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늦는 다더니 일찍 들어오는구나.”
유민과 도이가 나란히 들어서자 안쪽으로부터 조민주 여사의 시니컬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됐어요.”
“저녁은......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로구나.”
조 여사는 묵직한 책을 보느라 콧등에 반쯤 걸쳐진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고는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췄다.
그 옆에 민아의 시선 또한 덩달아 곱지 않았다.
도이는 은연중 그 시선을 피해버렸다.
흔쾌히 허락을 받을 자신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에선지,
안쪽에서부터 쏟아지는 시선에 금세 주눅이 든 것 같아 보인다.
“아버지 어디계세요?”
“아버지는 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 늦은 시간에 말이냐?”
“네.”
“....서제에 가 보거라.”
아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무척이나 딱딱했다.
허물 수 없는 높은 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민은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조 여사는 내심 불쾌한 기색을 내 비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려는지 서제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를 유민이 잡아 세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머니.”
“나에게 말이니?”
“네.”
“별로 듣고 싶지 않구나.”
조 여사는 계속해서 도이를 살며시 흘겨보고 있었다.
“잠시면 돼요. 아버지 모셔 나올게요.”
단조롭고도 똑 부러진 말을 강하게 내 뱉고는 서제로 사라진 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 차선무회장과 함께 나왔다.
차 회장은 아직도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도이와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조 여사를 번갈아 봤다.
“두 사람 다 이리 와서 앉아요.”
“…….”
차 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조 여사는 방문을 열기위에 얹었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못 마땅한 얼굴로 차 회장 곁에 다가가 앉았다.
모두가 거실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유민의 가족과 도이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유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희 둘, 약혼식 올렸으면 합니다.”
단도직입적이고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온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놀란다거나 크게 반박을 해오는 사람은 없었다.
“유학하기 전, 약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다시금 유민이 말했다.
조 여사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내비췄지만
옆에 차 회장의 존재 때문인지...
크게 도이를 몰아세우거나 유민의 어리석음을 타박하지는 않는다.
“그래,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 한 것이냐?”
차 회장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아버지.”
“도이양도 그러길 원하고?”
“....네.”
도이는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말 했다.
“그래, 그렇구나.”
“아니, 여보!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거예요?
혹시 두 아이 혼사를 허락 하는 건 아니죠? 집안의 혼사는 자고로 인륜지대사라고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성향이 강한 억양이었지만,
수긍을 하는 듯한 차 회장의 말에 조 여사의 언성이 높아져간다.
“당신은 가만있어요.”
“여보!”
“어허!!”
“…….”
아녀자의 언성이 높아지자 불같은 호통을 하는 차 회장.
조 여사는 더 이상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어머니의 말씀처럼 결혼은 자고로 인륜지 대사다. 신중하게 생각 한 거냐?”
차 회장은 다시금 차분해진 억양으로 유민에게 먼저 물었다.
“네, 아버지.”
“그래, 그럼 이번엔 도이양에게 물으마. 신중하게 생각 한 거냐?”
“.....네.”
도이는 이번에도 자신 없는 대답을 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발언에 불과 했다.
그래서 더욱 그들 앞에서,
자신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저 모녀 앞에서 자신에 넘쳐 의기양양할 순 없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게임이 아닌 오기에서 비롯된 게임을 수행 중 이었으니 더 그랬다.
“신 기사, 아니 아버지께서도 아는 일이고?”
차회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질문에 두 사람은 똑같이 놀랐다.
그러고 보니 유민은 한번도 도이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존재를 아예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도이는 차회장이 이런 일을 가지고 걸고넘어질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 예상이.
아버지와의 상의.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다.
언젠가도 한번 언급했다시피 도이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요.”
“아직 말을 하지 않은 게로구나.”
“네....”
“그럼 이 일은 전적으로 혼자 결정 한 걸 테고.”
도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 알겠다.”
유민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심장은 꼭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새카맣게.
“유민아,”
차 회장은 좀 더 나지막하고 위엄 있는 언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말 했다.
“날짜를 좀 당겨야겠구나.”
“당기다뇨?”
“다음 달 5일이 되면 비행기를 타도록 하거라.”
“오, 오일이요? 그런 말씀은 없었잖아요.
언제든 제가 좋을 때 떠나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그렇게 빨리 떠나라 하시면 저희의 약혼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유민은 불안에 떨었다.
“신중하게 생각 한 거라면,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지 않겠느냐?
쉽게 바뀔 염려는 없을 거 아니냐.”
“하지만 아버지.....”
“도이양은 어디까지나 학생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 철없이 굴지 말거라.”
“아버지!”
“오년이 지난 후에도 두 사람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도이양이 조금 더 내 며느리로써의 자격이 갖춰진다면..
그 때는 나 또한 신중하게 생각 해 보마.”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 어딜 보나 부정밖에 되지 않는 차 회장의
칼날 같이 매섭고 또한 단호한 말은 유민을 실로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환대하게 맞아준다 해도 지금 도이의 마음을 확실히 해 둘 수가 없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나오니 유민으로써는 5년 후가 아닌 지금 당장이 깜깜하기만 할 뿐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도이의 마음을 잡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데,
그들의 방해로 인해 도이의 마음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도이양.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 했다고는 말 하나,
학생의 신분에서 어찌 그리 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지,
단독결정으로 쉽게 일을 성사시키려는지 난 알 수 없구나.”
“…….”
“이런 중대사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도이양도 더 이상은 어린아이가 아니니 말이야.
아무튼, 난 허락 할 수가 없구나. 그럼 늦었는데 돌아가 보거라.”
차 회장은 자신의 말만을 마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유민은 점점 더 큰 불안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이대로, 이대로 도이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버지!! 허락 해 주세요!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 합니다!”
유민은 덥석, 차 회장의 앞에 무릎부터 꿇고 앉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이 났으니 어서 올라가거라.
날자가 촉박해졌으니 너도 어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허락 해 주세요, 아버지. 꼭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약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그리고서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습니다.”
“난 한번 내 뱉은 말을 번복하거나, 정정하지 않는다.”
간절한 유민의 청을 무시한 채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 차 회장.
차게 닫혀져 냉랭한 공기만이 흐르는 거실에서 유민의 절규하는 듯한 간절함은
끊이지 않았다.
“제발 허락 해 주세요... 허락 해 주셔야 해요...”
“…….”
“아버지의 허락 없는 약혼식 올리는, 불효자가 되게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 드려요. 이렇게 부탁 드려요.”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