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21화 (22/91)

21.

“오빠.....?”

도이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빠.... 유....학 가? 응?”

“....아니야.... 그냥 해 본 소리야.”

천천히 반문하는 도이의 말에 그저 미약한 미소를 지어본다.

하지만 그 미소가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아니라는 말은, 절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도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딱히,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가지의, 수백 가지의 실타래가 엉킨 것 마냥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 회로가 엉켜 버린 건 사실이다.

“도이야, 신경 쓰지 마. 응?”

“…….”

“오빠가 그냥, 그냥 해 본 소리야. 정말 그냥 해 본 소리야.”

유민은 괜히 말을 꺼낸 건 아닌가, 후회가 들었다.

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명쾌한 대답을 혹은, 가슴 아픈 대답을 줄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도이는 그저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등성이에 시선을 박아 두었고,

유민은 도이의 옆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이야.... 오빤 지금.... 오빠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옳은 건지 모르겠다....

널 지키고 싶고.. 아버지의 일도 배우고 싶은데...

널 지키자니... 일이 걸리고... 일을 배우자니... 네가 걸려....

차라리 조금만 더 너를 늦게 만났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너를 늦게 만났더라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후에나 만나고 사랑했더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널 데리고 유학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함께 호주로 떠나자는 말을 하기가 조금은 더 쉬웠을 텐데…

.

.

“들어가서 쉬어, 오빠.”

“그래, 너도 좀 쉬어라. 혹시라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는 말고.”

“응.”

오늘도 저녁 느지막이 들어서는 집안에서 도이를 반기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어둠 뿐 이었다.

아버지는 또 유민의 아버지, 차 선무 회장을 모시고

어디에서 또 어디로 바쁘게 액셀을 밟아 이동하는 모양이다.

도이는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겨우겨우 제 방에 들어가서는 가만히 벽을 타고 앉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눈을 감고 귓가에서 잔잔히 메아리치는 유민의 음성을 귀담아 듣는다.

{만약에 오빠가, 이건 정말 만약의 일인데....}

{유학을 가게 된다면....}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만약에 내가, 이것도 정말 만약의 일인데....}

{약혼식 올리자면... 도이는 아직 학생이니까 결혼은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약혼식 올리자면....}

{...날... 따라와 줄 수 있겠어?}

나지막한 한숨이 연신 터져 나온다.

가슴이 맥없이 답답해진다.

신경 쓰지 말라던 유민의 말과, 유난히 힘겨워 보이는 축 처진 어깨와...

쓸쓸해 보이던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하지만.....

도이는 갑갑한 마음에 저녁 산책을 나선다.

그냥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혹여나 자신의 갑갑한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진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것은 막연한 기대였다.

“안녕? 낙동강 오리알? 후훗.”

그러나 미처 현관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오는 낯익은 두 인형.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낙동강 오리알”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랐지만

자신을 향한 호칭임은 분명했다.

비꼴 대로 비꽈가며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민아의 눈빛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곁에 서 있는 그녀의 어머니로 인해,

대경그룹의 안방마님으로 인해, 도이는 억지로 화를 삭여야만 했다.

아무런 대꾸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느닷없이 도이를 찾아온 두 모녀와의 만남.

분명 즐거운 만남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딱딱할 대로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왔음에

분명 좋지 못한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자명했다.

살짝 미간을 좁히면서도 예의 겸손을 떨며 살며시 고개를 숙여 보지만

자신을 보고 한껏 인상을 쓰고 있는 두 모녀만큼 도이도 이 자리가 껄끄러웠다.

“어디 나가려는 모양이구나.”

“네.... 잠깐 산책 좀 다녀올까 해서요.”

“그 다리로 산책은 무슨 산책?”

“.....들어오세요.”

“그래.”

그 누가 봐도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였다.

“유민이는 만나봤니?”

“네.....”

조민주는 도이가 내어준 방석위에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는 도이를 마주 보며 부담스러울 만치 딱딱한 억양으로 묻는다.

“그래, 유민이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던?”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하기는 한 모양이구나.”

“…….”

“앞길이 창창한 아이다. 그 녀석이 너 하나로 인해 한없이 갈팡질팡 하더구나.

네가 유민이를 좀 바로 잡아줘야 하지 않겠니?”

도이는 묵묵히 조민주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과연 저 말은 헤어지라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으로 하여금 유민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소리일까....

그 속내를 헤아리고자 해 본다. 우선은 말이다. 우선은.....

“진작부터 호주로 보내졌어야 하는 아이다.

헌데, 그 일이 너라는 아이 때문에 늘 어렵더구나.

그래서 이렇게 시일이 미루고 미뤄졌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걸 그 녀석도 알고는 있을 게다.”

“…….”

“헤어지거라. 유민이가 너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네가 먼저 헤어지자 말 하거라.”

맥없이 갑갑하기만 한 가슴이 한 순간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유민에게서 유학과 약혼의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넌 그릇이 너무 작아.

장차 큰일을 하기엔 그만한 그릇을 만들어줄 여자가 필요하지 않겠니?

유민이의 보필은 따로 정해 놓았단다. 경선그룹의 둘째 아이란다.

그 아이가 가진 배경 하나만으로도 이미 너와는 천지차이지.”

“…….”

“어리석은 욕심은 이제 그만 부려줬으면 좋겠구나.

네가 정말 우리 아이를 좋아했다면, 좋아하고 있다면,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 주길 바라마.

그럼 쉬거라.”

그렇게 조민주는 제 할 말만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끝내고는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어머~ 그 잘나지도 않는 면상으로 우리 오빠 잔뜩 못 벗겨 먹어서 어쩌니?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 말이야. 후훗.”

“…….”

“그러게 지주제를 알았어야지.

그랬으면 적어도 이렇게 낙동강 오리알 마냥, 끝이 처량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르잖니?

후훗. 어쨌든 좋은 구경거리 만들어줘서 그건 고맙다?!”

잔뜩 기분이 상할 말을 늘어놓고는 마지막으로 흥! 하며 콧방귀까지 한번 뀌어주고는

여전히 도도하고도 뻔뻔한 몰골을 들고 쫄랑쫄랑 제 어미를 따라간다.

그런 민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제야 왜,

제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낙동강 오리알]을 운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민주와 차민아를 만나기 전보다 더 갑갑해진 가슴과

더 복잡하게 엉켜버린 머리로는 도무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이는 무작정 집을 뛰어 나왔다.

하지만 도이가 뛰는 속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가 뛰는 것과도 흡사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경보를 하는 속도보다도 뒤쳐졌다.

그것이 다, 아픈 다리 때문이었다.

아픈 다리만 아니라면 정말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그렇게 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데서 주는 허탈감이 도이의 숨통을 더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어?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

“도이누나!”

정말이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신에 약간은 이상이 온 사람처럼 초점조차 없이 멍한 얼굴로

맥없이 앞으로만 걸어가는 도이를 부르는 음성이 어디에선가부터 들려왔다.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음성이었지만,

지금 도이의 귓가에는 그 음성이 채 전달되지 않았는지, 여전히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누나, 누나!!”

“…….”

“어디 가는 데 그렇게 바빠요? 어쩜 사람이 그렇게 부르는데도..... 어? 누나!”

그러다가 제 어깨에 전해지는 힘으로 인해 다소 힘에 겨운 걸음을 멈췄고,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공허한 눈동자 안으로 하나의 실루엣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흐릿하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져갔을 때 즈음.....

“....성민아.....”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울컥하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참았던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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