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병신.....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먹지....”
멀어지는 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환은 낮게 지껄였다.
그리고는 이내 도이의 모습이 다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가 간 반대방향으로 무거운 걸음을 떼어 놓는다.
“…….”
하지만, 서너 발짝도 채 가지 못해 다시 멈춰야만 했다.
“.....너는.”
“절, 기억하시네요.”
“…….”
“다행이에요.”
수줍은 듯 부끄러운 눈을 하고는 민환의 얼굴을 응시하는 아이.
느닷없이 나타난 이 아이로 인해 민환은 지독히도 엉켜버린 혼란을 느꼈다.
다시금 봐도 너무나 같은 민주의 모습에.... 와락― 끌어않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경아. 언젠가 한번 찾아갔던 진영중학교. 그 곳에서 만난 민주의 분신 같은 존재.
어찌하여 경아는 지금 이 곳에, 그것도 민환의 앞에 우뚝- 서있는 것일까?
“....쇼핑을 나왔나보구나?”
“네.”
어색하게 한마디 내뱉었더니 경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 되었다.
“...그래.. 그럼 계속 쇼핑을.....”
“저, 저기 오빠!”
기쁨과 행복. 희망과 환희의 미소와 더불어 아련한 슬픔이 드리워진 민환의 얼굴.
동시에 어떤 난감함과 좀처럼 안절부절 할 수 없는 불안한 심리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과 표정들도 동시에.....
당황스럽다고 말 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좋게 웃으며 지나쳐 줄 수도 없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상황.
한 순간에 느껴지는 수만 가지의 복잡 미묘한 감정들.....
민환은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고만 싶었다.
그래서 경아의 수줍은 듯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최대한 시선을 멀리 두었다.
그렇지만 경아는 도망치려는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야속하게도 잡아 세운다.
“만나고 싶었어요. 꼭 한번은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
“그래서 오빠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냥.. 이름만... 그것만.. 알고 싶었어요...”
“…….”
조심스럽고 무척이나 긴장된 경아의 음성을 차분하게 담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민환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팔을 잡고 서있는 경아를 피해 어디로든지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만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이라면 그저 좋았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겠다.
경아를 데리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꽁꽁 숨어버리고 싶었다.
친구 태영의 시선도, 성택의 시선도 닿지 않는 깊은 곳.
민주를 대신한 도이도, 그녀의 남자친구 태민도 찾을 수 없는 깊고도 또 깊은 곳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싶었다.
“알려주세요.... 오빠......”
경아의 눈이 민환의 매끄러운 턱 선을 지나 투명하고도 맑은 눈동자 위에 멈춰 섰다.
그 순간, 경아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동시에 경아의 마음이 어떤 감정에 동요되고 있었다.
진득한 슬픔이 묻어 나오는 민환의 눈.
그 눈이 무의식중에 경아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의 슬픔 안으로....
“그냥... 그냥 지나가는데.. 오빠가 보였어요....
이러면 안 돼는 거 알지만... 너무 반가워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얇고 얇은 강막위로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경아는 어떤 초라함을 느꼈다.
진득이 묻어나오는 슬픔 위에 비쳐진 자신의 얼굴 또한 너무나 생소했다.
그래서 경아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찾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다가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민환의 눈가에 드리워진 슬픔이 경아를 스스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아는 괴로워서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냥, 오빠 얼굴만 한 번 더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어요.
.....느긋하게 걷다가 갑자기 빨라지는 오빠의 걸음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
“미안해요 오빠.....”
경아의 고개가 슬며시 아래로 내려갔다.
경아는 울상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동요하는 자신과 다르게 아무런 동요가 없는 민환의 굳은 표정이 어쩐지 섬뜩했다.
무서웠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태민의 차고 서늘한 시선에도 이렇게까지 섬뜩한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그냥, 가던 길 가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오, 오빠!!”
“…….”
정말 순순한 마음에서 이름 하나만 알고 싶어서 다가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민환은 차마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고 아니고를 떠나서였다.
정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이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 순간, 무엇보다 곤욕스러운 것은 바로, 강경아라는 한 인물의 존재 그 자체였다.
벌써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나타난 강경아라는 아이에게서
도민주를 찾고 싶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정말... 이름만 알고 싶었을 뿐인데.....”
경아는 멀어져가는 민환을 보며 허전함을 느꼈다.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꼭 다시 보고 싶었던 그를 다시 봤다는 짧은 순간의 기쁨이
이제는 몇 배나 더 부풀어진 슬픔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어쩐지 슬펐다.
다음이라는 기회가 또 찾아올까..... 걱정스러웠다.
“미안해요.... 그냥 갈 수가 없었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한 여자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오빠가
너무나 슬퍼보여서 내 발을 잡았잖아요.
어떤 남자와 사라지는 그 여자 뒤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는 오빠의 모습이...
처음 만났던 날 보다도 더 슬펐잖아요.”
“…….”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잡는데, 그런 오빨 두고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었겠어요?
....난 못해요.... 죽어도 못해요.....”
경아는 듣지 못하는 민환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경아의 시선은 여전히 민환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민환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경아는 허전함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을 느꼈다.
늘어지듯 무거워진 발을 떼었다.
그리고는 민환이 이미 지나간 그 자리를 그대로 밟아 걸었다.
이 길을 곧장 따라가면, 다시 마주칠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민환이 그랬듯 경아 역시 그 발을 마저 뗄 수가 없었다.
묵직한 힘을 느끼며 우뚝 멈춰 섰다.
반동으로 돌아간 고개, 큰 키를 따라 치켜 올려진 고개.
멍했던 동공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당황스러움과 함께 온 몸이 싸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어떻게, 어떻게 태민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오, 오빠....”
설마.... 설마.... 모든 것을 다 본 것은 아니겠지?
그 오빠와의 만남과 더불어 내내 뒤쫓아 오던 모습을....
하아.... 제발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민의 무반응에
더욱 섬뜩함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
.
벌써 오래전에 백화점을 빠져나온 민환은 다급히 걸음을 옮겨 왔다.
주변에는 큰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낮고 또 낮은, 저층의 건물들만이 즐비해있었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우산을 쓰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는 민환의 옷을 적시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소수의 인파가 이동을 하는 쇼핑몰의 그 중심지.
흠뻑 비에 젖은 몰골이 초라하거나 볼품없어 보이기보다는 더욱더 시선을 주목시킨다.
비에 젖어 더욱 섹시하고 또한 도발적인 민환의 외모에
흘끔흘끔, 견 눈질을 보내는 여자들이 더러 보인다.
비에 젖은 민환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며, 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었다.
영락없이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었는데도 말이다. -_-;
몇 개의 모퉁이를 지나 2층의 호프집으로 들어가는 민환.
구진 날씨 때문인지 손님은 없었다.
몇몇 점원들이 민환의 상태를 보며 출입을 막았지만,
민환은 막무가내로 그들을 밀치고 들어와 아무 곳이나 자리를 트고 앉았다.
멀뚱멀뚱― 웨이터가 난감한 낯빛을 띠며 멀뚱히 서 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박태영 좀 불러줘요.”
“네?”
“박태영말이야. 박태영, 몰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해 보이기만 하는 민환.
기분 탓으로 튀어 나온 짧은 말짓거리에 웨이터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싹, 바뀐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내쫓으려고 한다.
민환은 그의 행동에 짜증을 느꼈지만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행이도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 태영이 민환의 앞으로 다가왔다.
태영의 등장에 웨이터는 가시지 않은 불쾌함을 띤 채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야? 왜 이제와?”
“...어디 숨어있었냐?”
“아, 잠깐 물류창고 좀 정리하고 왔어. 근데 옷이 왜 이래? 우산 안 쓰고 왔냐?”
“응.”
“왜?”
“그냥. 귀찮아서.”
“미친 놈.”
“손님이 왔는데, 술이나 좀 내와 봐라.”
“씨파.... 넌 친구보다 술이 좋지?”
“새끼, 당연한 거 아니냐?”
“씨빠빠.... 기다려 봐.”
그렇게, 아직은 이른 시간.
태영이 내어다 준 술을 무서운 속도로 비워내기 시작한다.
태영은 일을 하며 오가는 사이, 옆에서 지켜보기가 무척이나 불안했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지만,
한참 아르바이트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좋지 못한 일이 있는 날이면, 취기가 더 빨리 오른다고 했던가?
하지만, 술병이 늘면 늘수록 오히려 더 멀쩡해지는 것만 같은 민환의 모습에
태영의 불안감은 더해진다.
결국, 보다 못해 조퇴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그칠 줄 모르는 비 때문이라도 손님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행이도 사장님은 쉽게 허락을 해 주셨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가 시작 되었다. 이미 민환은 만취 상태인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