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저녁 여덟시쯤이 되자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도이는 단순히 아빠려니 하며 문을 열었지만 의외의 인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오늘은 제법 일찍 들어오셨네?”
시니컬한 표정과 시니컬한 음성을 한껏 자랑하며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민아였다.
그 순간 좋지 않은 목적으로 민아가 이곳까지 친히 발걸음을 했음을
도이는 감지할 수 있었다.
하교 때 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던 일이 생각난다.
성민의 입에서 당당히 자신을 내 마누라라 칭했던 그 달콤한 말이 귓가에서 요동친다.
그 순간, 그 말로 인해 민아가 한번쯤은 자신을 찾아와 줄 거라는 걸 예감했다.
물론 그 것이 오늘 당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머리가 잔뜩 욱신거리는 지금은 제발이지 피하고 싶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니?”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니?”
“여기가 썩, 네가 올만한 곳은 아니라고 보는데.”
“왠지 그 말은 내가 너한테 해 줘야 할 말인 것 같구나?”
“왜? 잘난 집 따님께서 이제는 이런 누추한 곳까지 탐이 나시는 모양이지?”
“아무리 누추한 지하방이라도 너 같은 계집한테 내어 주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민아는 건방지게도 신고 내려온 슬리퍼를 벗지 않았다.
고의적으로 묻혀왔는지 흙이 잔뜩 묻은 슬리퍼로 온 거실 안을 헤집고 다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신발부터 벗어주지 않을래?”
“신발? 아 참, 그러고 보니 깜박 했네? 후훗.
하지만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신고 있어도 괜찮겠지?”
정말이지 너무나 뻔뻔한 말이었다. 고의적인 의도가 분명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왜? 불만 있어?”
“…….”
“네까짓 게 불만이 있으면 어쩌려고? 어이쿠, 그렇게 노려보니 무섭네?”
도이는 가뜩이나 민주의 분신을 본 듯한,
정말이지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실제로 겪은 일로 인해
어지간히 가라앉지 않는 지독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일인데
때 아닌 불청객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빨리 용건이나 말 하시지?”
“왜? 일찍 들어왔으니 이 시간에라도 데이트를 즐겨야겠다, 뭐 그런 거니?”
“용건 없어? 그럼 그만 나가줄래?”
“훗, 뻔뻔하고 제 주제를 모르는 줄만 알았는데 보기보다 당당하다, 너?”
한없이 빈정거리는 민아 덕에 도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니 보기보다 영리한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쭈? 주제에 성질까지? 꼴같잖은 짓 하네.”
“…….”
“난, 너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인간들이 제일 재수 없어. 알아?”
도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오빠한테 단물 쓴물 다 빨아먹었으니 이제는 권성민이니?”
“.....고작 그 말 하려고 온 거냐?”
“고작? 너 지금 고작이라고 했어? 핫!”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 같은 소리 하지 마!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내 앞에서 건방 떨지 마!
재수 없어!! 재수 없다고!!”
민아는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귓가가 멍멍하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다.
“고상한 척,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른 척은 혼자 다하면서
결국 자기 실속 챙기는 너 같은 인간들 때문에 우리 오빠가 상처 받는 거라고.
나 같은 사람이 피해 보는 거라고! 알아?”
“네가 피해를 본다고? 천하의 차민아가? 나 때문에?
야야, 지나가는 똥강아지가 웃겠다. 앙?”
“그만 그 얼굴에 뒤집어 쓴 탈 좀 벗을 수 없어? 우리 좀 솔직해지자.
너의 그 가식적인 표정, 가식적인 어투, 역겨워. 역겹다고!”
“...제발 그 언성 좀 낮혀줄래?
네가 굳이 소리소리 치지 않아도 내 머리가 반으로 뚝, 하고 깨질 것만 같거든?”
민아는 적잖게 흥분을 했는지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울려대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도이는 덥석 문부터 열어준 일을 후회했다.
“아무래도 네가 할 말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좀 나가주라.
내가 오늘 별로 너랑 마주하고 싶지가 않거든? 그러니까 기왕이면 네 발로 걸어 나가라고.
내가 몸이 부치긴 하지만 너 하나쯤을 끌어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떻게, 걸어 나갈래? 아니면 내가 끌어내줄까?”
자지자란 말다툼으로 그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을 방해받은 것을 몹시도 언짢아하며
도이는 정말로 끌어낼 태세로 민아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지만 또한 예사롭지 않은 도이의 표정에
민아는 다급하게 본론을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다 하고 싶었던 말,
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꺼내지는 못할 것 같은 기분 하나 때문이었다.
“우리오빠, 떠나기 전에 얼마나 보기 안쓰러웠는지 너 모르지?
권성민 옆에서 희희낙락거리느라 우리오빠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절어 눈물에 절어
시간 보냈던 거, 너 모르지?”
“그런 거라면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너 같은 년 하나 바라보고 헤어 나오지도 못하는 우리오빠가 다 불쌍하다. 불쌍하다고!”
“후..... 아무래도 내가 널 끌어내는 게 낳겠다. 그치?”
“권성민한테서 떨어져!”
“....미안하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우리오빠가 네 그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권성민까지 네 손아귀에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착각 하지 마! 그쪽 부모님은 또 어떻고? 성민이 부모님이 아시면 분명...”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아무래도 네가 생각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벌써 성민이 부모님도 만나 뵈었거든. 참 좋으신 분들이시더라.
누구 부모님이랑 다르게 말이야.”
“뭐, 뭐?”
“뭘 그렇게 놀라? 벌써 성민이 부모님 만났었다니까?”
“근데 어떻게 성민이 곁에 머무를 생각을 해?
아버님, 어머님을 만나고도 어떻게 뻔뻔하게 그 자리에 있어?
아~ 부모님을 뵈니까 그 배경 때문에 더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디?”
“뭐, 그렇다고 치지.....”
두통이 심해서인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몸으로 간신히 민아를 문 밖으로 몰아냈다.
이마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숨이 가빠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민아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꾸를 해 주고 있었는데, 순간 어쩐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민아가 한 말이 이상하게도 걸렸다.
“배경이라니?”
“왜 그렇게 당황 해? 꼭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순진한 얼굴 좀 하지 마. 정말 역겹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건 뭐고 배경은 무슨 말이야?”
“어이쿠~ 정말 무섭네?”
“차민아!!”
“이게 어디다 소릴 질러?”
“그게 무슨 소리냐고?”
버럭 소리치며 다급하게 물어오는 도이는 보고 민아는 잠시 주춤했다.
순전히 악의만 가진 채로 정말 모르는 척, 내숭이라도 떨고 있는 거래 생각 했는데
도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왜 인지, 상당히 난감해지는 순간이었다.
“뭐야, 설마 진짜 모르는 거야?”
“빨리 말 해! 빨리 말 하라고!!”
“뭐야? 신일그룹 권회장님을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거야?”
“뭐어?!”
“신일그룹 말이야. 신일그룹!”
“서, 설마.....”
그 순간 도이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머, 웬일이라니? 정말 모르고 있었니? 그래?”
도이의 바보스러움에 민아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면 댁으로 갔던 건 아닌가보지?
하긴 나 같아도 너 같은 애, 집으로 들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거짓말이지? 그렇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대단한 집에 사는 놈이 뭐가 아쉬워서 반한을 하고,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걸....”
“훗, 그래도 제 주제를 아예 모르지는 않구나?”
“…….”
“거짓말이길 바라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 아니라 어떡하냐?”
“…….”
“네가 내 말을 영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럼 직접 찾아가 보던지.
웬만해서는 평창동 신일그룹 저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 동네가 또 동네잖니. 뭐, 필요하다면 내가 콜택시 정도는 불러줄 의양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