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늘 저녁에 오빠랑 데이트 할까?”
“안 돼, 오빠.”
“이런, 너무 단칼에 거절 하는 거 아니야? 가끔 보면 도이도 정말 매정하다니까.”
이른 아침, 등굣길에 오른 도이를 바래다주며 유민은 기분 좋은 음성으로 말 했다.
그러나 도이는 단 한번의 생각도, 일체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냉정하게.
“즐거운 토요일 오후, 여자친구에게 데이트 거절을 당하다니.... 슬프다고.”
“미안해 오빠, 그렇지만 오늘은 안 돼.”
“선약이 있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오픈 되어있는 유민의 스포츠카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은 유민의 머리카락을,
이어 도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는 재빠르게 도망친다.
“오늘은 엄마 보러 갈 거야.....”
“엄마?”
“응..... 내일이 엄마 생일이거든....”
“아.....”
부드럽게 흘러나온 도이의 말에, 유민은 아차 싶었다.
한순간에 밝게 미소 짓던 얼굴이 어둡게 그늘져 버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던 잔잔한 대화가 끊겼다.
유민은 핸들을 잡은 채, 간간히 도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날짜에 대해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도이는 그런 유민의 반응이,
얼굴이 보기 싫은 모양인지 아주 등진 자세로 측면에 시선을 박아두었다.
“오늘 가려고?”
“응. 엄마 옆에서 자고 올까해.”
“몇 시에 가는데? 오빠가 데려다 줄게. 같이 가.”
“됐어. 그냥 둬.”
좀처럼 돌려지지 않을 시선을 돌린 도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 했다.
“오늘은 집에 행사도 있잖아.”
“......행사는 무슨.”
“괜히 나 때문에 또, 아저씨 곤란하게 하지 마.”
“…….”
“오빠가 애도 아니잖아?”
싱긋, 웃고는 있지만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작은 웃음에 진득한 슬픔이 묻어나왔다.
“아버지랑은 이야기 한 거야?”
“…….”
“왜 말이 없어? 또 혼자서 멋대로 결정 지은거야? 응?”
“.....그런 건 아냐. 단지...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유민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먼데를 어떻게 혼자 가려고 그래?”
“나 어린 애 아냐. 오빠. 애, 취급 하지 마, 기분 나빠.”
“하지만......”
내 눈엔 늘, 넌 철부지 어린애인걸.
퉁퉁 부은 듯한 얼굴 때문인지 유민은 부드럽게 말끝을 얼버무리며 차츰 속도를 줄였다.
희망고의 정문이 가까워왔기 때문이었다.
토요일이라 하루가 제법 가벼웠다.
유민 덕분에 느긋한 마음으로 등교한 학교에서 첫 출발도 순조로웠다.
선도를 서는 날이라 여지없이 땡볕 아래서
한 시간 가량을 서있어야 하는 곤욕을 치루긴 했지만, 어차피 이 일은 숙달된 지 오래였다.
“장 보는 거 도와줄까?”
“많이 안 사, 간단하게 할 거야.”
“그래도 혼자보다 둘이 좋지 않아?”
“왜, 오늘은 님 만나러 안 가는 모양이지?”
“아직은 사랑보다는 우정이라고.”
“입술에 침은 바른 거야?”
“당연하지! 후후.”
책가방을 짊어 메고 하교 길에 오른 도이와 다희.
덥지도 않은지 꼭 달라붙어서 팔짱을 끼고는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마냥 어린아이들 같이 해맑았다.
“여자는 가끔씩 튕겨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그래야 권태기라는 놈이 늦게 찾아오지.
뭐, 날이 유난히 화창해서 조금 고민이 되긴 하지만.....”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권태기를 따져?”
“사전대비! ok?”
너무 앞서간다면 앞서갈 노릇이요, 어이가 없다면 없을 노릇이었다.
도이는 마지못해 웃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예의상이었다.
그러나 다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말이 사람 좋은 웃음이지, 사실은 바보 같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렛츠 고우~!”
저벅저벅! 제 일을 위해 나가는 것처럼 힘찬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내딛는 다희였다.
그 모습이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나름대로 보기 좋은 구석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도이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_-;
둘은 학교에서 근접해있는 대형마트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몇 가지 재료를 사들고 금세 나왔다.
장을 본다했지만, 사실 도이가 사고자 했던 것은 미역과 소고기 반근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주 조촐한 장을 보고 난 후, 두 사람은 다시금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여전히 찌는 듯한 땡볕 아래서 나란히 팔짱을 낀 채 말이다.
“오늘 가면, 내일 저녁때쯤이나 오겠네?”
“응.”
“이모가 좋아하시겠다.”
두런두런, 그리 재미난 이야기도 그렇다고 재미없는 이야기도 아닌
그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얼마간을 걸었다. 버스정류장까지.
버스정류장은 마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고,
서로 방향이 다른 탓에 다른 버스를 타고는 그 자리에서 헤어진다.
버스는 빠르게 이동했다.
뜨거운 햇볕을 받아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제법 달궈진 아스발트 위를 신나게 달렸다.
이까짓 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원한 바람까지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그러기를 얼마간, 도이는 버스에서 몸을 내렸고,
이제 더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조차 없이 뜨거운 표면위에 발을 디뎠다.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 딛기 시작했고,
얼핏 스무 발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여기서 뭐해?”
“누나?”
“누구 기다려?”
“응. 오늘 집에 손님을 초대했거든요.”
“손님?”
“나, 권성민 그 자식이랑 친구 먹었잖아.”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으며 민환이 말했다.
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하는 얼굴로 민환을 바라봤지만 사실,
‘그 녀석도 이젠 볼 장 다 봤구나, 어디 사람이 없어서 이런 애물단지를. 쯧.’
속마음은 이랬다. -_-;;
“친구 된 기념으로 초대했구나?”
“그런 셈이지 뭐. 안 바쁘면 누나도 갈래?”
“말은 고맙지만 난 사양이야.”
“왜? 또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랑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근데 그건 웬 봉지?”
민환은, 유민을 향해 기생오라비라는 호칭을 쓰곤 했다.
유민의 생김새나 얼굴선등이 계집 같은 면이 있긴 했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래저래 말 많고 이유가 많아 나열하기는 조금 어렵겠다..
그냥 앞으로 천천히 이야기 될 것에 귀 기울여 주시길!
“미역이네, 누구 생일이야?”
“내일이 엄마 생일이거든.”
“아, 그래? 그럼 오늘 양평 가겠네?”
“응.”
민환은 도이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저냥 학교 후배가 아니라 얼핏, 유민과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친구 같은 존재.
도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서로 간에 불편함이라거나 조금이라도 꺼리는 모습들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겠지?
부릉 부릉- 빠라바라바라밤
“야!! 비켜, 썅!!”
“꺄악!”
너무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시시콜콜한 것 까지 하나하나 말을 나누는 도이와 민환.
민환은 그저 한번 싱긋 웃어보였고,
도이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듯 서둘러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엄청난 경적소리와 함께 표면을 뒤흔드는 바이크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골목길임에도 불구하고 바이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몸을 돌린 도이와 바이크 사이의 거리는 자칫 위험해 보였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좁은 것도 아닌 길을 놔두고 왜, 가장자리에서 달리는지.....
의문이 먼저 앞서지만, 지금 급한 것은 넘어져있는 도이와, 쓰러져버린 바이크였다.
“누나!!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