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삐그덕 삐그덕-
녹이 슬은 쇳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 소리가 싫지만도 않았다.
도이는 잠시 낡을 대로 낡아 녹이 슬고,
볼 품 조차도 없는 그네의 쇳줄에 머리를 기댄다.
여름이긴 하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녹슨 쇠의 차고 비릿한 향이 코끝을 스쳐간다.
“누나.....”
아주 흐릿한 목소리. 성민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나.... 지금 너무 궁금한데 말 해 줄 수 있어요....?
민...주라는... 사람이 누군지.....”
그 흔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놀이터라서 인지
달빛 하나만이 덩그러니 비쳐오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아주 잠시 뿐이었지만 마주친 눈동자에서,
스치듯 지나간 아련함을 읽은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성민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싸했다.
때때로, 무언가 좋지 못한 일에서 주는 그런 차고 시린 감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저 흔한 일상에서 혹은,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어느 한 순간에 가져오는 잔잔한 감동도 아니었다.
무언가.....
오랫동안 들춰내지 못했던 추억이 빚어낸 아련함, 가슴 쓰라림,
그리고 짙게 풍기는 향수에서 오는듯한..... 애처로움이었다.
‘2년 전 여름’이라는 말이 유난히 걸린다.
완벽한 과거형과, 한편으로는 아니길 바라는 아련함.
그것이 어쩐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일임을 증명 하는 듯 해
더더욱 가슴이 싸해짐을 느꼈다.
도이는 잠시 얇디얇은 쇳줄에 기댔던 머리를 떼어내고 고개를 살짝 틀었다.
무언가 간절해 보이는 성민이 두 눈 가득 차올랐다.
“.......궁금하니?”
무겁게, 어렵게 두 입술을 떼어낸 듯한 질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물음조차 성민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성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기분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딱 그랬다.
사흘을 밤낮으로 굶주린 것만 같은 기분. 무척이나 허기가 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람 한점 없는 사막에서,
때때로 불어오는 거라곤 매섭도록 시린 추위만큼이나
매섭도록 뜨거운 열기만이 느껴지는 곳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아주 간절히.... 조그마한 오아시스라도 갈망 해 보지만 조그마한 오아시스는커녕,
그 흔하다는 선인장 한 그루 조차 없는 사막의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목이 타고, 입술이 메말라 버린 지 오래인 것만 같은 착각.
....그래... 그랬다.....
성민은 지금 도이의 눈빛에서 그와 같은 애처로움과 그처럼 심한 갈증을 느꼈다.
“2년 전 여름에.....”
도이는, 성민의 간절함을 알기라도 하는 양,
메말라 버린 입술을 촉촉이 적셔줘야 하는 의무감이라도 생긴 양,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맞닿은 두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왜 이 순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 채....
왜 이 순간, 성민에게 민주를 알리고 싶은지 그 분명한 이유도 모른 채....
단순하면서도 분명히 알 수도 없는 막연한 이끌림에서부터였다.
.
.
2년 전 여름....
그 여름은 도이에게 있어서 두 번째로 찾아오는 공포의 계절이었다.
.
.
도이가 민주를 만난 것은 정확히 엄마가 엄마의 죽음을 맞이한 후로 한 달 만이었다.
늦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던 무렵이었다.
열다섯 살의 3월. 새 학기였으니까......
“자 자, 주목! 여기는 예림중학교에서 전학 온 신도이 학생이예요.
앞으로 일년 동안 함께 할 친구니까 사이좋게 지내고,
빠른 적응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많은 관심 가져주길 바래요.
간단하게 친구들에게 인사부터 하세요.”
그 날은 정확히 3월 하고도 2일이었다.
신입생이 입학하고 새 학년이 되는 첫 날.
엄마의 장래가 있던 때는 2월 초였고,
급급하게 전학 수속을 받고 희망 중학교의 첫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아직까지 배치되지 않은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아서 멀뚱멀뚱한 눈으로
새 학년의 담임선생님인 여자와 도이를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그 시선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는 도이.
자신의 인사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향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하, 아무래도 전학 첫 날이라 많이 쑥스러운가 봐요.
음, 저 중간 자리가 비어있네. 우선 그 자리에 앉도록 해요.
자리 배치는 운동장 조회 끝나고 난 후에 하도록 할게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마치 동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마냥 그렇게 멀거니 서 있기만 한 도이를 보며,
선생님을 그렇게 얼버무렸다.
더 세워 놔 봤자 오히려 첫 날의 설레는 기분을 망칠 것을 그녀도 예감했던 모양이다.
차게 굳어진 표정과 이율배반적으로 우수에 젖은 눈.
그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독기.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반면 어렵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저마다 소곤소곤, 도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다가오는 사람도, 그렇다고 뭐라 해코지 해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멀찌감치 에서 지켜보는 일을 반복했을 뿐이다.
자신들과는 애초부터 상관없었다는 양.
그렇게 한달이 지났을까?
도이는 자의든, 타의든. 어차피 전학 온 학교이건만, 왕따 아닌 왕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워낙 겉으로 풍겨지던 분위기가 음산하고 어려웠기에 아무도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외로워 보이고 안 돼 보이기도 했지만, 도이는 오히려 그 생활이 편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그 생활이.
그러다가.........
“음.... 안녕!”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상큼, 발랄, 그리고 명랑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냥 듣는 것 자체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유쾌한 목소리였다.
도이의 두 눈이, 아주 자연스레, 아주 당연하다는 듯 유쾌한 음성을 찾았다.
“나, 난 도민주야!! 만나서 반가워!”
도이가 자신을 봐주자 기쁘다는 듯 서둘러 인사를 하는 아이.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 통통한 두 볼이 너무나 귀여웠다.
길게 늘어트린 지독히 까만 생머리는 통통히 오른 젖살을 가려주며
조금은 성숙한 이미지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주먹만한 얼굴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큰 눈은 짙은 쌍꺼풀 선이 너무나 선명했고,
초승달을 보는 듯 곱게 접힌 눈가가 잔웃음을 머금고 나면
그 모습에 미칠 듯 갑갑해 져 옴을 느끼게 된다.
왜, 그 웃음에 갑갑함을 느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여자인 도이가 봐도, 다른 아이가 봐도 참으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는 것.....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밝은 아이.
민주는 아주 우렁찬 음성으로 명랑, 쾌할 한 인사를 건넸다.
그 음성이 어찌나 크던지 살포시....
도이의 미간이 좁혀지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짐을 느낀다.
“아, 소리 질러서 미안! 헤헤.”
“....괜찮아.”
잠시나마 찌푸려진 인상에 민주는 서둘러 사과를 했고,
도이는 늘어질 듯 길게, 괜찮다는 짧은 말을 꺼내었다.
“이야~ 너 목소리 참 예쁘구나?
그렇게 예쁜 목소리를 왜 이렇게 숨기고 다녔어?
진작 예쁜 목소리 들려줬으면 좋았잖아~~”
큰 눈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는 도이의 앞자리에 마주 앉는 민주.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야~ 웃는 건 더 예쁘잖아?”
신기하다는 듯 연신 꺅꺅거리면서도 너무나 앙증맞은 웃음만큼은 잠시도 잃지 않는다.
사근사근하고 귀염성 있고, 붙임성이 너무나 좋은 아이, 민주.
민주는 도이의 미세하지만 그 미세함 속에서도 투명해 보이는 웃음에 홀딱 반한 사람마냥,
그 뒤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도이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도이도 민주가 자신을 따라 붙는 게 귀찮지 많은 않은지, 별다른 제제를 하지 않았고,
워낙 천성부터가 밝고 명랑한 민주를 보며 차츰.........
차갑게 굳어졌던 안면위로 웃음을 짓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때에, 다희를 만나게 되었다. 다희는 민주의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