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직 주문 안 한거예요?”
무언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성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 메뉴판이 정 가운데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아직까지 주문 내용을 결정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도이를 향해 볼멘소리를 늘어트리며 윗입술을 삐쭉 내민 것이
성민을 기다린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성민아~~”
“무슨 피자 시켰어요?”
“우엉~ 시키긴 뭘 시켜, 차라리 난 그냥 나가고 싶다고. 정말 미치겠어.”
밖에서의 울적했던 기분을 완벽하게 감춘 성민은 도이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보지만
왜 갑자기 그녀가 우는 소리를 하는지 쉽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누가 저 놈 좀 말려줘 봐. 제발.”
“뭘 말려요?”
“야야, 잘 왔다. 네가 공정하게 판정을 좀 내려줘야겠다.
이야~ 그러고 보니 권성민, 이 놈도 쓸모가 많잖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잔뜩 울먹거리는 도이 대신 민환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리고는 어찌 보면 적당한 토론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성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으로. -_-;
“내가 샐러드를 좋아해서 이리로 오긴 왔는데,
도이누나는 여기보다 도미노를 좋아하거든.”
“그래? 그래서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저 여자는 여자치고는 샐러드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 -_-;;
그래서 내가 좀 미안하잖아.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 놈인데.....
암튼, 그래서 내가 두 사람 다 맛있는 식사를 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샐러드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은 상당히 억지스러워 보였다.
“모색하다가?”
“자기 좋아하는 도미노를 시켜주겠다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안색이 파리해지면서 싫다고 방방 뛰잖아....
덴장! 백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내 성의를 무시하고 있어...”
민환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쥐고는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면서 도이를 정면으로 직시한 채 여전히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설렁탕보다 더 맛있는 도미노를 무시하는 플레이야?”
“우엉~ 피자헛 와서 도미노를 시켜 먹는다.......?
성민아, 이게 과연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정상적인 생각의 흐름을 갖고 있는 자로써는 도무지 납득 할 수가 없는 거라고.”
도이는 잔뜩 울먹거리는 얼굴로,
잔뜩 울먹이는 음성으로 성민을 마주보며 도무지 납득 할 수 없음을 말하지만,
“음......”
잠시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성민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한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무척이나 유쾌한 음성으로 말한다.
“스테이크 피자 먹자!! +_+”
“헉.....!!”
“이야~ 권성민. 역시 넌 뭔가 통하는 놈이구나!
이야~ 새끼, 인정한다. 넌 이 시대가 만든 최고의 멋진 놈이다!!”
“하하. 자식, 쑥스럽게~”
예정에도 없던 성민까지 합세하여 마냥 신나는 민환.
더 이상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어 주문을 마쳤다.
아, 물론 이 곳에서는 샐러드와 음료수까지도...............
“음료수 리필 되죠?”
물론, 이 말도 잊지 않았다.
샐러드 하나에 리필을 묻는 그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그들에게 음료의 리필은 무척이나 중요해 보였다. =_=
그 기가 막히게도 어처구니없는 모습들에 도이는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친 다리로는 열 발자국도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잡히고 말 게 뻔했다.
덴장. 날을 잘못 잡아도 단단히 잘못 잡았다.
.
.
“오빠, 어디 안 좋아?”
학교를 마치고 오랜만에 유민과의 데이트 길을 나섰다.
다친 발로 인해 잠시 병원을 들리긴 했지만
그 후엔 적당히 풍경이 좋은 곳을 한바퀴 돌아 남산타워까지 왔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유민은 도이를 데리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언제부턴가,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냐.... 괜찮아.”
도이는 내심 유민이 걱정되었다.
말은 아니라지만 무언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밝은 유민의 얼굴에 이렇게 짙은 어둠이 깔려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그 이유가 뭘까,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추측해보지만 도무지 갈피가 집히질 않았다.
아침때의 일을 생각 해 보지만 그것 역시 유민의 얼굴가득 근심거리를 만들기엔 부족했다.
아침의 일, 그것은 짧은 말다툼이 있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도이의 다친 발 때문이었다.
토요일은 오전에만 함께 했고 오늘 아침에서야 비로소 얼굴을 마주 했으니,
유민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다.
양평에서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 것에 대해 유민은 무척이나 서운해 했고 속상해 했던 것이다.
해서 그 일로 인해 아직 불편한 것일까, 생각 해 보지만.....
말다툼이 원인이라 치부하기엔 뭔가가 부족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무언가 유민을 괴롭히는 골치 아픈 일이 있음이 틀림없다.
“확실히 여름은 여름인가 봐.”
“…….”
“조금 더 늦은 시간에 와서 탈걸 그랬나? 오랜만에 야경도 보고 싶고,”
시간은 이미 여섯시를 넘었지만 그 어디도 어둠이 보이지 않았다.
유민은 그 사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아니면 해지고 한 번 더 오던지.”
“그럼, 저녁 먹고 여덟시 쯤 한 번 더 올까?”
“오빠 좋을 대로.”
어느새 두 사람은 케이블카에 탑승을 마쳤다.
그리고 그들을 태운 케이블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이라지만 평일이라서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케이블카 안에는 유민과 도이를 제외하고 세 명의 인원이 더 있을 뿐이었다.
“있잖아, 도이야.....”
“응, 오빠.”
“휴우.... 아니야, 아무것도.....”
천천히 이동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무거운 입술을 떼어내던 유민,
무언가 가슴속에 답답한 것을 털어 놓으려는 듯 보이지만, 쉽게 꺼내질 못한다.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빠.....”
“참, 우리 저녁은 뭘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없어....”
“그럼 오빠가 정할까?”
“아니, 저녁은 됐고, 그보다도.....”
“무슨 소리야? 밥은 먹어야지.”
“오빠가 하려던 말 해 주면..... 그거 먼저 해 주면....”
“…….”
유민은 물끄러미 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도이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꼭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하지만 유민은 그 눈빛에 오히려 숨이 막힐 만큼 갑갑함을 느꼈고,
동시에 간절함을 느꼈다.
도이를 향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응?”
“해 주기 어려운 이야기냐고.”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왜...”
“도이야,”
오늘따라 유난히 도이를 부르는 유민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만약에 오빠가.... 이건 정말 만약의 일인데.....”
“…….”
“유학을 가게 된다면.....”
“유....학......?”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만약이라고 말은 하지만, 만약이 아닌 실제 상황 이었다.
상당히 불안한 음성은 무척이나 자신감 없는 말을 꺼냈다.
살짝 흔들리는 눈가도 도이의 입을 통해 거절의 말을 듣게 될까 불안에 떨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것도 정말 만약의 일인데.....”
“…….”
“약혼식 올리자면....
도이는 아직 학생이니까 결혼은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약혼식 올리자면....”
“…….”
“날.... 따라와 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