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꼭두새벽이라면 새벽이요, 이른 아침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때 아닌 고민에 휩싸이게 된 권 회장.
그는 내심 모른 척 하며 성민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좀 우스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자신의 곁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성민.
진득하니 물고 늘어지며 설득을 해오는 성민.
귀찮고 성가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성민의 태도에 긴장을 한다.
아비가 아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어렸을 적을 그대로 재생시켜 놓은 것만 같은 모습에
동요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며칠,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성민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하지만, 끝까지 순순할 순 없었으니, 권 회장은 조건을 내걸었다.
이제까지의 친구들과 다른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눈앞에 데려다 앉혀 놓으라는 엄명 같은 것이었다.
속된 말로, 어른들 눈엔 발라당 까진 날라리가 아닌,
좀 조신하면서도 돈이나 명예 따위와 상관없이 성민을 진심으로 아껴줄만한 사람.
아니, 친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을 데려다 앉히라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권 회장의 눈에 비친 성민의 친구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이나 어려운 환경을 빗대어 성민을 욹어먹거나 이용하려는
그런 놈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오나 송을 비롯하여 성민이 속한 폭주족 내에서는
끊이지 않는 빈번한 사고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것을 매번, 성민이...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권 회장이 다 뒷수습을 해 왔다.
그들의 친구뿐만이 아니라 항상 아들 성민이 관계되어 있었기에
얌체 같이 성민만 쏙 빼오기도 뭐했고,
사실, 성민만큼 심성이 여린 권 회장은 그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기간은 석 달 이내여야 할 것이며 내가 인정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은 그 놈들과의 관계도 허락 할 수 없다.
나아가,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네 놈이 그 놈들을 외면할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네 형에게로 보내 버릴 테다. 그래도 할 테냐?”
“…….”
“왜? 또 그건 싫은 게야? 왜 말이 없어?!”
“...아니요, 할래요. 할게요. 해요!”
“분명히 말 한다! 석 달이야! 석 달!”
“대신 아버지도 분명히 해 주세요.
제가 이번에 아버지가 정말 인정할 만한 사람을 데려다 앉혀놓는다면,
그 후에는 제 주위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가시 박힌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고요.
내 친구들, 그냥 그대로 놔두겠다고요.
더 이상은 강제로 떼어 놓으려 하시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비난하지 않는다고요.”
“좋아. 그러지.”
“그럼 저도 좋아요.”
그렇게 권 회장은 검찰청 쪽에 압력을 넣어 그 업주로부터 순순히 합의를 보게끔 했다.
동시에 백송의 합의금을 마련해 주었고, 그렇게 시작된 일종의 도박 같은 게임.
아버지 권회장이 인정 해야만 송과 진오를 비롯한 아끼는 친구들의 곁을 지킬 수도 있었고,
미래도 편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도박을 시도했음을 당장에 친구 놈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비밀리에 거행했고 그 좋아하던 폭주를 다 마다했다.
며칠을 곰곰이, 전학 갈 학교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주저 없이 희망 고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새 학교에 등교하기 하루 전날,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여가면서 탐색차원으로 향한 희망고.
때 마침 하교하는 아이들 틈새에서 성민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쟤, 쟤 어때? 응?”
“어디? 누구?”
성민의 눈이 유난스레 반짝이면 옆에 앉아있던 그의 엄마는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아 왜, 쟤 말이야. 쟤, 커트머리에 바싹 말라가지고, 열라 구린 얼굴 하고 있는 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다가가서 물어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성민은 그를 알아도, 그는 성민을 알지 못했기에 참아야만 했다.
더불어 엄마에게라도 쉽게 알던 사람임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거짓 연극에 충실했다.
“어? 웃었다.”
“도대체 누구를 말 하는 거니? 누구?”
“저기, 똑 같이 생긴.... 친군지 뭔지 달고는 방긋방긋 웃는 애. 아, 안 보여?”
자신의 온 시야를 사로잡은 키 작은 계집아이.
무슨 일인지 얼굴가득 어두운 낯빛을 띄다가
친구의 몇 마디로 인해 활짝 웃는 그 얼굴에 유난을 떠는 성민.
도이를 쉽게 찾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도이를 찾았는지 무언 갈 골똘히 바라보다가 심드렁한 음성을 내뱉은 엄마.
“얜, 어쩜 보는 눈도 그렇게 없는지. 기왕이면 좀 볼만한 얼굴 고르는 게 좀 좋아?
그럼 잠시간이라도 눈요기도 하고. 아빠 코도 납작하게 누르고. 일석이조 아니냐?”
“엄마는, 내가 지금, 연애 상대 고르우?”
“그래도 그렇지. 어쩜 그리 사내새끼가 계집 보는 눈이 낮은지 모르겠다.”
“이게 다 꼰대 닮아서 그런 거 아니우?”
장난스레 말을 하지만 가볍게 웃자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악의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 모르게 포근한 느낌과 함께 도도하고 당당함이 보이는 성민이 아는 도이는,
아버지께 전해들은 젊은 시절의 엄마를 너무나 꼭 닮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는 수줍음이 많아 사람을 꺼려했고,
성민이 관심을 갖는 그녀는
여러 가지 고통과 함께 어린 날부터 겪은 아픔으로 인해 사람을 꺼려한다는 것이다.
“김 실장님, 쟤 뒷조사 좀 부탁해요.”
“네. 도련님.”
“그럼, 내일부터 희망 고에 첫 출근인가? 아니, 첫 등교겠지. 후후.
어째 앞으로가 기대 되는데. 무척이나 재밌을 것 같아. 안 그러우? 엄마?”
이미 도이에 대한 신상명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캐내고자 그렇게 말을 하며 웃는 성민의 모습에 설렘이 잔뜩 묻어나온다.
“엄마, 이번엔 정말 이 아들만 믿으라고!
꼭 엄마도, 우리 꼰대도 실망 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 예감을 믿어요.
그리고 이 아들을 믿으라고! 분명히 내 눈썰미는 녹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만남. 운명인 듯, 예견 된 것 마냥 다가간 그 자리.
그렇게 그런 방법으로나마 그녀의 존재를 부모님께 당당히 알리고 싶었던 성민.
동시에 그녀를 얻고 친구들을 지키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그 때의 계획은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도 짜 보고,
평소와는, 혹은 전 학교인 태진 고등학교에서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그녀의 곁에 섰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
뜻밖의 정보. 유민의 여자친구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깊은 비밀이 느껴지는 그녀. 그리고 예상을 뒤 엎는 그녀의 돌발선언.
차유민과의 약혼식!
축복받지 못할 약혼식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감행한 그녀.
이제는 모든 게 끝이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단순히 친구로만 여기기엔 그녀를 향한 성민의 감정은 너무나 깊도고 컸다.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도이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모님 앞에 내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님 앞에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심과 함께 꿈꿔오던 친구를 지키는 일 까지도...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갔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셈이다.
“그 애를 더는 이용할 수가 없었어. 더는 그 애를 놓고 송이를 지킬 수가 없었어.”
또 다시 시작된 반항.
너무나 소중한 친구.
소중한 것을 잃어 아파하는 친구 백송을 위해서 잠시 접어두었던 반항이었지만
이제는 그를 위해 접거나 벌이는 반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 감행하는 반항도 아니다.
그저, 이제까지의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후회하는 반항이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해온 그녀에 대한 감정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과 그녀를 단 한번도 잡아보지 못한 미련함으로 오는 후회와,
후회는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이렇다고 말 하지 못하는
억눌린 감정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
“근데 엄마... 나...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지?”
태어나 성장하면서부터는 정확히 두 번째 보인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어쩐지 쉽게 가시지 않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민은 여전히 임 여사의 허리춤을 꽉 끓어 않은 채로
갈라지는 음성으로 묵직한 한숨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힘들어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임 여사는 일부러 묻지 않는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나 정말 어떡하지?”
도대체 몇 번 째 인지 모르겠다.
자꾸만 반복되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는 저 말이....
하지만 이제 그 말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성민은 여전히 어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이렇게 말 한다.
“나... 정말... 그.. 애를... 사랑...하나 봐.....”
“…….”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