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그런 말을.....”
도이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앉는 것을 확인 한 후, 성민은 줄 곳 앞만 바라본다.
눈앞에 펼쳐진 저수지와 그 둘레를 감싸고도는 산과 나무.....
그리고 보이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바나나 보트 등을 타며 더위를 떨쳐버리는 사람들....
그러한 주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나.... 날 어떻게 생각해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도이는 무슨 말을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런 질문을 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물어 올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그 말 한 마디에 가슴이 싸해졌다.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만 같이 아프다.
성민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 하는 것인지,
이 질문을 한 궁극적인 요지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말, 믿겨지지 않는 다는 말은 무엇을 말 하는 것일까?
자신이 성민을 좋아하기에 기쁘다는 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있잖아......”
잠시 짧지만 긴 침묵이 흘렀다.
성민은 재촉하지 않았고, 도이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루라도 보이지 않으면 궁금한 사람이 있어....
늘 보이는 곳에 있기에 곁에 있다고 생각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옆을 돌아보니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야....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앞이 깜깜해졌어.....”
빠르지 않게 나지막이 말을 늘어놓는다. 이모에게 했었던 말들을.
“...주변을 막 둘러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아....
울고 싶었어.....
그 사람이 있을만한 곳을 가도 그는 없었거든....
날 피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상하게도 비참해지더라...
근데.... 그보다 더 비참한 일도 있다는 걸 알아버렸어....”
“…….”
“그 사람을 찾기 위해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너무나 한정적이었다는 거야....
고작.. 그 녀석의 교실이 전부였거든....
...생각 해 보니까.... 아주 만약이라도....
그 사람을 피해... 내가 숨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나를 쉽게 찾았을 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거든.”
그때, 줄 곳 앞만 보던 성민이 시선을 달리했다.
“왜냐면.. 그 사람은 내 비밀장소를 다 아니까...
나랑은 달리... 우리 집도 알고... 민주의 놀이터도 알거든....
그리고... 난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민주를 찾는다는 사실까지도 알아...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모네 집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아냈고, 도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는 웃는 게 참 예뻐...
그 웃음이 얼마나 매력적이냐면....
잠시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다가도 문득, 나도 모르게 그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
그냥 맥없이 웃어지고 싶어져....
언제 좋지 않았던 일이 있었냐는 듯이 말이야.... 참 신기하지?”
“…….”
“이게... 내... 마음이야.....”
“....그 사람이 누구예요?”
미세하게 웃어 보이는 도이를 보며 성민은 한껏 긴장 된 음성으로 물었다.
굳이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확인 하려는 듯한 물음에
도이는 잠시 멈칫 하는 것 같았지만 곧... 망설임 없이 말했다.
“...권성민.....”
“…….”
그 이름 석자를 말 하는데 왜 그리 긴장이 되던지, 도이의 음성은 무척이나 떨렸다.
꼭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말 하는 것도 같았다.
어렵게 고백을 하듯 그 긴 말을 마친 도이의 표정은 차라리 밝아 보였다.
단도직입적이고 생각보다 빠르게 물어오는 성민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 할 때보다 밝다.
오랜 시간 고열로 시달리다가 그 지독한 고열을 떨쳐내 버린 듯한 얼굴이다.
“그.... 권성민이 나예요?”
“응... 너야....”
“그.. 말이... 정말 이예요?”
“응... 정말이야....”
“정말 나를 좋아해요?”
“..으응....”
“그럼, 나 때문에 차유민과 헤어졌다는 말도 사실이겠네?”
“응... 그랬어....
그 중요한 순간에 네 생각이 너무 나서 차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어...
유민오빠가 끼워주는 반지를 끼고 싶지 않았어.”
“하아... 바보 같아.....”
그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성민은 도이의 고백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너무나 기뻐, 그 기쁨이 채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말을 몇 차례 반복하며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의 진심은 채, 불안에 떨고 있는 도이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제 나 어떡해요? 누나가 그렇게 말 하면 나 어떡해야 되는 거예요?”
“아....”
더군다나 마치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말에 도이는 가슴이 아파온다.
아아.... 정말 성민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누나가 그렇게 말 해 버리니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잖아.....”
“…….”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잖아...
묻고 싶은 것도 참 많았는데...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잖아.....”
“…….”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흔들리는 눈을 꾹 감으며 성민이 말했다.
그 행동은 이제야 찾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앞날의 행복을 꿈꿈과 동시에,
한번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의 표출이었다.
허나, 아직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확신 할 수 없는 도이는 돌연 무서웠다.
역시나 다희가 들은 말은 진짜가 아닌 것 같음에 두려워진다.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자신의 진심은,
누군가를 향해 콩닥콩닥 뛰어대는 가슴이 성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성민은 자신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민환이 자신에게 대하듯 “아는 누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만 같아 슬펐다.
하지만..........
“진작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
“이렇게 말 할 누나를... 아니... 너를...
몰라봐서 미안해....
그렇게.. 나... 없는데서.. 마음 졸였을 너를... 원망....해서.. 미안.....”
성민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그렇게까지 불안에 떨0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겹겹이 쌓인 불안감을 홀연히 떨쳐 내주는,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말들이었다.
“너를.. 원망했어....
바보 같이...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너를 원망했어....”
“성민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네가 정말로 차유민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성민아.....”
“그래서 그런 결심을 한 줄 알았어.”
성민은 가만히 도이를 끌어 않았다.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스킨 냄새가 도이의 코끝에 닿았다.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안겨본 성민의 품은 포근했다.
“이젠 바보처럼 널 보고만 있지 않을래.....”
그 품안에서 듣는 그의 음성도 좋았다.
“널 좋아하면서도 병신같이 아무 말 못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래....”
“…….”
“내 마음대로 널 좋아할래....
이젠 거짓 말 안 하고 당당하게... 사랑할거야... 나... 그래도 돼?”
가늘게 떨리는 물음에, 도이는 성민의 허리춤을 꽉 끓어 않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이 웃고, 도이가 웃는다.
세상을 다 갖은 듯한 환한 미소.
그간의 많은 일에서 비롯된 상처가 말끔히 치유되는 듯한 그 미소가 너무나 보기 좋다.
“성민아.... 나 궁금한 게 있어.”
한참을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 한 후...
나란히 저수지를 바라보며 도이가 입을 열었다.
다희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해 듣던 순간부터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내가 널 알기 전에, 날 알고 있었어?”
“어?”
“그냥, 다희가 그랬는데, 네가 오래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래?”
“응. 진짜야?”
“음... 모르겠는데?”
“왜 몰라?”
“모르니까 모르지. 그나저나 다희누나는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거야?”
“모르지.”
사실 성민은 이미 오래전에 도이를 보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도이를 향해 심장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진실을 확인 한 지금,
자신의 사랑을 지킨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민아.”
“왜?”
“왜 다희는 누나고 나는 너야?”
“후훗.”
“어어? 왜 웃어?”
“바보.”
“내가 왜 바보야?!”
“한다희는 네 친구지만... 신도이는... 이제... 내거잖아....”
“…….”
“넌... 이제 내 여자잖아....”
당당하게 내 여자라 말 하면서도 성민의 양 볼은 수줍음에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나마 사랑을 잃고 좌절하던 시간에..
도이의 앞에 나서기 전의 생활로 돌아간 성민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도이 앞에서 ‘이글’이라는 폭주족의 총장 자리는 상당히 뻘쭘해진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