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43화 (44/91)

43.

좋은 날이라 그런지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렀다.

그 누구도 쉽게 ‘축하한다.’ 말 하지 못한 언약식임을 하늘도 아는 것일까?

하늘만은 도이와 유민의 이 행사를 축하해주는 것만 같았다. 꼭.

하지만 도이는 기쁘지 않았다.

차라리 먹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좋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도 모르게 치렀다.

정신없이 시험기간도, 시간도, 훌쩍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시험이 끝난 후라고 어깨가 가볍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이 머리위에서부터 도이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이 약혼이지, 약혼은 결혼이나 마찬가지잖아.

새 신부가 기운도 좀 내고 활짝 웃어야지.”

다희는 며칠 째 기운이 없이 축 쳐진 도이가 걱정스러웠다.

보통 친하지 않는 친구들이 보기에는 시험에서 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줄로 알겠지만 다희는 그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도이는 유민과의 약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운운되면서 그 많던 웃음도,

말 수도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시도 떠나지 않는 근심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두운 얼굴이 더 어두워보였다.

“다희야.”

“응?”

“넌.... 올 거지?”

너무나도 의기소침한, 자신 없는 물음이었다.

“그럼, 가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도이인데.”

“…….”

“꼭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응. 그래.”

“좀 웃어. 도희야. 좀 웃어.”

“...노력은 해 볼게.”

“…….”

마지못해 답하는 듯 보이는 도이의 답은 어쩐지 외롭게 들렸다.

이 상황에서 어울릴 법한 ‘응, 그래.’ 내지는 마지못해 하는 말이라도,

눈에 보이는 거짓말 일지라도 ‘웃고 있잖아....’ 등의 말을 해 주면 좋으련만,

그 좋은 말 대신에 ‘노력은 해 볼게.’라니.....

“그럼 저녁에 보자...”

“응... 어서 가....”

교문을 나서자마자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는 유민의 모습에 낮은 한숨이 연신 터져 나온다.

마음만 같아서야 후문을 통과해서 유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고만 싶었지만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도이의 모습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나 원해서가 아닌

자신이 내 뱉은 말에 대한 책임 하나로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아리게 만들었다.

“참, 다희야.”

“응?”

“저기, 내가 부탁한거... 그거....”

“걱정 마. 꼭 소식 알아가지고 갈게.”

“...응.”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나 믿어. 꼭 소식 가지고 갈 테니까.”

“응.”

“어서 가.”

“그래. 부탁 좀 할게.”

딱딱한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 마냥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옮기는 도이의 뒷모습이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리고 슬퍼보였다.

또한 더 많은 감정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역시... 그냥 두는 게 아니었어.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고....”

“…….”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말리냐고. 내가 어떻게....”

유민의 스포츠카를 타고 어디론가 멀어져가는 도이를 보며

다희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말을 내 뱉었다.

그 말속에는 진득한 한숨이 묻어나왔고,

다희는 잠시 그렇게 주춤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내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였다.

.

.

저녁 다섯 시가 조금 더 넘었다.

도이는 새하얀 치마정장을 입은 채로

작지만 결코 작지만도 않은 한 카페 안에 들어와 있었다.

주위가 온통 시끄럽다.

실내는 몇 명의 남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한 가운데 유민이 있었다. 커다란 3단의 케익도 보인다.

아마 유민은 이 카페에서 친구들을 초청 해 놓고 도이와의 약혼식을 거행할 모양이었다.

“주인공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

“아, 우리 초면이죠? 차유민 한 다리 위 선배예요.”

“아, 안녕하세요?”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가장자리 옆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시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도이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은 한데, 주인공 치고는 표정이 너무 딱딱하다. 긴장해서 그런가요?”

부드럽게 말을 던져오는 그를 보며 예의의 웃음을 띠어주었다.

그 웃음에 그 남자는 단순하게 긴장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야~ 이렇게 예쁜 주인공이 긴장을 하니까, 그 모습도 예쁘네.”

“…….”

“차유민이 왜 그렇게 도이씨 자랑을 하는 줄 알겠네요.”

“…….”

“근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말씀 하세요.”

“왜, 도이씨 친구들은 아마도 안 보여요?”

“아.....”

눈치 없는 그 남자의 물음에 도이의 고개가 푹 수그러든다.

그러고 보니, 유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낯선 인물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도이와 한두 번 얼굴을 마주 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게가 낯선 인물들이었다.

도이는 딱히 대답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작해야 올 사람은 다희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친구라고는 다희와 민주뿐이었는데,

민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천사였기 때문에 올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민환이나 성민은....

그들은...도이의 이 오기에서 비롯된 결론을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도이에게 단 한번도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물며 민환은 그 날, 백화점에서 헤어진 후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성민도 만나기가 힘들었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축하를 해 줬으면 좋으련만,

성민은 도이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후부터는

도통 그녀의 앞에 나타나질 않는다.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인해 서운함을 느낀 것일까?

아니, 서운함을 넘어서 실망이 역력했던 그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래, 성민은 도이의 그 말에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빛을 내비췄다.

전부는 아니지만 도이는 어느 정도 성민의 마음을 이해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만약에 자신이 성민의 입장에 놓여 있었더라면

자신 또한 성민에게 무척이나 큰 실망을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도이 역시 성민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 어렵게 전화 통화를 시도 하노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아니면 그녀를 고의적으로 피하는 것인지...

성민의 핸드폰은 매번 꺼져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교실이라도 찾아가서 만나려고 하면,

어찌 된 영문인지 민환이 하는 얄미운 짓을 고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성민까지도 등교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험이 끝난 오늘까지도.....

도이의 표정이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위로 아련한 슬픔이 차올랐다.

“아, 이런.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네요.”

“...아녜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가뜩이나 딱딱한 얼굴에 아련한 슬픔이 차오르자 그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사과를 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 할 때 마다 도이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이 차오르는 촉촉한 물줄기에 더욱 난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또 그러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는 사이,

고맙게도 유민과 다희가 다가온다.

“도이야.”

“왔어...?”

“선배, 여기서 뭐해요? 왜 남의 여자한테 추근거려요?”

넌지시 장난을 던지는 유민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줄 상황이 아니었다.

“아, 치, 친구 분이 오셨나보네요.”

휴우.... 정말이지 십년감수했네. 괜히 참견한답시고 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냐고!

그는 속으로 남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쏜살같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유민이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다희는 무언가 할 얘기가 있다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스리슬쩍 유민의 눈치를 보았다.

“오빠,”

“응?”

“나 잠깐 다희랑 얘기 좀 할게.”

“무슨 얘기?”

“그냥, 그냥 얘기.”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거야?”

“…….”

유민은 굳이 들으려는 의사보다는 형식적임에 가까운 말을 꺼냈지만

도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잠시 늦췄던 긴장감이 바싹 조여져왔다.

이제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도이는 옆에 있지만 무엇이 이리도 불안해져 오는 것인지.....

“그럼, 얘기 나눠.”

“응. 오빠.”

두 사람의 은밀한 눈빛교환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지만,

유민은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며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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