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38화 (39/91)

38.

“...후회 하지 않을 자신 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민의 음성은 다른 어느 때 보다도 긴장 되어 있었다.

사실 유민은 이 질문을 망설였다.

도이는 분명, 후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너무나 확실했다.

아니, 어쩜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몇 번을 생각 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분명 누군가가 자극을 시켰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이의 눈물이, 그녀의 흐느낌이 증명 해 주었다.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고 난 후에 따라오는 답변을 들어야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듣기 좋은 말이던, 그 반대의 말이든.

그래서 유민은 몇 번의 생각 끝에, 몇 차례의 망설임 끝에 어렵게 물었다.

“후회...안 해.... 후회 안 해.... 오빠...”

“그래.”

“후회 안 해. 후회 안 해.”

“후우... 어디니?”

“...놀이...ㅌ.... 공원. 오빠랑 나랑 가끔씩 산책 나오는 공원.”

....역시 유민은 안 되는 것일까?

유민과 함께 라는 것은 실현 불가능 한 것일까?

도이는 그 순간 까지도 유민을 경계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후회 하지 않는 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맡긴다고 하면서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지금 도이가 있는 곳은 놀이터였다.

무의식중에서도 찾아온 이곳.....

크던 작든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발걸음을 하게 되는 이 곳.

작고 허름한, 민주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놀이터.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사람의 채취가 아련하게 묻어나오는 놀이터.

그 어둡고 어두운 작은 놀이터.

왜 인지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대충 설명하면 쉽게 찾아올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비밀장소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민주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은 놀이터를...

그리고 더 깊게는 민환과 성민의 체취가 묻어 있는 이곳을 유민은 모르길 바란다.

“오빠가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

“미안 오빠.”

“....금방 갈게.”

도이는 힘없이 폴더를 닫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착잡했다.

단순히 거짓말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유민에게만 비밀이 된 놀이터를 영원히 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허전함과 그리움이었다.

“누나, 그거 안 하면 안 되나요?”

“적어도 내 눈에 차유민은, 자신의 감정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 마디로 구제불능 이예요.”

유민을 만나기 위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기는데

자꾸만 도이를 설레게 했던, 진지하던 성민의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지워졌으면 좋겠는데, 그 말이 지워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려와 도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성민도 알고 있는 것일까?

도이가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채...

이렇게 섣불리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버린 것을...

정말 원해서가 아닌, 누군가의 자극으로 인해 오기로 일을 벌인 것을....

그래서 화가 나 자꾸만 도이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히는 것일까....?

유민에게 말했던 장소,

놀이터에서 조금 많이 떨어진 공원에 도착한 도이는 우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혹은 유민의 스포츠카는 볼 수 없었다.

도이는 가까운 벤치에 다가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 저 밖으로 낯익은 스포츠카가 멈춰 선다.

그 역시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오늘따라 왜 그렇게 신호가 다 걸리는지.”

“앉아.”

“…….”

유민이 도이의 옆에 앉았다.

도이는 유민이 앉자마자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가져다 기댔다.

흠칫― 놀라는 유민.

거하게 취하진 않았지만 유학을 앞두고 친구들과 한 잔의 술로 회포를 풀다가 왔기에

도이의 잔소리가 내심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는 되도록 티가 나지 않게 도이의 눈치를 살폈다.

“술 마셨네, 오빠.”

“아, 응.. 조금... 정말 조금만 마셨어.”

“응.”

그렇지만 예상했던 잔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던 거야?”

“아니.”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응.”

“그래....”

두 사람은 나란히, 드넓은 밤하늘에 덩그러니 떠있는 초승달을 응시했다.

“언제 떠나?”

“응?”

“오빠 유학.”

“유, 유학?”

유민은 심하게 말을 더듬거렸다.

“바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 했다고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알았어?”

“…….”

“어디로 가?”

“....호주.”

“언제?”

“다음 달 말쯤에 가게 될 것 같아.”

“그래?”

“응.”

“그럼 약혼식 서둘러야겠네?”

“응?”

“약혼식 말이야. 우리 약혼식.”

“....신중하게 생각 한 거지?”

“…….”

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민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묻지 말걸 그랬나? 하는 뒤 늦은 후회도 들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안감은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도이의 아주 간략한 대답 덕분이었다. ‘응.’이라는....

“그럼 말 나온 김에, 인사부터 드릴까? 그리고 날 잡을까?”

유민은 조금 다급하게 서둘렀다.

어차피 치러야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해결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도이를 옆에 묶어 두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곁에서 정착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난 시간, 그녀와 순수한 교재를 하며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고 키워오고 그랬지만,

유민은 늘 행복 보다는 불안함을 더 느꼈다.

도이는 남자친구와 애인이라는 이름 안에서 억압당하는 걸 싫어했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까지 늘 관대했다.

아니, 유민과는 달리 다른 이들에게는 늘 관대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민환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도이는 친한 동생이고, 친구의 동생일 뿐이라는 말로

유민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민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가 그랬던가?

사랑을 시작 하게 되면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 하나에도, 그가 바라보는 시선 하나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딜 바라보는지, 누굴 바라보는지,

다 알 수 있다고..........

유민은 도이의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갔다.

술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둘이서.. 나란히 걷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도이야....”

집 앞 까지 걷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척이나 큰 대문이 보이고 높고도 높은 담벼락이 보인다.

그리고 동그란 쇠기둥 사이사이로 드넓게 퍼진 정원이 보인다.

그 가운데 2층짜리의 우아하고도 웅장한 저택이 보인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 유민은 놓칠 세라, 도이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말이야... 우리 부모님이.....”

“난, 오빠만 있으면 돼.”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유민의 물음 뒤에

바로 따라오는 도이의 답변에 왜 이리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일까?

사랑을 하면 누구나 바보가 된다더니,

유민 역시 그 엉뚱하고 어리석은, 정말 바보스러운 사랑의 공식은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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