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도이야―
유민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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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처음 너를 보았던 날이 생각나. 참 예뻤는데. 참 많이 예뻤는데....
처음에는 그냥 예쁘게 생긴 아이가 우리 집에 왔나보다 했어.
근데 어느 날인가 문득, 젖어있는 네 눈동자를 보게 됐어...
그 순간부터 두 눈동자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지...
단 한번도 웃지 않는 네 얼굴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항상 어두웠거든....
그 예쁜 얼굴엔 항상 어둠이 깃들여있었어....
네 두 눈은 항상 눈물에 촉촉이 젖어 있었고....
처음에는 네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내 마음이 뭔 줄 몰랐어.
....그 마음을 도이가 알려줬지.... 동정이라고 말이야...
그 말이 참 모질게 들리더라. 왠지 참 많이 모질게 들리더라.
그리고... 참 슬프게 들리더라....
어느 날인가― 우연이었어.
정말 우연히 부모님이 나누시는 대화를 듣게 되었어.
이 집에 이사 오기 전 있었던 모든 일을....
....어머니의... 죽음...과 현재의 처지, 그 이야기들 말이야...
너무나 안쓰러웠어.... 동정이라도 좋으니까 널 도와주고 싶었어....
다른 건 못해줘도 웃음만은 주고 싶었어... 그냥.. 그러고 싶었어...
네 과거를 알면서 비로소 네 얼굴위에 비춰진 어둠의 근원을 알 수 있었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었으니까.
근데... 이번에 역시 넌 모질게 굴었지.
어쩜 사람이 이토록 모질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모질었어....
단호하게 날 거부했고, 차갑게 얼은 시선으로, 날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벽을 만들어뒀지.
...좀처럼 허물수가 없었어.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두꺼웠거든.
근데, 그 때는 몰랐던 걸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알게 되었지....
그 벽은... 나를 경멸하는 벽이 아닌 세상을 경멸하는 벽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
그토록 어린 네가 벌써부터 세상을 경멸한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어.
...왜였을까?.....왜.... 그랬을까?
왜... 너를 지배하는 생각 하나하나에...
너를 지배하는 네 환경 하나하나에... 내 마음은 그토록 안절부절 하지 못한 것일까?
...............아주 잠시였지만...
그 시간이라도 네 곁에 머물 수 있어서 좋았어.
잠시나마 나를 보며 웃던 네 얼굴을 간직할 수 있어서 감사해.
물론, 앞으로도 좋을 거야...
비록 더 이상은 네 웃음을 볼 수 없겠지만.....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곁에서 웃을 너지만....
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꼭 이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되돌아 본 내 과거. 내 감정―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건, 네가 생각 했던 것처럼 그 감정이 동정은 아니라는 거야.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난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던 거라고.... 그렇게 믿어줬으면 좋겠어....
꾸밈없는 사실이니까.
왜... 욕심을 부렸을까?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을까?
언젠가 네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때, 이런 말을 했었지.... 오빠는 왜,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해 하냐고...
늘, 어린 네 눈에 보이는 나는 항상 모든 걸 갖고 있는 풍요로운 사람이었어.
사실 너의 그 생각들이 더 날 힘들게 했어.
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은 나를 채울 수 없었거든.
그 많은 것들을 버려서라도 너만 있다면 난 그 누구보다 풍요로울 수 있었거든.
다시... 돌아올 수 없냐고 말 한다면... 그건 너를 더욱 괴롭히는 일이 되겠지?
설사 다시 돌아온다 해도 넌 내 곁에서는 전처럼 환한 웃음을 지어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알아...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네가 돌아와만 준다면...
빈껍데기라도 널 다시 소유할 수 있다면... 난 당장이라도 그 말을 할 거야....
다시 돌아와 달라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아....
이제... 더 이상은 그 말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
아무리 애원을 해도 돌아오지 않을 너를 알아...
그래서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해.... 할 수가 없어....
........잠시, 긴 여행을 다녀올까 해.....
날짜를 당겼어.... 오늘 저녁에 떠나려고....
시간은 말하지 않을게.... 그러면 결국 널 기다리는 꼴이 될 테니까.....
그 전에 어렵게 어렵게 너에게 편지를 써 봐.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편지를 말이야.
꼭... 하고 싶은 말이 남았거든.....
미안했어.... 널 욕심 부려서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잠시나마 내 곁에 머물러 줘서....
고이...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허락해 줘서.....
마지막으로...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한번씩은 나를 생각 해 줄 수 있을까..?
그러면... 그것이 미련이 되는 걸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집에는 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그게 좋을 것 같았거든....
내 마음은 적어도 네가 불편한 걸 원치 않으니까.....
부모님은 모르셔... 그냥... 내 생각이 바뀐 줄만 아셔....
굳이 뭐라고 이유를 가져다 대는 것 보다, 잠시 미뤘다는 말을 드렸거든.
그 시간 후에 부모님의 허락 하에 일을 진행시키고 싶다고 말이야.
그 쪽이 혹시라도 내가 없는 시간에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 같았어.
그러니 돌아와.... 여긴 누가 뭐래도 네 집이야....
혹시라도 죄책감에 싸여 있다면.. 더는... 그러지 마라....
나를.... 의식하지도 말고... 민아를.. 의식하지도 말고...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의식하지도 마.... 그러면 내가 더욱 미안해 질 테니까....
........이렇게 길게 늘어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시작을 하니 끝을 내기가 어렵네.
하지만 이쯤에서는 그만 마침표를 찍어야겠지?
더 이상은 나도 할 말이 없으니까....
...잘 지내고... 많이 웃길 바래....
무엇보다.... 정말... 많이.. 사랑했다..... - 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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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하게 와 닿는 유민의 편지는 빽빽이 두 장 하고도 반장을 가득 메웠다.
구구절절이 하는 유민의 말에 도이의 고개가 푹 수그러든다.
너무나 미안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들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허나, 그보다 더 미안 한 것은...
유민의 편지를 펼쳐든 순간에도 그 녀석이 보고 싶다는 사실이다.
유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그 녀석이 걱정되고 신경 쓰인다.
...그 녀석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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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라 수업은 일찍 끝났다.
전날에는 어떤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민환에게서 어떤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는 묵묵 부답이었고 오히려 다른 소리를 하기에 바빳다.
도이는 아침부터 내내, 성민을 찾아갈까 싶었지만 가지 않았다.
극구 말려오는 다희때문이기도 했고,
당분간 오지 않을 거라 했던 진오의 말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 온 종일, 도이의 마음은 이글의 아지트에 가 있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나란히 하교를 하며 다희가 물어온다.
“응?”
“어디로 갈 거냐고.”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토요일인데 누구 안 만나?”
“응.”
“그럼 누구 집으로 갈 건데?”
“....어?!”
“얘 좀 봐. 왜 그렇게 놀래?”
“…….”
“그냥, 유민오빠 없으니까 집으로 갈 건가 해서 말이야.”
“내가... 있는 게 불편해?”
“말이 돼?!”
다희가 불끈했다. 도이가 내 뱉은 말에 무척이나 서운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따지고 보면 다희가 먼저 실수를 한거다.
한번 쯤 더 생각을 하고 물었더라면, 도이가 저리 반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희가 뒤늦게 그 생각을 한 것인지 실수를 만회하려고 어물 정,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사실.... 내가 그동안, 우리 오빠한테 뜸했잖아....
그래서 오빠가 삐졌거든... 모른 채 할 수 없잖아.
근데, 아무래도 오늘은 늦게 들어가게 될 것 같아서.... 너 심심할까봐 그렇지.”
다희는 남자친구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도이의 입장에선 조금은 불편할 만큼....
“그런 거라면 걱정 마... 안 심심해.... 양평 이모네 다녀올 거거든.”
걱정하는 친구를 보며 문득 생각 난 곳이 고작 양평이었다.
하지만 도이에게는 무엇보다 적당한 핑계거리가 되었다.
“왜?! 나 때문이야?”
“아니야... 그냥 엄마 보러.”
“정말? 정말 그냥 엄마 보러 가는 거야?”
“응....”
“정말?”
“응... 정말! 후훗.”
뻔한 거짓말이지만 다희는 잘도 속아줬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말이 나온 김에 엄마를 보고 오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다.
그래서 다희는 남자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도이는 조금은 얼떨결에 양평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