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51화 (52/91)

51.

다희를 따라 태진 고등학교 앞 까지 온 도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희가 알아놨다는 그들의 아지트. 성민이 있다는 그의 아지트.

그 곳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다린다고 기다려봤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또 세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덧 열시를 훌쩍 넘어섰다.

기다림에 지친 도이는 할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내일 또 와보자. 내일은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작은 어깨가 축 늘어진 도이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다희가 말했다.

도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둘은 성민의 아지트를 벗어나 번화가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얼마간을 앞만을 보며 걸었다.

방향을 잘 잡은 것인지, 잘 못 잡은 것인지....

삼십분 정도를 걷다 보니 익숙한 동네가 보인다.

성북동. 자신의 집. 아니, 유민의 집이 있는 성북동.

우뚝, 도이의 발걸음이 멈춘다.

딱딱하게 굳은 돌상을 보는 듯 그녀의 몸이 일체 미동이 없었다.

“다희야.”

“응?”

“나... 당분간 너희 집에 좀 가 있으면 안 될까?”

“..안 될 리가 없잖아.”

유민을 꺼려함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기에 다희는 흔쾌히 승낙했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성북동,

도이의 집이라기보다는 유민의 집이라고 해야 더 맞는 듯한 그 동네를 등에 졌다.

쓸쓸해 보이는 도이의 뒤를 밝혀주는 달빛 까지, 오늘은 유난히 어두워 보인다.

.

.

날이 밝자 도이와 다희는 집을 나선다.

다희는 교복차림인데 반해 도이는 어제의 그 하얀색 정장 그대로였다.

밤잠을 설친 모양인지 도이의 얼굴이 까칠해 보인다.

“도이야, 그러지 말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응?”

“안 돼!”

“왜?!”

“그냥 안 돼.”

“아잉~ 그러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 늦어!”

“그러지 말고~”

작은 아파트를 나선 둘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는 내내 티격태격 이었다.

도이는 무언 갈 보채대는 다희를 본 채도 안 했고, 다희의 땡강도 계속되었다.

학교를 거르면서까지 성민에게로 가려는 도이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도이의 그 대단한 고집으로 인해 다희는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다희를 먼저 보낸 도이는 연이어 오는 버스를 타고 태진 고등학교로 향한다.

심난하다. 아니, 마음이 무겁다. 어제와는 다른 기분이 든다.

성민을 생각하는 순간 들었던 어제의 그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오늘도 못 만나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다.

아니, 설사 만나게 된다 해도 그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바보같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돌아 올까봐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등교시간이라 버스 안은 많은 인파로 붐볐다.

간혹 아침잠이 덜 깨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도 있다.

목적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열 정거장도 넘게 왔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멀지 않게 느껴졌을 뿐이다.

도이의 발걸음이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다.

어제 다희가 알려주었던 그 자그마한 빌딩의 지하로.

“하아.....”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면서 긴장을 풀어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한 걸음, 또 한걸음.... 한 계단, 또 한 계단.....

천천히 가지각색의 색상과 무늬로 요란 법석한 지하의 문이 가까워진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한차례 또 뱉어내고 가볍게 그 문을 두들겨 보려는데

뒤쪽에서 낯선 이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야, 뭐야?”

투박하고 거친 억양이었다.

흠칫― 놀란 도이가 어정쩡한 자세로 뒤를 돌았다.

그랬더니 제일 앞쪽에서 보이는 한 남자의 눈이 도이의 온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간다.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이잖아?”

그 남자의 뒤에서, 계단 저 위쪽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몇 명의 남자들.

지하실에 보이는 문이 달랑 하나인 것으로 보아하니 분명, 이 안에 들어갈 이들이었다.

성민의 소식을 들려줄 수 있는 이들이라는 확신이 선다.

“뭐냐고 묻잖아?!”

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쉽게 말을 꺼낼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상황.

성민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들의 차가운 모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풍기는 거칠고 또 거친 분위기에 도이는 바보같이

잔뜩, 겁부터 집어 먹는다.

“벙어리야 뭐야?”

“에이씹, 가뜩이나 기분도 꿀꿀한데, 웬 년이 아침부터 기분 조지고 있어?”

그들은 대게가 도이의 등장에 불만을 표했다.

“야야, 여기는 어린 얘들이 오는 곳이 아니거든? 말로 할 때 가라, 응?!”

얼른 빠져나가고 싶지만 빠져나갈 길이 꽉 막힌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유난히 뚜렷해 보여

개중에 더욱 포악해 보이는 한 남자가 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장난질을 걸어온다.

“저, 저기......”

“왜? 이 오빠한테 할 말 있어?”

“그, 그게 아니라.....”

“어려워 말고 말 해봐.”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도이는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냥 냅다 뛰쳐나가 그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도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이의 주눅이 든 듯한 모습을 즐기고 있었으니,

쉽게 길을 터주지는 않을 것 같다.

“어려워 말고 말 해봐.

뭐, 짜다리 봐줄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숙녀에 대한 예의로 이 오빠가 다 들어줄게.”

짓궂게 장난질을 계속 가해오는 남자의 행동에 주변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왜들 다 나와 있어?”

“어? 왔어?”

“뭐야? 왜 좁은 길 막고 있어? 뭐라도 있어?”

“뭐, 그냥. 어디서 재밌는 게 하나 굴러들어왔네.”

그러다가 일순간 도이에게 시선을 박아두었던 이들의 시선이

더 위쪽의 빌딩 입구로 향했다.

누군가의 등장으로 더욱 술렁이는 것이 또 한패의 무리가 몰려든 모양이다.

분명, 이 놈들도 학교를 가야 할 학생들이 분명한데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으로 말이다. 젠장!!

잔뜩 붐벼드는 사내들로 인해 도이는 전 보다 더욱 위축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성민을 찾거나 만나는 일 보다,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다.

“재밌는 거라니?”

“웬 계집이 얼쩡거리더라고. 그래서 잠깐 재미 좀 봤지.”

“계집?”

“응. 여기, 이 계집.”

그래도 이 무리 내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놈인지,

도이를 상대로 재미를 보던 녀석이 위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너무나 착실했다.=_=;

도이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 젠장맞을 놈이 도이의 뒷목덜미를 잡으며 앞으로 쑥, 끌어당겼다. 그런데―

갑작스레 온 몸에 가해지는 힘에 화들짝 놀라기보다도

순식간에 가까워진 또 다른 인물로 인해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

“어?!”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도이를 보는 그의 동공이 점점 커진다.

“왜, 왜? 아는 사람이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커다랗게 떠진 동공을 보며,

순간 도이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끌던 놈이 긴장을 한다.

“성민이 친구.... 맞죠?”

“그때, 그 누나 맞죠? 성민이 버리고 간 여자.”

“아.....”

고의적으로 내 뱉은 건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내 뱉은 건지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성민일 버리고 간 여자....

그 한 마디에 도이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가시 돋친 그 말이 무척이나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아니라고는 말 할 수 없는 날카로운 비난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들의 곁에서 도이보다 한층 더 파리해진 안색으로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도이를 상대로 막무가내로 장난질을 친 그 녀석과,

그와 함께 처음에 이 자리에 나타났던 무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