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진오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곳. 정아의 집 근처. 성북동의 작은 호프집 안.
성민이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상황은 크게 진행이 된 후였고,
성민보다 이르게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너무나 낯익은 파랗고 하얀 자가용 두 대.
그 안으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한 여자와 송이 나란히 올라타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선 푸른빛이 띄었다.
“성민아!”
물끄러미 경찰 차 안으로 올라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진오가 다가온다.
“어떻게 된 거냐?”
상당히 딱딱하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보는 대로.”
“저 여자는 뭐야?”
“범인.”
“범인?”
“응. 범인. 한정아 뺑소니의 가해자.”
“어떻게 찾은 건데?”
“그냥 술 먹으러 들어왔다가.”
상당히 껄렁껄렁한 대답에 성민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진다.
“씨빠빠. 똑바로 대답 안 할래?”
성민의 어투에서는 강한 지배력이 느껴졌다.
익숙한 만큼 낯선 차가운 말투에 진오가 잠시 움찔거린다.
“말 그대로야. 저녁에 정아한테 다녀왔거든.
그러고 나서 잠시 들려보고 싶다더라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왔는데, 술 먹자잖아.
그냥 모른 척 하거나 말리고 싶지 않아서 따라 들어왔지.”
성민이 다가갈 새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두 대의 경찰차를 보면서
진오의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송이 기분이 더 나빠졌어.
옆 테이블에서 어떤 여자가 울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불쾌했던 모양이야.
한 여자는 울고, 그 앞에 두어 명의 여자는 좀 거친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 여자를 달래는데, 많이 시끄러웠거든.”
“…….”
“참다못한 송이 조용히 좀 하라고 말하려는지, 일어났어.
근데, 말이 아닌 주먹이 먼저 날아가 버렸지.
왜냐면, 백송이 일어난 순간, 그 여자들의 입에서..
하필이면 지난겨울의 뺑소니 사건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었거든. 정아 일 말이야.”
“…….”
“그 여자가 그렇게 말 했어.
‘얼마 전에 말이야, 내가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됐을 때 있잖아?
그 때 사실...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말았어.
인간으로써는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짓을 하고 말았어.
....사람을 쳐버렸거든. 내가 어떤 여자아이를 받아버렸거든.
근데 비겁하게도 도망을 치고 말았어.... 무서웠거든.....
검붉은 피를 흘리며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그 아이가 무서웠거든....’라고 말이야.”
성민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멀어져버린 두 대의 차를, 백송과 그 여자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 곳에서 가장 가까운 파출소로 향한다.
다행이도 첫 번째로 도착한 파출소에서 백송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제야 찾은 원수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송의 모습을.
차가운 이미지가 강한, 제 멋대로의 송의 모습.
도전적이면서도 매섭고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젖어있었다. 슬프게 젖어있었다.
그 눈은 정아를 찾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눈빛이 공허하다. 슬프게 젖었지만 그래서 더욱 공허하다.
성민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띄우고 앉아있는 한 여자.
역시나 얼굴 가득 눈물이 범벅이 된 한 여자.
그리고 숫한 상처로 성한 곳이 없어 보이는 한 여자.
몸도 마음도 모두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한 여자.
그녀는 지금 어느 순경에게 취조를 당하고 있었다.
성민은 천천히 송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한대의 담배를 권한다.
송은 말없이 그 것을 받아 입에 물었다.
송의 담배에 불씨가 지펴지고 이내 하얀 연기를 내 뿜으며 타들어간다.
“민아.”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성민을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괴롭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미치겠다.”
“…….”
“이제야 찾았는데, 우리 정아 그렇게 만든 그 인간, 이제야 찾았는데...
근데 내가 정아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너무도 없다는 게... 그게 날 미치게 만든다.”
뿌연 연기에 가려진 슬픈 눈동자와,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가려질 수 없는 떨리는 음성이 성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송이 말 했다.
그 여자는 분명, 사람을 죽인 살인자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체벌한 자신 또한 죄인이 되어 벼렸다고....
법의 심판 앞에서 법보다 먼저 도덕으로 정아를 대신해
그녀를 체벌한 송마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라고...
그는 자신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보다는,
정아를 대신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저 여자를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송의 죄는 두 가지였다. 폭력과, 기물 파손 죄.
우선 폭력은, 뺑소니 사고의 주범인 그녀에게 가한 일로,
어느 정도는 정당방위임이 인정이 된다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바로 기물 파손 죄였다.
한 참 바쁜 시간에 남의 엽소에서 행패를 부리며 몇 가지 기물을 파손했기에
업소에서 그를 고소한 것이다.
영업에 차질이 생겼기에 그냥 둘 수가 없다는 게 업주의 입장이었다.
성민의 입에서 나직하고 묵직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친구가 뭔지, 그 놈의 우정이 뭔지....
송을 그렇게 방치 할 수만 없던 성민.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담배를 물며 일어선다.
송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는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날은 밝아 해가 뜨고 있었다.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계절은 여름의 시작이었기에 아침 해가 유난히도 일렀다.
“꼭두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게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넓고도 넓은 집에서
제일 먼저 성민을 반기는 음성은 퉁명스러운 아버지의 것이었다.
성민은 그 앞에서 다시금 무언 갈 망설이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 하더니 곧,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권 회장이 잠시 당황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부탁이 있습니다. 아버지.”
심상치 않은 공기의 흐름에 주변이 고요하다.
아침 식탁을 차리기 위해 분주한 주방까지도 고요해졌다.
그 고요한 정적을 깨는 것은 오로지 성민의 굳건한 결심이 깃든 몇 마디의 음성이 전부였다.
“돈이 필요 합니다. 친구의 일로 돈이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도와주세요.
마지막으로 부탁드릴게요.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드릴게요.”
“친구라면 누굴 말하는 게냐?”
“...백송...이요.”
“....백송이라면, 그 때 그 친구 말이냐?”
“네, 네 아버지.”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구나.”
“그렇게 됐습니다.”
백송을 아는 듯한 권 회장.
그의 물음에 성민은 단조로운 대답을 했지만 이내,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그래야만이 아버지를 설득해 도움을 받기가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는 잘 알겠지만, 안되겠구나.”
“아버지!”
“언제까지 친구 놈들 뒤치다꺼리만 할 게냐? 네가 왜 그 놈들이 벌인 일에 나서? 나서길!”
“....친구잖아요.”
“친구는 무슨 놈의 친구! 친구 앞길 망쳐 놓는 놈이 친구란 말이냐?”
“누가 누구 앞길을 망쳐 놓았다고 그러세요?”
권회장이 막무가내로 꺼낸 말에 성민이 불끈했다.
자칫하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 것만 같아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권 회장은 쯧쯧, 혀끝을 찬다.
“꼭, 앞길을 망쳐놔야만 망쳐놨다고 할 수 있는 줄 아는 게냐?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 또한 이미 망쳐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걸
왜 모르는 건지, 그래서 어디 큰일을 할 수 있겠어?!”
단호하고 직설적이면서도 또한 냉정한 아버지의 말에 성민은 혼자서 이를 갈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친구를 욕하는 것은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누가 뭐래도 송은 성민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친구인 것을....
성민은 아버지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성질만으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다.
부유하지 못한 송의 집안. 자신과는 다르게 어려운 그 녀석.
이대로 방치를 해 뒀다가는....
아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영락없이 소년원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업소의 주인.
그리고 그와 송을 번갈아 보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경찰들.
하지만, 그 일을 아버지가 나서 주신다면 분명,
그 누구도 더 이상 송을 그대로 방치 해 두진 않을 것이다.
그 업소 주인도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봐 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정당방위가 인정된다고는 해도,
업소 측에서 고소한 사건은 합의를 하지 않고서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민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송을 위해서 잔뜩 일그러진 미간을 곱게 펴고
잔뜩 구겨진 자존심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다시금 수그렸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그 누구 앞에서도 쉽게 수그리지 않았던 그 자존심을 그렇게 굽힌다.
“불쌍한.. 놈...이잖아요... 나와 다르게 상처가 많은 놈이잖아요.”
“사내자식이 되가지고 왜 그리 마음이 단단하질 못하는지, 쯧.”
“친구잖아요. 아버지 아들이 믿고 의지하는 친구잖아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보다 더 좋은 친구는 많이 사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백송은 아니잖아요. 백송만큼 가치가 있다고는 장담 못하잖아요.”
“그건 네 놈이 그렇다고 단정을 짓기 때문이 아니냐?”
“아버지, 도와주고 싶어요. 정말 도와주고 싶다고요.”
“몇 번을 말해야 돼?! 안 된다잖아!”
“....미안한 마음 아세요....
그 놈을 보면 자꾸만 미안해지는 마음, 아버지는 아시냐고요?”
절실한 성민의 마음을 몰라주는 권 회장은 연신 쯧쯧, 거리며 혀끝을 내두른다.
하지만 성민은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그를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나같이 상처가 있는 놈들 이예요.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안다고는 말 하지만....
나란 놈은 복에 겨워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런 상처가 숫한 놈이라고요.”
“…….”
“그래서 미안해요. 그래서 고마워요.”
“…….”
“나란 놈은 절대로 겪지 못할 법한 상처를 갖고 있어서,
남의 상처 따위 보살필 줄 모르는 놈인데, 그 방법을 하나씩 알려주는 놈이 있어서 고맙다고요.
....그 마음 아세요?”
성민이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친구를 위해. 오로지 자신의 친구 백송을 위해 눈물을 보였다.
권 회장은 그 눈물이 더욱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뜩이나 친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작은 아들이 친구라는 그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들지 않는 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성민의 모습을 보자니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눈물이 안타까워 보이는 마음.
강한 척, 냉정한 척 하려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그 때문에 묵직한 한숨을 내 쉰다.
자신을 꼭 빼 닮은 아들의 마음. 냉정하지 못한 자신을 빼다 박은
아들의 심성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강한 것 같지만 그 강한 표면 안에 감춰진 근성.
무엇보다 약하고 여린 내면.
친구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친구의 일이라면 제 일처럼 생각하고 나서는
그 심성으로 인해 권 회장은 계속해서 묵직한 한숨만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