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6월 치고는 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물론 봄바람 마냥 기분 좋게 차거나 설레는 건 아니었다.
적당히 열기 있는 더운 바람이 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앞에 흐르는 강 때문인지
열기가 느껴지는 바람이었지만 제법 시원하게 와 닿는다.
“아~ 좋다. 엄마.”
도이는 조금은 피곤한 안색으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면서,
듬성듬성 잔디가 오른 그 위에 등을 대고 눕는다.
차가운 흙이 좋았다. 저 위로 올려다 보이는 붉은 하늘이 좋았다.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이 마냥 예뻐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옆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도이는 어느새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방긋 웃는다.
그러나 웃고 있는 건 단지, 그녀의 입가가 전부였다.
예쁘게 반달모양으로 접힌 눈은, 겉은 웃지만 그 속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추억에 잠기어 울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엄마의 곁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었기에
예쁘게 접힌 웃음으로 눈물을 가리고자 할 뿐이다.
.
.
그 해의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하늘에서는 많은 양의 눈이 쏟아져 내렸고,
영하권에서 좀처럼 벗어날 줄 모르는 매서운 추위는
온 거리의 아름다운 장관을 허락하지 않았다.
눈이 쏟아져 내리는 족족이, 싸이는 족족이,
얼마 지나지 않아 꽝꽝 얼어 버려 오히려 그 해의 겨울을 더럽혔으니 말이다.
“도이야, 속에 뭐 하나 더 껴입었어?”
“응. 엄마. 엄마가 입으란 거 다 껴입었어. 그랬더니 이렇게 뚱뚱하잖아. 웃겨 죽겠어.”
“예쁘기만 한데 왜?”
“그래도 이게 뭐야? 걷는 폼이 딱, 곰 한 마리 굴러가는 것 같잖아.”
“얼어 죽는 것 보다 낳아. 밖이 얼마나 추운 줄 알아?”
매주 화요일마다 분리수거가 있었다.
두터운 점퍼를 껴입고 분리수거를 마치고 들어온 엄마의 얼굴은
몇 분 사이에 잘 익은 홍시와도 같이 새 빨갛게 얼어 있었다.
살짝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온기도 남아 있었다.
“밥 다 먹었어?”
“응. 아, 엄마! 나 지각하겠다.”
“그래, 얼른 가야지.”
“응, 엄마,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 길 미끄러운데 조심하고.”
“네!”
그즈음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도이는 도이대로, 그리고 아버지역시 아버지 나름대로
모두가 제 자리에서 제 할일을 하며 각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 냈기 때문에
무엇보다 화목하고 즐거운 생활이 유지 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의 겨울. 뜻하지 않은 불행이 시작된다.
“뭐, 뭐라고요?!”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 딛으려는 찰나,
집안에서부터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다.
어쩐지 지금은 들어갈 때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발동한 호기심으로 인해 살짝 문고리를 돌려본다.
다행이도 문은 잠기지 않았다.
도이는 조용히, 최대한 소리를 죽여....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안방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엄마 아빠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도이가 귀가 한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큰 돈은 아니잖냐며 사정사정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어 줬는데, 아 글쎄....!!”
“큰 돈이던, 작은 돈이던 해 주질 말았어야죠.”
“어떻게 그래? 하루 이틀 알고 지낸 놈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놈이 신용이 나쁜 놈도 아니잖아.....
워낙 친구들 사이에서도 돈 문제는 없기로 유명하니까....
하아.... 그래, 그래서 믿었던 거지. 나도.....”
“정말이지, 당신은 사사로운 정에 약해서 문제예요!”
“이건 사사로운 정이 아니야, 여보.
준섭이는 그래도 제일 오랜 친구라고. 벌써 이십년이 넘었잖아.”
잔뜩 화가 난 듯, 조금은 매섭게 들리는 엄마의 음성에 비해
아버지의 음성은 허탈하게 들렸다.
그 허탈함이 도이에게까지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도이는 스르륵,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충분히 좋지 못할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좋은지, 좋지 못한지, 그런 것 하나 파악하지 못할 만큼 도이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결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때로는 작게.... 때로는 크게.....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다가 체념이라도 한 듯 다소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림짐작 해 보건데 그때의 엄마는 아마도, 무척이나 두려웠을 것 이다.
“....집이.... 담보로 잡혔어......”
다시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큰 돈이 아니라면서요?”
“그, 그렇지.....”
“근데 어떻게 집이 담보로 잡힌다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는 그 다음 말을 쉽게 잊지 못하셨다.
안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엄마의 표정이, 아버지의 표정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도이의 표정은 무척이나 경직 되어 있었다.
집이 담보로 잡혔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오천이 좀..... 넘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어렵사리 말 했고..
안에서는 다시금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수차례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고....
“.....지금 당장 오천을 어디서 구해......”
“…….”
“.....집이라도 내놔야 하는 건 아니죠?”
“…….”
“왜 말이 없어요? 뭐라도 좀 말을 해 봐요. 도이아빠.”
“그게.... 이번 주까지... 돈을 구하지 못하면.... 이 집이...”
“뭐, 뭐라고요?”
“미안해... 여보....”
침묵은 다시금 기다리기라도 한 양, 그렇게 찾아왔다.
그리고는 훌쩍,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갔다.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소리와 함께.
“여보!! 도이엄마!!”
짧은 시간 긴 침묵을 무산시키는 고함소리였다.
아버지의 음성이 워낙 다급했기에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도이는 서둘러 안방으로 향한다.
“엄마! 아, 아빠, 엄마 왜 이래? 응?”
“도, 도이야!”
제일먼저 도이를 맞은 것은, 놀란 아빠와 혼절해 있는 엄마였다.
아버지는 도이의 등장에 여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제 딸에게 시선을 박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도이의 다급한 외침에 아내를 살핀다.
“어, 엄마!”
“여보, 도이엄마! 정신 좀 차려봐! 응?”
“아, 아빠! 119, 119부를게.”
도이는 서둘러 거실로 뛰어 나갔다. 엄마는 아버지께 맞겨눈 채로. 그런데 그 순간,
“도, 도이야! 잠깐만!! 잠깐만 도이야!”
무슨 영문인지, 아버지는 다급하게 도이를 잡는다.
얼핏 마주 본 아버지의 얼굴은, 엄마가 쓰러졌다는 사실보다 더,
이처럼 긴박한 순간에 도이가 등장했다는 사실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놀람 속에는 다급함도 묻어 나왔다.
“왜, 왜 아빠?”
“도이야, 조금 만 기다려 보자.”
“응?”
“....잠깐 놀랐을 뿐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아빠......”
도이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굳이 도이가 나서기도 전에 벌써
엄마를 병원으로 이송시켰을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자신보다 서두르는 딸아이를 막았다.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아무런 이유 하나 언급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