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 곰탱아! 나 배고파!”
살짝 쿵, 본의 아니게 무게를 잡고 있는데, 버럭! 소리치며 민환이 재등장 했다.
곰탱이라는 어찌 보면 참으로 친근하지만,
달리 보면 참으로 민망한 호칭에 도이의 얼굴은 울그락발그락 화로 얼룩졌고,
성민의 얼굴엔 늘 그랬던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어쩌라고?”
“어쩌긴 뭘 어째, 빨리 들어오란 소리지.”
“씨......”
휭~ 하니 바람처럼 나왔다가 -_-;; 바람처럼 사라진 민환.
살짝 붉어진 도이의 얼굴 뒤에서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다.
아무래도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들어가 봐요. 누나..... 풋....”
“왜 웃어? 웃지 마!”
“미안해요..... 근데 그게 내 맘대로 안 돼요.... 후후.”
“덴장..... 근데, 저녁은 먹었어?”
“슬슬 먹어야죠.”
“같이 먹을래? 물론 친구들도.”
“예감에, 도민환이 별로 안 반길 것 같은데요?”
성민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말했다.
언뜻 난처한 기색이 스쳐갔지만 그것은,
말처럼 민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 때문일 것이다.
“저게 괜히 없는 폼 잡으니까 신경 쓰이는 구나, 너.”
하지만 도이는 그 사실을 몰랐다.
“에이~ 설마요.”
“뭐, 그럼 다행이고. 참!!”
도이는 잠시 시선을 쇼윈도 너머에 있는 민환에게서 백송을 향해 옮기며 이어 말했다.
“아까도, 어제도, 저 녀석 때문에 기분 상했죠?”
“…….”
“그쪽이 이해 해 줘요. 겉은 저래도 속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녀석이거든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잠시, 과거의 어떤 일이 저 녀석의 뇌 회로를 엉켜나서 그렇지,
본심은 아니었을 거예요.”
“과거의 어떤 일이라......”
잠시, 도이는 백송을 향해 민환을 대신해 녀석의 행동에 대한 해명을 했고,
성민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흘러가듯 말 했다.
자꾸만 번벅되는 “과거의 어떤 일.,,,,”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더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이는 냉정하게도 더 이상의 깊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 행동이 성민으로 하여금 더 많은 호기심을 갖게 했다.
“누나, 누나랑 저 자식 보면 꼭 뭔가가 있어 보이는 거 알아요?”
가능 하다면 묻고 싶은 눈치지만, 쉽사리 말을 해 주지 않을 것을 아는지,
성민은 살짝 틀어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말 못 들었어요? 두 사람 보면, 꼭 그냥 선후배나 아는 누님동생이 아니라,
음..... 그래요, 이를테면 애인사이 같아 보인 달까요?
두 사람 뭔가 많은 게 통하는 것도 같고, 서로에 대해 속속 들이를 잘 알고 있고.”
“이런.... 그런 소리 여기서 또 듣네?”
“역시, 많이 들었죠?”
도이는 살며시, 스며들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성민의 얼굴 위로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들어갈래, 말래?”
성민이 민진오와 백송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굳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알려드는 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이라면 이야기가 틀려질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싶어진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계획한 바의 일에 진도를 때야 할 시기도 왔기에 더 그랬다.
“너, 설마 따라 들어가려는 건 아니지?”
하지만 백송이 반기를 들었다.
그 자리도, 도이와 민환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아주 관심이 없는가 보다 했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왜? 그럼 안 돼?”
“너, 애들 생각은 안 하냐? 벌써 여기서 몇 분이나 지체 했는지는 아는 거야?”
“혹시 선약 있었던 거야? 미안. 내가 그것도 안 묻고.....”
누군가를 가리키는 “애들”이라는 말에 그제야 도이는 아! 하며 짧은 감탄사를 내 뱉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자기 입장만 생각 한 것에 대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반대로 백송의 얼굴위로는 성민의 무심함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올랐다.
“괜찮아요, 누나.”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말 괜찮으니까.
아, 그러지 말고 먼저 들어가 있을래요? 금방 따라 갈게요. 자자~ 얼른요~”
“아니 성민아, 선약 있으면 굳이.....”
“하루 이틀, 미뤄도 괜찮은 일이예요.”
성민은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반 강제적으로 도이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너 정말 저 계집애 따라 들어갈 생각이냐?”
“응. 왜?”
툭 쏘아 붙이는 듯한 백송의 질문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한 대답을 해주었다.
“송아, 진오야, 애들한테는 오랜만에 보는 건데 못 가서 미안하다고....”
“실망이다. 권성민.”
“.....뭐가?”
“저 계집애가 너한테 뭔지 모르지만, 난 솔직히 기분이 더럽단 말이다.
저 계집애 말에 쉽게 움직이는 너, 네가 할일과 위치까지도 망각하는 거,
솔직히 보기 안 좋다. 존나, 책임감 없어 보이거든.”
“망각이라고?”
툭, 누가 봐도 고의적이었다.
백송은 자신의 어깨에 적당히 힘을 실어 성민의 어깨를 툭 치고는 그 옆을 지나갔다.
반동으로 성민은 한발자국 주춤했지만,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신에 어느 손짓이나 몸짓이 아닌 단 한마디의 차가운 음성으로 그를 잡아 세운다.
“책임감이라고 했냐?”
상당히 간결한 말 이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나온 듯 했지만 반면, 어떤 무시 할 수 없는 지배력이 동시에 느껴졌다.
지금까지 도이와 민환의 앞에서 보여줬던 그 많은 모습들과는 천지차이였다.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송아,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냐?
아니지, 진심이라기보다는...... 그래, 이건 아무리 봐도 질투에 가까워.
이런~ 우리 송이송이 백송이가 질투를 다 하는군. 후후.”
“씹.”
하지만 곧, 능청을 떨어가며 아주 편안하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순간 느낀 그가 가진 지배력에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아주 잠시 뿐 이었다.
“네가 뭘 걱정 하는지 알겠는데, 쓸데없는 걱정은 사양이다. 인마.”
“…….”
“네 말대로 지금, 내가 내 할 일과 위치를 망각 했다면,
적어도 이딴 허튼 짓 따위 하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물 쓰듯 그렇게 쓰진 않았을 거다.
차라리 그 잘나신 신일그룹 권회장님 분부 따라 캐나단지 뭔지, 갔으면 갔지.”
백송의 잘못 된 생각을 정확히 집어 주는 듯하지만 제법 부드럽게 말 하고 있었다.
살짝 말꼬리도 길게 늘어트리면서.
하지만 성민의 눈가는 무어라 말로는 형용 할 수 없는 씁쓸함에 물들어버린 지 오래다.
“말했잖아. 수십 번, 수백 번도 너 많이 말했잖아.
아무리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지만, 내게는 아버지만큼 네놈들도 소중하다는 거,
아무래도 그걸 잊은 모양인데, 정말 섭섭하다고~~~”
미세하게나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백송의 행동에
무척이나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성민은 더 이상 아무런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놈들을 향해
가라마라, 이렇다 저렇다 더 이상 왈가불가 하지 않은 채로.
살짝 억지 미소를 띤 얼굴 때문에
더욱 더 씁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그 자리에 여운으로 남긴 채, 그렇게.......
“하아.....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
어렵다.... 어렵다 송아.....
난 다만 너희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다만 너희들과 끝까지 함께이고 싶은 것뿐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함께 하고 싶을 뿐인데.....
내 곁에 널 두는 것과 너희들을 지키고자 하는 게, 너무 과분한 욕심인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