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얼떨결이긴 했지만, 내친김에 양평을 찾은 도이는 마음이 편했다.
아무래도 엄마 옆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모와 이모부는 무척이나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도이의 등장으로 이모네 집안에는 온통 웃음꽃이 난발했다.
엄마가 해준 듯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동생들과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그러다 보니 밤은 무척이나 빨리 찾아왔다.
“이모.”
살짝 생떼를 부려 거실에 이불을 펴고
이모와 나란히 누운 도이가 어둠속에서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있잖아... 나... 어떡하지?”
“뭘?”
“음....”
되돌아가는 자신의 말에 무엇을 먼저, 또 어떻게 이야기 할지 정리가 되지 않은 양
길게 소리를 빼어내는 도이를 보며, 이모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열려진 창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은 조카의 얼굴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묻는다.
“너, 무슨 일 있구나?”
이모는 도이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양 보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좋아하는 사람?”
“응.”
“그 남자친구는 어쩌고?”
이모는 유민을 말하는 것 같다.
어쩐 일인지 유민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도 같다.
헤어짐은 물론이요, 유민과의 약혼식을 치를 지도 모르던 그 날, 그 사건까지도....
그러고 보니 그날, 도이의 손님이라고는 다희가 전부였다.
“유민오빠...는 그냥.. 오빠일 뿐인걸....”
“왜? 한동안 잘 지내는 것 같더니.”
“이상해... 나 진짜 이상해... 이모....”
“…….”
“유민오빠는 아무리 같이 있어도 그냥 오빠일 뿐이야....
아무리.. 오래 만났어도... 남자로 안 보여.....
안 좋아.... 이 가슴이 막 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근데.....”
조금은 괴로운 듯 들리는 도이의 음성에 이모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 얘는 안 그래... 있잖아.. 그 얘는...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
같이 있으면.. 그냥 좋아... 편해...
그 편안한 느낌이 오빠랑은 달라...”
“그리고?”
이모는 부드럽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뭐라고 다른 이유를 묻는다거나,
유민의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하는 것 보다는 그 방법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도이는 그 질문이 너무 좋았다.
자신의 주변에서는 바로 이렇듯 장단을 맞춰줄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 다희라도, 아끼는 동생인 민환이라도 조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궁금해....
늘 곁에 있다고 생각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옆을 보니까 그 애가 없어... 그 빈 자리가 가슴이 아파....”
“…….”
“그 애가 웃으면 나도 웃고 싶어지고, 그 애가 인상을 찌푸리면 괜히 짜증이 나고 그래.”
“…….”
“생각 해 보니까... 그 아이의 감정에 따라 내 감정이 움직여....”
더 이상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살짝 그을린 음성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이모는 도이를 품안으로 끌어 않았다.
.
.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셨어요?”
“이야~ 그때보다 더 멋있어졌는데? 이제 제법 남자 티가 나는 걸?”
“에이~ 이모님은. 제가 언제는 남자 아니었나요? 하핫.”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11시경이다.
조용하기만 한 집안에 불쑥, 예고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이모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아하니 민환은 이 곳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근데 옆에는 누구? 친구?”
“네.”
지난 밤, 도이는 거실에서 잠을 잤기에
현관을 들어서는 그들의 눈에 잠자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떠들썩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단잠을 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르게 웃음이 지어지는 성민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와요.”
어색해 보이는 성민에 반해, 이모의 얼굴엔 함박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조카를 보며 웃는 이 남자. 그리고 금세 붉어지는 그의 얼굴. 어쩐지 그가 반갑다.
지난 밤 도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
더 많은 이야기를 듣거나 그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자의 직감이 통한 것일까?
이모는 지난 밤 도이가 말했던 남자가 성민은 아닐까 생각한다.
또 그러기를 바란다.
비록 첫 인상은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가 있지만,
소위 어른들이 말하시길, 싹수가 노래 보이는 그런 인상에
생 날라리의 면모가 줄줄 넘쳐흐르기도 하지만...
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며 수줍어하는 그 얼굴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이모부는요?”
민환은 성민과 함께 거실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사이 이모는 시원한 주스 잔을 들고 왔다.
“얘들 데리고 낚시 가셨어.”
“여전히 낚시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렇지 뭐.”
“멀리 가셨어요?”
“응. 오늘은 좀 멀리 나가셨어.”
“근데 저 잠탱이는 왜 안 갔대요?”
“내가 못 깨우게 했거든.”
“왜 그러셨어요? 가뜩이나 게을러 터졌는데. 저러다가 뚱뚱보 돼요. 이모.”
“어제 나랑 얘기 하다가 늦게 잤거든. 피곤할거야.”
“그래도 시간이 몇 신데. 깨워야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심술을 부리며 천천히 도이에게 다가간다.
그를 이모가 말린다.
“민환이 너, 그러다가 이모한테 혼난다?”
“엥?! 왜요?”
“왜긴 왜야? 이모 말 안 들으니까 혼나야지.”
“어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11시라고요.”
“그래도 놔둬. 보아하니 며칠 잠 못 잔 것 같던데.
이모네 집에 와서도 단 잠을 방해받아야겠니?”
“이모네 집에 왔으니까 이모랑 수다도 떨고 그래야죠.”
“그건 어젯밤에 실컷 했어. 그러니까 더 자게 놔둬.”
다소 짓궂은 민환의 말에 이모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다.
“그럴 거면 방으로 들어가던가.”
“그럼 깨워야 되잖아.”
“까짓것 깨우면 되죠.”
민환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붉은 입술을 한 대박 만하게 내밀었다.
“밥은 먹었니?”
“아니요, 배고파요~ 이모~”
그러다가도 밥 이야기가 나오자 돌변하고 만다.
민환은 귀엽상한 얼굴을 다소 애처롭게 찡그리며 달려들었다.
이모는 그 모습에 다시금 웃음을 지어 보이시며 잠시 기다리라며 두 사람의 밥상을 차린다.
“이모 댑따 좋지?”
“그러네.”
“이모부도 만났으면 좋았을 걸, 아쉽다. 무지 좋은 분이시거든.”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후훗. 짜식~”
그때, 민환에게 장난기가 발동한다.
“어쩜 여자가 이렇게 잠기가 어두운지,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모르고 자네. 자.”
“...늦게 잤다잖아.”
반면에 성민의 얼굴은 한층 더 붉게 바래져갔다.
이상하게도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다. 홀딱 반해버릴 것만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러지 말고 우리 깨우자!!”
“놔둬...”
“에이~ 그러지 말고 깨우자.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행차하셨는데.
후훗... 그러고 보니 눈 뗬는데 너 있는 거 보면 어지간히도 놀라겠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또 언제 어디서 찾은 건지,
민환의 손에는 거실 한쪽을 굴러다니던 붓이 들려있었다.
아마도 동생들이 쓰고 치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민환은 예의 가소로우면서도 장난기가 넘쳐나는 얼굴로 천천히 도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붓을 움직였다. 도이의 코 위에서.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