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빨리! 오늘 바쁘다고.”
“왜? 어디 가는데?”
“가보면 알아.”
아침 등굣길부터 유난히 들떠있던 성민은 한사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도이는 도대체 무슨 일로 저리도 들떠있나 싶은 게 궁금해 죽을 것만 같았다.
“자자, 렛츠 고우~”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성민이 좋기도 좋지만
도무지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는 모습은 얄밉기 그지없다.
오늘만 해도 궁금증만 가득 만들어 놓고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속 시원히.
그저 막무가내로 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갔고, 이제는 제 풀에 지쳐 성민이 하자는 대로만 할 뿐이다.
두 사람은 조금 걸어 전철을 탔다.
몇 정거장을 가서는 열차를 갈아탔고, 한참을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린 낯선 마을에서 성민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약 10분정도를 달렸다. 번화가가 아닌 외길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성민이 도이를 데리고 간 곳은 적당한 크기의 깔끔하고 세련된 한식집이었다.
건물 구조부터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현대식으로 개조를 했다지만 꼭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한옥 집이었다.
기왓장도 낡은 듯 보이지만 색깔은 그 빛을 잃지 않아 무척 멋있어 보인다.
“들어가자.”
“어딘데?”
“어디긴, 밥집이지.”
“밥집?”
“여기 밥 맛있어.”
성민은 도이의 팔을 또 잡아끌었다.
다소 거대한 대문을 지나치고 나니 곳곳에서 가야금을 켜는 소리도 들렸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계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꼭 TV속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도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런 데 비싸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작게 속삭이는 도이를 보며 성민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두 분이세요?”
“아뇨, 일행 있어요.”
“예약 되셨나요?”
“네. 권만세회.... 권만세씨요.”
성민은 아무렇지 않게, 권만세 회장님이요. 라고 말 하려다 정정했다.
아버지를 회장님이라 칭하는 것도 우스울 일이지만,
아직 자신의 배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굳이 그녀를 속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그녀이기에 배경은 잠시 뒤로 미루고자 했을 뿐이다.
“따라오세요.”
“가자.”
“일행이라니? 여기서 누구 만나?”
“응.”
“뭐? 누구?”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래?”
“지금 안 놀라게 생겼어?”
“그렇게 놀랄 것 없어. 편안한 사람들이야. 어려운 사람 아니라고.”
“누군데?”
“우리 부모님.”
“뭐어?!”
“야야, 너무 놀라지 마. 어려운 사람들 아니라니까.”
“그래도,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여깄지.”
“지금 이 상황에서 넌 장난이 나와?”
“어우야~ 너무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너 가끔 그렇게 사람 흘겨보면 얼마나 섬뜩한지 알아? 꼭 귀곡 산장에 온 것 같단 말야.”
성민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모션까지 취했다.
정말 온 팔에 소름이 돋는다는 시늉으로 양팔을 문질렀다.
그에 도이의 더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고, 훗,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성민이 말한다.
“말하면, 너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랬어.”
“그래도 그렇지.”
“이것 봐. 벌써 이렇게 얼굴에 한가득 근심 투성이잖아.”
“당연하지.”
“그냥, 우리 애들 만났을 때처럼 하면 돼.”
“부모님이 네 친구들이랑 같아?”
“친구 같은 부모님이야.”
“그래도.....”
“얼굴 좀 펴. 우리 부모님이야 말로 네 얼굴 보고 불편해하시겠다.
너 꼭 울 것 같은 표정이라고.”
도이는 생각지도 못한 느닷없는 만남에 잔뜩 긴장을 했다.
성민의 말을 빌리자면 살짝 건들이기만 해도 금세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만 같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왜 일까?
“언제 왔어요? 한참 기다렸어요?”
성민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도이를 데리고 예약된 방으로 들어왔다.
그 곳에는 이미 그의 부모님께서 도착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라.”
“네. 참, 아버지, 내 여자친구.”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도이는 잔뜩 긴장된 음성으로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다소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에 성민이 훗하며 웃는다.
그 모습이 도이는 너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엄마 아버지 만난다는 말 안 했거든. 그랬더니 긴장 했나봐.”
“긴장 할 거 없어요. 앉아요.”
“네.”
“근데, 우리 어디서 본적 있어요? 난 왜 이렇게 아가씨가 낯익지?”
“글쎄요.... 전.... 기억이 없는데.....”
도이는 몰라도 윤희는 분명 도이를 본 적이 있기에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때, 상채를 살며시 뒤로 빼며 성민이 입을 방긋 거렸다.
“나 전학가기 전에 봤잖아요. 왜, 희망고 앞에서 김 기사님이랑 같이.”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은 말이라 윤희는 잠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했다.
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기억이 났는지, 두 손뼉을 마주쳤다.
“아! 기억났다.”
“네?”
“아, 미안해요. 내가 그냥 우연히 아가씨 한번 본적이 있었거든.”
“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참 예쁘네.”
“감사합니다.”
“배고프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수고는요, 뭘.”
“우리 맛있는 밥 먹어요.”
싱긋, 웃어 보이는 윤희를 보며 도이는 얼떨결에 같이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성민처럼 포근하게 다가왔다. 또한 편했다.
덕분에 잔뜩 몰려왔던 긴장감도 한 템포 늦출 수 있었다.
미리 주문을 해 뒀는지 하나하나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윤희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을 떨어댔고
도이는 예의바르게 꼬박꼬박 대답했다.
사실 윤희는 성민이 전학 가기 전 날,
그녀를 보고 좋아했던 것을 썩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달라 보인다.
성민을 변하게 하고, 그의 마음을 독차지한 도이가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게까지 느껴진다.
그 무뚝뚝하고 자기만 알고,
친구라고는 그저 아버지 눈에 차지 않는 녀석들만 주르륵 달고 다니던 녀석의 눈에서
눈물까지 뽑아 낸 도이가 새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성민이 전학 오던 날 우연히요.”
“전학 간 첫날부터 만난 거예요?”
“교무실을 물어봤거든요. 저한테.”
“그래요?”
“네. 근데 그 때 모습이 참 좋았어요. 첫 인상도 그렇고.”
“조금 의외네요.”
“네?”
“이 녀석 아무한테나 쉽게 마음 열지 않거든요.”
“아... 그래요?”
“워낙 고집불통에 성질머리가 보통 못돼 먹은 게 아니거든요. 후후.”
“아~ 엄마!!”
“이것 봐요. 지 욕 조금 했다고 엄마한테 이렇게 버럭 소리까지 치잖아.”
“후훗.”
주 메뉴가 나올 때까지 성민의 부모님과 몇 마디의 이야기도 주고받으면서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그 이야기 속에서 도이는 성민이 왜 친구 같은 부모님이라고 말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 했던 것만큼 어려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꼭 이모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성민은 양쪽의 부모님을 너무나 빼다 박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무뚝뚝하지만 가끔씩 어머니를 챙기는 자상함도
(아버지는 도이가 엄마와 한참 떠들 때,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식사를 도왔다.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그릇에 담아주는 행위 등을 통해서.)
무엇보다 아버지를 꼭 빼다 박은 외모를, 어머니에게서는 정겹고 풋풋한 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