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9화 (10/91)

09.

“누나!”

정상 수업이 모두 끝난 하교시간.

오늘도 도이는 다희와 나란히 교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늘 하던, 가벼운 말을 몇 마디 주고받는 도이와 다희.

그 이야기는 제법 평범한 일상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은 그 이야기에 흠치 되어 있기라도 한지,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왜 이렇게 둔해요?”

“응?”

“얼마나 불렀는데. 목이 다 아플 지경이라고요.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했어요?

저~~~~어 쪽에서부터 보고 불렀는데, 한번을 못 들어요. 두 사람이 똑같이.”

교문을 통과해 가벼운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의 사이에 자연스레 합류하는 성민이었다.

불쑥......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이렇다할 말 한마디도 없이 사라졌던

점심시간 때와는 달리, 평상시 도이 앞에서의 귀엽고 밝은 모습이었다.

마치, 애초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성민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늘 곱상하게 웃는 얼굴만 봐와서 일까?

딱딱한 얼굴의 성민이 아직도 상상조차 되지 않는 도이.

워낙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었기에 더욱 더, 몇 시간 전의 일을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을 생각하는지, 도이는 넌지시, 하지만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다.

허나, 방긋방긋, 어쩜 계집아이보다 더 예쁘장하게 웃으며 성민이 말한다.

“이렇게 예쁘신 누님들이 앞에 계시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아부야?”

“에이~ 그렇게 말 하면 또 서운하죠. 난 진심으로 누나들이 좋은걸요.”

보통 사내 녀석들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아마, ‘역시나 아부였구나!’ 할 텐데,

이상하게도 성민이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게 된다.

아니, 믿고 싶은 게 더 솔직한 마음이다.

아무래도 매력적인 녀석의 미소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바빠요?”

“그럭저럭 괜찮아. 왜?”

“그럼 오늘 저와.......”

그런데 돌연, 무언 갈 말하려던 성민이

다소 성급하게 터져 나오던 말을 잠시 먹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다시 말한다.

“오늘, 저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어여쁜 아가씨.”

살짝,

티가 나지 않게 감았다 뜬 눈가가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 왜 이리 황홀해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흔히 TV나 영화 프로그램에서 핸섬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하듯,

부드럽고 황홀한 제안.

여자라면 꼭 한번쯤은 꿈꿔오는 그런 데이트 신청이었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현재 성민은 두 명의 아가씨에게 동시 데이트를 신청 했으니,

자연스레 오른손만 나가있어야 할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

즉, 양 손이 다 나가 있었다.

이런! 욕심도 많지.

“흐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제법 폼이 나와. 상당히 노련하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해내는 다희. 그러나 그녀의 음성엔 악의가 담겨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멋있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고마워요. 누나.”

“그래서..... 영 아쉽기도 해. 사실.....”

“뭐가요?”

“백마 탄 왕자님보다 더 멋진, 멋쟁이 신사의 제안을 거절해야 하는 사실 때문이지.”

영 아쉬운 얼굴의 다희를 대신해 도이가 말했다.

“거절이라뇨? 왜요?”

“선약이 있거든. 남자친구랑.”

“아하!!”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그래도 난 다른 좋은 일이 있으니까 이쯤에서 빠질게.

조금 늦장 부리다 혹시라도 오빠를 나몰라하게 될까봐 겁나거든. 후훗.”

다희는 수줍게 웃었다.

“내 몫까지 둘이서 재미나게 놀아야 해. 알지?”

“걱정 마요, 누나. 그런 거라면.”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질까?”

“데이트 잘 해요.”

“그래, 두 사람도 데이트 잘 해.”

입으론 아쉽다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게 들떠 있었다. 점점 크게 번져가는 기쁨.

아니 설레임.

그 감정에 행복을 느끼며 마냥 웃는 얼굴로, 다희는 점차 멀어져갔다.

“얼굴에 꽃이 폈는데요?”

“한참 좋을 때거든. 아직 한달도 안 됐으니.”

“아~ 그렇구나. 근데, 누나가 남자친굴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멋진 후배의 데이트 신청을 냉정하게 뿌리칠 수야 없죠.

그렇지 않아요?”

“하하하.”

“우리도 자리 옮겨야죠. 어디로 갈까요?”

“글쎄..... 어디가 좋을까?”

“날이 덥긴 하지만, 일단 좀 걷는 건 어때요?

걷다가 좋은 데 있으면 거기 가요. 괜찮죠?”

괜찮죠? 라고 묻기는 했다만,

상대로서는 ‘괜찮지 않아.’라고 대답 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늘 그렇듯이 말이다.

허나, 이번엔 무언의 압박과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다, 쪽이 더 가까웠다.

생글생글...... 한번을 봐도 두 번을 봐도,

너무나 예쁜 웃음을 짓고 있었기에 싫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가도 쏙~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가히 황홀한 데이트 신청을 제안했듯 이번 역시, 그의 행동과 태도는 무척이나 노련했다.

“뭐. 나쁠 건 없지.”

“이왕이면 식사할 수 있는 곳은 어때요?”

“배고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점심때 지키지 못한 약속도 있고 해서,

디저트 대신 맛있는 저녁 사드리고 싶은데, 어때요?”

“난 아직 생각 없는데.”

“그럼 좀 오래 걸을까요? 그럼 반드시, 배가 고파질 테니까요.”

“굳이 저녁을 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설마요. 제가 걷는 걸 좋아 하거든요. 물론 누나가 괜찮다면요.”

“나도 걷는 거 좋아해.”

“이야~ 삼일만이네요. 우리 뭔가 통하는 걸 하나 발견 했어요. 기뻐요.”

성민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느 때보다도 더 환한 얼굴로 생긋 웃고 있었다.

살짝 주름잡힌 눈도, 매끄러운 선을 그리는 입술도, 너무나 예쁘게 웃고 있었다.

“누나도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선약은 없어.”

“다행이다. 그럼 누나, 내가 오늘은 좀 오래 시간을 뺏어도 괜찮겠어요?”

“좋을 대로 해.”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분명한 행선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별달리 행선지 따위를 운운하지 않아도 무관했다.

이렇다 말도 없이 먼저 오는 버스에 나란히 올라선 채로,

조금 멀리 떨어진 쇼핑가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태운 버스는 신촌에 당도했고, 두 사람은 그 곳에서 몸을 내렸다.

넓은 쇼핑가를 오가며 한시를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성민.

편안한 웃음에 다정한 모습까지 한껏 과시 하며 도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분명, 한 쌍의 커플로 밖에 생각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닭살스러운 커플로. -_-;

“근데 누나. 왜 안 물어봐요?”

“뭘?”

“차민아.”

“물어주길 바래?”

“뭐, 솔직히 말해선 묻지 않는 게 더 고맙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뭐가?”

“원래 여자들이 궁금한 거 하나는 끝발나게 못 참거든요.

물론,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녀석들이 그렇다는 거지만.

암튼, 난 누나가 물어볼 줄 알았거든요.”

성민은 어떤 대답이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도이는 무어라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소리 없이 웃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지친다.”

“어디 들어가서 시원한 거라도 마실까요?”

“응. 그러고 싶어.”

소리 없는 웃음이 너무나 자연스레 모든 상황을 넘겼지만,

도이라고 궁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점심시간 때 까지만 해도 다희와 민환의 토론 아닌 토론에

귀를 쫑긋 세웠던 것도 사실이 아니던가?

그들이 끌어낸 여러 가지의 유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직접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보아하니 물어 봐 주길 바라는 것도 같고,

묻는다고 해도 썩 나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느낌상!

정말 물어야 한다면, 듣고 싶다면, 지금이야 말로 아주 적절한 기회였다.

그러나 도이는 점심시간 때의 일을 묻지 않았다.

0