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도민주!!”
“헤헤, 미안 얘들아~”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도이, 민주, 다희는 무서울 만치 빠른 속도로 친해져 있었다.
신기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는데....
민주의 앞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민주에게는 엄마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편하고 그리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 집안에서의 모든 불화를 잊게 해줬고,
티 없이 맑은 웃음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그립게 했던 가보다.
그래서였을까?
이사를 온지 한달, 그리고 전학을 온지 한달, 민주와 다희를 안지 한달....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사람의 앞에서 조금씩 감정의 변화를 보여 왔다.
기쁠 땐 마냥 기쁘게 웃어 보기도 했고,
슬플 땐 뿌연 눈물도 흘려보고,
무엇이든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땐 소리도 쳐 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땐 친구들 앞에서 칭얼거리는 소리로 아양을 떨어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제 고집을 부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표현 할 수 있는 감정들을,
잠시 잊고 살았던 감정들을 하나씩 되찾고 있었다.
그 날의, 그 순간의 도이의 모습은 전과 다름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 예전의 밝고 명랑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해 보였고, 때로는 그 나이의 아이들처럼 순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얌체 같아.”
“헤헤.”
시큰둥한 도이의 말에 마냥 배시시 웃어대는 민주.
맥없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는 도이와 다희.
뽀루퉁한 두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우걱우걱,
무언 갈 맛있게 삼키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깍쟁이로만 보였다.
“오늘 저녁에 뭐할 거야?”
비어진 도시락을 정리 하면서 민주가 물어왔다.
얌체 짓을 하고도 맑게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밉지가 않았다. 아주 조금도.
“은일이가 너희들 보고 싶다는데, 같이 만나지 않을래?”
은일이라 함은, 당시 민주와 핑크빛 사랑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던,
민주만큼이나 귀여운 아이였다.
그리고 은일은 한살 연하의 재간둥이였다.
“아우~ 우리 은일이, 너무 귀엽지 않아? 웃는 것도 그렇고, 애교도 잘 부리고,
아우~ 너무 예뻐 죽겠어~”
생긋 웃음을 짓는 게 민주보다도 더 귀여웠던 은일.
그 웃음을 보며 민주는 은일의 볼을 잡고 늘어지는 일이 많았다.
“씨, 내가 애 취급 하지 말랬지?”
물론, 그럴 때마다 은일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라? 지금 앙탈 부리는 거야?”
“야, 이게 무슨 앙탈이냐?”
“에이~ 앙탈이네. 후훗.”
민주의 애 취급에 은일은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으로 잔뜩 인상을 쓰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을 먹는 일처럼 흔한 일상이었고, 어느 순간부턴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그저 귀여워만 보이던 민주.
“이야~ 우리 은일이 화내니까 더 예쁘다.”
“뭐?”
“후훗.”
“....도민주!! 이럴 땐!!......예쁘다가 아니라, 멋지다고 하는 거야!”
“후훗. 알았어. 알았어. 우리 은일이 멋져. 최고로 멋져.”
잔뜩 화가 난 듯 하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이는 은일.
가끔씩 이 커플의 대화를 들을 때면,
조금 많이 특이하다는 생각은 수식어처럼 늘 따라다녔다.
“얼 만큼?”
“하늘에서 땅만큼.”
“정말?”
“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두 사람 사이에 태양보다 환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은일과 민주는 최고의 커플이었다.
찰떡궁합이라는 말은 아마 그 두 사람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낙천적이면서도 밝고 명랑한 성격도 성격이요,
귀엽상한 외모도 외모였고, 그 밖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두 사람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 간다지만,
은일과 민주의 경우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닮아 가는 것이 아닌,
천성부터가 워낙 닮은꼴의 커플이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순수했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포장했다.
그들은 행복했다.
사소한 일들로 티격태격하는 일이 많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행복이 부럽지 않았다.
늘 웃고 떠들고, 또 웃고, 그 웃음 안에서 더 큰 행복을 찾고 만들어가고.........
그리고 그 큰 웃음은 주위에 있는 도이와 다희마저도
행복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정원 안으로 이끌었다.
그들의 존재는 다만 두 사람뿐이 아닌 주위의 모든 것을 행복으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사랑의 공식에 제일 첫 번째인-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듯,
민주와 은일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다만, 그 이별의 문제가 있다면 일방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한다지만,
은일에게는 자신을 애 취급 하는 민주보다는(물론 자주 있던 일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더 좋았던 모양이다.
그 아이는 자신을 애 취급 하는 일이 없었고
민주와 다르게 차분하면서도 청순한 이미지가 단연 돋보였다.
청순함. 사실, 애 취급을 하는 민주의 버릇보다도 더 큰 문제는 그 청순함이었다.
흔히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청순한 이미지에
가슴 설렘을 느끼고 크게 흔들리기도 하니까..........
“민주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은일의 마음이 민주에게서 완전히 돌아서던 날..
그 날부터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민주의 손에는 하얀 목도리가 들려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엉성해 보이는 것이 민주가 손수 짠 목도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하루하루를 웃어가며, 은일과의 데이트로 인해 밤잠도 줄여가며 만든 목도리였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해야지, 하며 열심히 짜 놓은 것인데.....
은일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하루 전날..... 민주에게 이별선언을 했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목도리.....
그 목도리를 적셔버린 민주의 눈물.......
“정말 나쁘다. 은일이 정말 나쁘다.....”
“…….”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었기에
두 사람의 이별은 도이와 다희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민주는 하루가 다르게 헬쓱해져갔고, 전과 다른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민주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왔기에 도이와 다희마저도 가슴쓰라림을 느꼈다.
주인을 잃어버린 목도리처럼....
웃음을 잃어버린 얼굴과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가슴으로 인해......
그 해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고, 그래서 더 많이 아팠다.
........은일의 이별선언은, 생각지도 못한 아주 큰 충격이었다.
시간은 빠르지 않게 지나갔다.
가슴 시린 겨울이 지나가고 향기로운 풀냄새가 진을 치는 봄이 찾아왔다.
검고 어두웠던 나무에 새파란 나뭇잎들이 가득 돋아나고,
색색의 봄꽃들이 방긋이 얼굴을 내보일 때,
다행이도 민주는 지난겨울의 이별상실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해의 봄날.
민주에게 또 다른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땅에 물기가 스며들 듯 그렇게 서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