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엄마~ 엄마~”
도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성민은 뛸 듯이 기뻤다.
엄마를 찾는 그의 목소리가 온 집안을 울린다.
“우리 아들, 왜 이리 기분이 좋아? 좋은 일 있었어?”
아주 잠시였지만, 한동안 한참 방황을 하던 옛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방황을 갈망하던 성민의 모습에서 더없이 맑은 웃음을 보니,
윤희는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보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외출 하셨는데, 왜? 아버지랑 할 말 있니?”
“외출? 시간이 몇 신데 외출이야? 쳇.”
“얼추 들어오실 때 됐어.”
성민은 투덜거리며 다소 심통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곧, 그 심통하던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피어난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에게 얼굴 도장이나 찍어주려는 의도로 아지트를 찾아갔다.
성민으로써는 더 이상 그들에게 도이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터져버린, 성민으로써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에서 오히려 기쁨을 얻었다.
도이가 자신을 얼마나 어리게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이야기는 그냥 혼자만 아는 비밀 따위로 두고 싶었는데
그 이야기를 도이도 알게 되었다는데서 처음에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지만
도이의 반응은 무척이나 좋았다.
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유민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찾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솔직히 그 정도가 얼마인지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가끔씩 자신이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도이는 이제야 성민을 알아봤지만 성민은 그녀를 알고 지낸지 벌써 몇 해나 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서운한 마음도 있었고 괜스레 억울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의 등 뒤에 슬며시 다가와 자신을 않아주던 도이의 행동.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행복해 질 줄은 몰랐다.
사랑으로 인해, 좋아하는 여자로 인해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로써 행복하다는 것이다.
도이로써는 큰 뜻이 없이 행한 행동일지라도,
그 작은 행동 하나에 너무 기뻐 좋다는 말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성민이다.
조촐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분식집을 찾았을 때에도 그녀의 애정공세는 끊이질 않았다.
멋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주었고,
헤어질 때까지 성민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도 않았다.
늘 자신이 행해오던 행동을 그녀에게 받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성민아, 엄마 말 듣고 있는 거야?”
“아, 미안해요. 엄마.”
윤희는 무슨 연유에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날아갈 듯 기뻐하는 성민의 얼굴을 보고 함께 기뻐했다.
그러다가 기왕 기쁜 일이 있을 때,
더 좋은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성민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금 성민의 머릿속엔 온통 도이에 대한 생각들로 엄마의 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다시 말해줄래요? 이번엔 딴 생각 안 하고 잘 들을게요.”
“분명히 좋은 일이 있었구나?”
“하핫.”
엄마의 말에 성민은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엄마가 아빠를 설득 해 봤는데.”
“뭘요?”
“네 부탁 말이야.”
“내 부탁?”
“왜, 전학 문제 말이야.”
“아~ 근데 내가 엄마한테 전학 얘기 까지 했었나?”
“아버지한테 들었지.”
“그래요? 근데, 그거 이제는 안 해줘도 되는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전학 안 가요. 내가 전학을 왜 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성민을 보며 윤희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전학을 요구하던 성민이 아니던가?
그 때의 그 눈빛. 너무나 슬펐던 그 눈빛이 그녀는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전 학교에다가는 이야기를 마처놨는데?”
“뭐어?! 정말?”
“으응.”
“안 돼! 안 돼 엄마!! 나 전학 안 가요! 그거 없던 걸로 해 줘. 알았지?”
당장이라도 원한다면 가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엄마의 말을 막은 성민은
길이길이 날 뛰었다.
그 모습에 윤희는 화들짝 놀랐다.
녀석의 고함소리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 나, 유학은 어떻게 됐어요? 그거 날자 벌써 잡힌 거 아니지? 응?”
“그 그건,”
“응. 그건?”
“이번 달 말에 네 형이 잠시 들린다더구나.
휴식 차 나온다고 해서, 같이 들어갔으면 싶어서 미루고 있는데.....”
너무나 급박하게 재촉해오는 성민으로 인해 뜨문뜨문 뜸을 들이면서까지 말 했다.
또 이 다음에 무슨 이야기로 사람 놀래킬까, 솔직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젠장!
“엄마, 나 안 가!”
“응? 어딜?”
“어디긴 어디겠수? 형한테 가는 거 말이지.”
“유학을 안 가겠다고?”
“응. 안 가. 아니, 못 가.”
“누구 맘대로?”
성민은 어미를 향해 강력히 부인했고, 그 사이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근엄한 음성의 아버지 권회장이었다.
“아버지 왔어요?”
“누구 맘대로 가고 말고를 정해?”
여느 때와 달리 성민은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아버지를 맞았다.
그에 반해 권회장의 반응은 차고 딱딱했다.
“아이참~ 아버지도.”
“사내새끼가 왜 실없이 웃는 게냐?”
“하하. 그럴만한 일이 있거든요.”
“다음달 말경에 형 따라 들어가거라.”
“아이~ 안 된다니까요?”
다른 때 같으면 조금은 떽떽거리거나 퉁명스러운 반항을 한번쯤은 해올 녀석이
그저 실없는 눈웃음만 쳐대는 모습에 권 회장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켜줘야 할 사람이 생겼는데, 가긴 어딜 가요?”
“너, 여자 친구 사귀니?”
다소 뺀질거리는 얼굴로 말하는 성민을 보고 권회장이 아닌 그의 어미가 대꾸했다.
“그래서 말인데, 엄마.”
“…….”
“내일 시간 내줄 수 있어요?”
“무슨 시간?”
“아이참~ 내 여자친구 안 볼 거야? 안 궁금해?”
“뭐하는 애냐?”
“아버지는, 학생이지 뭐하는 애는 뭐하는 애겠어요?”
“별일이구나. 네가 여자친구를 다 소개시켜 준다하고.”
여자친구를 소개 해 준다는 성민의 말에 권 회장은 도이가 궁금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유민의 부모님이었다면 제일 먼저 물었을 법한 그녀의 집안사라든지,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말이다.
“별일이랄 것 까진 없죠.
그동안은 사귄 여자가 없었으니까 소개를 시켜드리고 싶어도 못했던 거잖아요.”
“민아랑 사귀었던 건 아니고?”
“아버지는!! 여기서 차민아가 왜 나와요?”
한껏 기분이 좋았던 성민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튼, 내일 저녁은 이 아들을 위해서 시간 비워주시기예요.”
“몇 시에 끝나는데?”
“학교요? 세시 이십분이요.”
“차 보내마.”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왜?”
“우리 도이는 나랑 같이 버스타고, 걸어 다니는 거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 버스를 타고 오겠다는 거냐?”
“당연하죠. 그것도 데이튼걸요.”
“정말 별일이로구나. 천하의 권성민이가 버스를 타 마다 않고.”
“우리 도이 덕분이죠. 장소나 정해서 알려주세요.
우리 도이가 너무 부담스러울만한 곳은 잡지 마시고요.”
“여자친구 이름이 도이냐?”
“네, 이름 예쁘죠?”
“나쁘진 않구나.”
“보시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걸요? 그럼 주무세요.”
성민은 금세 이층으로 사라졌다.
이층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부모의 입가에
아주 환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저, 녀석이 사랑을 다 하는가 보구료.”
“그러게 말예요.”
“한동안 안 좋아 보인다더니, 아마 그 아이랑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원하던 전학도 다 마다하네요.”
“같은 학굔가?”
“김 기사 시켜서 한번 알아보랄까요?”
“뭐, 내일이면 볼 텐데 굳이 그럴 필요야 있겠소?”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왜 궁금하지 않겠소. 제 입으로 처음 소개시켜주마 하는 아인데.
그래도 저 녀석 오랜만에 활짝 웃으니 기분이 좋아 놔두라는 거요.
저 녀석 저런 웃음은 처음이지 않소?”
“그건 그래요.”
“어쩐지 내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구려.”
“저도요.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