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오늘 정말 잘 했어.”
늦은 저녁, 도이를 바래다주는 성민이 그녀의 집 앞에서 달빛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잘 하긴 뭘 잘 해? 그때그때 묻는 질문에 당황해서 급급해했는데.”
“아니야. 너 정말 잘 했어.”
“뭐라고 넌지시 말 해줬음 좀 좋아? 더군다나 너희 부모님이시잖아.”
“뭐라고 말 했으면 너 부담 가졌을 거 아니야.”
“그래도 이게 뭐야. 너 진짜 미웠어. 오늘.”
“미안해.”
부모님과 헤어진 후부터 내내 투정을 부려대는 도이가 밉지 않았다.
성민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끓어 않았다. 작은 체구가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기분이 좋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 네 칭찬이 얼마나 자자한줄 알아?”
“네가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린지, 내가 알게 뭐야?”
“바보. 난 없는 말 안 지어내.”
“경우가 다르잖아.”
“다르긴 뭐가 달라.”
“아무튼, 진짜 미웠어.”
“어유~ 우리 공주님 화가 단단히 나셨네. 어떻게 하면 풀어주시려나?”
“비꼬지 마.”
“바보. 비꼬는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를 비꽈?”
“피이~”
성민은 살며시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빼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깨위에 자신의 손을 데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도이의 얼굴을 봐온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더군다나 상황이 기가 막히게 잘 따라줬다.
이 동네는 워낙 도이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거니와
늦은 시간에 바깥일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도 아니었다.
고로, 키스를 한다 해도 방해받을 만한 일은 전혀~ 전~~혀 없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쿨럭!
그 순간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덩달아 도이의 얼굴이 괜스레 발그레해진다.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
“...키스..할까?”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성민은 그렇게 물었다.
덥석, 멋대로 덮쳐오는 게 아니라 도이의 의사를 먼저 존중해준 것이다.
도이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키스를 처음 해 보는 건 아니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질문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꼭 이제까지는 단 한번도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설레고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도이는 뭐라고 대답을 하는 대신에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굳이 성민을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도이도 꿈꿔오던 일이기도 했다. 성민과의 달콤한 키스는...
어떤 맛이 날까? 도이는 문득 그것이 궁금하기까지 했다.
꽈악― 자신을 안고 있던 팔이 허리를 감았다.
허리위에서 작지만 큰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체온이 입술 끝에 닿았다. 성민의 체온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그 맛은 기가 막히게 달콤했다.
꼭 싱싱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듯 상큼하기까지 했다.
황홀했다. 성민과의 키스는 너무나 황홀해서 미칠 지경 이었다.
차가운 체온을 느끼면서 온 몸이 잔뜩 긴장을 했지만,
이내 익숙하게 자신을 파고드는 성민의 행위에 스르륵, 그 긴장감이 풀렸다.
서서히 뒤꿈치가 들렸고 도이는 성민의 목 위로 제 팔을 둘렀다.
깊게 이어지는 딥키스. 그의 웃음만큼 부드럽게 진행이 되었다.
살살 녹아내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잠시 들렸던 카페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맛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꼭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그 위에 싱싱한 과일의 상큼함이 묻어있으니 조금 묘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키스는 촉촉하게 시작하여 긴 시간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
.
“야야, 나 어제 도민주 봤어.”
“그게 무슨 소리야?”
기분 좋은 등교를 마쳤더니, 황당한 소리가 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희는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한 듯 초췌해진 얼굴로 반쯤 혼을 빼고 말했다.
그에 도이는 크게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긴 했다.
워낙 다희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그저 헛소리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나, 어제 시내에서 도민주를 봤어.”
“민주가 시내에 왜 있어.”
“그러게. 민주는 분명히 죽었는데.... 그치?”
“그냥 조금 닮은 애를 본 건 아닐까?”
“조금 닮았다면 닮은 애를 봤다고 말 하겠지. 근데 아니라고.”
“얼마나 닮았는데?”
“정말이지, 난 그 성경말씀에나 나오는 부활! 난 민주가 부활이라도 한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많이 닮았어?”
“응. 얼마나 닮았냐면, 내가 민주야! 하고 뛰어갔을 정도라니까?”
이쯤이 되자 도이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지만 꿈에라도 좋으니까
민주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도이였다.
“오죽하면 우리 오빠가 나더러 미쳤다는 말까지 했을까.”
“남자친구?”
“응.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아 보였대.”
“그렇게 많이 닮았어?”
“응.”
민주와의 추억을 생각하는지 의기소침해진 다희는 그로부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이역시 덩달아 잠잠해졌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도 지나고,
성민이 교실로 찾아왔다.
처음엔 민아를 의식하는지 잘 찾아오지도 않던 성민이었는데,
요즘에는 부쩍 자주 찾아온다.
뭐, 아침저녁으로 집 앞까지 행차하는 몸인데 교실이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마는
도이는 민아가 의식되고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성민아!”
아니나 다를까, 도이보다 성민을 일찍 보게 된 민아는
민첩한 행동을 발휘하며 쪼르르 성민에게로 달려갔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이 누나 보고 싶어서 왔구나?”
“야야, 덥다. 좀 떨어져라.”
“어머, 짜식~ 수줍어 하기는. 훗.”
“착각은 자유라더라.”
“너, 보기보다 많이 소심해졌다? 별거 아닌 일에 수줍음도 다 타고.”
“지랄도 가지가지네, 정말.”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민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곧 죽어도 성민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양 당당하게 굴었고
불쾌한 기색을 수줍음으로 치부해버렸다.
“성민아, 누나 배고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일 없다.”
“에이~ 왜 그래? 이렇게 누나 교실까지 찾아와 놓고는.”
“누가 너 보러 왔대?”
“그럼 네가 여기 나 말고 볼 사람이 어디 있어?”
“왜 없어? 네 뒤에 내 여자친구 있잖아.”
“응?”
“네 뒤에 내 여·자·친·구.”
“...여자..친구...라니?”
차갑고 단호한 성민의 말에 민아는 당황함도 잠시, 서둘러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 곳에는 이제 막 가방을 짊어지고 나오는 도이와 다희가 보였다.
다희가 성민을 향해 방긋 웃었고, 도이는 왜 인지 얼굴을 붉혔다. 수줍음의 표시였다.
아마도 어제의 키스가 생각났으리라.
“너, 신도이랑 사귀니?”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민아가 물었다.
독기를 품은 듯한 눈으로 도이와 성민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친한 척 좀 그만 하자.”
“…….”
“조강지처가 버젓이 있는데, 바람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잖냐?
뭐, 상대가 너라면 바람피우고 싶어도 피울 일은 없겠지만. 훗.”
“너어, 너어!!”
“가자. 마누라!”
성민은 일부러 민아를 자극시킬 만한 말들을 누설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주변을 추근거리는 민아가 꼴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도이가 민아를 의식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민은 민아가 들을 수 있도록 마누라라는 말을 꼬박꼬박 사용했고, 강조까지 했다.
도이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민아의 옆을 지나갔지만,
다희와 성민은 아주 통쾌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실로 사악한 영혼들이었다.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