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민환은 오후수업을 아예 재껴둔 채로 진영중학교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꺅~ 저 오빠 너무 멋있다.”
“어디, 어디?”
“저기~ 등나무 앞에.”
“어머, 어머 어떡해, 어떡해~”
“누굴 만나러 온 걸까?”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아~ 저런 남자친구를 기다리게 하는 얘는 과연 누구일까?”
민환의 등장으로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진 운동장.
큰 키에 전체적으로 귀엽상한 외모를 소유한데다가
남자다운 면모까지 두루 잘 갖춰진 웬 녀석이 교문 앞을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 곁을 지나가는 여중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민환을 힐긋힐긋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곁을 지나가는 남학생들은 시기와 질투 어린 곱지 못한 시선으로 민환을 바라봤지만.
그러나 민환에게 그들의 시선은 귀찮은 존재 일 뿐이었다.
“강경아.... 강경아.....”
교문 가까이에 등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운동장 저 안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민환.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다수의 아이들이 교문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민환이 찾는 사람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는다.
“하아.... 정말이지 미치겠군....”
갑갑한 와중에도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방안이 어두컴컴할 때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 세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한참을 단 잠에 빠져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환의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전화벨소리.
눈조차 뜨지 않고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민환의 베스트 중에 한 녀석, 태영이였다.
[도민환!]
“....아씹, 고막 나가, 개세.”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평소 같으면, 아! 미안, 이라며 언성은 낮췄을 테지만,
그날따라 태영은 무척이나 다급해보였다.
“그럼 뭐가 문젠데?”
[나, 나....!]
민환은 자신의 단 잠을 방해받은 것에 연신 언짢은 표정을 지워내진 않았지만
별 말 없이 곱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태영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너.”
[그러니까....]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야, 야! 씹새. 존나 성질머리 하고는.]
아주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 사이 민환은 어느 정도 잠에서 깨어났음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손은 주변을 더듬거리며 탁상시계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만 반복하지 말고, 빨리 용건 안 말할래?”
[그러니까....]
“아씹, 너 진짜 죽는다?”
[..나.... 귀신에 홀렸나봐.]
“…….”
민환은 상채를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세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전화를 해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처럼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으니,
달콤한 수면을 방해받은 민환의 입장에선 충분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하지만......
[봤어.... 존나... 똑같은 년... 아니, 닮은 계집을 봤어.]
한껏 짜증을 섞은 말을 내 뱉기 전에 들려오는,
아마 시야에 보인다면 분명..
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은 태영의 목소리에 그저 갑갑한 한숨을 내 뱉었다.
“뭘?”
크고 묵직한 한숨이 섞인 의무적인 물음이었다.
“뭘 봤는데? 이 시간에.”
[....민..주.]
“…….”
[도민주.. 봤다고....]
민환은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뒤진다?”
[농담 아니야. 헛소리도 아니야. 분명 도민주였다고.]
민환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물론, 내가 본 애의 이름이 도민주는 아니야. 아니지.
나이도 틀리고 사는 곳도 다른데.....
하지만, 그 겉모습이 완전 붕어빵이라니까? 존나, 씨발....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아냐? 장작 두 시간을 넘게 따라다니고 있는데도 믿지 못하겠다고.]
“…….”
[존나, 못 믿는다는 거, 아니 안 믿으려는 거 아는데,
내가 성택이 시켜서 폴라로이드 가져왔거든?
그리고 핸드폰으로도 몇 개 찍어놨어. 일단 봐. 보면 너도.....]
“뭐야?”
태영이 정신없이 말을 이어가는데, 민환이 단번에 그 말의 꼬리를 잘라버렸다.
[응?]
“..이름..이며... 나이며... 그리고.....”
[정확한 건 성택이가 지금 조사 중이고, 일단은 이름만 접수했어.
강경아래. 얼핏 그 무리에서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중학생 같기도 해.]
“더 자세한 건 없어?”
[아직. 근데.... 남자친구가 대단한 인물인데?]
태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생긴 거랑 다르게, 존나 대범한 계집인가 봐. 왜, 너도 알지?
얼마 전에 소년원에서 나왔다는....
왜, 라이더 총장 나태민 말이야. 그 자식 깔다군 것 같아.]
“…….”
[아, 씨발. 그 자식 때문에 사진도 얼마나 심장 졸이며 찍었는지 아냐?
괜히 잘못 건들이면 완전 좆 되는거잖냐?]
“야, 너 지금 어디냐?”
[왜?]
“글쎄, 어디냐고.”
[갈까? 사진 볼래?]
태영은, 민환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듯, 그렇게 물었고,
민환은 아주 짧은 대답을 했다.
응이라는 단 한마디의 대답을.
그렇게, 그 어두컴컴하고 이른 시간에 모든 잠을 날려버리고, 태영을 기다리던 민환.
그리고 이내 전해 받은, 두 눈으로 확인한 사진을 보며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 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민환의 첫 사랑.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첫 사랑 민주.
경아의 등장은 정말로 민주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을 가져오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하물며 민주의 곁에 늘 붙어 다니던 도이마저도 그 사진을 보고
(일전에 설렁탕 집에서 민환이 보여줬던 사진은 바로 경아의 사진이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민주가 아니냐고 말 했으니.....
허나 그 때, 민환은 도이에게 무척이나 서운함을 느꼈었다.
민주와 경아의 다른 점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데서 온 서운함이었다.
사진 속에 웨이브 진갈색 머리가 한결 더 밝은 느낌을 가져다주는 경아와 달리
민주는 늘 천연 검은색의 긴 생머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정말이지 미치겠군.”
태영과 성택이 얻어다 준 정보로 인해 진명중학교 앞까지 찾아왔지만,
막상 두 눈으로 사진이 아닌 실물을 확인하려 하니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살며시 주먹 쥔 손으로 제 이마를 서너 번 두들기는 민환.
평소와 달리 어둡고 어두운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씨발. 정말이지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
“…….”
“야, 도민주. 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응?”
갑갑한 듯, 조여진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르고
꽉 닫힌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늘어트린 교복 사이로 목걸이가 보인다.
민환은 그 목걸이를 손바닥 안에 감싸 쥐더니 이내,
동그란 펜던트 같은 것을 살며시 열었다.
손가락으로 두 마디 정도 되어 보이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양의 그것.
살며시 열린 틈으로 잔잔한 음악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초조했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씨발......”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민환의 얼굴위로 번진 자지자란 미소는
오래 머물지 못한 채 거두어진다.
동그랗게 오려진 작은 사진.
이제까지의 민환의 미소보다도 더 환하게 웃는 여자.
검고 긴 생머리가 유달리 잘 어울리는 민주.
민환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하아.... 지질이도 궁상이다. 정말.”
스스로의 행동에 낯설음을 느끼며 애써 시선을 돌린다.
궁상맞은 짓을 유감없이 실행으로 옮기도록 만드는 사진을 반으로 접어 닫았다.
더 이상 자그마한 민주의 미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후덕 지근하던 오후의 하늘이 자그마한 비구름을 동반하고 있다.
곧 비가 오려나보다.
“어떡해, 어떡해. 오빠 기다릴 텐데.”
“어휴~ 그러게 왜, 필요치도 않는 개깡을 발휘해?”
“몰라, 몰라. 짱나 죽겠어.”
이제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하교를 마쳤는지, 어느새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간혹 보이는 아이들은 서너 명씩 어우러져
운동장에서 한창 공을 들고 뛰어노는 사내 녀석들을 응원할 뿐이었다.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누군가를, 이제는 체념하며 쓸쓸이 돌아서려는데....
거짓말처럼.........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말투.
그리고 익숙한 외모를 소유한 한계집이 움직이려는 민환이의 발을 잡아 세운다.
“...도...민...주.....”
허공에 번지는 민환의 흐리멍텅한 음성.
민환의 눈이 급격히 커져간다.
연한 갈색의 머리가 살짝 웨이브 진 아이.
우유를 머금은 듯 뽀얀 얼굴과 땅딸만한 작은 키가 순간 두 눈동자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고 몇 미터를 걸어오면서도 한시를 쉬지 않는 방정맞은 입과,
근심이 가득담긴 말을 내 뱉지만,
무척이나 밝고 귀여운 얼굴에 이번엔 이미 오래전에 차게 얼어버린 심장이 반응한다.
“민주야.....”
“꺅!!”
눈 깜짝 할 사이에 운동장 가득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민환은 본능적으로 다가가 경아를 와락 끓어 않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