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들어가자.”
기분 좋게 시작을 했지만, 좋지 못한 마무리를 끝으로 돌아온 집 앞.
유민과 도이의 표정은 서로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일을 진행 시키려면 아저씨도 아셔야지.”
“응. 오빠.”
낯과 밤의 분명한 경계선조차 존재하지 않은
습하기만 했던 하루를 마치기 위해 돌아온 집 앞이지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도이의 발걸음이 좀처럼 무겁다.
삐걱, 웅장한 겉과는 달리, 유민의 집과는 달리
녹이 슬어 낡은 문을 열고 발을 들여 놓는다.
오랜만에 어둠이 아닌 밝은 빛이 도이를 반겨 주지만 도이는 그 빛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주말이면 집에 좀 붙어 있지 않고.”
“…….”
안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반갑지 않은 음성과
똑딱똑딱,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죄송해요. 아저씨. 저랑 같이 있었어요.”
딸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넓디넓은 등만 보여주던
준태(도이의 아빠)는 유민의 음성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저녁은 드셨어요?”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준태는 도이와 나란히 들어서는 유민이 반갑지 않았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그럼 자네는, 여기가 자네가 와도 되는 곳이라고 생각 하나?”
“…….”
그냥 가벼운 장난을 치듯 아무런 감정 없이 내 뱉은 말이었지만
차고 직설적인 준태의 답변에 당황스러웠다.
“하하....”
“실없이 웃지 말고, 어서 올라가 보게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난 자네한테 들을 말 없네.”
“…….”
유민은 쉽게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딱딱하던 준태가 아니었다.
어머니께로부터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저, 그래도 꼭 드릴 말씀이....”
“아, 글쎄 난 들을 이유가 없대도!”
“아저씨....”
“그리고 이 참에, 얼굴 본 김에 한 마디 더 하겠네.”
“…….”
“앞으로 도이 곁에 얼씬도 하지 말게나. 절대로 곁에 머물러서는 안돼!”
아무래도 어머니나, 아버지 쪽에서 무슨 말씀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유민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준태에게서까지 축복받지 못한 사랑이라....
도이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견딜 수 있지만...
도이 역시 견뎌 줄지는 장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민은 도이를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반면,
도이가 유민에게 갖은 감정은 결코, 사랑이라고 단언하기엔 자신이 없었던 이유 때문이다.
“아빠, 왜 그래?”
뜻밖의 준태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는 유민을 보며, 도이가 기분 나쁜 음성을 내 뱉었다.
“너도 다시는 유민군과 가까이 하지 말거라.”
“왜?”
“아, 글쎄, 이 애비가 그러라면 그럴 것이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싫어.”
“신도이!”
“반대 하려면 해. 애초부터 아빠의 허락은 필요 없었으니까.”
도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듯, 그렇게 말 했다.
준태의 표정이 무척이나 무거워졌다.
자신을 똑 바로 바라보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덤벼드는 딸아이의 모습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래서, 애비 허락도 없이 그 결혼인지 뭔지를 하겠다는 거냐?
네 분수도 모르고 분에 넘치는 남자와? 분에 넘치는 대 기업 아드님과?”
“...응. 해. 할거야. 유민오빠가 나 좋다니까 한다고!”
“너, 이 애비 말을 도대체 뭐로 듣는 거야? 내가 안 된다잖아!
아빠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어디서 그런 막말을 내 뱉어?!”
“....그러는 내가 언제부터 아빠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아빠 뜻대로 하려고만 해?
어차피 아빠한테 나는 존재 자체도 없는 그런 딸 아니었어?
엄마가 아빠한테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했듯이 말이야.”
짜악―
지나치게 막말을 내 뱉는 도이의 행동에 유민이 당황함을 추스를 세도 없이
준태의 큰 손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 작고 여린 뺨을 내리쳤다.
그 힘에 도이가 휘청거리며 몸을 움직였고,
놀라 멍해있던 유민이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너, 너...!”
준태는 가시지 않는 화로인해 더 이상은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기가 막혔고 너무나 허무했다.
지난 인생과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마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다. 그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찌 일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잃었는데 그 슬픔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슬퍼하고 싶어도 슬퍼할 수가 없었던 자신의 처지,
구하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던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긴급하게 병원으로 후송하였더라면, 조금 이라도 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며,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면서도
아내의 곁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그렇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말은 않지만 사실 평생을 두고 한이 맺혀버렸다.
3년 전, 아내의 죽음은.
뭐라고 말 할 수 없었던 혼자서 감수해야했던 시간과 고난과 역경들.
그것을 어린 도이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그 마음까지도 이렇게...
진흙탕 속에서 밟혀 찢어지고 또 찢겨지듯이 무시당하는 게 가슴 아팠다.
더욱이나 남이 아닌 피부 치에게...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그녀를 쏙 빼닮은 딸아이에게.....
“아빠도 내가 싫지? 근데, 근데 말이야. 나도 아빠가 싫어.”
준태의 속이 어떤 줄도 모르는 채, 준태의 진심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채,
도이의 막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빠가 나 싫어하는 것만큼 나도 아빠가 싫다고.
아니, 아빠가 나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난 아빠가 싫어.”
“…….”
“작지만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행복했던 그 시간을 산산이 무너뜨린 아빠가 싫어.
위급한 엄마, 그냥 그렇게 방치해둔 아빠가 싫어.
병원만 가면, 그래도 살수 있었는데, 분명 살았을 텐데, 그런 엄마 방치해둔 아빠가 싫다고!
.....수술해야 하는데, 절박한 상황에서 연락 안 된 아빠도 싫어!
엄마 죽음 앞에서도 돈 밖에 모르는 아빠가 싫어.
장례식 치루면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은 아빠가 싫어.”
“…….”
“그런데... 그 보다 더 싫은 건... 그런 아빠 보다 더 싫은 건...
그런 아빠를 엄마는 끝까지 사랑했다는 거야. 끝까지 믿었다는 사실이야.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아빠를 미워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사실이야.
..눈앞에 있는 내가 아닌, 어디에서 뭘 하는지도 모를 아빠를 걱정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엄마를... 그런 엄마를 사랑하는 내가... 끔찍이도 싫어...
엄마 때문에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는 내가 너무 싫다고!”
“…….”
“난.. 아빠가 그렇게 싫어.... 너무너무 싫어서 실컷 미워하고 싶다고!!
근데, 근데 빌어먹게도 그럴 수가 없잖아!
....왜냐면.. 왜냐면.... 그건... 엄마가 바라지 않으니까.....”
도이는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련히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과, 포근했던 품.
그리고 달콤했던 엄마의 속삼임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리웠다. 미치도록 그리워서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그 그리움 속에 진득하니 취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
무뎌졌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이제는 엄마의 생각에도 무감각해진 심장에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나 그냥 내버려둬. 난 그렇게 아빠 싫어 하니까, 내버려 두라고!
아빠도 나 싫고, 나도 아빠 싫은데, 그게 서로 좋은 거잖아.
그게 그나마 아빠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거잖아.”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 되었지만,
날카롭고도 슬프게 바라보는 시선은 도무지 변함이 없었다.
그 시선이 준태의 말 하지 못하는 속을 더욱 긁어댄다.
아무리 약을 발라도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짓이겨 놓은 것만 같았다.
“...나 시험 끝나는 대로 오빠랑 약혼식 올리기로 했어....
어른들 허락, 그런 거 개의치 않기로 했어....
오빠가 좋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니까. 적어도 난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빠가 아무리 반대해도 하겠다는 거야.
축하, 그런 거 바라고 말 한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못 해줄 거라면,
적어도 우리 두 사람 마음을 아빠 임의대로 움직이려고는 하지 마.”
유민은 어쩐지 두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 힘들었다.
준태를 위로 할 수도, 그렇다고 도이를 막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도이를 막는 쪽이 유민에게는 쉬워 보였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
도대체 뭘까?
씁쓸히 등을 돌려 조용히 사라진 유민은 비가 내리는 정원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소량의 빗줄기로 젖어들지만 불씨는 죽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이 이 담배 한 개비보다 더 못한 것만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문득, 유민은 비참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그 자리에 자신이 아닌 타인이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했었을까...?
그 자리에.... 민환이 있었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했었을까....하고.
...그렇게, 그 날도 저물어갔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6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 날은 도이의 시험이 끝나는 날로, 유민과 도이의 둘 만의...
축복받지 못한 의식을 치루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