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27화 (28/91)

27.

삐그덕- 삐그덕-

낡은 쇠의 움직임만 느껴지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이 고요하다.

도이는 긴 이야기를 끝내고 난 후, 다소 버거운 듯 여전히...

그네의 쇳줄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도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 곳을 찾았던 순간보다.

반면에 성민의 두 눈은 주변을 훑는다.

조금은 놀란 듯싶지만 신기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두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와 다른 느낌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데서오는 희열감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고요한 정적이 뒤덮인 놀이터에 성민의 음성이 잔잔히 울려 퍼진다.

“그럼, 민주라는 그 사람이 도민환 누난가요?”

“응.”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쉽게 알 수 있던 내용이지만,

그래도 성민은 재차 확인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 자식한테도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

“워낙 밝으니까.”

“근데요 누나, 그럼 먼젓번에, 왜 내 친구랑 살짝 마찰 있던 날 말예요.

그러니까 누나 발목 깁스한 날.”

“갑자기 그 날은 왜?”

“그날, 도민환이 누나한테 그랬던 것도...

그리고 내 친구를 죽이겠다며, 차게 말 한 것도 다...”

“맞아. 민주 때문이었어. 무의식중에 그 날일이 떠올랐을 거야.”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누난 바이크와 부딪힌 것도 아니고....”

“그래, 그랬지. 하지만 성민아.....

민환이는 하나 뿐인 누나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 걸 봐야만 했어.

어떻게든 수습 할 수도 없었고...

이미, 한순간에 시체로 변해 돌아왔으니까.... 뿐만 아니잖아.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체가 피로 잔뜩 젖어있는 걸 두 눈으로 봐야 했다고.

아무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시신을 말이야.....”

도이는 여전히 두 눈을 곱게 감은 채 말 했다.

유달리 침착해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도 하지. 이런걸.”

“트라우마?”

“자신의 눈앞에서, 혹은 곁에서, 또 다시 누군가가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야.

아주 자그마한 사고라도 그 날의 일이 무의식중에 겹쳐 오니까 더 괴로운 거고.

오토바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성민은 어쩐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해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아주 부분적일 뿐이니까.

“하지만 누나의 죽음에서 너무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건....

그 민주라는 사람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더군다나 그 일이 트라우마까지 왔다는 것도 좀......”

“쉽게 이해 가지 않는다, 이 말이지?”

“네.”

“그래. 그럴 거야. 하지만 성민아, 우리 주변엔 항상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어.”

“만약이라고요?”

“응. 그 만약이 뭔지를 알게 된다면....

그 다음은 더 믿을 수 없을 테지만, 이해하기는 조금 더 쉬울 거야.”

만약이라는 말을 응용하며 지금까지는..

절대적으로 말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민환의 이야기를 너무나 술술 털어놓는 도이.

그런 도이의 행동이 쉽게 이해 할 수 없었다.

늘, 성민이 조금이라도 궁금하다는 반응을 보이면,

“나중에... 나중에....”라는 말로 항상 미루곤 했었다.

그런데 대체, 오늘은 왜 이리도 술술 털어 놓는 것일까?

“민환이는.... 민주를... 사랑.....했거든.....

..........누나가 아닌... 여자로......”

“.......!!”

하지만, 그 궁금증을 다 끌어내기도 전에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도이의 얇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민환이 자신의 누나를 사랑했다는.....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성민으로써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접한테서 오는 당황스러움으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고, 도이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 있었다.

민주의 향기가 많이도 묻어나는 이 작은 놀이터 안에서.

이 놀이터라면, 이유 없이 편안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때의 도이의 안색은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잠시 동안 평온했던 얼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에 그 자리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 그늘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근데요 누나, 그 민주라는 사람이, 누나 친구가....

동생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 라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응.”

“....어떻게요?”

“민환이가 고백을 했었대. 그 때 민주가 많이 힘들어했었지.....

근데 민주는, 그냥 한때 지나가는 그런 감정으로만 치부해버렸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헌데, 민환이는 아주 조금도 거짓이 없었고, 진지했어.

그 때문에 민주는 계속해서 밖으로 나도는 일이 많았던 거지.

사실, 은호오빠와의 관계도 민환이가 그렇게까지 거부 할 필요는 없었어.

내가 보기에도 은호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었거든.

민주에게 무척이나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였어.”

“…….”

“하지만 민환이가 민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던 거야.

민주가 다른 누군가를 보며 웃던 게 싫었던 거야.”

이야기가 무거운 만큼, 분위기도 점점 무거워져갔다.

그 분위기에 따라 도이의 음성도 무겁게 가라앉아만 간다.

그 무거움 속에서 때로는 지독히도 쓸쓸한 여운이 풍겨져 나온다.

그 여운이 어쩐지 주변의 공기를 슬프게 이끌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누나, 아까는 왜 그렇게 울은 거예요?”

이쯤에서 성민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가는 공기를 정화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살며시 말문을 돌린다.

무엇보다도 미치도록 갑갑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마다 오는 장소라는 말에,

도이를 괴롭히는 그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누나를 괴롭히는 그 고민은 뭐예요?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아니. 그렇진 않아.”

“그럼, 그 이야기도 조금만 해 주지 않을래요?”

삐그덕 삐그덕-

한동안 멈췄던 그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길지 않은 침묵의 끝에선 도이의 얇은 입술이 어김없이 열리기 시작한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참, 너 민아를 알지?”

“차민아요?”

“응. 실은 내 남자친구가 민아네 오빠야.”

“유민형이요?”

사실, 성민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너, 유민오빠도 아는구나?”

“그냥, 조금.”

“아무튼, 오늘 유민오빠를 만났는데.....”

“둘이 싸웠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도이는 힘없이 고개를 내 저었다.

“....오빠가 유학을 가려는 모양이야. 아마도 아저씨 회사 때문이겠지.”

도이의 안색이 차츰 어두워져간다.

“그런데 오빠가.... 내게.... 제안을 해 왔어. 약혼식을.....”

“..약..혼....이요?”

성민은 무척이나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봉변이었다.

“그, 그래서요?”

“아무런 말도 못했어.”

“.....그, 그래요?”

지금 당장은 아무런 결정도 나질 않았다지만, 성민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도이가 유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어쩌나, 불안했다.

이봐, 권성민. 지금 느끼는 이 불안함. 도대체 뭐야?

왜 저 여자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발끈하고, 또 불안에 떠는 건데?

후우.... 이봐, 권성민.

설마 그런 건 아니지? 설마 너, 저 여자를....

후우.... 제발 이러지 말자고.

어디까지나 이건, 저 여자는 너에게 잠시 필요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백송을 위해 필요로 했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하지만, 하지만...........

스스로의 행동에 낯설음을 느끼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성민이었다.

그러나 그 책망의 끝에서 성민은 무척이나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하나의 수단과 도구로써 다가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인지,

아니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민 본인조차도.

“있잖아, 성민아. 이런 상황에서 난 대체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 걸까?

유민오빠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나의 마음이 어떤데요?”

“오빠가.... 싫은 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그럼.... 유민형과 약혼식을 치룰 의사가 있는 거예요?”

도이의 두 눈이 물끄러미 성민을 응시했다.

“아니, 결혼할 의시가 있는 거예요? 왜, 약혼은 결혼의 준비 과정이잖아요.”

어쩐지 성민의 음성이 가냘프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경직되어 보였다.

그런 성민의 표정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다가왔지만, 크게 생각하지 않는 도이.

이내 슬며시 고개를 내 저으며 말한다.

“...난.... 한번도.... 결혼을 생각 해 본 적이 없어.....”

만약에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단 한번이라도 결혼 생각을 해 봤다면... 그건... 그건 말이지....

유민오빠가 아니야.....

조심스레 말을 꺼내긴 했지만, 도이는 중간에 그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무릎위로 파묻었다.

마지막 말은 차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싹트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 했다가 찾아올 냉랭함을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전혀 눈치 체지 못하는 성민.

평상시의 그 말간 웃음을 지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누나. 정말 다행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