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어떻게 됐어?”
도이의 눈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또한 긴장감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그것보다, 넌 어때? 정말 할 수 있겠어?”
도이는 다희의 입에서 무언가 터져 나올 말을 기다렸지만,
다희는 도이가 기다리는 대답을 해 주기에 앞서 오히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도이야. 이건 네가 내 친구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아주 조금이라도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마. 응?”
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말 한다고, 내 앞에서도 아니라고 말 하지 마.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거, 난 다 알잖아.”
“다희야.....”
“꼭 그 아이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그 사람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는 거잖아....”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무리 다른 사람 자리를 만들어도 다른 사람으론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다는 거....”
“그건 네가 그 자리에 유민오빠만을 채우려고 하니까 그런 거고,
네 주위에는 유민오빠 만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그 사람에겐 기회를 안 줘?”
최후의 수단인 양, 도이의 오기를 꺾어보려는 다희였다.
그 억양과 표정이 너무나 신중했고 또한 절실했다.
“다른 사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완강한 표정에 도이는 그대로 되물었지만
다희는 그 순간 말문을 돌렸다.
“태영이의 도움을 좀 받았는데. 딱히 좋은 소식은 못 가져왔어.”
“…….”
“그렇지만 성민이는 만날 수 있었어.”
성민이의 이름이 테이블 위로 나지막하게 깔렸다.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거래?”
“그게...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성민이가 좀 이상하다고. 아니, 많이 이상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어...
그리고... 내가 아주 어마어마한 특보를 하나 가지고 오긴 했는데,
솔직히 난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다희의 말에 도이는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 순간, 성민이가 이상하다는 다희의 말에 왜 이리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보며, 누가 봐도 진지한 눈빛으로
오늘의 이 약혼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냐는 말이 왜 자꾸 귓가에서 맴도는지 모르겠다.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성민이 마저 결석을 하고 있는 동안,
왜 온 신경세포가 다 성민을 향해서 움직였는지....
도이는 그 해답을 찾고 싶었다.
학교를 거르는 성민을 보면서 왜 자꾸 그가 신경이 쓰였는지,
전처럼 활짝 웃으며 짜잔~ 하며 나타나지 않음에 왜 구태여 그의 교실까지 찾아갔었는지...
도이는 지난 몇 일간 자신이 한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기억 나? 왜, 처음에 성민이 보고 나서 어떤 애일까, 많이 궁금해 했었잖아.”
“…….”
“그때, 우리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 기억 해?”
“응. 대충은....”
“그 때의 예상이 보기 좋게 들어 맞았어.”
“어떻게?”
“그러니까 그게.... 반쯤은 예상했던 날라리였다는 거지.
근데 그건 문제가 안 돼. 왜냐면, 우리가 예상했던 건 완전 장난이었거든.”
“장난이라니?”
“그게, 예상보다 더 심하게 놀은 모양이야. 그 놈이. 이런 빌어먹을 놈!”
혼잣말까지 내 뱉고는 귀엽게 인상을 찡그렸다. 도이와 정 반대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심하게 놀았다는 거야?”
“아~ 그거? .....전 학교에서... 폭주를 뛰었던 모양이야.”
“폭....주?”
“응. 뭐라더라? 폭주족 이름이 뭐라고 하던데....
남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가 보더라고.”
다희의 인상이 한 번 더 찌푸려졌다.
기억을 가다듬어 보지만 좀처럼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튼, 성민이가 거기 총장인가 봐.”
“총장?”
“응. 총장....
암튼, 성민이가 전학을 온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내가 미처 알아오지 못했다지만,
오늘 내가 본 성민이는 그동안 우리가 본 성민이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어.”
내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도 무겁지 않았던 얼굴이,
긴장 되어 보이지 않았던 다희가 돌연 무거운 얼굴을 했다.
“머리는 어찌나 심하게 탈색을 했던지, 샛노래도 그렇게 샛노랄 수가 없더라고.
그리고 또 무슨 이유인지 반 삭발을 해가지고는.....
그 천진난만한 웃음이 싹 지워졌는데, 왜 그렇게 살벌하고 무섭기만 하던지....
정말이지 저게 내가 알던 권성민인가 싶더라니까?”
한참 물이 올라 이야기를 나누던 때, 유민이 가까이 다가왔다.
얼핏 보아하니 더 많은 인원으로 카페 안이 북적였고, 약속한 시간도 가까웠다.
이제 6시가 되려면 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유민은 오늘의 의식을 위해서 손수 주인공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온 것 이었지만,
도이를 에스코트해 갈 수가 없었다.
자신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채, 쉽게 다가설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벽을 형성하고
다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언뜻 유리창으로 비춰지는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포착 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유민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얘기는.... 해 봤어?”
“...몇 마디 못 했어. 딱, 두 마디 했거든.”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네가 걱정하고 있다고 그 말만 했지.”
“그랬더니 뭐래?”
“섬뜩했어. 어찌나 차게 웃던지.”
“..차게...웃어?”
“으유~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리다니까?”
다희는 살며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여름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공포영화를 볼 때의 소름이 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움 속에서 오는 아주 짧지만 큰 몸부림이었다.
“또 다른 말은....? 다른 말은... 없었어?”
“그냥, 그렇게 의미모를 웃음을 짓더니, 오토바이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던 걸.”
“아무... 말도 없이?”
“아니, 딱 한 마디 말을 하긴 했어.”
“뭐라고?”
“축하한다고 전해달래.”
“…….”
“근데, 그 말이 참 딱딱하게 들렸어.”
“그래...?”
“응. 근데, 그 이유를 내가 다른 놈한테 들어가지고 왔다는 거 아니겠니?”
도이의 안색이 조금 전 보다 더 많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커다란 슬픔이 드리워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민은 가슴이 아팠다.
한 고비를 겨우 넘겼나 싶었더니 이제는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다니....
그저 암담하기만 했다.
첩첩산중이었다.
“야! 차유민!! 거기, 두 주인공! 뭐해요? 시작 안 할 거야?”
커져가는 불안감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서 끙끙 앓으며 전전긍긍하는 사이, 뒤쪽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회를 맡았는지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재촉을 해오는 남자가 보인다.
작지만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진 소리에 도이와 다희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 서있는 유민 때문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조심한다고는 했으나
조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이미 들어버린 것 같았다.
“오, 오빠.....”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지, 사람 오는 것도 모르기에 방해 할 수가 없었어.”
“…….”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유민은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었다.
“어? 으, 응....”
“그래. 그럼 곧 시작 하니까 자리 옮기고 있어. 오빠는 담배 한대만 피우고 올게.”
“으응...”
“긴장이 되서 말이야.”
싱긋, 웃어 보이지만 늘 웃던 웃음이 아니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거짓웃음이었다.
도이는 알 수 있었다.
유민은 긴장이 되서 담배를 찾는 것이 아닌, 밀려오는 착잡함에 담배를 찾는 것임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임을 알고 있다.
아무리 주변의 환경으로 인한 오기였다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단 한번도 주변보다 그를 먼저 생각 했던 적이 없었다.
코앞에 닥친 그와의 약혼식을 앞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 순간 도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 속에 슬픔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민보다 그 녀석이 보고 싶었다. 너무도 많이.
“금방 올게.”
유민은 도이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바쁘게 등을 돌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이가 너무나 불안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까지 함께 온 마당에 더 이상의 고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 했던 것 같다.
“어쩌지?”
다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도이는 딱히 대답이 없었다.
다희는 불안했다. 유민의 표정이, 뒷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냥 둬. 다희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허나, 도이는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덤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