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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앞 그녀석-48화 (49/91)

48.

아버지 권 회장을 만난 후, 성민은 다른 길로 새지 않았다.

곧장 집으로 들어왔다.

그를 그의 어머니가 다정스레 맞아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들어오는 거야?”

임윤희는 며칠 새 많이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에 잠시 놀랐는지

토끼 눈을 떴지만 곧 태연하게 굴었다.

2층의 방까지 따라 들어온 임 여사의 손에는 잘 갈아진 오렌지 주스가 들려있었다.

“머리 새로 했네? 우리아들, 멋진데?”

아버지 권 회장과는 다르게 변화된 성민의 모습에

그저 늘 상 대해주듯 포근하게 구는 임 여사.

그를 본 성민의 표정이 어쩐지 한층 무거워진다.

“엄마.”

“응?”

“미안해요.”

“…….”

뜬금없는 성민의 말.

임윤희는 그 말의 뜻을 이미 알고 있는지, 측은한 눈길로 성민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그의 쓸쓸한 얼굴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긴다.

“무슨 일 있었구나, 우리 아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성민의 짧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

성민은 그녀의 허리를 꽉 끓어 않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파묻은 채로 쓸쓸하게 말 한다.

“할 수가 없었어.”

“…….”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어.”

“…….”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임 여사는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성민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린아이를 어루만져주듯이 그렇게 포근하고 따스하게.

그녀의 품에서 성민은 오랜만에 눈물을 흘려본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손길에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 때문인지 어머니의 몸이 잠시 놀란 듯 주춤거리며 살며시 움직였지만

성민은 어머니의 허리를 감싼 손과 팔에 더욱 큰 힘을 싫어 넣는다.

가슴이 아팠다. 성민은 지금 무척이나 가슴이 쓰리다.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처음부터 솔직하게 다가가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못나 보여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감정을 악감정으로 이용하려 했던 스스로에게

너무나 큰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처음엔 이렇게 아프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냥 잠시, 그 사람으로 인해 친구들만 구할 수 있다면,

친구들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면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고 생각이었고 또한 판단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민은 사랑보다는 우정이 소중한 줄만 알았다.

사랑은 버려도 우정은 못 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송을 위해 이렇게 어려운 결심을 했었다.

무모한 결심을 했었다.

그리고 그 무모한 결심은 끝내 아픔을 낳았다.

그 아픔은 예상 이외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

.

[성민아!!]

한달정도 된 것 같다. 아니, 아직 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피곤했다. 왜 그렇게 피로가 몰려들었는지 모르겠다.

새벽 두세시가 넘도록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을 좋아했던 성민이지만

그날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몰려드는 수면으로 인해 일찍 귀가 했었다.

한참을 깊은 수면 속에서 허우적이는데,

끊이지 않고 울려대는 벨소리로 인해 잔뜩 짜증으로 구겨진 머리를 들어올렸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권성민!]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전화를 건 것은 진오였다.

“씨빠빠, 죽을래?”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진오의 음성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투박한 욕설을 내 뱉는다.

잠결에 내 뱉은 말이라 억양은 무척이나 가라앉아 있었다.

탁하게 들렸고 또한 잔뜩 갈라진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수면에 절은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사나웠다.

[씨파, 일 터졌어!]

하지만 진오는 그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음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

[백송, 그 자식이 기어코 일을 벌였다고!!]

“무슨 소리야?”

다급한 진오에 비해 비몽사몽한 성민은 재빠르게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 왜 있잖아! 그 뺑소니!!]

“뺑소니?”

[정아 말이야. 한정아.]

“아....!”

한정아라는 이름 석자가 나옴과 동시에 잠이 깨는 성민이다.

아, 하며 입가에서 절로 탄식하는 한숨 섞인 묵직한 한 마디가 튀어 나온다.

한정아.

그녀는 동갑네기 친구로, 백송의 둘도 없는 분신 같은 존재였다.

백송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의 사랑.

그런데 그녀는... 몇 개월 전...

그 때는 올 해의 겨울이었다. 그것도 겨울의 끄트머리였다.

그 날은 며칠 째 눈이 잔뜩 내리고 난 후였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영하의 날씨에 수북이 쌓인 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얼음이 되어있었다.

길가는 온통 딱딱하게 얼어버린 눈으로 인해 지저분해져있었고,

날은 영하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그런 때에, 날씨가 아직 못다 풀린 때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나서던 정아는...

집 앞 골목길에서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어느 차로 인해 그만....

운전자는 초보운전자였는지, 브레이크를 밟으며 세워야 했을 시간에,

반대로 액셀을 밟아 가속도를 붙여버렸다.

당황한 운전자는 핸들을 급하게 꺾어 버렸지만,

꽁꽁 얼은 빙판으로 인해 자동차의 바퀴는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렸고,

뜻하지 않게 정아를 향해 돌진한다.

당황한 정아는 그 자리에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고,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온 몸이 붕 떠올랐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얼음덩어리위에 발갛게 번져가는 정아의 붉은 피.

작은 승용차 안에서 내리던 젊은 여자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한 당황스러움보다도

정아의 몸 어딘가에서 흘러내렸을 핏물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고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음이 파악되자,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렇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뺑소니 사고.

정아의 죽음을 전해들은 백송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쓰디 쓴 경험을 몸소 체험했고,

괴로워하는 송을 바라보는 성민과 진오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아무런 목격자도 없는 뺑소니 사고의 범행자를 찾기 위해 길이길이 날뛰던 백송.

꼭 정아의 원수를 값아 주겠다며

정아의 집 앞을 중심으로 성북동 일대를 샅샅이 뒤져가며

하루의 모든 시간을 그 곳에서 의지하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가해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도 모르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던 범인.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그 상황.

결국은 많은 시간만 헛되이 흘려보냈을 뿐, 이렇다 할 어떤 것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모두가 서서히 지쳐 가는데....

포기를 했는지, 이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체념을 한 것인지.....

잠잠하던 그에게 어떤 일이 생겼음에 확신이 든다.

“찾았구나...”

[일단, 말려야 돼. 말려야 한다고.]

“…….”

[근데, 나는 안 된다. 나 하나로는 역부족이야. 네가 있어야겠어.]

“..하아.... 어디냐?”

나지막한 한숨을 몰아 내쉰 성민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나갈 차비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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