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26화 (27/91)

26.

동이 틀 무렵이면 소리 없이 내려 주변의 모든 것을 촉촉이 적시고

금세 사라지는 이슬처럼....

민주에게 있어 은호라는 그 녀석의 존재는 특별했다. 처음부터.

민환과 무척이나 잘 아는 사이인 것만 같은 은호라는 남자.

민주는 그날 저녁, 민환을 몹시도 괴롭히며, 때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가며,

그렇게 그 남자의 신상명세를 얻어냈다.

“아, 왜 자꾸 묻느냐니까?”

“궁금하니까 그렇지, 이 멍청아!”

“글쎄, 왜 궁금하냐고!!”

“씨,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톡 쏘는 말이었지만 시무룩해지는 얼굴에 민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신에 크고 묵직한 한숨만을 거듭 내쉬었다.

“......좋아하지 마라.”

“응?”

“좋아하지 말라고. 그 형....”

“왜, 왜?”

“....위험한 사람이야.”

“…….”

나지막 민환의 음성이 뭘 말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민환은 그 남자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사내놈들이 동경하는 것과,

너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멍텅구리가 좋아하는 감정은 분명히 다른 거야.”

“너.... 네가 철딱서니 없는 놈인 줄은 아는구나?”

“....씹, 누구는 이렇게 진지한데, 그런 농담이 나오지, 지금?”

“응.”

민주는 아주 조금도 망설임 없이 긍정의 대답을 했고,

민환은 무척이나 못마땅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근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야.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이를테면, 여자인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생리를 매달, 거르지 않고 하는 것과도 같은 거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는 민주.

이맛살에 주름만 잔뜩 잡고 있던 민환의 얼굴이 이번엔 묘하게 비틀어졌다.

“지금 상황에 딱히 잘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즉,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하고 싶지 않아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말이라고.

이 무식한 것아!!”

“썩을.”

“그러니까 얼른 이 누님의 의문사항들을 낱낱이 풀어주도록 하여라. 후훗.”

민환의 입가에서 다시금 나지막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문도 열었다.

“프랑스인의 아버지와 한국인의 어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한국의 이름은 백은호이며 프랑스 이름으로는 엠마뉴엘.

나이는 올해 열여덟.

나이로는 엄연히 고등학생이어야 정상이지. 하지만 학생은 아니야.”

“왜?”

“자퇴했어. 헌데 한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퇴학을 당했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형의 입으로 직접 들었지. 자퇴했다고.

물론 우리가 물어서 들은 건 아니고 어느 날 형이 말하더라고. 느닷없이 말이야.”

“그래서?”

“뭐, 남들이 어떻게 말하던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형을 좋아하고 믿으면 그걸로 끝이지.”

“피이~ 재미없게.”

“넌, 누굴 섬기는 걸 재미로 섬기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형이 그렇다니까 그렇게 믿는 거야. 나는.”

“근데 왜 안 된다는 거야? 넌 그렇게 굳게 믿으면서 말이지.”

민주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에 민환이 흠칫- 제 몸을 뒤로 뺀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게 당황스러웠나보다.

민주가 웃었다. 꼴에 사춘기라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민환이 귀여워 보였던가보다.

그녀 딴에는 말이다.

아무튼, 민환의 말이 이어졌다.

“어려서 미국에서 자랐어. 그리고 갱스터 집단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대.

엄마와 아버지의 국적이 다른 아이라고 시선이 차가웠던 거지. 형은 그런 시선들이 싫었던거고.

더군다나 태어난 나라 프랑스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인 만큼 힘들었을 거야.”

“…….”

그저 기대에 부푼 듯 설레던 감정이 거둬지고 무언가 안쓰러운 듯

무거운 감정에 슬퍼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낯을 무척이나 가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고.

그런데도 좋아하는 감정을 접지 않는다면 결국 상처 받을 것도 너야.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

“그 사람에게서 구분이란 없어. 남자고 여자고, 똑같은 사람일 뿐이야.

즉,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난폭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지.

폭력뿐만이 아니야.

언제 어디서 또.. 어떻게..... 너를 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괜히 옆에서 들이대다가 얻어맞지나 마.”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무미건조하게 말을 꺼냈지만, 민환의 얼굴엔 근심이 서렸다.

그러나 그 근심을 알아채지 못한 민주.

그저 한동안 바닥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민환의 방을 빠져 나갔다.

“하아..... 도민주..... 제발이지 내 앞에서 그런 모습 좀 보이지 마라.

나 때문에 그런 식으로 아무 남자한테나 들이대지 말라고. 존나.... 씨발스러워지니까.”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안에서 낮은말로 혼자 지껄이는 민환.

그의 슬픈 음성을 민주가 들었으면 좋으련만.....

사방으로 둘러싸인 탄탄한 벽은 민환의 근심 걱정을 아주 조금도 민주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민환이 지금 자신으로 인해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는 민주.

이상하게도 가슴이 꽉 막힌 듯 갑갑하기만 했다.

딱히 무엇을 동정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측은함을 느꼈다.

차라리 민환의 말을 듣지 말 것을......... 후회가 들었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많이 알고 싶고, 꼭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민환이 민주에게,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을 거듭 반복했고,

위험한 사람이니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져만 같다.

의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에 이미.....

왜 인지 몰라 한동안 머리가 복잡했다.

왜 그 사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몰라 괴로웠던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단 한번 봤을 뿐인데도 왜 그 사람의 체취에서 헤어 나오질 못할까,

여러 가지 의문사항이 늘어났고 그 의문사항들로 인해 더욱더

갈피잡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고단했다.

“그래, 이건 운명이야.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난 후에도 사그라질 줄 모르는 그리움은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사랑임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하자는 다짐까지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갔다.

민환을 핑계 삼으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그들은 늘, 놀이터 안에서 만나 놀이터 안에서 헤어졌다.

처음 그 사람을 따라갔던 그 작은 놀이터.

어두컴컴해서 그 곳에 놀이터가 존재하는지 조차 의심이 가는 그런 곳.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이외로 힘들었던 벽, 도민환.

민환은 은호에게 점점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민주를 보며 길이길이 날뛰었다.

허나 그 것은 이제까지 민환이 범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로 끝이 났다.

민환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반대가 오히려

민주와 은호가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머지않은 시간이 지나고, 민주는 백은호라는 그 남자와 사랑의 결실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때는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르고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좋아....해요.... 오빠....”

“…….”

“오빠랑.... 사귀고 싶어요.”

좋아한다는 민주의 고백에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었지만 쉽게 받아들어던 은호.

민주는 하늘을 날것만 같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였다.

예상보다 더 반박이 심했던 민환.

민주와 관련 된 일이라면 사사건건 간섭을 해 댔다.

등하교시간을 철저히 따지는 것은 물론이요, 하물며 집안에서 조차

잠시, 화장실을 가는 것까지도 낱낱이 보고를 해야 했으니......

그토록 길이길이 날뛰는 민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속상했다.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민환이 너무 야속했다.

그렇다고 밉다고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밉다고 냉정하게 대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 때는... 민환과 자신의 관계가 더 없이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민주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더, 민환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도 더,

은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둘이서 밤나들이를 즐기는 일이 많아졌다.

은호는 상당한 실력과 경력을 갖춘 바이크 매니아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민환이 걱정했던대로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자인 민주에게는 늘 친절했고 따듯했다.

가끔씩 거친 성격으로 인해 당황하게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민주는 좋았다....

“오늘따라 날이 서늘하네. 그만 들어갈까?”

민환을 피해 다닌 지도 어느덧 한달.

붙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이미 한시도 붙어 있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만큼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날도 여전히 밤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아뇨.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놀아요.”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괘난 걱정 이예요. 여름엔 개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도로를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달리는 것에

무척이나 재미를 들여놓았던 민주.

고요한 밤에 울려 퍼지는 정적을 깨고 이질적인 굉음을 넣고,

가끔은 뒤를 쫓는 경찰과의 마찰과 그 스릴을 즐기며 환호성을 쳐댔다.

그런 민주의 모습은 더 없이 자유분방해 보였고 보기 좋았다.

꽉 막힌 듯 답답한 것을 질색하는 은호였기에 어쩜 더 좋아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 날은, 늦은 여름에 때 아닌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유난히 피부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비구름을 몰아왔던 것이다.

주르륵.... 주르륵....

갑자기 퍼붓는 장대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길 속에서 은호의 바이크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강 둔치를 달리고 있던 터라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이 없었기에

은호의 바이크와 눈은 비를 피하기 적당한 곳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꽉 막힌 듯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기에 비를 피할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찾기는 찾아야 하는데........

빵-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속도를 줄이고 달렸다마는,

사차선 도로에서 우회전 신호를 받고 방향을 틀었는데.....

세상이 다 잠든 고요한 시간이라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트럭이... 뒤 늦게...

그들의 오토바이를 보게 되었고.... 다급하게 경적을 울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끼이익.....

물이 오른 표면과 타이어의 마찰음이 상당히 차갑게 들려왔고....

물살로 인해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듯싶었지만....

속력이 줄어들지 않은 바이크는.... 트럭의 밑으로 곱게 깔려 들어갔다.

트럭은 바이크를... 보기 좋게 갈아 버리고.... 한참을 달려가서야

겨우겨우 가로수를 들이 박은 채로 멈춰 섰고....

되 돌아 본 길에는.... 트럭이 지나온 길에는....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는 여전히 퍼붓는 장대비속에서 멀리멀리 퍼져 나갔고,

물이 섞인 피는 연하게 바래져갔다.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로 나가 떨어져 굴러버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시체...

멈출 줄 모르고 퍼 붇는 장대비는.. 결국... 민주와 은호의 영혼을 낚아 채 간 것이다....

민주에게 두번째 운명이 다가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더 없이 기뻐하고 즐길날들이 많이 남아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럴 수 없었던...

벼랑 끝에 서버린 민주의 운명... 마지막....

그날... 그렇게 퍼 붓는 빗속에서....

민주와.... 은호는..... 나란히...

되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먼 여행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