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성민은 도이를 이끌고 제일 가까운 생과일 전문점으로 들어왔다.
도이는 메뉴판을 들고 망설이는 일 따위 없이 눈꽃빙수를 주문했고,
성민도 도이를 따라 같은 것을 주문했다.
멀지 않은 시간.... 두 사람이 주문한 빙수가 완성 되었고,
셀프서비스가 원칙인 카페 특성상, 성민은 두개의 빙수가 예쁘게 올려져있는
트레이(tray)를 들고 왔다.
“이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죠?”
“이런 거 좋아해?”
“좋아하기만 하겠어요? 환장하죠. 하하하.”
성민은 버릇처럼 눈웃음을 쳤다.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
“그럴 리가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도이. 성민보다야 못하지만, 못잖은 예쁘장한 미소였다.
크게 한술 떠 맛있게 넘기는 두 사람.
천천히 녹아가는 빙수와 함께 두 사람은 한동안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직 두 사람이 깊이있는 말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아닌지라 오히려 그 점이 훨씬 낳았다.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 웃음이 두 사람 뿐이 아니라, 주위까지 덩달아 환하게 빛을 밝히는 것만 같다.
크고 또랑또랑한 예쁜 눈. 누가 더 랄 것도 없이 쌍꺼풀이 짙은 두 남녀가
똑같이 눈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마주 앉았다.
따로 보자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다소 언밸런스 해 보였다.
남자는 그냥 흘깃- 지나쳐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이 시선을 사로잡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강한 느낌이 분명했고,
여자아이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이 똑같이 웃음을 머금고 있노라면 누가 더 랄 것도 없이 근사해보였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말이다.
“어..? 잠깐만. 전화 왔다.”
한참을 너무나 재미나게 이야기 하고 웃던 도이가,
무언가 또 말 하려는 성민을 저지 시켰다. 그리고는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전화를 걸어온 건 부드럽고 포근한 음성의 유민이었다.
“그냥..... 밖....이야.”
[밖 어디?]
“신촌. 놀러왔어. 오빠는?”
[지금 집에 들어왔어. 불이 꺼져 있기에 전화 해봤지. 언제 들어 올 건데?]
“글쎄. 아직 모르겠는데.”
[다희랑 있는 거야?]
“응? 아..... 아...니.”
[대답이 왜 그래? 나 몰래 바람이라도 피는 거야?]
“…….”
[정말 그런가 보네? 왜 말이 없어?]
이런 질문을 해 올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왜 그 많고 많던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지, 얼굴이 점점 당황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나 도이를 엄습해 오는 당황스러움은 결코, 유민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민환이었던가? 그 녀석이랑 있구나, 너?]
마치,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양,
전화기 너머로 유민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번일로 그러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도이야.]
“으... 응. 미안 오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왜 그랬는지, 왜 아니라고 말하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상하게 도이는, 유민에게 성민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한쪽 머리가 지긋이 아파온다.
전혀 생각 하지 못한,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 가져다주는 당황스러움.
좀처럼 당황스러운 마음이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유민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는다.
핸드폰의 성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민의 음성이 큰 것인지....
맞은편에 앉은 성민은 간혹 들려오는 유민의 음성과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나........?”
그렇지만 성민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유민의 음성보다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듯 하얗게 질려버린 도이의 안색이 더 걱정스러웠다.
“누나!”
“어... 어..... 성민아.”
언젠지도 모르게 이미 끊겨버린 전화.
도이는 뒤 늦게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귀에 닿아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왜 그래요? 무슨 전화를 그리 받아요?”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겠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아......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누나, 안 되겠어요. 저녁은......”
“미안한데 성민아, 나 저녁은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아.”
“알았어요. 누나.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그렇게 말 하고 성민은 어디론가 부랴부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대화는 분명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웃음 섞인 음성과 장난기가 섞인 말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도이는, 이해 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연신 무어라 말 하는 성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유민은, 도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지만, 도이는 달랐다.
물론 유민을 제외하고 어울리는 사람이라곤 여태껏 민환과, 그의 친구 서너 명이 전부였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성민이 처음이었지만,
가끔씩 민환이나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있노라면 세세하게 이야기 하곤 했던 도이였다.
죄를 짓는 마냥 숨어서 만나고 비밀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성민은 말하지 못한 것일까?
왜, 민환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 성민은 말하지 못한 것일까?
그 순간 딱히, 성민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민아가 떠오른 것도 아닌데 말이다.
“권성민!”
얼마간을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유민에게 전화가 오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고 시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이 앉아있는 카페에 낯선 얼굴이 등장했다.
“여기.”
딱 달라붙는 진에 해골 모양이 아주 크게 새겨진 검은 나시티를 입은 사내였다.
제법 큰 키에, 예쁘게 탈색된 은회색의 머리는,
우윳빛을 잔뜩 머금은 듯한 유독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첫 인상이 제법 귀여웠던 성민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강해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성민과 어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른쪽 귀에 달린 은색의 피어싱은 한층 더 차가운 이미지를 짙게 부각시켜준다.
상당히 날라리 틱 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성민과 비슷한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었다.
포근하다고는 감히 말하기 어렵지만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누구냐?”
“아, 처음 보지? 인사해라, 신도이라고 형님이 전학 오신 학교 선배님 되신다.”
유민의 전화에서 가져온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등장한 낯설 얼굴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듯한 도이의 얼굴을 보며 녀석은 멋쩍은 듯,
마지못해 하는 듯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물론 도이를 보고 있는 상대도 만만치 않게 어색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 마요. 민진오라고 내 친구예요.”
“아.... 반가워.....요.”
성민의 친구라면 한살 어림이 분명했지만, 어색하게 말을 끌어 존칭을 사용한 도이.
그러나 진오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것인지, 애초에 도이 따위는 관심도 없던 것인지....
아주 짧은 인사를 건성으로 마친 채 성민을 향해 무언가를 채근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연락 한번을 안 하고, 이게 무슨 경우냐?”
“그럴 일이 좀 있었다니까.”
“왜 하필이면 희망이냐? 언제까지 있을 건데?”
진오는 성민이 입은 교복을 단번에 알아보는 듯 했다.
“애들이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 줄 알긴 아는 거냐? 백송이는 두 말 할 것도 없다고.
당장이라도 너네 집으로 쳐들어간다는 걸, 애새끼들이 목숨을 걸고 말렸다고. 씨빠빠야.”
“이런!”
“감탄만 하지 말고, 얼굴 좀 내 비춰라.
너나 돼야 백송이의 발악도 잠잠해질 거 아니겠냐? 더 이상은 우리도 수습 불가라고.
알지?”
진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결코 가벼운 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민은 별로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마디 말 정도는 들어주는 가 싶더니 단호하게 진오의 말을 잘라 버리고
도이를 부축이기 시작 한 것이다.
얼른 일어나자고. 데려다 주마하고.
물론, 아무런 말없이 가볍게 뻗은 손 위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열쇠가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