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탁, 탁, 탁―
테이블 위를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긋이 턱을 괴고 앉아서는,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테이블을 쳐대는 유민의 손.
꽤나 불안해 보였고 심난해 보였다.
“오빠, 뭐해? 바빠?”
시간이 가는지 마는지도 모르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저 멍하니,
얼마간을 그렇게 같은 동작만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투명한 유리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데,
때를 맞춰 빼 꼼이 방문이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민아가 들어온다.
“전화 올 때 있어?”
“아니, 왜?”
“아빠가 보자 셔.”
“서제에 계시니?”
“응.”
“그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 받은 것에 대해 다소 불만이 섞인 얼굴로
투명한 유리 탁자를 짚은 손에 약간의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는 탁자위로 자신의 몸을 맡기듯, 그 힘을 빌려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터져 나온 한숨에 민아는 의아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아무데나 자릴 잡고 앉는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신도이랑 관련 된 일이야?”
“…….”
“오빠답지 않게 왜 그래?”
후우....
민아의 낭랑한 음성에 뭐라 반박하기에 앞서 어김없이 한숨이 터져 나온다.
다른 날 같으면 어떤 참견을 하고 간섭을 해 와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겠지만
오늘은 마냥 귀찮고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말은 다 해 놓고선 뭐가 고민인거야?”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거냐?”
“그건 오빠가 더 잘 알잖아.”
유민의 눈이 잠시, 매섭게 민아를 쏘아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뭐.”
“너, 도이 만났냐?”
“한집이라고 갖다 붙이긴 싫지만, 아무튼 집 주소가 같은 건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며,
더군다나 같은 학교 같은 반이기까지 하니,
지겨울 정도로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우리 두 사람이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만 하는 나로서도 별시리 달갑지 않은 일에
새삼스레 예민해질 건 없잖아?”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구차한 이유를 장황하게 나열하는 민아의 행동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그걸 물어 보는 게 아니잖아?”
“그래, 아니겠지. 어련하시겠어?”
“…….”
“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그 시선은 정말이지 사양이라고.
내가 만난 게 아니라 엄마가 만난 거니까.”
“엄마가?”
“그래, 엄마가 만난 거라고.”
“엄마....”
“혹시라도 말이지,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유민이 뭐라고 말 하려는지 몰라도,
살짝 엄마라는 호칭을 입 박으로 내 뱉어 그 끝을 살짝 흐리는데,
재 빨리 민아가 뒷말을 가로채간다.
“왜냐고 물을 생각이라면, 그건 사양하겠어.
더 나아가 왜 말리지 않았냐는 둥의 말로 날 닦달 할 생각이라면 그건 더더욱 사양이야.
그런 일일랑, 엄마와 오빠 두 사람이 직접 해결하라고.
어디까지나 난 제 3자에 불과하니까.”
“너....”
“오빠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내가 신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나를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빠와의 결혼 문제에 왈가불가 할만한 관심 따위는 없단 말이지.”
왜냐면 나에겐 그보다 더 큰 관심거리가 존재하니까......
신도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충분한 다른 이유가 내 안에 있으니까........
민아는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정말로 신도이를 좋아하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오빠 일이지 내 문제가 아니잖아?”
“네가 웬일로 도이와 내 일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냐?”
“....글쎄..... 왜 일까?”
“민아야.... 만약에 오빠가....
도이로 인해 엄마, 아버지를 상대로 싸움을 해야 한다면.... 넌 누구 편을 들어 줄 거냐?”
“유치하게 애들도 아니고 편은 무슨 편이야?”
“후훗, 그런가?”
유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빠. 내가 이 말 하나는 해 줄 수 있어.”
“…….”
“소중하면 지켜. 뺏기지 말고.”
표면적으로는 오빠를 위한 거라지만....
사실은 오빠와 나,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해.....
유민은 잠시 아주 진지하게 민아를 내려다보았다.
민아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얼마간,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다.”
차가운 듯 하면서도 단호하고,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씁쓸한 얼굴로 뒤돌아선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어 생소하게 다가오지만,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곱게 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민아.
“정말 별일이로세.”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 일이 아닌 이상 그 이상은 관심이 없다는 듯 양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유민의 뒤를 따라 나온다.
허나, 그 뒷모습이 어쩐지 한 번 더 시선을 가게 만들었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온 넓은 거실에서는 조용한 침묵이 민아를 반겼고,
살며시 어둠이 스며든 테라스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스쳐지나간 바람의 흔적을 알린다.
민아는 천천히 발을 옮겨 테라스에 선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휘이잉~ 하고
민아의 온 몸을 한번 휘어 감고는 재빠르게 도망가는 바람을 느끼고는
그 바람이 머문 자리에 답례라도 하듯,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다소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의 민아.
자신의 온 몸을 휘감고 달아났지만 여전히 생생한 바람의 흔적이 결코 반갑지가 않았다.
어쩐지 그 바람은, 앞으로 일어날 크고 작은 일을 예언이라도 하고자 다가온
사자(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온 사람)만 같은 기분에 꺼림칙하다.
막상은 자신의 일이 아닌 양,
관심 없는 얼굴로 시종일관 변함없는 표정으로 제 할일만을 묵묵히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큰 고민과 걱정이 민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
.
“누나.... 무슨 일 있었구나. 그죠?”
성민은 아주 부드럽게 도이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 않았다.
가녀린 그 어깨는 슬프게도, 너무나 작았기에 성민의 품속으로 쏘옥 들어왔다.
“엉엉... 흐엉....”
그 품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지는 도이.
성민이 지금 이 곳에 있는 이유도 모르겠고 자신은 어디로 가던 길이었으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성민을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왜 성민을 보자마자 예고에도 없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재간이 없었기에,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 버린다.
성민은 묵묵히 도이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울 수 있게끔 아무것도 묻지도 듣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넓은 가슴을 가만히 내어주었다.
“다 울었어요?”
부드럽게 던져진 성민의 질문에 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예요?”
“…….”
“말하기 싫은 모양이네. 뭐, 괜찮아요. 아무렴 어때요?”
“…….”
“근데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던 길이었어요? 불러도 모르고...”
늘 보여줬던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가 아닌 차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나, 이상한 노릇이었다.
성민이 지어주는 차분한 미소에 설레임을 느꼈고, 한결 마음도 편안해졌다.....
“근데 여기가 어디야....?”
“엥? 정말 수상하네? 어떻게 자기 동네도 몰라요?”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는 촉촉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봤다.
역시나, 성민이 말한 대로 그 곳은 자신의 집에서,
아니 정확히 유민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2층의 커다란 집들이 몰려있는 곳과는 다르게 빌라들이 늘어선 빌라 촌이었다.
성북동의 빌라 촌.
그제야 자신이 무의식중에 찾은 곳이 어디고, 찾은 사람이 누구였다는 것을 의식했다.
‘또, 민환이를 찾아온 모양이네. 바보같이.’
“그런데 너는 왜 이쪽에 있어? 집이 이 근처야?”
“아뇨, 집은 아니고 도민환, 그 자식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헛걸음 하고 돌아가던 길이예요.”
“민환이 만나기로 했었나보지?”
“그런 건 아녜요. 그냥, 제가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에요.”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하하, 그러게요. 근데 정말 무슨 일 있었어요?”
성민은 제법 조심스레 물었다.
도이는 살며시 고개를 내 저었다. 부정의 표현이었다. 허나 이내,
“저..... 성민아.”
“말해요, 누나.”
“잠깐.... 시간을 좀 내 줄 수 있을까?”
“뭐... 그러죠.”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흐렸지만,
성민은 오히려 기다리기라도 했던 양, 반기고 있었다.
물론 그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작은 놀이터.
도이가 그 곳으로 성민을 이끌었던 것이다.
성민은 다소 허르스름해 보이는 놀이터였지만 썩 마음에 들어 했다.
‘오호~ 이런 곳도 다 안단 말이지?’
가로등 빛 하나 없는 놀이터라 스산한 기운까지 감돌았지만,
오히려 성민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귀엽고 발랄하고, 늘 생기 넘치는 모습과 달리.
두 사람은 삐그덕 삐그덕, 낡은 쇳소리를 내는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그냥, 트인 곳이 좋아서 이리로 왔어. 괜찮아?”
“뭐, 나쁘진 않아요.”
“…….”
“…….”
잠시 침묵이 흘렀고, 얼마 후 도이가 다소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내 친구가 많이 놀라겠다.”
“친구요?”
“응 친구. 사실..... 여긴 미치도록 갑갑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마다 오는 장소야.”
“…….”
“여길 오면 마음이 편하거든. 2년 전 여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민주가 날 보며 활짝 웃어 주는 것 같아서.....”
“…….”
“그런데 오늘은, 민주가 날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것만 같아.
내가 여길 찾을 때마다, 늘 내 옆에 있던 사람은 민환이었거든.
그런데 오늘은 민환이가 아닌 성민이가 함께 왔으니까......
그래서 우리 민주가..... 많이 놀랐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