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해?”
이번에는 성민이 등을 돌렸다.
두어 칸, 내려갔던 계단을 올라와 민환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안 될 건 뭔 대?”
“장난 해?”
“설마,”
“씨빠빠. 빈정거리지 마라.”
“이야~ 그렇게 인상 쓰니까 졸라 무섭다, 야.”
독기 서린 성민의 음성에 민환은 살짝 오버된 제스처를 취했다.
“새끼,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 인상부터 좀 풀어라.”
“…….”
“근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거 먼저 물으면 안 되냐?”
묘하게 억양을 조절해 가며 성민을 자극한다.
“중요한 거야?”
“적어도 누구한테는.”
“그 누구가 누군데?”
“들어보면 알아.”
민환이 씩 웃는다.
어째 그 웃음이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한참 개봉중인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한다희한테 들은 건데, 네 진심이 뭐야?”
“진심?”
“신도이 좋아한다며. 오래 됐다며?”
“뭐, 뭐?”
성민이 심하게 당황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이제까지는 진오와 송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 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도이를 향한 마음은.
“언제부터야? 아니, 진짜야?”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말 하는 거야?”
“진짠가 보네.”
좀처럼 진정 되지 않는 음성에,
동문서답을 하는 민환을 보며 성민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한다희가 그래?”
“응.”
“뭘 믿고 그런 소리를 씨불여?”
“그런 게 있어.”
민환은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늘 자신이 해오던 행동을 타인에게서 보니 기분이 묘하다.
더군다나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불쑥 나타난 민환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것 보노라니
혈압이 오르기에 앞서 이상하게도 긴장된다.
묘하게도, 남자인 민환에게 매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씨빠빠. 난 건전한 대한민국의 청년이거늘. -_-;
“한다희 심부름으로 온 거긴 하지만, 영양가 없는 심부름은 아니라 좋네.”
그때부터 민환은 열심히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하루 전에 있었던 유민과 도이의 약혼식장,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리고 다희에게 전해들은 도이의 진심을.
민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성민에게는 말 할 수 없는 수많은 희비가 교차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하지만 좋았다. 꿈같이 다가왔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미웠다.
도이가 자신을 알아 봐 주기 전부터 늘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는데,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도이가 야속했던 것이다.
유민을 버리고 자신을 찾는 도이가 고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작 찾아주지 않았던 도이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분명, 이제라도 자신을 찾아오는 여자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잠시나마 자신을 몰라줬다는 건 어쩐지 서운하다.
그 서운한 마음이 좀처럼 가실 줄 모른다.
더군다나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문의 사람에게
(성민은 언젠가부터 유민의 집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을 줬다가 돌아왔다는 것은 어쩐지 개훈치가 못하다.
.
.
“어떻게 됐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물어오는 다희를 보며 도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못... 만났구나?”
“응....”
힘없는 도이의 대답에 괜스레 울적해진다.
그래서 그 기분을 돌려볼 겸, 다희는 다소 들뜬 얼굴로 말 한다.
“너무 걱정은 마. 곧 해결 될 거야. 해결사가 나타났거든.”
“해결사?”
“응. 해결사.”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기나긴 잠수를 마쳤다는 소리지 뭐겠어?”
“기나긴 잠수?”
“이야~ 신도이. 아무리 권성민이 좋기로서니 벌써 도민환을 잊은 거야?”
“민환이? 민환이 만났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정말 만난거야?”
민환의 소식이 그리도 반가운지,
아직 제 할 말이 다 끝나지도 않은 다희의 말을 싹둑 잘라버린다.
그에 다희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버렸다.
“응. 오늘 왔더라고.”
“그동안 뭐한 거래?”
“모르지.”
“안 물어봤어?”
“물어본다고 말 해줄 놈이냐? 그 놈이?”
“하긴....”
“그래도 너무 걱정 마. 얼굴은 좋아 보였어.”
“그래.”
“그리고 네 소식에 아주아주 방방 뛰더구나.”
“너... 무슨.. 소릴 했기에 방방 뛰기까지 해?”
“왜, 민환이가 유민오빠 무지 싫어했잖아.
유민오빠가 너한테는 잘 했다만, 민환이한테 오죽 못되게 굴었냐?
물론, 너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그러긴 했지만.”
어렴풋한 지난 기억에 두 사람은 살며시 웃었다.
“근데 해결사는 무슨 소리야?”
“아~ 내가 그 녀석한테 임무를 하나 부여했거든.”
“임무?”
“너도 가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거기 오가는 놈들이 오죽 살벌해야지.”
다희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성민이를 만나고 왔대도 도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모양인지
금세 좋았던 표정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민환이가 어제 그 일 듣고, 무지 좋아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네 마음도 넌지시 얘기 했거든. 네가 성민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성민이도 널 좋아한다더라고.”
“말... 했어?”
“응... 왜?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면 뭐가 걱정이야?”
“아직... 확실 한 건 아니잖아....”
“뭐? 성민이 마음?”
“응. 아니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앞으로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조금은 걱정스러운 도이에 비해 다희는 전혀 걱정스럽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너무나 태평해 보였다.
누군지 모르는 성민이 친구에게서 들었다는 그 말.
그 말을 너무 굳건히 믿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믿음이 무척이나 강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쉬운 줄 알아....”
톡 쏘는 듯 하면서도, 다소 새침하게 말하는 도이를 보며 그저 배시시 웃기만 한다.
그 웃음이 밉지는 않았다.
“참, 나 너한테 전해 줄게 있는데.”
“뭔 대?”
“사실.... 오면서 유민오빠 만났거든....”
“유민오빠?”
“학교 앞에 왔더라고. 물론, 아침에도 봤어. 널 찾는 것 같더라.”
“그....래?”
“응... 오빠가 너 어딨냐고 묻기에, 그냥 모른다고 말 했어. 그게 날 것 같아서...
물론.. 우리 집에 있다는 걸 아는 눈치였지만...”
“…….”
“그리고 이건, 오빠가 너 만나면 전해주라더라.”
다희는 가방을 열어 작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도이 앞으로 내밀었다.
“아~ 배고파. 우리 과일 먹자. 내가 가져올게, 잠깐만 있어.”
도이가 편하게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다희.
서둘러 방을 비워줬고 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봉투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