 하필이면 민아에게서 전해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도이는 그것이 가장 불쾌했다.

주제를 알라는 말. 심심하면 한번씩 툭툭 내 던지듯 했던 그 말.

만약 민아의 말이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이라면

민아는 왜 그토록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알 것도 같다.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어. 성민아, 제발 민아의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았다.

한참을 울다가 어렵게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위해 길을 나선다.

이렇게 하면 민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움직여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도이는 도무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지갑 하나만 들고는 집을 뛰쳐나왔다. 허둥지둥 거리면서 택시를 잡았다.

“평창동이요. 평창동이요. 아저씨.”

“평창동 어디로 갈까요?”

“...신일그룹.. 회..장님.. 저택이요....”

금방이라도 볼우물이 터져버릴 듯한 얼굴로 띄엄띄엄

힘들게 말하는 도이를 택시기사는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허둥지둥 잡아 탄 택시가 매끄러운 속도를 내는 동안 도이는 새삼,

배경이라는 게 이토록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단지 신일그룹이라는 그 타이틀만 이야기 했을 뿐인데,

정확한 주소가 없어도 쉽게 찾아갈 수도 있다니....

평창동으로 향하는 내내 도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울지는 않았지만 살짝이라도 건들이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 위에

근심을 한가득 담아 조바심마저 느끼며 그렇게 이동하고 있었다.

아닐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쩜 이제는 마지막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도이는

제발 그 곳에 성민이 없기를 바랬다. 성민의 집이 아니기를 바랬다.

제발 민아의 말이 거짓이길 바랬다.

“하아...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한참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도이는 몇 번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를 느꼈다.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수치심까지 느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 하는 성민인데,

그렇게 유민을 향해 등을 돌리면서까지 선택한 한 사람인데,

민아의 한 마디 말에 이렇게 무너지다니....

과연 내가 성민을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결코 어리지 않은 자신의 사랑이,

성민을 향한 자신의 믿음이 고작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걸까 싶었다.

“아가씨, 다 왔어. 저기 저 집이야.”

그 사이, 어느새 택시는 도이가 원했던 그 곳에 도착했다.

“저 집이요?”

바로 앞은 앞이지만 제법 넓은 길 가장자리에 멈춰선 택시.

차가 넉넉히 한대는 더 지나갈 법한 길을 사이에 두고

성민의 집은 왼쪽 편에 우뚝 솟아 올라있었다.

“아가씨, 안 내려?”

“아.... 저... 죄송하지만 잠시만 있다가 제가 탔던 곳으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저 댁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닌가보지?”

“아... 그건.....”

“뭐, 어차피 그건 아가씨 사정이니까. 뭐, 좋을 대로 해요.”

“고마워요. 아저씨.”

도이는 택시 안에서 성민의 집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 겉모양은 정말 으리으리해 보였다.

담이 워낙 높아 그 안까지는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았지만,

그 높은 담과 커다란 대문만 해도 한 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굉장했다.

그동안 아침나절로 오가며 봐왔던 성북동도 손꼽히는 부자동내로

으리으리한 집들은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오늘 처음 와 보게 된 성민의 집은

이제까지 도이가 봐 왔던 집들과는 겉 보기부터가 무척이나 틀렸다.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성민이가 이런데서 살았구나... 성민이는... 이런 집에서 살았구나....”

정말 바보같이 남자친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에

단 한번도 깊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나 미안했다.

한달 남짓한, 성민을 본 시간을 그토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주최 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게 된 감정.

그 하나로 녀석의 옆 자리에 우뚝 서 버렸는데,

그렇게 생각나고 함께 하고 싶어 했던 마음은 굴뚝같았어도

이제 생각 해 보니 단 한번도 녀석의 환경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엄밀히 따지면 굳이 따져보지 않았어도,

차근차근 알아가도 충분 하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이는 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거였어...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였다고....”

으리으리하기만 한 그 집을 둘러보다 잔뜩 풀이 죽은 도이는

기운 없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아저씨... 그만 가요.”

민아와 함께 있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절망적인 표정으로 도이가 말 했다.

그 순간 잠시 시동이 꺼져있던 택시는 엔진을 가동시켰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그 집을 담아두지 않고 멍하니 앞을 내다보는 도이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비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자, 잠깐만요. 아저씨!”

눈부시게 빛이 났던 헤드라이트 빛에 선명한 윤곽이 시야를 가득 매우는 그 얼굴.

자신의 마음이, 믿음이 너무도 나약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그 얼굴.

헤어진 시간은 분명 이른 시간이었는데 무척이나 피곤한 안색으로

이제야 귀가를 하는 성민의 얼굴. 달려가 안기고 싶은 성민의 모습....

핑그르르.... 그 순간 그토록 참았던 눈물이 도이의 두 뺨을 적신다.

순식간에 온 얼굴이 젖어들었다.

북 받히는 감정에 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도 시언찮을텐데

어찌하여 입을 꼭 틀어막고 숨죽여 우는지, 그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눈물 너머로 환하게 웃는 닮은꼴의 세 사람이 보인다.

하루 전, 녀석의 부모님을 만났던 자리가 눈물 너머로 희미하게 비친다.

참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 했는데, 참 편한 분이라고 생각 했는데..

그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한 생각이었던가....

주제도 모르고 훈훈히 웃어주는 그분들 앞에서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했던가.

이상하게도 성민이라면 다가갈 수도 없고,

다가가서도 안 될 것 같은 먼 존재로만 느껴졌었다.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그런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참 서글픈 현실이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민과 도이는 차원부터가, 갖고 자라온 배경부터가 하늘과 땅 끝 차이 라는 것을.

그러니 당연히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고 다가가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는 더이상 뒤로 갈 수도 없고.. 민아가 가져다 준 시간을 되 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바라던 바대로 민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피부로 직접 느낀.. 보여지는 그 하나에서 비롯된 차이 하나로 어렵지만.. 정말 어렵지만..

더 시간이 지나 더 많은 정이 들기 전에 서둘러 성민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고....

쓴 눈물을 삼키며 독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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