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유~ 정말. 저렇게 노골적으로 노려본다고 뭐, 뭐가 뚫어지기라도 한대?”
아침의 시작이 무척이나 산만했다.
“진짜, 별꼴이라니까.”
도이는 옆에 철썩 같이 붙어서 쉬지 않고 주절주절 거리는 다희로 인해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더 엉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딱히, 다희의 비아냥거림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다희의 비아냥 상대는 바로, 등교 직후부터 내내,
다소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민아였기 때문이다.
“어머~ 저러다 눈알이라도 빠지는 건 아닌지 몰라.
어머머, 저것 봐. 저거. 벌써부터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네.
얼마나 무식하게 힘을 줬으면 저러겠어.
쯧쯧, 괜히 주인 잘못 만난 저 눈이 다 불쌍하다. 흥!”
뭐라 말은 하지 않지만,
도이는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민아의 눈빛이 싫었다.
“그런데 너, 정말 어떻게 할 거야.”
도이는 다희를 교문 앞 문방구에서부터 만나 쉴 세 없이 어제의 일을 이야기 했다.
좀처럼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에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누구는 유민도, 성민도, 그리고 민환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다희가 적절했다.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린 거지?”
다희가 재차 물었다.
“다희야.....”
“응.”
“어떤 결정이 현명한 결정이 될까?”
“.....글쎄.”
다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유민오빠에 대한 감정이 정확히 어떤데?”
“알잖아.”
“하아, 그래. 공연한 걸 물었네.”
“하지만, 오기가 생겨.”
“그럴 만도 하지. 그 집에서 널 좀 무시했어?”
“그런데, 사랑은 오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
약혼식은 오기만으로 치룰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전혀, 변화가 없는 거야? 아직도 그냥 오빠로만 좋아하는 거야?”
“응.....”
시무룩하지만 숨김없는 도이의 대답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너.... 설마... 아직..도.....”
“쉿! 누가 들어.”
도이는 다급하게 다희의 입을 막았다.
누구라도 들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웠다.
“미, 미안. 워낙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알아.”
“그나저나 정말 걱정이다. 걱정이야.”
“…….”
“남들은, 정이 없어도 붙어있다 보면 그 시간에 정이 든다고들 하던데,
어째 너는 조금도 발전이 없냐? 유민오빠가 불쌍하다. 정말.”
“한다희~!”
도이는 잠시, 고개를 살며시 돌려 민아를 경계했다.
민아의 시선은 여전히 도이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워낙 소곤소곤 거리며 대화를 나누었기에 유민의 이야기가 거론 된 사실을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신에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도이의 행동으로 인해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허나, 선뜻 다가와 묻지는 않았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갔기에 자신을 경계하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그에 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이나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다.
“앗, 쏘리.”
“제발 좀 말 좀 가려서 해. 여긴 우리 둘만이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미안. 미안해.”
“아무튼, 그 방정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후훗.”
“웃지 마. 칭찬 아니야!”
“치, 가끔 보면 도이도 진짜 냉정하다니까.”
다희는 서운하다는 듯 말 했다.
“근데, 민환이는 알아?”
“아니, 아직.”
“말해야 하지 않아? 나중에 딴 데서 들으면 서운 해 할 텐데.”
“하긴 해야겠지....?”
“무슨 대답이 그래?”
“후우....”
“근데, 성민이는 뭐래?”
“별 말 안 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 같아.”
“하긴, 얼마나 알았다고 이러 쿵, 저러 쿵 하겠어? 근데, 그렇게 보면 너도 참 대단하다.”
“뭐가?”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망설임 없이 한 걸 보면 말이지.”
도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네.”
“민환이가 알면 분명 성질부릴 텐데. 그 성깔이 오죽 해야 말이지.
더군다나 자기 이야기 아무데서나 막 하는 거 댑따댑따 싫어하잖아.
그리고... 민주 이야기도.... 그렇고.”
“....걱정 마. 그건 귀띔 해 놨어.”
“그렇다면 뭐, 걱정 없겠지만. 근데, 성민이 보기보다 입이 가벼운 녀석은 아니겠지?”
“뭐,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엥? 왜 그렇게 태평하게 구는 거야? 걱정 안 돼?”
“그냥.... 믿어.”
이상하게도 믿고 싶었다.
딱히, 왜 믿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믿고 싶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도 없이 그냥 그러고 싶었다.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졌던 모습도, 사근사근한 그 모습도....
포근한 웃음도, 명확히 꼬집어 낼 순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민환과 닮은 듯한 모습도...
어처구니없는 일로 당황스럽게 했지만(양평을 다녀온 날, 피자가게에서 있던 만행 등)
되돌아보면 좋은 추억이 되어버린 돌발적인 행동도....
더 나아가 민주를 보는 듯한 성민의 웃음도.....
모든 것이 마냥 포근하게 느껴지고 친숙했기에,
민주처럼.... 민환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도이는, 성민에게 믿음을 가져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 종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맞이한 하교 길.
교문 앞에 낯익은 스포츠카가 보인다. 유민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 오후에 수업 있는 날이잖아.”
“바보, 필요 없는 걱정은 사양이야.”
“그게 왜, 필요 없는 걱정이야?”
유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퍼부어대는 잔소리.
도이는 분명, 어떤 해명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유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도이의 팔을 잡아 보조석으로 태우는 일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드라이브 코스는....!”
“오빠,”
“응?”
“후우.... 무슨 일 있어?”
도이는 다시금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양, 한껏 찡그린 얼굴로 유민을 바라보지만,
순간 지어버린 유민의 억지웃음에 화를 내는 대신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을 해온다.
“무슨 소리야?”
“오빠 지금, 억지로 웃고 있잖아. 오빠는 항상, 무슨 일 있으면 억지웃음 짓잖아.”
“....일은 무슨.”
“거짓 말.”
“정말 없어. 정말로.”
이미 유학이 결정 났고, 그로 인해 휴학계를 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한 도이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하여
다른 아이들처럼 한참 웃고 떠들어야 할 시기에....
벌써부터 결혼 문제를 운운 한 것도 미안한데
그 이상의 부담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회피하는 유민의 행동에 도이는,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하지만 더 이상 캐내지는 않았다.
애써 감추려는 것을 굳이 들춰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지금 도이는 어제의 유민의 제안, 그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더 이상 다른 문젯거리를 끌어다 놓고 싶지는 않았다.
유민의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이는 습관처럼 묵묵히, 측면을 주시했고, 유민은 물끄러미 정면을 주시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엔 누가 위랄 것도 없이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