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쿵쾅 쿵쾅, 60여 평의 집안가득 울려 퍼지는 소란스러운 소리.
민주는 빼 꼼이 방문을 열어 그 소리의 원인을 찾아본다.
“야! 도민환! 시끄럽잖아!”
한껏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톡 쏘아 붙이며 말을 하지만,
민환은 혓바닥만 쑤욱~ 내밀며 재빠르게 현관으로 뛰어간다. 그러다가,
“야!”
“왜?!”
“조금 있다가 내 손님들 올 거니까 집 좀 치워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명령조로 말을 하고는 후다닥~ 뛰어나간다.
민주의 입에서 어떤 말이든 나올 시간도 주지 않은 채로.
“씨이~ 저게 진짜 죽을라고.”
“왜 그래? 민주야?”
“아~ 몰라. 짜증나.”
한마디 대꾸도 못한 것이 영락없이 그 명령에 따르마,
긍정한 것만 같아서 괜히 심술이 났다.
투덜투덜 거리며 제 방문으로 들어와 팔짱을 괴고 앉아 씩씩거리는 민주.
놀러왔던 다희와 도이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려 보지만 이내 관심사는 바닥에 널려있는 잡지책으로 되돌아간다.
도이와 다희에게 무엇보다 큰 관심사는
민주의 심술 난 얼굴보다는 그 시절 한창 뜨고 있던 가수의 기사가 실린 잡지책이었다.
“이야~ 이 포즈 봐봐. 너무 멋있지 않니?”
“이야~ 이거 대체 뉘 집 아들이니?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짜증나게 스리.”
“후후.”
“헤헤.”
열다섯, 열여섯 아이들에게 누구나 한번쯤은 찾아오는 연예인을 향한 관심사. 동경.
도이와 다희는 매끈하니 잘 빠진 연예인들의 사진을 보며,
기사를 보며 이유 없이 신이나 있었다.
“씨, 너희는 친구가 지금 이렇게.....”
“민주야, 민주야!! 이거 봐봐. 너 좋아하는 강우진이다.
이야~ 이 오빠 넘 멋져. 어떡해, 꺅~”
“어, 어디? 어디 좀 봐봐.”
그 중에서 민주는 강우진이라는, 당시 A잡지사 최고의 인기 모델을 좋아하고 있었다.
보통 그 또래의 아이들이 열광하는 가수나 연기자,
혹은 무척이나 핸섬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배우를 좋아하기 보다는,
강우진이라는 모델을 동경해 왔다.
“엄머~ 어떡해, 어떡해~”
“…….”
“아~ 우리 우진 오빠, 왜 이렇게 잘 생긴 거야?”
배시시 웃음을 짓고 있는 민주의 볼이 종이 짝에 지나지 않는 잡지 책 하나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민환으로 인해 울그락발그락 물이 들었던 두 볼이 어느새....
강우진이라는 인기 모델로 인해 물이 들어버린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달의 신간잡지 서너 권을 함께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보니, 어둑어둑 해가 진지 오래였다.
도이와 다희는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갖은 채로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민환이가 코빼기도 안 보이네? 한번 나가면 함흥차사라니까. 하하.”
“참, 이 녀석, 곧 들어올 것 같이 말 하더니 왜 안 들어오지?”
“뭐, 목적지가 바뀌기라도 한건가?”
늘, 입만 살아 그 입이 바쁜 녀석이기에 그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저녁때가 많이 지난 시간이기도 했기에 서둘러 집으로 향해야 했다.
민주는 그리 멀리까지 바래다주진 못했지만
습관적으로 빌라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상가까지는 바라다 줬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집이 아닌 그 반대편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마치, 자석의 N극이 S극으로 끌려가듯이 자연스레.....
굳이 그 곳으로 가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집이 아닌 그곳으로 가는 것인지는 몰랐다.
그냥, 알 수 없는 이끌림. 단지 그 하나였다.
민주의 발을 끌어당겼던 어떤 이끌림 하나.
아마도 그것은 본능이었던 것 같다.
툭-
그리고 그 본능에 충실할 때, 무언가 커다란 마찰을 느꼈다.
“아......”
“…….”
어쩐지 정신이 몽롱했다.
평상시 도민주답게 생기 넘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스치듯 부드럽게 부딪힌 것 같았지만 무척이나 아파왔다.
통증 때문에 잠시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대가 멀뚱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괜찮냐는 말조차도 없는 상대가 불쾌했다.
버럭, 화를 내야지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그런데 그 순간....
민주는 어떤 고약한 마귀할멈의 주문에라도 걸린 듯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 미안해요.”
마음과 다르게 고작 한다는 소리도 미안하다는 사과인사가 전부였다.
무표정한, 무관심한 그의 눈이 민주를 내려다본다.
그는 키가 큰, 젊은 남자였다. 그의 눈동자는 검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마치 혼혈아를 보는 듯, 이방인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무척이나 신선했고 자극적이었다.
겉으로 풍기는 외형은 그가, 학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서 거둬지지 않는 그 남자의 시선.
민주는 그 시선이 무척이나 부담스레 느껴졌다.
민주는, 자신이 그리도 동경해 온 강우진이라는 모델의 얼굴을 곱게 빼다 박은 듯
닮아있는 그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가 부담스러웠다.
두근두근........
하지만, 민주가 갖은 부담감들이 민망할 만큼 미친 듯이 요동을 쳐대는 심장과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두 볼.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는 민주의 모든 행동들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로.
미치도록 목이 말랐다. 그 남자의 짧은 말 한마디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왜일까? 단순히 그동안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연예인과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민주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 두통 속에서도 원하는 해답을 얻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찾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찾지 않고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
봄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나부끼는, 그 남자의 연한 갈색의 머릿결.
적당히 기른 머리가 왜 이리 단정해 보이고 로맨틱해보이던지.......
필사적으로 그 남자를 잡고자 하는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무의식중에서도 그 남자를 향해 가는 손을 뻗었다. 단 한마디라도 좋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욕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잡을 수 있을 듯 가깝게 있었지만, 너무나 멀게 느껴져 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머릿속이 흐리멍텅하게 바래져갔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번 민주의 두 발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지나간 자리를 그대로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인지....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단지, 한마디의 말이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한참을 걸어갔다. 아주 느릿하면서도 여유 있는 걸음이었다.
살갗을 에는 봄바람이 그 남자의 향기를 가져다준다.
.....향기로웠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닐라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그 향기에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지독히도 고약한 마귀할멈이 민주를 상대로 또 한번의 장난질을 치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민주가 자신의 뒤를 밟는지, 마는지를 모르는 듯싶었다.
아니, 어쩜 무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오던 말든, 그것은 개의치 않다는 식으로.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한번이라도 뒤를 돌아봐준다면 그 검푸른 눈동자에 나를 담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지?”
“....아....!”
우뚝 멈춰선 그 사람이, 가려던 길을 바라본 채로 물어왔다.
검푸른 색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남자답지 않게 얇은 목소리였지만, 꽤나 무게감이 느껴졌고,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부드러웠고 달콤했다. 그리고 그 속에 날카로움이 베어있었다.
“왜 말을 않지?”
“저.... 그러니까... 그게....”
“…….”
미치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그가 민주를 위해 멍석까지 깔아 놓아주었는데도 말이다.
벙긋, 벙긋- 민주의 입이 수시로 달싹인다.
당장이라도 아무 말이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아무런 말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질문들은 많은데, 밖으로 꺼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아..... 형은 왜 이렇게 안 오실까?”
“조금 더 기다려 보면 오시겠지.”
“약속시간에 이렇게 늦는 법이 없었는데.... 어?!”
“왜?”
“저기, 은호형 아니야?”
“어디?! 오셨어?”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근데....”
“어? 저거...... 야! 도민주!!”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아 조금은 난감할 때....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이름도 들려왔다.
도민주라는 자신의 이름이......
그제야 민주는 주변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쫓았을 때,
작고 오래된 놀이터 안에서 너무나 낯익은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주는 유난히 반가움을 느끼며 활짝 핀 얼굴로 민환의 이름을 불렀고...
천천히 다가온 그는,
무슨 영문인지 자신이 따라온 남자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곱게 인사를 받아주는 그, 그리고 그를 향해 방긋 웃는 민환...
검푸른 눈동자를 소유한 그 남자가... 민주에게 다가온 두 번째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