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47화 (48/91)

47.

“꼴이 그게 뭐냐? 아주 애비 얼굴이 먹칠을 하려고 작전을 했구나? 네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안쪽에서는 성민을 향한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짧게 잘라진 머리와 탈색된 머리카락.

너무나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피어싱이 그의 눈살을 찌푸렸다.

“왜 불렀어요? 아버지?”

투벅투벅― 내지는 너털너털한 걸음걸이도 없었다.

거리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성민이 들어선 후 문이 닫힌 바로 그 자리.

“지금 이 애비와 장난이라도 하자는 게냐?”

단조롭지만 조금은 가시가 박힌 음성이었다.

넓은 방안에 덩그러니 놓여진 책상에 앉아 무언가 업무를 보던 권 회장이 성민을 바라봤다.

지긋한 나이를 말하는 자지자란 주름이 적당히 자리 잡은 얼굴은

주름을 빼고는 성민을 너무나 닮아 있었다.

아니, 성민이 그의 붕어빵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대략, 30~40년 후의 성민의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그 모습에 뭔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에이~ 설마요.”

느긋한 마음으로, 느긋한 억양으로 말을 하지만, 성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권 회장은 표정과 억양이 확연히 차이 나는 성민을 보며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말한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아~ 당연히! 모르죠.”

흔들리는 눈동자와 상반되는 너무나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잠시, 권회장의 눈가에 찬 바람이 서린다. 그를 본 성민이 움찔 한다.

“분명히 마지막이라고 했다?”

“…….”

“왜 아무 말이 없는 게냐? 혹시라도 또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안 그래요.”

차게 쏘아붙이는 듯한 권 회장의 말에 힘없이 대꾸하는 성민이었다.

힘은 없었지만 또한 단호한 대답이기도 했다.

마지막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차갑게 굳어졌던 얼굴이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물들어간다.

눈물만 흘러내리지 않을 뿐, 그의 눈동자는 울고 있었다.

“너.....”

권 회장은 그 눈을 놓치지 않았다.

아련한 슬픔과 함께 무언가 알 수 없는 가슴 쓰라림이 권 회장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

권 회장은 잠시 아들 성민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버지.”

“…….”

“일단은, 다시 전학 올래요.”

“어디를 말이냐?”

“어디긴 어디겠어요? 친구들 있는 곳이죠.”

“그건 안 된다.”

“알아요. 하지만 허락 해 주세요.”

“안 된다.”

“이 학교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눈동자보다 더 쓸쓸한 말이었지만,

권회장은 여전히 안 된다는 단 한마디로 못을 밖아 버렸다.

더 이상은 그 어떤 이유를 대가면서도 말을 할 수 없도록 말이다.

“후우.....”

“그런다고 안 되는 게 될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그럼,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

“기간을 좀 당겨주세요.”

“무슨 기간 말이냐?”

“비행기.... 날자....”

자신의 고집대로 성민의 기를 꺾어 버릴 듯 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점점 더 가슴 아리게 하는 그 눈동자를 볼 수 없었는지,

권 회장은 괜스레 책상위에 놓여진 서류들을 들춰보고 있었다.

모든 신경은 그 서류가 아닌 아들 성민에게 둔 채로.

힘없이 늘어트리는 성민의 말에 고개를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눈을 바라다본다.

그 어느 때와는 달리 단 한번의 반항이 없이 순수한 성민이 어쩐지 두려워진다.

이런~

“왜 그렇게 고분고분한 게냐?”

권 회장이 무척이나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은 절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게 좀 안타깝다. -_-;

“글쎄요.”

성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많고 많은 대답들 중에 저 말을 대신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학은 안 된다.”

“그래도 친구 놈들이랑 송별회는 해야 하는데.....”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송별회는 무슨.”

“이제 가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해야죠. 아버지.”

“네 놈이 어디 멀리 가냐? 어디 죽으러 가냐?”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잖아요.”

“방학은 폼으로 있냐? 이 놈아!”

별다른 감정이나 특별한 뜻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방학을 이용해서라도 친구들을 만나는 데는 특별히 제지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

한마디로 방학만큼은 성민에게 주어진 하나의 특혜이자 자유 같았다.

하지만 그 말에 성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권 회장은 물끄러미 어떤 대답이라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 후,

“...안.. 올 거예요... 잊을....때 까지는 안... 올 거예요... 그래서 그래요....”

너무나 고독하게 느껴지는 그 말에 권 회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잊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아요.....”

.

.

“어디로 갈까요?”

유난히 사람들이 많은 틈을 비집고 간신히 찾게 된 택시정류장.

도이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맥없이 흐르는 눈물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기쁜 마음에 택시를 올라타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으로 달려가야 옳은지, 도이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성민이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도이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너무나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데, 볼 수가 없는 그 녀석으로 인해,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그 녀석으로 인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도이는 지금껏 성민의 집이 어딘지,

하물며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가씨, 어디로 가냐니까?”

기사 아저씨가 다시 물어온다. 아무래도 내려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허나, 그 순간,

“태진 고등학교 앞이요, 아저씨.”

“아가씨는 누구야? 일행이야?”

“네.”

천만 다행으로 도이는 굳이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태진 고등학교? 가만, 그게 어디에 있는 학교지?”

“신영동에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앞좌석에 떡하니 올라타서는 싱긋, 웃어 보이는 다희.

도이의 말 못한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민이 보러 가는 거 맞지?”

다희의 물음에 왜 더 많은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도이는 잔뜩 메인 목으로 인해 짧고 간결한 대답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마음 정한거야?”

“…….”

“후회 안 하지?”

이동하는 차안에서 유민과 같은 질문을 하는 다희.

그 순간 도이는 잠시 잊어버린 유민이 생각난다.

늘 자신에게는 관대했던 남자.

하지만 아무리 사랑이라고 단정 지어도 사랑이 될 수 없던 그 남자를 생각한다.

괜스레 마음이 무겁다. 너무나 미안해진다.

“뭐, 하긴. 넌 유민오빠를 선택 한 순간부터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쳇, 바보. 넌 정말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너를 몰라?”

뒤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다희는 자신의 물음에 하나같이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은 마냥

그렇게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성민이, 잘은 모르지만 정말 괜찮은 애 같아.

민환이랑 닮은 부분이 많다는 게 늘 걸리긴 했지만....

우릴 감쪽같이 속인 건 지금 생각해도 살포시 열이 받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온 성민이는 정말 매력 있었잖아.”

“…….”

“참! 만나면 젤 먼저 그것부터 확인 해 봐.

도대체 널 언제 어디서부터 알았으며 언제, 어떻게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

“아우~ 아무리 생각해도 멋있단 말이야~”

어느덧 택시는 유민을 두고 떠나온 카페에서 멀어져간다.

그리고는 이제야 비로소 정말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도이의 심장이

주최할 수 없이 뛰고 있다.

..꼭 만나야 하는데...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만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기대의 수치가 균등하게 올라갈수록, 신영동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기다려.... 기다려 줘 성민아.....

이 못난 나를... 바보 같은 나를.... 제발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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