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무슨 일 있어? 오늘 따라 구라가 좀 세다?”
길지 않은 침묵 후, 무심결에 내다 뱉은 한마디.
아주 잠시나마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해놓은 도이의 노고(?)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구라?”
온 몸을 엄습했던 긴장감이 맥없이 풀림을 느꼈다.
“왜, 아니야?”
“왜, 구라였으면 좋겠냐?”
“.....이 아줌마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살포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민환이 돌연 얼굴을 도이의 눈앞으로 밀착시킨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심오한 표정을 짓더니 역시나 심오하게 묻는다.
“혹시.... 그 날이야? 비도오고 날도 구린데, 그 날까지 겹쳐서 맘이 심난해?”
“씨이...... 넌, 일년 365일 동안 그거 하는 인간 봤냐?
뻑~하면 그날에다가 핑계 갖다 붙이게. 그리고! 누구보고 아줌마야?!”
“후훗. 그 날, 맞구나? 불끈하기는. 쿡.”
뺀질거리는 민환의 행동에 민망함을 느끼기에 앞서
(이미 한두 번 겪은 일은 아니었기에 민망함에 얼굴을 붉힐 단계는 지났다. -_-;)
버럭, 화가 치밀어 오르는 도이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빼내고 일어섰다.
어찌나 화가 나 있는지, 그 소음이 조금 심하게 컸다. 쿨럭!
“저, 아줌마 힘 좀 보소. 저런 무식한 여자를 누가 좋아해? 쯧쯧.”
여전히 뺀질거리는 민환의 추태와 잠시 집중되는 시선에 본의 아니게 살짝,
얼굴이 붉어졌지만 애써 태연한척, 도이는 민환을 보고 당당하게 말 했다.
“야, 도민환! 너 자꾸 이 하늘같으신 누님한테 딴지 걸을래?”
“헤에~ 하늘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하늘? 흥이다!”
“이씨......”
“...아줌마.... 난 이씨가 아니라 도씨야.... -_-;”
허걱! 저것이 과연 언제쩍의 유치뽕짝에 찬란한 개그란 말인가?
옆에서 내내 두 사람의 심각한 듯, 심각하지 않은 듯,
묘한 대화를 주고받던 둘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얼굴에 당황함이 물들었다.
근래에 한참 잘 나가는 뭐 오락프로에서 잠시...
0복고개그 바람이 일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한 복고개그와는 달리 전혀~ 전~~혀~~ 웃음을 유발 하지 못하는 썰렁한 개그.
민환의 그 개그, 개그, 개그........
하지만, 그 유치뽕짝에 찬란하기까지 한 복고개그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사실 알아줬다기 보다는 무시했다가 더 가깝다.)
“너, 너! 내가 졸라 멋지고 핸섬한 남자랑 해피러브러브하면 어쩔래?”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 했다.
“졸라 멋지고 핸섬? 해피러브러브? 쿡. 표현력이 아주 예술인데요?”
“비아냥거리지 좀 마!”
“그럼 대 놓고 웃을까? 푸하하. 이렇게?”
“암튼!! 두고 보면 될 거 아냐?”
“뭘?”
“날 데려가겠다는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오우~ 자신감이 줄줄 흘러넘치는데?”
“암튼!! 두고 보자고. 내가 조만간 단 한칼에 널 졸도시킬 빅뉴스를 들고 올 테니!!”
아, 정말!! 이런 식으로 큰 대사를 치루고 싶지는 않았는데.
여튼 도민환 저 웬수같은 놈!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씨이... 씨이.... 네가 그따위로 날 무시했다 이거지?
내 그 기고만장한 콧대를 아주 확실히 눌러주겠어!
두고 보라고. 그래, 두고 보면 알거 아냐?
날 좋아하는 놈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결혼을 하는지 못하는지.
반 오기로 굳은 결심을 다짐 하는 모습이 어째, 좀 불안하다.
“쯧쯧, 저렇게 큰 소리 치고서 상황수습 못하면 어쩌려고.”
터벅터벅, 신경질적으로 큰 보폭을 걸어 나가는 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민환은 여전히 뺀질거린다.
도이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고
전적으로 구라라고 믿고 있음이 확실했다.
저런, 그러다 큰 코 다치지. 쯧.
“야, 넌 왜 그렇게 누나랑 마주치기만 하면 티격태격 이냐?”
“재밌잖냐. 쿡.”
“즐기냐?”
“짜식, 눈치 깟어?”
헐레벌떡 도이를 뒤쫓아 가는 다희의 모습까지 완전히 사라진 후,
성민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야, 근데.”
“응.”
“넌 정말로 도이누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왜 그렇게 단언해?”
“야야, 그건 말이지.... 야, 근데 너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 묻냐?
혹시 쟤(도이) 좋아하냐?”
거만한 자세를 잡으며 털을 괴고 지긋한 눈길로 성민을 바라보더니, 돌연 반문을 던진다.
그 반문에 성민은 야릇하면서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냐? 형님이 물어보면 즉각, 즉각 대답해야지.”
“...피식.....”
“어라? 왜 웃는 건데?”
“그냥.....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서.”
“역시,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구나?
자식, 보기보다 눈이 높은 놈일세.
딱히, 따지고 보면 저 인간도 그럭저럭 봐줄만 한 얼굴이긴 한대.”
궁시렁 궁시렁 혼잣말을 하는 민환을 보면서 성민은 시선을 달리 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주변에서 성민을 주시하던 여학생들 중 간혹 코피를 흘리는 잡것들도 있었다.)
묵묵히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병신 새끼.... 너와 같은 생각?
어쩌냐, 난 전혀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데...
왜냐면 그 여자.. 신도이라는 그 여자.. 무척 매력 있거든.....
웃는 것도... 웃음 속에 가려진 슬픈 얼굴도...
그리고 어디서나 당당한 면도......
성민의 눈이 아련한 기억 속을 천천히 더듬어간다.
피식.... 그래.... 난 그 여자의 당당함이 좋았어.
무엇보다 세상을 차단시킨 그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흔들어 놓았지.
그리고는 그 얼굴과는 전혀 다른 포근한 웃음이....
천진난만한 웃음이 나를 또 한번 흔들어 놓았지.
“야, 근데. 뭘 믿고 차유민을 그렇게 무시해?”
탁-
그 순간 급식을 먹던 테이블 위가 너저분해졌다.
민환이 신경질적으로 수저를 내다 던진 것이다.
그 바람에 아주 살포시 식판 위에 있던 반찬이며 국이 그 주변으로 흩어졌다.
“왜, 왜 그러냐?”
벙진, 표정으로 민환을 바라보다가는
무척이나 서늘한 녀석의 눈동자를 보고 잠시 당황하는 성민이 말을 더듬었다.
“씨빠빠. 왜 하나같이 그 기생오라비 같은.... 생기다 만 새끼를 들먹이는 거야?!”
“…….”
“그 겉 배경만 번지르르 하고 속은 하나도 없는 병신 같은 새끼.
그 놈이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새끼, 왜 그리 오버냐? 넌 차유민이 그렇게도 싫으냐?”
“그럼 너 같으면 좋겠냐?”
“...피식....”
“가만, 근데 네가 차유민을 어떻게 알아?”
“병신. 차민아 오빠 아냐?”
“아 참!”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거짓 발언을 얼굴 색 하나 바뀌지 않고 지껄인다.
“암튼 간에 너 이렇게 오버하는 건 첨보는 것 같다?
뭐 하긴, 그렇게 싫어하는 놈한테 좋아하는 누나를 떠밀 순 없지.”
“엥?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뭐가?”
“싫어하는 놈한테 좋아하는 누나를 떠밀다니?”
“뭐야?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모르다니? 뭘?”
“엥? 진짜 이상하네.”
“새끼. 내 눈엔 네가 더 이상하다.”
“뭐야. 알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뭘?”
“차유민이 도이누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거 말야.”
“뭐어?!”
민환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갔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어라? 진짜 몰랐나보네, 이 놈!!”
“그래서? 그래서 누나는 모래?”
“그냥.... 아직 결정 못한 것 같던데.”
“.....아씹! 이 인간 어디 갔어. 이 화상 어디 갔어!”
민환은 꼭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다급하게 급식소를 뛰어나갔다.
“...뭐야? 저 자식 진짜 심하게 오버하네? 혹시.... 그 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