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40화 (41/91)

40.

차 회장은 서제로 돌아갔고, 조 여사와 민아는 나란히 안방으로 들어왔다.

“정말, 마음에 들질 않아. 한참 좋다가도 밉다니까?”

방 한가운데 얌전히 놓여진 탁자.

그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조 여사는 무척이나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민아가 살며시 다가간다.

“오빠는, 너무 바보 같아.

뭐가 모자라다고 그런 별 볼일 없는 애한테 연연해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누가 아니라니?”

“이그~ 그러고 보면 울 오빠도 정말 허 똑똑 이야.”

“그래, 그렇지?”

“응. 엄마, 속상하지?”

“어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 속이 지금 속이 아니다.

하지만 말 해 뭐하니?

애지중지하게 키워 놓은 자식 놈은 어미 맘을 그렇게도 몰라주는 데.”

유민 앞에서의 냉랭하던 모습과는 달리

짙은 한숨이 묻어나오는 푸념에 민아의 눈빛이 측은해진다.

조 여사는 자신을 걱정 하는 딸아이의 눈빛에 애써 웃음을 띠어보지만

나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웃음으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 쓴웃음이 전부였다.

“근데, 엄마.”

“응?”

“이번 한번만 엄마가 눈 감아 주면 안 될까? 그냥 허락 해 주면 안 될까?”

“뭐어?! 넌 도이가 네 올케자리로 아무렇지 않니?”

조 여사는 쓴 웃음을 거두고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런 게 아니야, 엄마.”

민아는 가볍게 고개를 내 저었다. 조 여사의 안색이 차츰 진정되어 간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오빠의 뜻을 따라 달라는 거야.”

“잠시고 뭐고 간에,”

“나 때문인데도? 그래도... 안 돼?”

“거기서 네가 왜 개입 돼?”

민아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무척이나 신중해 보였다.

표정도, 억양도, 그리고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까지도.

“있잖아, 엄마. 엄마는 성민이가 어때?”

“성민이? 권회장님 댁?”

“응.”

“우리 민아 신랑감으로는 재격이지.”

“엄마도 그렇게 생각 해?”

“그럼~ 사모님도 우리 민아 마음에 들어 하시고, 당연한 얘기잖니.

근데, 성민이는 또 왜?”

조 여사의 머릿속엔 어느새 유민의 존재는 사라졌다.

덩달아 유민과 도이의 약혼 문제 따위로 오는 스트레스도 말끔히 치유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푸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반면에, 민아의 표정은 어둡게 침체되어갔다.

“엄마.....”

“응?”

“근데 어떡하지?”

“뭘?”

“...성민이는 내가 싫대.”

“그게 무슨 소리야? 성민이가 그래?”

“...응....”

행복에 가득 차 있던 조 여사의 말간 웃음이 차츰 지워져갔다.

거짓말처럼 금세 사라졌다.

“...걱정 마.... 그래도 권회장님은 우리 민아 예뻐하시잖니?

사모님은 우리 민아 예뻐하시잖아.”

조 여사가의 손길이 가볍게 민아의 긴 머리를 쓸어내린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권성민이지, 아저씨 아줌마가 아니잖아.”

민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말 했다.

“미안 엄마.”

“…….”

“정말 미안.....”

“민아야.”

“...나 자신 없어... 성민이 마음잡을 자신이 없어져....”

우리오빠까지..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

그런 계집한테 빠져있는 성민이...

그 마음을 도로 돌려 놓을 자신이 없어....

“성민이가 아직, 우리 민아를 다 몰라서 그래.

얼마나 싹싹하고 예쁘고, 또 영리한지를.

나중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성민이도 어른이 되고 나면 그땐...”

“그래도... 성민이는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 해?”

조 여사는 답답했다.

민아의 행동을 쉽게 이해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는 뜻밖의 사실. 민아가 그토록 자신 없어 하는 이유와 풀이 죽은 이유.

하물며 유민의 결혼을 잠시라도 허락해 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던 이유를 모두 알 수 있었다.

“...좋아 하니까. 성민이가... 신도이... 좋아하니까.....”

“…….”

“그것도 아주 많이.....”

.

.

새벽부터 내내 거센 소나기가 내렸다.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도이는 밤잠을 설쳤다.

지금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나 엉망이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잠시도 도이를 자유롭지 못하게 억압해오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데....

수많은 일을 몸으로 맞서고 난 후의 피로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는 이 감정.

알 수 없이 그녀를 파고드는 괴로움과 허전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인해 내려버린 판단에서 오는 후회보다

왜, 그 그리움이 더 짙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도이야, 이 반지 어때?”

“…….”

“도이야!”

“아... 미안, 오빠.”

비가 오는 관계로 사전에 이야기 되었던 놀이공원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둘은 백화점으로 나왔다. 쇼핑을 하기 위함이었다.

유민은 부모님의 동의가 없어도 일을 추진하고 싶었다.

도이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을 향해 있을 때, 단단히 묶어 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야만이 비로소 유민 또한 한결 마음을 편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랬다.

도이는 친구들만 불러 놓고서라도 일을 진행 시키자는 유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민은 기뻤다. 또한 슬펐다.

그 때의 도이의 표정은 너무나 창백했고,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유민이 두려워하는 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곤하니?”

“아니야, 그런 거. 잠시 딴 생각을 좀.....”

“우리 식사부터 할까?”

유민이 도이의 말을 잘라버렸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직접 그 사실을 들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못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미래를 책임 져 줄 자신을 옆에 두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 순간에 다른 생각이라니!

유민은 어쩐지 화가 치밀었다.

당장이라고 크게 소리치며 도이의 행동을 나무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도이가 자신이 아닌,

그 생각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될까봐 두려웠다.

“배고파?”

“....시간이 시간이잖아.”

“3시 밖에 안 됐는걸, 뭐.”

“…….”

“그냥 보던 거, 마저 봐. 나 딴 생각 안 할게, 오빠.”

“…….”

도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사방이 온통 유리로 된 진열대 안에 자리 잡은 가지각색의 보석들을 살피고 있었다.

허나, 여전히 그녀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우리, 옷부터 보자.”

“응? 왜?”

“그냥, 그냥 옷부터 보자.”

유민은 막무가내로 도이를 끌어냈다.

한참 예물을 보여주던 점원이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 오빠. 왜 그래?”

“그냥, 옷부터 봐.”

“오빠....”

“어? 신도이.”

“…….”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가는 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지던 참에,

거짓말처럼 짜잔~ 하고 두 사람의 앞을 막아 세운 이가 있었다. 민환이었다.

도이는 반가움 반, 당황스러움 반의 두 가지 감정이 복합된,

상기된 얼굴로 민환을 응시했다.

민환은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도이의 손목을 꽉 쥔 유민의 손을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신경질적으로 떼어놓았다.

이번엔 유민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하지만 민환은 유민은 애초부터 상종 할 마음이 없었다.

민환의 시선은 붉게 번져 자칫 하다간 멍이라도 들 것 같은 얇은 손목에 머물렀다.

그 손목이 너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민환은 가만히 그 손을 잡아다 끌어 어루만져 주었다.

어쩐지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봐, 왜 여기 있는 거지?”

유민이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되는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유민 못지않게 차고 시린 어조로 말한다.

“여자 친구를 다루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건 네 놈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당신 생각뿐이고.”

“제 삼자는 빠져.”

“그렇게 못하겠다면?”

전혀 물러섬이 없고, 물러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민환의 당당함에

유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그 때,

적지 않은 인파가 몰려드는 주말 한 낯의 백화점 안인지라,

한 여자를 중간에 두고,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두 남자가 대립하는 모습에 주변에서 구경꾼들이 하나둘 몰려든다.

“언제까지 남의 일에 그렇게 사사건건 참견 할 셈이지?”

“아마도, 당신이랑 저 여자랑 헤어지는 날 까지는.”

“....헤어진다고?”

“그래.”

“이봐, 애송이.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적어도 당신보다는 많이 알아.”

유민은 보기 좋은 미간을 한껏 찡그렸다.

다 된 밥에 제를 뿌릴 것만 같은,

아니, 어딜 봐도 그러려는 민환의 행동과 그의 등장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웬일인지, 다소 느긋하고도 편안한 웃음을 띠며 천천히 말했다.

민환은 예상 밖의 유민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았지만, 곧장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 곧 우리 두 사람, 결혼할 거란 사실 말이야.”

“오, 오빠!!”

일부러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며

약혼이라는 말 대신, 결혼이라는 말을 누설하는 유민.

그의 생각지 못한 말에 도이가 화들짝 놀랐다.

또한 기분이 몹시도 상함을 느꼈다.

민환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진짜냐고.

하지만 도이는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냥, 유민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덤덤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는 일인데,

왜 아무런 말도 못했는지 모르겠다.

도이의 고개가 땅 끝으로 하염없이 추락이라도 하듯, 점점 더 깊숙이 숙여져갔다.

민환은 씁쓸함에 얼룩져간다.

반면에,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이는 유민.

그는 힘없이 풀어진 민환의 손에서 빠져나온 도이의 손을 잡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도이는 맥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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