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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미터앞 그녀석-37화 (38/91)

37.

콩닥콩닥,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친다.

감히 주체도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 올라가는 수치에 도이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얼굴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이상하게도 설렌다. 이상하게도 긴장된다.

너무도 이상하게 그 말이 달콤하게 들려온다.

왜 일까? 도대체 왜 그렇게 성민에 말에 쉽게 동요를 하고, 과민반응을 보일까?

그 말이 싫거나 당황스럽기보다는,

그와 함께 먹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나.”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언젠가 한번 느껴 본 이후로는 다시는 느껴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던 감정.

그 감정을 지금 이 순간, 성민으로 인해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차유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난 도민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입장 이예요.”

“…….”

“누난, 아직 학생 이예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

그리고 고작 열여덟인데....

이렇게 빨리 그런 문제를 운운하고 고민해야 할 의무나 이유는 없는 거잖아요.

내 생각에도 차유민은, 지극히 자기중심적 이예요. 거기다가 무책임하기까지 하다고요.”

“…….”

“무책임 하지 않다면...

적어도 고작 고등학생인 여자친구에게 결혼 문제를 운운하지는 않아요.

나라면 그래요.

정말 많이 사랑하고,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아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후에.. 누나가 그 말을 받아들일 나이가 되고 난 후에..

해도 늦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이루어질 사람들이라면 말이죠.”

성민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말을 했다.

그의 말은 일목요연했고,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도이는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에 한 손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낮게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낮고 또한 작은 심호흡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성민이 모를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성민은 그저, 오르막길로 인해 숨이 거칠어진 것쯤으로만 여겼다.

도이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점점 더 좋아지기만 하는 그 감정을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좋았다.

그리고 또 좋았다.

비록, 성민이 꺼낸 일목요연한 이야기는,

솔직하고 냉정히 받아들이자면 자신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선배와 후배로써, 친한 누나 동생으로써, 당연히 할 수 있는 말 즈음으로 여겨졌다.

이를테면 민환이 짜증을 부리는 것이나, 다희가 걱정을 하는 그런 측에 속했다.

그런데도 가슴이 떨리는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도이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내 눈에 차유민은, 자신의 감정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 마디로 구제불능 이예요.”

“....그래, 네 눈엔 그렇게 보이는구나. 잘 알겠어. 성민아.”

“…….”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 볼게. 그리고 천천히 결정할게.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생각 한 후에.”

“고마워요.”

“많이 피곤하겠다. 어서 가.”

“월요일 날 봐요.”

“그래.”

분명,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지만

자지자란 파장으로 인한 혼동을 남기고간 성민.

도이는 진지한 성민의 말에 최선의 대답을 해 줌으로써 일단은 그를 안심시켰다.

동시에 그녀 또한 잔잔한 행복의 기쁨을 느꼈다.

딱 부러진,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중하게 생각 해 보겠다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지,

멀어져가는 성민의 발걸음이 제법 가벼워 보인다.

달빛을 받은 그의 뒷모습에 유난히 가슴이 설렌다.

그녀에게 또 다른 사랑이라도 찾아온 것일까?

“늦었네?”

“…….”

“분위기가 참 좋아 보이더라?”

끼익, 덜컹―

커다란 쇠문을 열고 안으로 한발자국 내 딛자마자 들려오는

가늘고 날카로운 음성에 도이는 흠칫 놀랐다.

“....너, 우리오빠 두고 바람피니?”

그리고는 이내, 불쾌함을 느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제법이다?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민아가 왜 이곳까지 나와서는 막무가내로 비아냥거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다는 건 사실이다.

자신과 성민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아주 조금은 들었을 게 뻔하니까.

아니, 그보다도 성민과 자신의 만남을 민아가 알게 된 것이 불쾌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게 이제 사람 말까지 무시하네?!”

“아!!”

도이는 최대한 민아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뭐라고 떠들어 대던 지간에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손목이 잡혔다.

(보통 여자들의 심리상, 민아는 도이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싶었지만,

도이의 머리스타일은 길지 않은 커트머리였기에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_=;)

깡마른 체형 치고 그녀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포악하고 거칠었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그 잘나신 차유민씨께서 어찌하여 너같이 보잘것없고 뻔뻔한 년한테 목을 매는지 말이야!”

민아는 고의적으로 말을 더 비꼬았다.

최대한 도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너 같이 보잘 것 없는 게 용케도 대단한 집 도련님 한번 꼬셨다고,

권성민까지 네 손아귀에서 놀아나 줄 거라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꿈 깨셔!

차유민이 호락호락하다고 권성민까지 호락호락 할 줄 알아!”

“…….”

“널 보면 한심해. 널 보면 짜증나. 신도이! 알아?

어디서 되도 않는 꿈에 빠져서 누굴 넘봐? 감히!!”

도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민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해 울컥했지만,

민아의 말을 전적으로 수긍이라도 하듯, 동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고만장 하지 마.

차유민이 아무리 내 오빠라지만, 그 인간은 쓸개 빠진 놈이라고.

제 앞가림 못하고 너 같은 것한테 그저 헤벌쭉~ 하는데, 그게 정말 사랑 이라고 생각해?

적선이라면 몰라도.

암튼, 그 인간은 별 볼일 없는 인간 하나 구제 해 주는 셈 치고

너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푸는지 몰라도 권성민은 어림없어!”

“적선? 자비? 동정?”

“잘 생각 해봐?

인물 좋아, 학벌 좋아, 집안 빵빵해.

세상 어떤 그런 놈이 너 같이 별 볼일 없는 계집을 좋아하겠어?

더군다나 집안은 빚더미에 앉아있어, 아버지는 능력 없이 남의 집 기사나 해.

게다가 엄마는...... 훗.”

민아는 고의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아주 교활한 웃음을 내 비췄다.

도이의 작은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게 화를 참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불쌍한 게집, 구태여 구제 해 주겠다는 우리 오빠가 한심하다, 한심해!

물론!! 엄마 아빠의 반대로 결혼은커녕, 그 근처도 못 갈게 불 보듯 뻔하지만.

잠시 어린 나이에 교재 좀 했다고….”

당장이라도 세차게 뺨을 한대 내리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만,

도이는 애써 화를 수그리며 당장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집 보다는 차라리 밖이 편할 것 같고, 현재 위치상으로도 더 가까웠기에,

아직 닫히지 않은 커다란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진게임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언제든 자신을 무시하는 민아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진정이 되지 않는 다는 사실.

화가 났다. 주최 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물론, 민아가 자신의 존재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자신이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던 순간부터 민아는 늘,

도이를 보며 으르렁 거렸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은 너무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눈물이 났다. 하지만 그 눈물보다 순간 차오르는 오기가 더 컸다.

도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짜고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오후 내내 분리되어 있던 배터리를 제 자리에 끼워 넣었다.

전원을 켜고 대기모드로 진행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액정위로 늘 봐오던 바탕화면과 현재의 시각을 알리는 대기모드가 뜨면,

급하게 단축 다이얼을 눌렀다.

익숙한 컬러 링이 얼마 흐르지 않아

다급한 반면 여전히 부드럽게 느껴지는 유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하루 종일!]

“오빠, 어디야?!”

[너야 말로 어디 있어?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있잖아 오빠.”

[도이야, 무슨 일 있니?! 너 울어?]

유민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거친 호흡에 파묻힌 미세한 흐느낌이 수화기 너머 유민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유민은 다급하게 물어왔지만 도이는 그 질문에 마땅한 대답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나 얼마만큼 사랑해?”

[응?]

“오빠네 부모님, 오빠 동생까지도 나 안 좋아하는데,

오빠 나 안 버린다고 맹세 할 수 있어? 안 버릴 자신 있어?”

[......무슨 일 있었구나, 너.]

“대답해. 대답해, 어서.”

도이는 좀 더 크게 흐느꼈다.

수화기 너머로 유민의 묵직한 한숨소리가 전해졌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유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날 버리는 일은 있어도.... 내가 먼저 널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오빠.....”

[...널 갖기 위해 세상 전부를 버려야 한대도... 난 널 버리지 않아, 도이야... 절대로.]

“오빠.....”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울면 내가 싫어져.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바동거리는 내 모습이 싫어져.]

유민의 음성은 지독히도 차분했다. 그 어떤 굴곡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그래, 도이야.]

“나, 할래. 그거 할래.”

[…….]

“오빠랑 약혼, 그거 할래. 오빠한테 내 인생 걸을래.”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 들리는 거라곤 오로지 도이의 작은 흐느낌이 전부였다.

유민은, 기다리던 말이라 더 없이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운치 못했다.

웃으면서 그 말을 해주길 바랐다.

누군가가 어떤 자극을 주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그 누구의 간섭이나 충고, 혹은 거드름 없이 전적으로 그녀의 결정이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도이의 결정은 그 누가 봐도 자발적인 결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유민의 마음을 굳이 확인하면서까지,

환한 웃음이 아닌 미세한 웃음이라도 좋았지만....

그 웃음이 아닌 흐느낌 속에서 내린 결정이었기에 기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변하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반면에 도이는...

바로 몇 분전까지만 해도 성민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꼭 신중하게 생각 하고, 몇 번이고 다시금 생각하고 또 생각 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뒤 돌아서자마자 이렇게, 어처구니없이도 가볍게 결정을 내려버린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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